국사편찬위원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정덕원년신묘년조선통신사행렬도권(正德元年辛卯年朝鮮通信使行列圖卷)》이라는 이름의 행렬도는 왜국에서 제작된 것이다. 정덕(正德), 일어로 ‘쇼토쿠’는 에도막부의 6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노부[德川家宣]가 1711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연호다. 따라서 정덕원년은 1711년을 뜻한다. 숙종 37년이던 이 해에, 이에노부의 쇼군 습직을 축하하는 통신사가 파견되었었다.
《정덕원년신묘년조선통신사행렬도권》은 당시 에도 도쿠가와막부의 노중(老中)인 쓰치야 마사나오(土屋直政)의 명령에 의해 제작되었다. 도쿠가와막부의 직제는 다이로[大老]라는 최고직 1명을 비상근(非常勤)으로 두고, 그 밑에 로쥬[노중(老中)] 4,5명이 정무를 총괄하는 방식이었다. 로쥬는 본래 쇼군의 의사를 하달하거나 다이묘[대명(大名)]들의 탄원 등을 쇼군에게 전달하며 공문서에 서명하고 도장을 찍던 직책으로, 막부정치(幕府政治)에서 세습적인 주종관계(主從關係)를 갖는 가신(家臣)가운데 2만 5천 석 이상의 다이묘 중에서 임명되는 것이 관례였다. 로쥬는 싯세이[집정(執政)]라는 이름으로 교토의 조정과 사찰, 그리고 전국의 다이묘를 통제하고 막부 재정을 총괄하는 것이 주 업무로 변화되었다.
1711년 정사 조태억(趙泰億), 부사 임수한(任守幹), 종사관 이방언을 3사로 하는 통신사 일행은 북규슈의 남도(藍島, 아이노시마)에서 악천후로 인하여 발이 묶여 있었다. 그 무렵 에도에서 막부(幕府)의 집정관이었던 쓰치야 마사나오(土屋政直)가 대마도 종가(宗家)의 게라이[家來]에게 통신사 행렬의 모습을 그려 받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갑자기 이런 명령이 내려진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에도시대에 유행했던 기록화 성격의 회권(繪卷) 제작을 통하여 막부와 대명(大名) 모두가 통신사의 행렬 모습을 시각적인 자료로 보존하려는 이유라고도 하고, 통신사 행렬이 지나는 현장의 정황을 자세히 전달받는 동시에 또한 다음에 올 통신사에 대비하여 접대와 의례절차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결과적으로는 조선에서 국가의 주요 행사가 있을 때 의궤의 반차도(班次圖)를 제작하여 행렬 구성원과 의장의 순서를 기록하였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대마도 종가(宗家)’는 13세기부터 에도막부가 끝나는 19세기 후반까지 대대로 대마도를 다스렸던 소[종(宗)]씨(氏) 집안을 가리킨다.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는 정이대장군에 의해 임명되고 파견되던 지방관인 슈고[수호(守護)])라는 직책으로, 에도막부시대에는 왜국 전체를 구성하는 300개 번(藩)의 하나로, 대마도 전역과 규슈 일부를 통치하는 쓰시마 후추번[대마부중번(対馬府中藩)]의 다이묘[大名]이자 번주(藩主) 자격이었다. 쓰시마 후추번도 참근교대(参勤交代) 제도에 의해 3년에 한 번 에도(江戸)로 올라가 쇼군을 알현하고 곁에서 섬길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에도에 쓰시마 후추번의 번저(藩邸)를 두고 있었다.
1711년 9월 20일부터 대마도의 종가(宗家)는 에도의 대마도주 번저의 작업실에서 화가들을 모아 회권(繪卷) 제작에 들어갔다. 제작의 총감독에는 대마번의 화가인 다와라 기자에몬(俵喜左衛門)이 임명되었다. 또한 에도의 화가들 중에 수준 있는 정회사(町繪師, 마치에시)를 작업에 동원하였다. 그런데 통신사의 행렬도 뿐만 아니라 통신사가 에도에 도착하여 막부(幕府)에 들어가는 모습까지 그리라는 명령이 추가로 내려짐에 따라 처음에는 14 ~ 15인이었던 정회사(町繪師)의 수가 후반에는 40인까지 늘었다. 회권의 4개 그림인 <신사도중행렬(信使道中行列)>, <신사등성행렬(信使登城行列)>, <신사래빙귀로행렬(信使來聘歸路行列)>, <신사래빙지절종대마수참착귀국행렬(信使來聘之節宗對馬守參着歸國行列)> 이 모두 완성되기까지는 총 141일이 걸렸다고 한다.
에도막부로 향하는 통신사들의 복식, 행렬의 반차 등은 행사당일이 되어야 알 수 있는 것이고, 특히 등성일의 수행하는 왜인들도 소관 번(藩)이 바뀌면서 복장도 달라지기 때문에, <신사등성행렬(信使登城行列)>은 화가들이 당일 에도의 길가에 나와 사생하여 그렸다고 한다. 통신사의 에도 등성은 11월 1일이었지만 그림은 1개월이 넘게 걸려 12월 4일에야 대마도주에게 인계되었다.
《정덕원년신묘년조선통신사행렬도권》에 있는 4개 회권은 모두 높이가 27cm로 같고, 길이는 짧은 것이 37.38m, 긴 것은 43m에 달한다. 그 가운데 통신사 일행이 에도막부에 들어가는 그림인 <신사등성행렬(信使登城行列)>은 길이가 41.72m이다.
이 때 제작된 통신사행렬도는 전부 4개의 종류 14점이었다고 하는데, 막부 헌상용 4점 1세트, 쓰치야에게 2종 2점이 전달되었고, 대마도에서 2세트 8점을 따로 보관했었다.
이 통신사행렬도권은 우리나라의 국사편찬위원회와 일본의 교토고려미술관(京都高麗美術館), 오사카역사박물관(大阪歷史博物館)에서도 소장하고 있지만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도권만이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유일본이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때인 1926년 과 1938년의 두 차례에 걸쳐 14세기 중엽부터 19세기 말엽까지 대마도주 종가에서 생산 보관한 대마도종가문서를 구입하여 소장하였는데, 일제 패망이후 국사편찬위원회가 이를 인수하게 됨으로써 오늘날까지 소장하게 된 것이다. 전부 4권의 두루마리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 한 권씩 회권(繪卷)으로 표장되어있다.
참고 및 인용 : 정덕원년신묘년조선통신사행렬도권 연구(정은주, 2006년),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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