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일 평방을 출발하여 가는 길에 정포(淀浦)라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정포(淀浦)는 산성주에 속하며, 주성(州城)은 강에 임하여, 성가퀴를 설치하지 않고서 행각(行閣)ㆍ판벽(板璧)으로 두르고, 흰 흙을 새로 칠했으며, 간간이 구멍을 낸 것은 우리나라 성의 제도와 같다. 3~4층의 망루가 곳곳이 솟아 있으며, 호수를 끌어다가 성을 둘렀는데 폭이 백여 보(步)이다. 성 밖에 수차(水車) 둘을 설치하여 물을 끌어서 성에 들이는데, 그 모양은 소거(繅車) 같고, 높이는 두세 길이며, 호수 안으로 드리워져 물결 따라 절로 돈다. 그 바퀴의 살은 모두 16이고, 살마다 작은 통을 달아서 수레가 돌 적에 통이 물을 담아서 수레를 따라 올라가서 절로 성 구멍에 쏟는데, 나무를 파서 만든 통이 보기에 매우 기이하다.”
▶소거(繅車) : 고치로 실을 켜는 물레 |
통신사 일행은 정포(淀浦)에서부터 배에서 내려 육로로 길을 가게 된다. 통신사 행렬은 조선의 통신사 일행을 대마도에서부터 수행하는 대마 번사(藩士) 800여명과 각 지역을 지날 때마다 그 지역에서의 접대를 맡은 지방 번사까지 포함하여 인원만 2천명 이상이 되고 동원되는 말도 300마리나 되는 대규모 행렬로, 행렬이 지나가는 데만 5 ~ 6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번사(藩士) : 에도막부 시대 각 다이묘[大名]가 관할하는 번(藩)에 소속된 가신(家臣)들로 사무라이[시(侍)]가 주류를 이루었다. |
정포(淀浦)에서의 다음 행선지는 서경(西京)이라고도 불리는 교토(京都)로, 당시 이곳에는 왜국 천황이 있었지만 통신사행에서 천황의 존재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다만 조명채가 “여기서 왜경(倭京)까지는 30리가 된다. 왜경은 왜황(倭皇)이 사는 곳인데 서경(西京)이라고 부른다. 세 사신과 원역(員役)은 으레 도포에 사모(紗帽)를 쓰고서 성에 들어간다 하는데, 전례를 보니 그러하다.”고 적은 것처럼 복장으로 천황이 사는 곳에 대한 예를 표할 뿐이었다.
“30리 사이는 길을 닦아서 평탄하고 깨끗하기가 숫돌 같고 한 조각의 사금파리도 한 오라기의 티끌도 남아 있지 않다. 좌우에 대나무 난간을 새로 만들어 두어 구경하는 사람이 벌여 설 한계로 삼았고, 인가가 조금 뜸한 곳은 시렁을 매어 올라가서 구경하는 자가 또한 잇따라 있고, 이따금 논이 있어 벼의 새싹이 막 돋아 나 있다. 도랑은 물이 깊어서, 작은 거룻배가 바다로 통행하는데, 마침 마을 가운데의 녹음(綠陰) 밑에 배를 대니, 또한 하나의 경치이다.”
“어둠이 깔리기 전에 초롱을 들고 따르는 왜인이 이미 불을 붙였고, 크고 작은 초롱을 들고 어둠에 대어 마중 나온 자도 무수하다. 우리나라 사람과 호행하는 왜인이 일로에 서로 이은 것이 거의 30~40리에 뻗는데, 길 양가의 집집이 다 등촉을 설치했고, 일행의 등촉도 줄을 벌여 섰으니, 환해서 긴 길에 터럭과 머리카락까지도 셀만하다.
시문(柴門) 스물다섯 곳을 들러서 관소에 닿으니, 관소는 곧 이른바 본장사(本長寺)이다.“
[《사로승구도》중 <서경본장사북원(西京本長寺北園)>]
“관사(舘舍)가 크기로 일로에서 으뜸이고, 벌여 놓은 온갖 제구가 모두 다 화려하다. 조반 뒤에, 정사ㆍ부사와 함께 관소 안의 여러 곳을 두루 구경하였는데, 모두 행각(行閣)으로 간 수가 몇천 간인지 모르겠다. 한 곳의 각자에 이르니, 그것을 북원(北園)이라 하는데, 맑은 시내 한 줄기가 콸콸 뜰 앞을 꿰어서 지나가고 기이한 바위와 괴상한 돌들이 시냇가에 여기 저기 흩어져서 솟아 있다. 물고기와 자라가 그 사이에서 헤엄치며, 아름다운 갈매나무가 울타리처럼 빙 둘러 섰고 진기한 나무들이 그늘을 이어 있어서, 경계가 맑고도 그윽하니, 결코 저자 거리 가운데에는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통신사 일행은 북원을 둘러보고 5월 3일 느지막이 길을 떠났다. 길에서 느낀 조명채의 소감이다.
