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과 왜(倭) 6 - 왜사(倭使)

從心所欲 2020. 9. 20. 15:23

임진왜란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고 그 대신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가 에도막부[江戶幕府]를 세워 정권을 장악하자, 왜국은 조선의 사정에 밝은 대마도주에게 외교권을 주어 1599년부터 160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어 외교 교섭을 요청해왔다. 조선은 왜국의 진의를 파악하가 위하여, 그 선행조건으로서 국서를 정식으로 먼저 보내올 것, 왜란 중 왕릉을 훼손한 왜인을 압송해올 것, 조선 포로를 송환할 것 등의 3개 조건을 제시하였다. 왜국이 이를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광해군 1년인 1609년, 에도막부[江戶幕府]의 외교권을 위임받은 대마도주와 왜국과의 통교에 관한 약조를 맺는데 이를 기유약조(己酉約條)라고 한다. 약조문은 조선이 왜국에게 통교(通交)를 허락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기유약조는 전문 13조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대마도주에게 내리는 세사미두(歲賜米豆)를 100석으로 유지하되, 대마도주의 세견선은 20척으로 제한하고 특송선 3척도 세견선에 포함시켜 계산하는 한편, 세견선의 구성은 대선 6척, 중선과 소선을 각각 7척으로 하였다. 또한 전례대로 조선이 대마도주에게 도서(圖書)를 만들어주되, 대마도주의 도장이 찍힌 여행증명서가 없는 자와 부산포 외에 배를 정박(到泊)한 자는 적으로 간주하며, 왜인의 왜관 체류시일은 대마도주 특송선은 110일, 세견선은 85일, 그밖에는 55일로 한다는 등이다.

▶도서(圖書) : 조선시대 예조에서 대마도주나 여진인에게 준 동(銅)으로 만든 도장.

 

왜와 통교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일단 방문하는 왜국 사절이 묵을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하였기에, 조선은 우선 육지와 약간 떨어진 부산의 절영도(絶影島), 즉 지금의 영도(影島)에 간이(簡易) 왜관을 지어 왜국 사절이 머물게 하였다. 그러다 선조 40년인 1607년에 지금의 동구 수정동 동구청 일대에 정식으로 두모포(豆毛浦) 왜관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두모포 왜관은 대지가 좁고 선창 수심이 얕으며, 남풍을 정면으로 받아 배가 정박하기에 부적당하다는 이유로 왜국은 왜관의 위치를 옮기고 싶어 했다. 이를 두고 인조 때인 1640년부터 현종 13년인 1672년까지 30여 년 동안 여덟 차례나 이관 교섭이 있었다.

 

왜인들은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의 웅포(熊浦)에 왜관을 설치하고 싶어 했고, 조선은 이를 결코 허락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조선이 이를 허락하지 않은 이유는 《현종실록》현종 13년(1672년) 12월 30일 기사에 지중추부사 유혁연(柳赫然)이 "저들이 청한 왜관을 이전할 곳은 순천(順天), 웅천(熊川), 거제(巨濟) 등의 세 곳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순천을 허락한다면 호남 조운(漕運)의 길이 끊어질 것이며, 웅천과 거제를 허락한다면 통영이 제 구실을 할 수 없을 것인데 어떻게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 말에서 그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두량포 왜관이 초량으로 이전하게 된 경위는 《현종실록》현종 14년(1673년) 10월 19일 기사에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대마주(對馬州)의 차왜(差倭)가 아직도 부산관(釜山舘)에 머물고 있으면서 관(舘)을 옮겨 달라고 강력하게 청하였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차왜 등이, 청한 바를 굳게 막아버린 우리 조정의 서계(書契)를 보고는 성을 내고 펄쩍 뛰면서 서울에 올라가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행구(行具)를 준비해 달라고 간절히 청하면서 떠나려고 하는 기색이 있었는데도, 조정에서는 역시 금지하지 않고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차왜 등은 별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하루는 접위관(接慰官) 조사석(趙師錫)을 찾아보고 말하기를,

"비록 다대(多大), 초량(草梁) 등의 포(浦)에라도 옮기도록 허락해 주었으면 합니다."

