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2일, 훈천이라는 곳에 묵었다.
【이른 아침에 마주수(馬州守)가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고 말 전하기를,
“앞길에 대정천(大井川)이 있는데, 감수하는 자가 사람을 보내와 알리기를, ‘초여드렛날 큰 비 뒤에 먼 데 물이 비로소 내려와 이제 한 길이 넘는다.’하니, 형세가 여기 머물러서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한다.
대개, 먼저 다녀간 이의 일기를 보니, 이 냇물은 매우 급하여 배다리를 쓰지 않고 받침대로 메어 건너는 곳이다.】
훈천에서 3일을 묵고 난 5월 15일에, 강물이 줄었다며 아침 4시경에 길을 떠나야한다는 연락이 왔다.
【널다리 세 곳을 건너 대정천에 이르니, 내는 산골 물이어서 물길이 매우 빠르고 깊이도 어깨가 묻히므로, 타고 가던 교자를 멈추고서 바로 들것[架子] 위에 얹었다. 들것은 우리나라의 들것처럼 만들었는데, 크기가 거의 집 한 간만하다. 멜대를 정(井)자 모양으로 가로 걸치고 전후좌우를 합하여 멜대 여덟으로 만들었는데, 크기가 또한 기둥만하다. 청백 두 가지 무명을 꼬아 큰 밧줄을 만들어 이리저리 굳게 묶어서, 받침대 난간 위에 얹은 교자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게 하였고, 메는 인부는 다 새로 도착한 푸른 무늬의 흰 옷을 입은 자들이다. 처음에는 언덕 위에 있는 대나무 바자 울타리 안에 들것 멜 인부를 가두었다가, 사신 행차가 오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사립문 하나를 열어서 내어 놓는데, 그 수가 몇 백인지 모른다. 받침대 하나에 드는 인부는 50여 명이다.
물은 세 줄기로 나뉘어 깊이가 같지 않은데, 먼저 인부를 시켜서 알몸으로 어깨동무를 하고 떼를 지어서 상류를 막아 여울의 빠른 물길을 줄인다. 그러고서야 들것을 들고서 마구 건너면서 일제히 물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는 형용할 수 없다. 또 허다한 인부가 좌우에 따라서 건너면서 마치 손으로 춤을 추는 형상을 지어, 교자를 멘 인부가 혹 미끄러지는 것을 막는다. 이 밖에 또 크고 작은 들것과 대로 만든 사립문짝 같은 것이 수없이 많아서, 일행의 상관(上官)은 다 이것으로 건네는데, 들것 하나에 두세 사람을 겹쳐 태우기도 한다. 수종하는 대마도 왜인도 모두가 걸어서 건너지 않고 사립짝을 타거나 사람의 목에 걸터앉아 간다. 다투어 건너는 소리와 부축하는 소리가 한 고장을 뒤흔드는데, 와서 대령한 왜인의 수를 모두 헤아리면 또한 몇 천인지 모르겠다.】
조명채에 앞서 1719년에 제술관으로 통신사행에 참여했던 신유한(申維翰의 통신사행록 「해유록(海遊錄)」 9월 21일자에도 비슷한 대목이 있다.
【앞길에 대정천(大井川)이 있는데, 얼마 전 큰 비가 내려 물이 불어 한 길이 넘는 상태라 더 나아가지를 못하고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야 하는 형편이 되었다. 대정천은 물살이 매우 급하여 배다리를 쓰지 않고 가자(架子)로 건넜다.
왜인 수백 명이 물 가운데 벌여서서, 새로 만든 판여각(板與閣)에다 견여(肩輿)을 얹어 판여각 네 귀퉁이에 굵은 새끼줄로 매어 끌고 가거나 사면에 난간을 설치한 백목가자(白木架子) 10여 개를 만들어서 용정(龍亭)과 승교(乘轎)를 받들었다. 가자 하나에 메는 사람이 수십 인씩이요, 일행의 안장 끼운 말과 행장을 부호하여 건너는 자가 천여 명에 달한다.】
▶「해유록(海遊錄)」: 원제목은 「해사동유록(海槎東遊錄)」이나 통상 해유록으로 불린다. |
대정천(大井川)은 일본어로 ‘오이가와’라는 곳인데, 그림에 ‘大定川’으로 쓰여 있는 것은 이성린이 오기한 것이다.
