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사 일행은 4월 15일 도모노우라[도포(韜浦)]에1박을 하게 되는데 《사로승구도》두루마리에 배접한 순서는 도모노우라의 그림보다 <하진(下津)>이라는 그림이 먼저 나온다. 그러나 하진(下津)은 도모노우라에서 다음 숙박지인 일비(日比)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섬이라, 이는 배접하면서 순서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
“선창에 들어가 배를 대니, 선창의 만듦새는 적간관(赤間關)과 같다. 언덕 끝의 높은 벼랑을 보니 위에 높다란 누각이 있고, 뜰 가운데에는 창ㆍ칼을 벌여 세워서, 대진(對陣)해 있는 것과 다름없다. 물어 보니, 요망(瞭望)하는 곳이라 한다.
저물녘에 국서(國書)를 받들고 뭍에 내렸다. 선창으로부터 관소까지는 거의 3~4리쯤 되는데, 거적을 이어 깔아서 조금도 흙이 드러나지 않고, 길 양쪽에는 집집이 모두 등 하나를 달았다. 좌우의 점방은 발로 가려서 드러나게 서서 구경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 규모가 들러 온 곳들과는 사뭇 달라서, 번화하고 풍성함이 적간관보다 나으며, 이른바 복선사(福禪寺)는 전부터 사신 행차 때면 이곳에 묵었는데, 악양루(岳陽樓)와 견주는 곳이다.“
▶요망(瞭望) : 높은 곳에서 적(敵)의 형세를 살피어 바라봄 ▶악양루(岳陽樓) : 중국 후난성[湖南省] 악주부(岳州府)에 있는 부성(府城)의 서쪽 문 누각으로. 동정호(洞庭湖)의 동안(東岸)에 위치하여 호수를 한눈에 전망할 수 있고 풍광이 아름다워 예전부터 중국과 조선에서 이름이 높았던 곳이다. |
도포(韜浦) 또는 병포(鞆の浦)로도 쓰는 도모노우라는 에도막부 시절에 통신사가 11회나 머물렀던 세토나이카이[뢰호내해(瀨戶內海)]의 대표적인 항구로, 복선사(福禪寺)는 1636년부터 통신사가 도모노우라에 정박할 때마다 머물렀던 삼사(三使)의 숙소였다. 특히 복선사 경내 본당 근처에 있던 영빈(迎賓)용 건물인 대조루(對潮樓)에서 보는 경관은 통신사들로부터 ‘일동제일형승(日東第一形勝)’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아울러 통신사와 지역 문사(文士)간 문화교류의 공간으로도 이용되었던 까닭에 복선사에는 지금도 다양한 형태의 통신사 관련 유묵들이 남아있다.
통신사 일행은 에도로 올라가는 길에는 복선사에서 숙박하지 못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복선사에서 묵었고, 이때 정사 홍계희가 그동안 객전(客殿)으로만 불리던 통신사 숙소 건물에 ‘대조루(對潮樓)’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편액도 직접 써주었다. 지금도 대조루 내부에 그 편액이 걸려있어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종종 사진을 찍어 올리곤 한다.
4월 16일 통신사 일행은 해가 돋을 때 도모노우라에서 출항하여 일비(日比)로 향하는 뱃길에 하진(下津)을 지나게 된다.
“40~50리를 가서 하진(下津)이란 곳을 지났다. 나루[津]는 북쪽 연안에 있고 육지와는 이어지지 않아서 외딴 섬을 이루고 있으나, 인가는 거의 1천 호를 채운다. 구경하는 남녀가 산과 바다를 가득히 덮고 바삐 돌아다닌다.”
