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왜국의 외교관계는 조선초기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이 태종 3년인 1403년에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고, 왜국 막부의 아시카가[足利義滿] 장군도 다음 해에 책봉을 받으면서, 조선과 왜국은 서로 사절을 파견하는 외교관계를 갖게 되었다. 조선 국왕과 왜국 막부 장군은 양국의 최고통치자로서 현안 해결을 위한 사절을 서로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이때 조선에서 보내는 사절은 통신사(通信使), 왜국이 보내는 사절은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로 부르기로 하였다. ‘통신(通信)’은 두 나라가 서로 신의(信義)를 통해 교류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선 국왕이 왜국에 파견한 사절이 모두 통신사로 불렸던 것은 아니다. 왜국에서 사신을 보낸 것에 대한 답례로 보내는 사신은 회례사(回禮使)나 보빙사(報聘使)라 했고, 그 외에 조선시대 중앙 정부의 특수 임무를 받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직을 가리키는 경차관(敬差官)으로 불린 경우도 있었다. 통신사란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태종 13년인 1413년의 박분(朴賁)을 정사(正史)로 한 사절단이었지만, 중도에 정사가 병이 나서 사행이 중단되고 말았다. 실제로 교토(京都)에 있는 막부까지 다녀온 첫 통신사는 세종 11년인 1429년에 박서생(朴瑞生)을 정사로 한 사절단이었다.
왜국에 파견하는 사절단이 통신사로 불리는 경우는, 조선 국왕으로부터 왜국의 막부장군(국왕)에게 파견되는 것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했다. 이들은 조선 국왕이 막부장군에게 보내는 국서(國書)와 예단(禮單)을 지참하였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7년, 1617년, 1624년에 파견된 사절단은 통신사라 하지 않고,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칭호를 썼는데, 이는 왜란에 대한 감정도 가라앉지 않은 상태인데다가, 갓 출범한 도쿠가와(德川) 막부를 완전히 신뢰하고 있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통신사의 호칭이 다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636년부터였다. 통신사는 양국 간의 상황에 따라 그 파견 목적이 달랐는데, 임진왜란 이전에는 왜구의 소요에 대한 방지 요청이 위주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직후에는 평화 유지와 포로 송환, 왜국 정세 탐색 등이 주 임무였다가, 1636년부터는 막부 장군의 즉위를 축하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쇄환(刷還) : 본뜻은 원거주지를 이탈한 백성들을 찾아 원거주지로 돌려보낸다는 의미이지만, 여기서는 왜국에 잡혀간 조선인들을 송환해온다는 의미. |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에는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를 받지 않았다. 그리하여 왜국 막부의 대조선 외교는 대마도가 대신 수행하였다. 외교사절은 지금도 서로 상대국에 대한 예의를 기본으로 한다. 자칭 ‘예의가 바른 민족’이라는 왜(倭)가 보낸 대마도 외교사절 차왜(差倭)들의 예의는 어떠했을까? 왜관을 옮겨달라고 조르던 때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차왜들의 행태다.
●기사 제목 : 차왜 평성태가 관문을 함부로 나와 동래에 오다 (《현종실록》 현종 12년, 1671년 8월 27일 을사 첫 번째 기사)
【차왜(差倭) 평성태(平成太)가 관문(館門)을 함부로 나와 동래부에 왔다. 당초 예조가 대마 도주에게 답한 서계에 관(館)을 옮기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평성태가 서계를 보고 나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하락받지 못하면 결코 서계만 받고 돌아갈 수 없다. 장차 아뢸 것이 있으니 두 대인(大人)이 편복으로 와서 만나기 바란다. 오지 않으면 내가 스스로 가겠다." 하였다.
신후재(申厚載)·정석(鄭晳)이, 이유없이 만나보는 것은 이미 법에 벗어나거니와 약조를 어기고 뜻대로 마구 나와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역관(譯官)을 시켜 타일렀더니, 평성태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약조를 어긴 것을 논할 것이 있겠는가. 두 나라의 유대 관계는 이제부터 끊어질 것이다. 두 대인이 거절하고 만나지 않으면 수영(水營)으로 갈 것이고, 감사가 또 만나지 않으면 서울로 가고야 말 것이다."