“좌우의 마을 집은 다 띠를 덮었으나 역시 매우 높고 크며 정하고 사치스럽기가 우리나라의 초가집과 비교해서 몹시 다르다. 농사짓는 왜인이 가장 가난한 백성이라 하는데도 사는 집은 또한 다 이러하다.”
“구경하는 법은, 어른이 뒤에 앉고 어린아이가 앞에 앉으며 엎드린 자도 있고 꿇어앉은 자도 있다. 대개, 그들의 풍속이 꿇어앉기를 잘하는 것은 어린아이들까지도 그러한데, 이는 겉으로 꾸미는 것이 아니라, 그들 남녀가 다 속바지를 입지 않으므로 아랫도리가 드러나기 쉬우니, 꿇어앉아서 감추기 위한 것이다.”
통신사 방문은 당시 왜국의 가장 큰 국가적 행사였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통신사 행렬을 보려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지나는 길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때로는 구경하기 좋은 자리를 돈을 주고 사기도 하였다는 왜국의 기록도 있다.
“세 사신이 타는 교자의 교군은 각각 20명으로 정해져 있는데, 대판(大阪)에서 강호(江戶)까지 1천 5백 리 사이에 중도에서 갈아들이는 일이 없다. 듣건대, 이들은 품산 인부인데, 각 참(各站)에서 그 삯을 장만하여 준다고 한다. 세 사신 일행의 교군은 각각 다른 무늬의 옷을 입었다. 키가 크고 건장한 자들이 열 걸음을 넘지 않아서 들락날락 번갈아 메어 조금도 미루는 기색이 없으니, 바꿔 메자고 번거롭게 외치는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아주 다르다. 교자가 잠시도 멈추지 않아서, 인부 또한 언제 바꿔 메는지 알 수 없으나, 물러나가는 자는 교자 앞에서 한 번 몸을 굽혀 절하고 물러간다.“
“5리 남짓 가니, 길이 비파호(琵琶湖)로 나 있다. 이것이 왜국에서 첫째가는 경치 좋은 곳이라 하는데, 호수가 넓고 먼 언덕이 나직이 둘러 있으며, 그 사이는 4백 리이다. 선소태수의 거처는 호수 가에 있어 물을 두른 누대(樓臺)가 흰 성첩(城堞) 안에 높이 솟아 있고, 동산에 둘러 있는 화초가, 울창한 회나무 사이에 한창 피어 있으니, 그림 속의 광경이 아니라, 바로 금수강산이다.”
교토(京都)를 떠난 통신사 일행은 나카센도(中山道)를 따라 북상하다 야스[野洲]라는 곳에서 갈라져 히코네[彦根]까지는 쇼군의 특별전용로인 빈가도(濱街道)로 통행하였다. 흔히 ‘조선인가도(朝鮮人街道)’로도 불리는 길로, 길이는 40km 정도이다. 이 길 도중에는 비와호[琵琶湖]로 들어가는 물길이 여럿 있는데 다리가 없는 곳은 왜국에서 미리 배로 주교(舟橋)를 만들어놓아 건널 수 있도록 했다.
대원(大垣)의 관소에서 묵고 난 5월 7일이다.
“동(東)으로 가서 좌도천((佐渡川)에 이르니, 내의 너비가 한 바탕 남짓하다. 작은 배 70여 척으로 내를 가로질러 부교를 만들고, 위에 두꺼운 널빤지를 깔았는데 틈 벌어진 곳이 하나도 없다. 양가에는 쇠사슬을 붙이고 굵기가 다리만한 밧줄을 꿰고 또 팔뚝만한 철사줄로 덧 누르고, 이쪽저쪽의 양 언덕에 각각 아름드리 나무기둥을 세우고 고패를 설치하여 철사줄과 밧줄을 당겨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게 하였으며, 선미(선미)마다 지키는 자 한 사람과 물통 하나가 있으니, 그 시설이 튼튼하고 물력이 큰 것은 이를 미루어서 알 만하다.
