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사로 파견되었던 사대부들이 견문록 형식의 글을 남겼다면, 화원(畫員) 중에는 그림을 남긴 경우도 있다.
영조 24년인 1748년, 왜국에 파견되었던 통신사절에 도화서화원(圖畫署畫員) 이성린(李聖麟, 1718 ~ 1777)이 최북(崔北)과 함께 통신사 수행화원 자격으로 동행했었다. 이때 이성린은 부산(釜山)에서 에도(江戶)에 이르는 통신사행의 여정에서 왜국의 경승지와 주요 사건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가 그린 총 30점의 그림들은 ‘배(뗏목) 타고 가는 길의 경승지(景勝地)’라는 의미의 《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는 그림이 각각 15점씩 나뉘어 두 개의 두루마리 형태로 전하지만, 원래는 한 장씩 따로 그린 것을 나중에 두루마리 형태로 배접한 것이다. 상권으로 불리는 두루마리에는 출발지인 부산에서부터 오카야마현[岡山縣]의 우시마도[牛窓]까지, 하권에는 무로츠[室津]로부터 에도에서의 관백연향(關白曣享)장면 그림까지가 실려 있다. 조선에서 왜국을 다녀온 통신사행의 여정을 담은 그림은 《사로승구도》가 유일하다.
당시의 통신사는 에도막부의 제9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시게[徳川家重]의 승습을 축하하기 위한 것으로 정사(正使)에 홍계희(洪啓禧), 부사 남태기(南泰耆), 서장관(書狀官) 조명채(曹命采)가 임명되었었다.
통신사 일행이 영조에게 길 떠나는 의례를 드린 것은 1747년 11월이었는데, 막상 부산에서 출항한 것은 그 다음 해 2월16일이었다. 1월 9일에 해신제를 지내고 떠나려 했으나, 일기가 순조롭지 못하여 출발이 지연되었다. 이에 따라 480명에 이르는 일행이 부산에서 4개월 동안 머물게 되면서 인근 70고을이 돌려가며 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느라 온 경상도가 말할 수 없이 피폐해졌다는 기사가 실록에 나온다.
그림 중앙에 부산진 성(城)을 배치하고 주변의 모습을 그렸다. 부산진성 앞 작은 언덕 위에 있는 기와건물이 통신사 일행이 출발하기 전 해신제를 지냈던 영가대(永嘉臺)이다. 영가대 위쪽의 깎아지른 산의 정상에 임진왜란 때 왜군이 성을 쌓았던 자성대(子城臺)인데, 그림에 성벽은 그리지 않았다. 부산진성의 성벽은 임진왜란 이후 새로 쌓은 것이다. 부산진성 남문 앞으로 난 도로를 따라 취락이 형성되었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영가대 앞에서 시작되던 바다가 지금은 모두 매립되어 부산의 시가지가 되었다.
서장관 조명채(曹命采, 1700 ~ 1764)가 남긴 당시의 사행록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에 의하면 부산에서 떠났을 때의 목적지는 대마도의 좌수포(佐須浦)였다. 그런데 오후 2시경부터 바람이 바뀌어 배의 속력이 점점 떨어지면서 좌수포(佐須浦)로 돌아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정사가 타고 있던 배가 바람을 타고 곧바로 가까운 악포(鰐浦)로 들어가는 바람에 모든 배가 악포로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바람을 얻느라 7일을 머물게 되었다. 그러던 중, 21일에 부사(副詞)가 타고 온 배에서 실화(失火)로 불이 나 배에 실린 예물과 사행기간 중의 여비로 가져온 물건들이 타버리고 사람도 3명이나 죽었다. 불에 탄 물건들은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의 건의로 다시 준비하여 뒤따라 보냈다. 2월 23일에 다시 항해를 시작하여 다다른 곳이 방포(芳浦)라는 곳이었다. 방포는 예정했던 기항지가 아니었고, 마을이 좁고 누추하여 뭍에 내리지 않고 통신사 일행은 그대로 배에서 잤다.
조명채의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을 보면 이성린의 《사로승구도》에 그려진 그림들이 무슨 의미의 어떤 그림인지 이해하기가 조금 더 쉽다. 그림 아래 붙여진 글들은 조명채의 「봉사일본시문견록」에서 발췌 요약한 내용이다.
24일에 방포를 출발하여 대마도의 부중(府中)인 이즈하라[엄원(厳原)]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의 숙소가 서산사(西山寺)였다. 통신사 일행은 이곳에서 무려 20일이 넘게 머물다가 3월 16일에야 다시 길을 떠났다.
3월 17일에 이키섬 항구에 들어갔다. 사신들이 묵던 관소(館所) 뒷산에 올라가 본 일행의 비장과 서기들이 “부산(釜山)의 산들이 마치 눈 안에 있는 듯하더라.”고 전했다. 비와 바람에 막혀 계속 이키섬에 머물다가 4월 2일에 출항하여 3백 50리를 가서 다음 날 새벽에 아이노시마[남도(藍島)]에 도착하였다.