5월 17일.
【맑음.
밝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밥을 먹고 떠나려는데, 소반 위를 보니 애오이가 처음으로 올라 있다. 조반 뒤에 떠나서 바닷가를 따라가 길가에 있는 청견사(淸見寺)에 들어갔다. 돌사닥다리 수십 층을 올라가니, 앞에 바다를 굽어보아 시야가 넓고 시원하고, 아울러 한없이 그윽한 맛이 있다. 뜰에 매화나무 하나를 심었는데, 키를 짧게 자르고 굽혀서 길이는 겨우 한 자 남짓하고 좌우의 두 가지는 3칸쯤 뻗어 있다. 뒤뜰에는 이른바 패왕초라는 것이 있다.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데, 줄기는 한 자가 넘고 부드럽지도 단단하지도 않으며, 잎은 두꺼운 손바닥 같거나 버섯 같기도 하고 혹 같기도 하며, 꽃은 잎 끝에 피고 연분홍빛이나, 도무지 형용할 수 없다. 부방군관(赴防軍官) 전광국이 ‘연경(燕京)에도 이 풀이 있어 선인장(仙人掌)이라 한다.’고 하는데, 그 이름 붙인 것이 그럴 듯하다.】
통신사 일행은 청견사를 고개를 넘어 바닷길을 따라 가는 중에 부사산(富士山)을 보았다.
조명채는【길이 부사산 밑으로 났으므로, 산 전체를 거의 다 볼 수 있으나, 허리 밑으로는 구름이 가리어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보려고 한다.】고 적었다. 이성린의 그림에도 6월 17일에 부사산의 눈을 보았다고 적었으니 이 그림은 에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린 것이다.
5월 17일 통신사 일행은 도중에 길원촌(吉原村)에 들려 잠시 쉬어갔는데 이렇게 낮에 쉬어가는 곳을 낮참(站)이라고 불렀다. 길원관(吉原舘)은 낮참인 길원촌에서 통신사 일행일 쉴 수 있도록 제공했던 건물이다. 통신사 일행은 에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이곳에 들렀고 조명채는 길원관에서 바라본 부사산의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
【오시(午時)초에 길원관에 이르렀다. 부사산이 전면에 마주 보이는데, 구름이 모두 걷혀 전체가 다 드러나 보인다. 일기(日記)를 상고해 보면, 전의 사신이 명확히 보지 못한 것이다. 또 전에 이마두((利瑪竇)의 글을 보니, 그 안에 일본의 부사산을 천하의 명산이라 하였었다.
▶일기(日記) : 앞서 왜국에 사행 왔던 사신들의 일기 ▶이마두((利瑪竇) :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
사록(四綠)의 분지(盆地)가 66주에 두루 퍼져, 왜국의 동(銅)을 캐고 금(金)을 불려 나라 안이 가멸진 것은 모두 이 산에서 나는 보물에 힘입었는데, 이 산은 곧 백두산 한 줄기가 바다 속으로 흘러들어간 것이라 한다. 반거(盤據)가 바다 모퉁이 가장 낮은 곳에 있는데 곁봉우리를 멀리 물리치고 외롭게 일어나 하늘을 찌를 듯이 홀로 서서 기세가 당할 수 없고, 머리와 몸뚱이도 험괴(險怪)하지 않으며, 지는 놀, 엉긴 구름이 끝내 그 꼭대기를 올라 덮지 못하고 늘 그 반허리를 돌 뿐이다. 때로 해매(海霾)가 전부 가려 산의 형태를 볼 수 없다가도 한바탕 바람이 불어와서 가린 것을 헤쳐 살짝 걷어 가면 둥그스름한 산머리의 은빛이 홀연히 하늘 위에 떠서 사람으로 하여금 몸을 기울여 쳐다보며 자못 당황하여 정신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지나가면서 바라보면 더욱 높고 장대하여 돌아보는 눈길을 잠시도 놓지 못하게 한다.