“해넘이에 북풍이 잠시 일어나므로, 돛을 달고 가서 일비(日比)에 이르러 항구 중류(中流)에 닻을 내리니, 밤은 이미 인정(人定) 때가 되었다. 부사의 배와 함께 먼저 들어가 배를 대었는데, 정사의 배는 뒤처져 소식이 없으니, 몹시 궁금하다. 소통사(小通事)를 시켜서 작은 배를 타고 항구를 나가 찾아보게 하고, 부사와 함께 선루(船樓)에 올라가서 기다렸다. 마침 바다에 비치는 달이 낮과 같고 마을의 등불과 배의 촛불이 물에 잠겨 서로 비추매, 고국을 돌이켜 생각하나 임금 계신 곳이 어느 쪽인지 몰라, 오직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그리운 마음이 간절할 뿐이다. 밤이 깊은 뒤에 통사가 돌아왔는데, 정사의 배는 바람과 물이 다 거슬러서 올라오지 못하고 닻을 내리고서 조수가 물러가기를 기다린다고 하니, 낙심된다. 4경(更)쯤에야 정사의 배가 들어오매, 수역(首譯)을 보내서 문안하고 비로소 잠들었다.”
▶인정(人定) : 조선은 치안 유지를 위하여 태조 때부터 야간 통행금지제도를 실시했었다. 매일 밤 10시경에 28번의 종을 쳐서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를 알렸는데, 이를 인정이라 했다. 통행금지의 해제는 새벽 4시에 33번의 북을 쳐서 알렸고, 이는 파루(罷漏)라고 하였다. ▶소통사(小通事) : 역관(譯官) 가운데 하급 통역관 ▶4경(更) : 하룻밤을 오경(五更)으로 나눈 넷째 부분으로 새벽 한 시에서 세 시 사이. ▶수역(首譯) : 역관의 우두머리 |
그림에는 항구에 커다란 배 2척이 들어와 있고 오른쪽 모서리에 배 하나가 뒤늦게 항구로 들어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조명채의 글에 나타난 상황을 이성린도 이렇게 그려낸 것이다. 통신사들의 기선 옆으로 떠있는 수많은 작은 배들은 통신사 일행을 호위하고 예인하는 역할을 맡은 왜선(倭船)들이다. 상당히 많은 배들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명채는 “배를 끄는 군사가 참(站)마다 늘어 가니, 대마도 사람이 배 끄는 군사가 1만 명이라 하는 것도 그리 헛된 말은 아니다.”라고 했다.
▶참(站) : 역마을이라는 뜻이지만 글에서는 배가 정박하는 곳을 의미. |
4월 17일 우창(牛窓)에 도착했다.
“미시(未時)에 우창(牛窓)에 배를 대었다. 예전에 응신천황(應神天皇)이 이 바다를 지나다가 소가 요사한 짓을 하는 것을 만났는데, 그의 신하 중에 장사가 있어서 쇠뿔을 뽑아 던져 버렸으므로, 그것이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국서를 받들고 뭍에 내렸다. 관사는 바로 이 고을 태수의 다옥(茶屋)인데, 수놓은 포장에 붉은 전으로 역시 다 화려하다.”
▶응신천황(應神天皇) : 서기 270년에 71세의 나이에 즉위하여 310년 111세에 사망하였다는 왜국의 15대 천황으로, '천황(天皇)'이라는 칭호를 최초로 사용했다고 전해지지만 역사 상 실제로 존재했는지 여부는 물음표다. |
“바다 경치가 넓고 고요하여, 마치 한수(漢水)와 같다. 모래 여울에 두 점의 기이한 섬이 물 어귀에 벌여 서 있어, 때로 혹 갑자기 보면 문득 떠서 움직이는 듯하여 참으로 이른바 그림도 이만 못할 것인데, 아깝게도 아름다운 산수가 문신(文身)을 새기는 오랑캐의 소굴에 있다.”
4월 19일 미시((未時))에 실진(室津)에 도착하였다.