구경꾼은 갈수록 많이 모여들어, 들에서는 시렁을 만들어 올라가 있고, 물에서는 배를 타고 섰으니, 오색이 얼룩져 찬란한 것이 온 땅에 가득히 찼는데, 보기도 지루하고 말하기도 지루하므로 더 적고 싶지 않다.“
▶고패 : 높은 곳에 물건을 달아서 올렸다 내렸다 하는 줄을 걸치는 도르래나 고리. |
“ 묵후천((墨俣川)에 이르니, 역시 배 위에 다리를 놓았는데 한 마장이 넘는다. 또 작은 내가 있어 이것이 계농, 미장 두 고을의 경계인데, 다리의 만듦새는 묵후천과 같다. 10리쯤 가니, 또 월천(越川)이라는 큰 내가 있는데, 좌도천에 비하여 너비가 세 곱이며, 이은 배의 수가 2백 80여 척이나 된다. 이것이 뭍에 오른 뒤에 으뜸가는 장관이다.”
일행은 5월 8일 강기촌(岡崎村)에서 숙박하고, 그곳에서 다음날 에도의 막부에서 보낸 사절을 처음 만난다.
“대마도 사람이 세 사신과 강호의 사자(使者)가 앉을 방석을 까는데, 정사(正使)와 사자의 자리를 대등하게 하느라고 혹 밀려서 조금이라도 내려갈까 보아, 줄로 재어 자리의 네 모퉁이에 구리 못을 박아서 위아래가 차이 나는 것을 견주니, 일에 잗단 것이 흔히 이러하다.
사자가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세 사신이 마중 나갔으며, 의절(儀節)은 마주수(馬州守)를 처음으로 만날 때와 같았다. 사자가 들어와 앉을 적에, 방석 쪽으로 향하여 꿇어앉아 무릎으로 걸어 자리에 올라서 몸을 돌려 앉는데, 이것이 왜인의 풍속으로 공경하는 예절이라 한다.“
▶마주수(馬州守) : 대마도주 |
5월 10일 길전(吉田)에서 묵고 다음날 병송(浜松)으로 향하는 길 중에 다시 강을 만나 배를 타고 건너게 되었다.
“이 강은 강호(江戶)의 목과 같은 곳이며, 동무(東武)로 들어가는 각 고을의 태수는 다 이 길을 지나므로, 방어하는 방도가 매우 엄하고, 수검(搜檢)하는 방법도 세밀하여 행인이 병기를 가지고 드나들지 못하게 하며, 여인은 들어가는 것만을 허가하고 나가는 것은 허가하지 않으며, 장삿배도 공문이 없으면 지나지 못한다고 한다. 국서를 모시고 세 사신의 배가 차례로 건넜다. 강의 너비가 15리 이며, 기송이라 부른다. 또 금절하(金絶河)라고도 부르는데, 예전에 조선 사신이 선물 받은 금을 여기에 버렸으므로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동무(東武) : 열도의 관동(關東)지역인 지금의 동경(東京)인 에도[江戶]에 있었던 강호막부(江戶幕府)를 가리키는 말. |
조명채가 말한 금절하의 사연은 인조 14년인 1636년의 통신사행 때의 일이다. 통신사들은 사행기간동안 왜국의 각 번으로부터 양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물품을 지원받는데, 이때에 물품이 많이 남았다. 당시의 통신 삼사는 임광, 김세렴, 황호가 그 남은 것을 다시 왜국에 돌려주자 왜국에서 이를 값으로 매겨 황금 1백 70정(錠)을 가져왔다. 이에 부사 김세렴(金世濂, 1593 ~ 1646)이 금절하(金絶河)에 이르러 얕은 물에 금을 던지고 말하기를, “내가 화뢰(貨賂)를 받지 않은 것을 보일 뿐이니, 쓸모 있는 것을 쓸모없게 하지 말라.”하였다. 통신사 일행을 수행하느라 고역을 치른 대마도 사람들이 금을 건져가도록 배려한 것이라 한다.
▶화뢰(貨賂) : 재물. 뇌물. |
하지만 조명채의 글을 보면 대마도인들은 알아서 자신들의 실속을 챙기고 있었다.
“대마도에서 따라온 왜인들을 보면, 다들 말을 타거나 교자를 탔고, 반쯤은 짐이 있는데 비단 이부자리 두세 개를 실었다. 이것은 연로의 참(站)에서 준비한 것인데, 사신 행차가 돌려주면 대마도 사람이 중간에서 가로챈 것이다.”
금절하를 건넌 뒤의 풍경을 조명채는 이렇게 기록했다.
“배에서 내려 출발하였는데 언덕 위의 거리가 자못 번성하다. 언덕 너머에 큰 못이 있는데, 넓이가 10여 리이고, 마름과 연(蓮)이 빽빽하고 소나무ㆍ대나무가 둑을 에워 있으며, 곳곳에 작은 배가 갈대[蘆]와 물 억새[荻] 사이에 매여 있으니, 곧 하나의 경치 좋은 곳이다.”
위 그림은 이성린이 이 경치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국역국조인물고(1999,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봉사일본시문견록(조명채, 노원마신 한국유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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