왜인이 말하기를,
“평지에서 그 꼭대기까지 4백 리이고, 그 위에 큰 못이 있는데 불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꼭대기의 은빙(銀氷)은 눈이 사철 늘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전인들의 일기에는, 그것이 과장한 말이라 의심하여, 돌 빛이라느니 얼음이라느니 하여 끝내 귀일된 논의가 없었다. 이번 내왕이 마침 첫여름ㆍ한여름 두 달 사이여서, 5월에 내려갈 때에는 산꼭대기가 허옇게 전부 희더니, 돌아올 때에는 6월 중순이라 눈빛이 간혹 녹았으나 오히려 분명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산 앞을 지나가게 되어서는 마침 경일(庚日)인데다가 더위가 가장 혹심하여, 바라보니 산꼭대기의 흰 것이 거의 다 녹아버렸고, 혹 군데군데 남아 있는 것은 바라보니 비단 필과 같았다. 그래서 그것이 돌이 아니고 백설의 흰 것임을 그제서야 분명히 안 동시에 전인(前人)의 갑을지론도 단정할 수 있다.】
▶해매(海霾) : 바다 위에 낀 아주 짙은 안개 |
5월 18일
【맑음.
해가 높이 뜬 뒤에 밥을 서둘러 먹고 곧 떠나서, 마을을 5~6리 지나 상근령(箱根嶺)에 이르렀다. 구불구불 꺾어 돌아서 천천히 오르는데, 교군 외에 또 그 참(站)의 왜인 장정을 내어, 무명으로 교자의 멜대를 매어 끌어서 올린다. 고개 위에는 마을이 이따금 있는데, 판잣집을 꾸며 놓고 차와 술을 파는 데가 있기도 하다. 산중 마을에 이르니, 잠시 쉴 곳을 마련하여 맞아들인다. 곧 동월산 종한사인데, 병장(屛帳)이 다 갖추어지고 다과(茶菓)가 갖추어 있다. 뜰 가운데에는 회양목 두 그루를 심어서 구리철사로 가지와 잎을 매어 혹 둥근 부채꼴을 만들었으며, 또 영산홍을 가꾸어 모서리 진 울타리를 만들었는데, 꽃도 한창 피어서, 진기한 나무는 그늘이 우거지고 별난 새들은 맑은 소리로 지저귀니, 여기는 수레를 멈추고 앉아서 즐긴 만한 곳이다.
조금 쉬고서 떠나는데, 소통사(小通事)와 교자 곁의 수종하는 왜인이 사사로이 수작하는 말이 들린다. 통사가 말하기를,
“사신 행차의 교자는 어느 곳에서 만들어 왔나?”
하니, 답하기를,
“대판(大阪)에서 새로 만들었습니다.”
하고, 또 묻기를,
“경윤(京尹)같이 높은 이도 이런 교자를 타시나?”
하니, 답하기를,
“관백공양께서만 이런 교자를 타시지, 그 나머지는 감히 타지 못합니다.”
한다.
▶병장(屛帳) : 병풍과 장막 ▶경윤(京尹) : 왕실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에도막부[德川幕府]시대의 관직명 |
고개 마루를 지나 산중을 내려가다가 평지에 마을이 있는데, 2리쯤 그 사이를 지나가서 관소에 들어갔다. 관소는 공해 관청(官廳)인데, 만듦새가 정교하고 화려하며 호숫가에 있어 경치가 매우 좋다. 대개, 사방의 산이 하늘을 받치고서 에워싸고 있고, 가운데에 둘레 40리의 물이 흘러온 근원도 없고 흘러가는 끝도 없는 큰 호수가 열려 있고, 짙푸른 그늘이 깊어 보기에 오싹한데, 때로 바람이 불어와 바다처럼 물결이 인다. 왜인이 말하기를,
“물속에 머리가 아홉인 용이 있으므로 세상에 전해 오기를 구룡택(九龍澤)이라 하는데, 이 골 안은 구름과 안개로 늘 어두우며 소나기가 자주 뿌려서, 주민은 햇빛을 보기 어렵습니다.”한다. 오늘 올 적에도 처음에는 하늘이 맑았으나, 문득 구름이 흘러 모이고 가는 비도 뿌렸으니, 여기를 굴집으로 삼으면서 구름을 토하고 비를 불러내는 등 변화를 헤아리지 못할 영괴(靈怪)한 것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구룡택(九龍澤)이라 하는 큰 못[大澤]은 지금의 가나가와현 하코네[箱根]의 아시노코[芦ノ湖]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하코네 화산[箱根火山]의 화구원호(火口原湖)이다.
참고 및 인용 : 한국고중세사사전(2007, 한국사사전편찬회), 봉사일본시문견록(조명채, 노원마신 한국유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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