조명채는 “여염은 쓸쓸하나 새로 지은 관사(官舍)가 거의 1천칸(間)에 가깝다.”고 하였다.
또한 “국서를 받들고 관소로 들어갔는데, 모든 제구(諸具)의 정교하고 사치하기가 일기도(壹岐島)와 마찬가지”라고 적었다. 4월 4일에 아이노시마를 떠났는데 “지나는 곳에 크고 작은 섬들이 많고, 남녀 왜인이 작은 방주(方舟)를 타고 사행의 배를 쫓아와서 구경하는 자가 매우 많은데, 남자가 없으면 여자도 나는 듯이 배를 잘 젓는다.”고 했다.
날이 어두워져 비가 내리는 중에 통신사의 배들이 서로 흩어진 사이, 종사관이 타고 있던 배가 암초에 걸렸다가 기적적으로 벗어나며 죽을 고비를 넘겼다.
4월 5일 오전 10시경 적간관(赤間關)으로 출발하였다.
“항구 밖에 있던 남도(藍島) 예선(曳船)이 앞을 다투어 어지러이 들어와 나는 듯이 노를 저어 와서, 사신의 배에 탄 왜 사공의 수기(手旗)의 부름에 응하고, 소창(小倉)의 배들도 합세하여 끄니, 돛대가 바다에 가득하고 기표(旗標)가 군진(軍陣) 같으며, 북과 나발의 요란한 소리가 바다 어귀를 진동하는데, 배를 저어와 구경하는 오랑캐의 남녀노소도 부지기수다.
소창(小倉)은 서남간에 있는데, 흰 칠을 한 집의 높은 담이 그림처럼 벌여 잇달았고, 흰 모래와 푸른 솔이 10리 사이에 평평히 깔려 있다. 5층 누각이 숲의 나무 끝에 높이 나와 있는데, 곧 태수가 유람하는 곳이라 한다.“
“미시(未時)에 적간관(赤間關) 일명 하관(下關)에 이르렀는데, 조수가 한창 빠지느라 물의 흐름이 매우 빠르다. 신(臣)이 탄 배도 조금 흘러내려가는 것을 억제할 수 없는데, 왜의 중선(中船) 한 척이 기선(騎船)에 부딪쳐 배 밑으로 빠져들어 가려 했다. 그 배 위에는 꾸며놓은 것은 나무 조각 하나 없이 부서졌으므로, 배 안의 왜인은 기선에 기어 붙어 겨우 살아났다. 대개, 우리 배는 소박하고 튼튼하나, 왜선은 가볍고 빠르게 만들었을 뿐이라, 서로 부딪는 일이 있으면 부서지는 우환을 당하므로, 우리 배에 가까이 오는 왜선은 이것을 피하여 매우 조심한다.”
▶미시(未時) : 십이시(十二時)에서는 오후 한 시부터 세 시까지. 이십사시(二十四時)에서는 오후 한 시 반부터 두 시 반까지이다. ▶기선(騎船) : 정사, 부사, 종사관이 탑승한 배. 사행의 짐 싣는 배인 복선(卜船)과 구별하는 명칭. ▶하관(下關) : 시모노세키 |
아카마가세키[적간관(赤間關)]에서 묵었는데, 4월 6일에 대마도주는 볼일이 매우 많아 출항할 생각이 없는데다, 조선 배 안의 집물(什物)도 고칠 것이 있어서 출발하지 못했다.
“거리 가운데를 통해서 가는데, 많은 주막들이 좌우에 잇달았고, 비단 옷과 채색 옷을 입은 구경꾼이 담처럼 늘어섰다. 여염이 조밀하여 수만 여 호에 이르고 흰 누각과 층층이 쌓은 담이 여기저기 어른거린다. 오가는 장삿배의 화물이 모여들어서 그런대로 아름다운 한 도회인데, 대판성(大阪城)에 버금간다는 것이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4월 8일에 가미노세키[상관(上關)]에 정박하였다.
“선창의 만듦새는 적간관(赤間關)과 다름없으나, 언덕에 돌둑을 쌓고 둑 위에는 대나무 난간을 둘렀다. 국서를 받들고 배에서 내려 관소에 들어가니, 관소는 태수의 다옥(茶屋)이다. 다옥이라는 것은 태수가 강호(江戶)에 왕래할 때에 머무는 곳이라 한다. 접대하는 제구(諸具)가 대체로는 적간관보다 조금 뒤지나, 마루 안팎에 비단 포장을 겹으로 드리우고, 툇마루에는 수놓은 자리를 깔았다. 멀리서 보면 담요 같고 가까이에서 보면 피륙 같은데, 털로 짠 것들이다.”