하고는, 상경하여 신청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어서 그의 부하를 시켜 행장을 준비하게 하여 트고 나갈 듯한 자세를 보이면서 ‘허락받지 못하면 곧바로 강호(江戶)로 가겠다.’고도 하고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섬을 유람하겠다.’고도 하였다.
이달 23일에 이르러 정관왜(正官倭)·부관왜(副官倭)·도선왜(都船倭)가 다 작은 가마를 타고 수행 왜인 2백여 인을 거느리고 갑자기 관문을 나왔으므로 부산 첨사(釜山僉使) 이연정(李延禎)이 두 진(鎭)의 토병을 거느리고 앞길을 차단하였으나, 왜인이 칼을 뽑아 마구 휘두르며 길을 트고 곧바로 동래부에 이르렀다. 신후재 등이 어쩔 수 없이 별관(別館)에 묵게 하고 치계하여 알렸다. 일이 비국(備局)에 내려지자, 비국이 회계하기를,
"차왜가 약조를 어기고 이렇게 장애되는 짓을 하고 있으니, 그 정상이 매우 놀랍습니다. 그가 반드시 감영(監營)으로 가고자 하거나 곧바로 서울로 오려고 한다면 도착한 뒤에 사리에 의거하여 엄히 물리쳐야 할 뿐입니다. 이제 잠시 그가 행동하는 대로 맡겨 두되 다만 역관으로 하여금 따라오며 그가 하는 짓을 살펴서 계속 알리게 하여 조정에서 처치할 근거로 삼고, 접위관(接慰官)은 동래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형세를 보아가며 행동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평성태가 동래에 온 뒤에 신후재 등이 그가 약조를 어기고 함부로 나온 정상을 꾸짖으니, 평성태가 답하기를,
"우리들이 어찌 나오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겠는가마는 참으로 사정이 마지못해서 그런 것이다. 이번에 관(館)을 옮기는 일은 이미 강호에 여쭈어 정한 것인데 조정에서 혹 그 사실을 통촉하지 못하여 이토록 망설이는 것이 아닌가. 허락받지 못하면 도주가 직임을 보전하기 어려운 형세이다. 그러면 귀국도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신후재 등이 치계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도주가 그 직임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따위의 말은 모두 공갈하고 협박하는 계책입니다. 그들이 반드시 상경하려고 하나 타일러서 말리지 못한다면 그들이 하는 짓을 보아 처치해야 할 뿐이고 결코 탈 말을 주도록 허가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리고 서계는 이미 내려 보냈으므로 뒤미처 고치지 않아야 합니다. 이 뜻으로 말을 만들어 타이르고 한편으로는 엄히 물리쳐서 빨리 관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하니, 상이 따랐다.
서계의 문구는 그 뒤에 차왜가 굳이 자신들의 뜻을 주장하여 마지않기 때문에 고쳐 보냈다.】
▶비국(備局) : 임진왜란 이후 의정부를 대신하여 조선의 국정 전반을 총괄한 실질적 최고의 관청인 비변사(備邊司). |
●기사 제목 : 왜가 동래로 온 뒤 왜인이 거리낌 없이 오가다 (《현종개수실록》 현종 12년, 1671년 9월 25일 계유 3번째 기사)
【차왜(差倭)가 동래로 온 뒤로는 왜관(倭館)의 왜인이 줄지어 오가며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었다. 혹 문을 지키는 병졸이 꾸짖어 금한다고 노하기도 하고 찬거리가 약소하다고 노하기도 하여, 손으로 때리지 않으면 대뜸 칼을 뽑기까지 하였다.
이달 17일에 왜관의 한 왜인이 어가미(漁價米)가 좋지 않은 것에 성을 내어 좌자촌(左自村) 앞까지 창고지기를 쫓아가서 칼을 뽑아 머리를 쳤다. 이에 부산 첨사 이연정(李延禎)이 곧 군관을 보내어 칼을 빼앗고 묶어서 왜관으로 보내고, 부사 정석(鄭晳)이 엄중히 처단하여 징계하라는 뜻으로 왜관의 왜인에게 말을 전하였더니, 답하기를 ‘자기의 일 때문에 칼을 뽑기까지 하였다면 그 죄가 물론 무겁겠으나, 이번에는 잡물(雜物)을 즉시 들여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다툰 것이었으니, 창고지기가 죽지 않았으면 실로 엄중히 다스릴 것이 없다.’ 하였는데, 정석이 치계하여 아뢰었다.