“관소(館所)는 선창 끝에 있으므로, 국서를 받들고 걸어 들어갔다. 관소 문에 진홍 문단(紋緞)의 휘장을 드리웠고, 문 안에는 오색 비단 휘장을 둘렀다. 지세가 둥글게 돌아 안아서 따로 한 항구를 이루고, 암벽(岩壁)에는 소나무ㆍ대나무가 있어, 경계가 맑고 곱다. 접대하는 제구에는 더한 것도 있고 덜한 것도 있으나, 분수에 넘치는 사치와 공교하고 화려한 것은 거의 마찬가지이다.”
4월 21일 통신사 일행의 배는 오사카(大阪)로 들어가는 강어귀에 도착하여, 사신 행차를 마중 나온 왜선에 옮겨 타고 오사카로 이동하였다.
“강어귀에서 대판(大阪)까지는 30리가 되는데, 강물이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다. 항구에 둑을 쌓아 교통하는 것이 마치 핏줄을 벌여 놓은 듯하며, 항구에 바로 배를 두었는데, 그것은 큰 장삿배라 한다. 강가 30리에는 다 돌로 둑을 쌓고, 둑 위에 인가가 잇달았는데, 재화(財貨)는 산해(山海)의 풍요한 것을 마음대로 갖고, 주거(住居)는 숲 기슭의 높고 상쾌한 데를 차지하였으며, 희게 칠한 누각과 아름다운 정자와 높은 집에 잇단 방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천만 가지로 붉고 푸르게 두른 것이 모두 기이한 화초인데, 그 가운데에 여인이 각각 무릎을 거두고 꿇어 앉아 있어, 색태(色態)가 눈처럼 비치니, 참으로 이른바 ‘월나라 여인은 천하에서 가장 희다[越女天下白]’는 바로 그것이다.
등촉(燈燭)이 빛나고 비단 담요가 밝게 비치며, 둑 가 좌우에 한 줄로 걸린 등불이 위아래로 뻗어 있어 물에 거꾸로 비치니, 금규(禽虯)가 어지러이 춤추는 듯하며, 밤경치가 도리어 낮과 같다. 구경꾼은 다락 위아래와 둑 위아래에 가득하고도 모자라서 작은 배를 타고 둑 밑에 늘어선 사람이 몇 천만 억인지 모르겠는데, 고요하여 떠드는 소리가 없고,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만 들린다. 그때 공중에 밝게 빛나는 불구슬[火珠]이 문득 가까워 오고, 만 길 뻗은 무지개가 뱃머리에 다가오는 것이 보이는데, 무지개는 다리[橋]요, 구슬은 다리 위에 걸린 등불이다. 누워서 쳐다보니 긴 난간이 아득히 구름 사이에서 나오는 듯하고, 아래는 중선(中船)이 돛을 달고 그대로 지날 수 있으며, 호수의 너비는 우리나라의 한강과 같다.
밤이 깊은 뒤에야 대판(大阪)에 배를 대었다. 선창의 만듦새는 지나온 참(站)과 한결같으나, 세 사신으로부터 수역(首譯)에 이르기까지 선창을 다 각각 만들었다. 탈 교자(轎子)와 인부와 말이 이미 다 정제하여 기다린다. 이른바 교자는 우리나라의 쌍가마 같은 모양이고 8인이 멘다. 3수역으로부터 제술(製述)까지는 현교(懸轎)를 타고, 그 밖의 상관(上官)ㆍ중관은 다 말을 타는데, 안장 제구의 온갖 것이 또한 화려하다.
선창에서 관소까지는 거의 10리에 가까운데, 좌우의 장랑(長廊)이 다 층을 겹쳐 지은 것이며, 네거리가 된 곳이 아니면 지붕 끝이 채색 포장과 높은 차양으로 이어지고, 금빛 병풍을 두르고 붉은 전을 깔아서, 휘황찬란하여 마치 금수(錦繡)가 쌓인 가운데를 지나는 듯하다. 관소에 이르니, 숱한 방이 얽히고 두루 통해 동인지 서인지 어지러워 들어갈 곳을 알 수 없으나, 문에 다 표지를 써 놓았으므로 그제야 비로소 알 수 있고, 또 벌여둔 온갖 제구는 지나 온 곳에 비하여 별로 더한 것이 없는데, 관소는 본원사(本願寺)이다.“
▶월녀천하백(越女天下白) :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장유(壯遊)라는 시의 한 구절. |
대판성 통신사 숙소에서 바라본 남쪽 풍경을 그린 것이다.