“일행에게 글씨를 구하는 왜인이 날로 더욱 많아져서, 곁군들 같은 천한 왜인들까지도 구하는데, 혹 언문을 써 주면 그것을 얻어 가는 자도 오히려 귀하게 여긴다. 혹은 말하기를, 왜인의 풍속으로는 우리나라 사람의 글씨를 얻어 두면 일마다 반드시 성취한다고 하는데, 그 말이 미더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을 보배처럼 구하는 데에는 또한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정사(正使) 홍계희가 며칠 동안 병이 나있는 상태라 4월 10일 해질녘에 예정에 없던 진화(津和)에 정박하고 이 고을 태수의 다옥(茶屋)을 빌려 묵었다.
“세 사신이 다 뭍에 내리려는데, 선창이 좁아서 기선(騎船)으로는 들어갈 수 없기에, 각각 채선(彩船)에 옮겨 타고서 내리고 원역(員役)은 다 배 안에 머물렀다. 다옥은 다른 곳들에 비하여 그리 사치하지는 않으나, 뜰에 있는 세 그루 늙은 소나무가 굽은 것이 볼만하다. 산꼭대기를 보니, 한 자루의 불이 있어 이를 봉화(烽火)라 하는데, 밤새도록 꺼지지 않아서, 밤에 가다가 길을 잃는 배로 하여금 찾아올 수 있게 한다고 한다.”
▶채선(彩船) : 채색하여 화려하게 치장한 배 또는 연희를 할 수 있게 만들어진 배. ▶원역(員役) : 벼슬아치 밑에서 일하는 구실아치 |
“신시(申時)에 포예(蒲刈)의 선창에 배를 대니, 다락을 세 곳에 벌여 세워 세 사신의 배를 각각 매어 두게 하였는데, 난간을 설치하고 붉은 전(氈)으로 덮여 있다. 태수가 사자를 보내어 문안하고 이어서 뭍에 내리기를 청하므로, 비를 무릅쓰고 부사와 함께 정사의 배 선창에 나아가서 국서를 지영(祗迎)하여 함께 모시고 가려 하였더니, 관소의 문에서 3~4간쯤 밖에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대로 걸어서 들어갔다. 새로 지은 행각(行閣) 20여 간에 붉은 전(氈)을 이어 깔고, 행각 좌우는 비단 포장으로 가렸는데 행각이 끝나고서 10여 층의 돌사닥다리를 오르니, 드디어 관사가 있다. 부사(副使)와 신(臣)이 든 곳은 뒤 행랑을 조금 돌아서 있는데, 왕래하는 툇마루에도 붉은 전을 깔았고, 칸막이 문에는 파랑ㆍ빨강ㆍ노랑의 세 가지색으로 섞어 짠 포장을 드리워서 그 광채가 찬연하다. 이것은 바로 기묘한 무늬의 신식 비단인데, 아란타(阿蘭陀)에서 나는 것이라 하며, 이부자리 따위도 다 이와 같다.”
▶신시(申時) : 십이시(十二時)에서 오후 세 시부터 다섯 시까지 ▶전(氈) : 짐승의 털로 아무 무늬가 없이 두껍게 짠 피륙. 담요. 카펫. ▶아란타(阿蘭陀) : 네덜란드 |
4월 15일 도모노우라[도포(韜浦)]에 정박하게 되는데 그 전에 해변가 절벽에 있는 한 암자를 지날 때의 일을 조명채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시도 앞을 지나며 보니 푸른 벼랑이 마치 바다에 꽂혀 있는 듯하고, 그 위에 작은 암자가 외로이 붙어 있어, 은은한 종소리가 공중에서 나는 듯하다. 한 중이 운문단(雲紋緞) 가사(袈裟)를 입고 배를 저어 마중 와서 흰 소반 하나를 바치는데, 거기 놓인 두세 폭의 종이는 축원하는 글이다. 여기는 해조산(海潮山)의 반대사(盤臺寺)인데 축사를 바치고 쌀을 구걸하는 자가 예전 사신 행차 때부터 규례가 되었다. 3방에서 각각 쌀 한 표와 종이ㆍ과일을 주어 보냈다. 대개 이 절의 중은 오가는 행인이 주는 것을 받고 순풍을 빌어서 갚는데, 오는 사람에게서 받으면 서풍을 빌고, 가는 사람에게서 받으면 동풍을 빌므로, 왜인이 이것으로 속담을 지어서, 만약에 반쯤 올라갔다가 떨어져 내리는 일이 있으면, ‘반대사 기풍’이라 한다고 하니, 몹시 우습다. 앞에 원산(遠山)이 있는데, 주민이 다 원숭이를 기른다 한다. 먼저 왔던 사람의 일기를 살펴보니, 혹 왜인의 과장된 말이라 하나, 대개 왜인을 보면 원숭이를 매어 데리고 가는 자가 많으니 누구의 말이 옳은지 모르겠다.”
▶운문단(雲紋緞) : 구름무늬를 놓은 비단 |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중세사사전(2007, 한국사사전편찬회), 봉사일본시문견록(조명채, 노원마신 한국유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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