비국이 아뢰기를,
"창고지기가 죽지 않았더라도 칼을 뽑아 쳐서 상처를 입힌 죄는 마땅히 다스려야 하는데 다스리려 하지 않으니 정상이 매우 밉고 또한 뒤폐단에 관계됩니다. 차역(差譯)이 갈 때에 도주(島主)에게 말하여 엄중히 처단할 근거를 만드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기사제목 : 정도성이 하직하다. 동래의 왜인들이 행패를 부리다 (《현종실록》현종 13년, 1672년 6월 29일 4번째 기사)
【....이에 앞서 차왜(差倭) 평성태(平成太) 등이 왜관 이전의 일로 나왔으나 조정에서 왜관의 이전을 허락하지 않자 차왜가 해가 지나도록 머물렀다. 이때 향접위관(鄕接慰官)인 경상도 도사 민홍도(閔弘道)가 동래부(東萊府)에 있었는데, 이 해 여름 석 달 동안의 전최(殿最)를 감정(勘定)하는 일로 순찰사 영문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차왜가 그가 가는 것을 들어주지 않았다. 고사(故事)에 도사가 전최에 참여하지 않으면 법률상 파직에 해당하므로 감사가 전례에 따라 파직시켰다. 민홍도는 파직되자 즉시 행장을 꾸려 가지고 서울로 향하였고, 동래부에서는 역관을 시켜 민홍도가 파직되어 돌아간 사유를 말하게 하였다.
이에 차왜 등이 화를 내어 통사(通事) 왜인과 졸개들을 시켜 역관을 붙잡아 놓고 칼을 들고 빙둘러 서서 칼날을 목에 들이대며 온갖 위압과 공갈을 하였다. 동래부에서 별차역(別差譯)을 시켜 꾸짖기를,
"접위관이 파직되어 돌아간 것은 실로 너희들이 그가 순찰사 영문에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반성할 줄은 모르고 허물을 역관에게 돌린단 말인가. 역관이 비록 낮고 미약하나 곧 왕의 심부름을 하는 자인데 어찌 감히 이같이 욕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차왜 등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이 역관과 함께 순찰사 영문에 가서 자세히 사유를 알아본 다음 서울로 가려고 한다." 하였다. 동래부에서 또 사람을 보내 꾸짖으면서 반복해서 효유시켰으나 마침내 듣지를 않았다...(후략)】
‘왜놈 종’이라는 뜻의 왜노(倭奴)는 예전에 중국과 조선에서 왜(倭)를 비하하여 부르던 호칭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일본의 규슈(九州) 지방을 왜노국(倭奴國)이라 불렀었다. 조선의 국가 문서인 『조선왕조실록』에도 왜노(倭奴)라는 말이 975번 등장한다.
이런 왜노도 명색이 남의 나라에서 보낸 사신인지라, 조선은 늘 이들을 예의를 차려 맞이했다. <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는 동래부사가 이들 차왜를 응접하는 의식을 그린 병풍이다.
열 폭으로 된 이 병풍은 조선에 온 왜의 사절을 대접하기 위하여 동래부사가 동래 읍성에서 초량왜관으로 길을 나서, 초량왜관에서 왜사를 접대하는 연회 장면까지를 그렸다.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첫째 폭에서 일곱째 폭까지에 걸쳐서는 동래부(東萊府)와 부산진(釜山鎭)을 지나 초량왜관으로 들어서는 행렬이 산수 경관을 배경으로 길게 이어진다. 여덟번째 폭부터의 세 그림은 각기 별개의 그림으로 보아야 한다.
참고 및 인용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고중세사사전(2007, 한국사사전편찬회), 실크로드 사전(정수일, 2013, 창비),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2011, 국립중앙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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