하니, 사석이 이 말을 조정에 아뢰었다. 조정의 의논이 웅천(熊川)은 결코 허락할 수 없고 초량(草梁)은 허락해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상(上)이 비로소 허락해 주라고 명하고 차왜로 하여금 스스로 다대(多大), 목장(牧場), 초량(草梁) 중 한 곳을 택하도록 하여 뒷말이 없도록 하였다. 차왜가 초량항(草梁項)으로 옮기기를 원하자 허락하였다.】

▶차왜(差倭) : 조선 후기 대마도에서 수시로 조선에 파견하는 외교사절.

▶접위관(接慰官) : 조선 조정에서 왜사(倭使)가 올 때 영접(迎接)과 접대를 위해 파견하던 관원(官員)

▶목장(牧場) : 당시 부산 동래부(東萊府)에는 동래현 남쪽 연안의 석포(石浦), 섬인 절영도, 내륙 분지인 오해야(吾海也)의 세 곳에 군용(軍用)의 말을 기르는 목장이 있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목장이 석포인지 절영도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실제로 왜관이 두모포에서 초량으로 옮긴 것은 1678년으로, 두모포에 왜관이 설치된 지 약 70년 만이다. 초량 왜관은 약 33만㎡(약 10만 평) 규모로, 그 크기는 두모포 왜관의 10배 정도였다. 초량 왜관 공간은 용두산 공원을 중심으로 동관(東館), 서관(西館)으로 나뉘었고, 왜관의 중앙인 용두산 기슭에는 왜관을 총괄하는 관수(館守)의 관저가 있었다. 서관의 북쪽에는 왜국 사절에게 연향을 베풀어주던 연회장인 연향대청(宴享大廳), 그리고 용두산 북쪽 복병산(伏兵山) 너머에는 조선인 역관들이 거주하는 성신당(誠信堂), 빈일헌(賓日軒) 등의 건물이 있었고, 그 위쪽에는 왜국 사절이 조선 국왕에게 숙배를 드리는 초량객사가 있었다.

▶관수(館守) : 인조(仁祖) 17년인 1639년부터 이 직임을 두고 왜인으로 임명하였는데, 관수왜(館守倭)라고도 불렸다. 왜관을 지키고 관리하는 일과 범죄를 저지르는 왜인(倭人)을 대마도에 통보하는 일을 담당했다.

 

[변박(卞璞) <왜관도(倭館圖)>, 1783년, 국립중앙박물관.]

 

왜관의 왜인들이 초량왜관 복병산 아래에 있는 조선인 마을인 초량촌에 자유롭게 드나들며 조선인과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매매춘, 밀무역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고, 때로는 이것이 외교 문제로까지 확대되었다. 왜관에는 왜인들과의 통역을 담당하는 역관들이 필요한데, 조정에서는 종9품의 역학훈도(譯學訓導)와 이와는 별도로 왜관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교역 시장의 통역을 위하여 별차(別差)라는 통역관도 파견하였다. 이들 통역관들은 초량촌의 민가를 빌려서 지냈는데, 왜인들이 이들을 만난다는 핑계로 왜관을 자주 벗어나자 1709년경에 동래부사 권이진(權以鎭)이 마을 주민을 모두 이주시키고 그곳에 역관들의 숙소인 임소(任所)만 남겨두었다. 또한 초량객사 바깥의 담장을 토담에서 돌담으로 바꾸고, 이곳에 설문(設門)을 설치한 뒤 군관으로 하여금 왜인의 출입을 통제하게 하였다.

 

당시 역관의 처소는 비바람을 가릴 수 없을 정도라, 왜인들 보기에도 부끄러워 당시의 역관이었던 현덕윤(玄德潤)이 동래부사에게 보수해 줄 것을 간청하면서, 현덕윤 자신도 자신의 돈 몇 백 관을 출연하고 동래부와 조정에서 도와 숙소의 보수와 신축을 마친 뒤, 임소에 성신당(誠信堂), 빈일헌 등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왜관도> 우측 하단 왜관 모서리에 있는 작은 산은 용미산으로, 일제 강점기에 깎여 평평해졌고 오늘날에는 롯데백화점 광복점이 들어서 있는 자리이다.

 

초량객사를 지어 그 안에 왕의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왜국 사절이 오면 그곳에 나아가 절을 하게 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오는 왜국 사절단 일행은 이전처럼 한양에 상경하여 왕을 배알할 수 없게 된 때문이다.