“대판은 섭진주((攝津州)에 속하고, 동으로 60리, 서로 40리 남으로 60리, 북으로 35리의 넓이이며, 호수는 10여 만에 이르는데, 이른바 그들의 양반은 성안에 살고, 시민은 성 밖에 산다고 한다. 관소(館所) 대문 밖에, 붉은 옷을 입은 자가 막대를 들고 늘어서서 잡인의 출입을 막으며, 문 위에는 ‘일 없는 사람은 드나들지 말라[無用人不容出入]’는 7자가 씌어 있다. 관소안의 심부름을 하느라고 머물러 있는 자도 4백 ~ 5백 인에 이르는데, 다 목패(木牌)를 차서 표지한다고 한다.”
5월 1일 통신사 일행은 아침 일찍 망궐례(望闕禮)를 행한 후에 다시 왜국의 배를 타고 요도강[정천(淀川)]을 따라 교토[京都]를 향하여 뱃길을 떠났다.
▶망궐례(望闕禮) : 궁궐이 멀리 있어서 직접 궁궐에 나아가서 왕을 배알하지 못할 때 멀리서 궁궐을 바라보고 행하는 예식(禮式). |
“선창을 나가 다시 금루선(金樓船)을 탔다. 마침 비가 내려, 좌우의 긴 둑에 섞여서 구경하는 남녀가 마치 금수(錦繡)의 포장을 깐 듯한데, 다들 채색 우산을 펴고 있다. 강물에 임해서 누대(樓臺)를 짓고 강을 가로질러 다리를 놓았는데, 곳곳이 다 그러하며 번화하고 미려한 것은 이루 적을 수 없다. 좌우로 돌아보면 광경이 현란하여 보이는 것이 도리어 지루하여 싫증을 느낀다. 언덕 위에서는 왜인의 아이가 손뼉들을 쳐서 우리나라 사람이 돌아보기를 바란다. 마침 나이가 조금 많은 왜인 남녀가 있다가, 사신 행차가 지나는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손을 모아 입으로 조용히 외는 것이 틀림없이 비는 말일 것인데, 여기서부터 연로에서는 또한 이런 것을 많이 본다.
수십 리를 지나간 뒤에, 좌우 언덕에 뱃줄을 끄는 군사를 벌여 세우는데, 그 기표를 보니, 한 배를 끄는 인부가 80명에 이르고, 물 가운데에서 앞을 끄는 작은 배 4~5척이 있다. 감정관이 낮에 숙공(熟供)을 바쳤는데, 자못 정결하다. 작은 판각(版閣)이 있는 작은 배가 따라오는 것이 보이는데, 그 안에는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하다. 물어 보니, 일행을 위하여 뒷간을 마련한 거룻배라 한다.
대판부터 평방(平方)까지는 50리 인데, 양쪽 연안의 마을이 거의 서로 잇닿았으며, 교야(郊野)가 그윽하고 산천이 밝고 곱기는 갈수록 더 기이하고 상쾌하다. 대판 근처에는 때때로 왜인 남녀 약간을 실은, 색칠하여 꾸민 작은 배가 위아래로 떠다니는데, 대개 이곳 왜인은 음식을 장만해서 배를 띄워 놀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바람은 거슬러 불고 해는 어두워서 나아갈 수 없으므로, 일행이 다 평방에 배를 대고 배에서 잤다.“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봉사일본시문견록(조명채, 노원마신 한국유사), 한국고중세사사전(2007,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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