임진왜란 전에는 왜국과의 사절 왕래가 많아 조선 사절의 왜국 파견이 18회에 달하였고, 왜국왕사(倭國王使)의 조선 파견은 71회나 되었다. 여기서 왜국왕이라는 의미는 천황이 아니라 막부(幕府)의 수장인 쇼군[將軍]을 가리킨다. 천황은 허수아비고 무신(武臣)정권인 막부가 실질적 권한을 갖고 있었기에 조선은 막부와 통교를 했고, 막부에서 파견한 사절단은 국가 사절로 인정되어 한양으로 올라와 왕을 배알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상경했던 길이 결국 임진왜란 당시 왜적의 침입로로 이용되어 피해가 심해졌다는 판단에,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에는 왜국왕사의 상경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왜국도 왜국왕사의 파견을 중단하고, 막부와 관련된 일은 대마도의 차왜(差倭)가 대신하게 되었다.

 

차왜(差倭)는 임진왜란 이후 대마도에서 조선에 수시로 파견하는 외교사절을 가리킨다. 당연히 임진왜란 전에는 없었던 것으로, 기유약조(己酉約條)의 체결 당시, 상경을 요청한 대마사절에게 ‘도주차왜(島主差倭)’라는 명칭을 붙인 데서 시작된 호칭이었다. 차왜 외에도 팔송사(八送使)라는 이름의 교역을 위한 정기적인 무역사절도 있었다. 하지만, 차왜는 외교적인 현안 문제가 있을 때마다 임시로 파견되는 외교사절이다. 이 차왜의 역할이 정착되고 이들에 대한 응접(應接) 기준이 정례화된 것은 1680년(숙종 6) 이후부터이다.

 

차왜 중에 특히 조선 정부로부터 외교사행으로 인정받은 차왜를 ‘별차왜(別差倭)’라고 하였다. 차왜는 그 사명에 따라 대차왜(大差倭)와 소차왜(小差倭) 및 기타 차왜로 구분되었다.

차왜는 파견 목적이나 지참하는 외교문서에 따라 그 구성 체계와 접대 규정이 달랐다. 대차왜는 정관(正官) 1인, 도선주(島船主) 1인, 봉진압물(封進押物) 1인, 시봉(侍奉) 2인, 반종(伴從) 16인, 격왜(格倭) 70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예조 참판 혹은 참의, 동래부사, 부산첨사에게 보내는 서계를 지참하는 사절이다. 왜관의 체류일은 60일 기한이며 숙공일(熟供日 )은 5일이었다. 이외에 다례(茶禮), 연향(宴享), 지공(支供)은 팔송사의 제1특송선과 같으며, 중앙에서 파견한 접위관(接慰官)의 접대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정관이 타고 오는 배외에 별도로 배 3척을 더 허용하고, 배마다 각각 20인의 격왜를 대동할 수 있도록 하여, 대차왜는 모두 4척의 선단을 이루어 총 151∼153인의 규모였다.

▶도선주(島船主) : 여러 배의 선주(船主)들 중 우두머리가 되는 선주로, 사절단의 정관(正官)이나 부관(副官)이 승선하지 않은 배의 우두머리.

▶봉진압물(封進押物) : 조선 국왕에게 올리는 진상물(進上物)을 담당하는 대마도의 관리. 인조 때에 진상(進上)이라는 말이 봉진(封進)으로 바뀌면서 생긴 호칭이다.

▶시봉(侍奉) : 불교에서 스승이나 지위가 높은 승려를 모시며 시중드는 제자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정관과 동행하는 부관이나 보조관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종(伴從) : 수행인

▶격왜(格倭) : 왜인(倭人)의 배에 일하던 사공

▶숙공일(熟供日) : 음식을 제공하는 일수

▶지공(支供) : 음식을 제공함

 

반면 소차왜는 정관 1인, 압물 1인, 시봉 1인, 반종 5∼10인, 격왜 30∼40인으로 구성되며, 예조참의, 동래부사, 부산첨사에게 보내는 서계를 지참하는 사절이다. 왜관의 체류 일수는 대체로 55∼60일 사이이고 숙공일은 5일이다. 이들은 지방 관아에서 보내는 접위관의 접대를 받는다. 소차왜는 배 1척만 허락하고, 인원은 38∼53인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차왜는 각종 연향접대를 비롯하여 식량과 일용 잡물을 지급받고, 조선에서 사례로 하사하는 회사(回謝)와 시장을 열게 하여 교역을 할 수 있는 개시(開市)무역에 참가하는 등의 혜택을 통하여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대마도에서는 가능한 한 많은 차왜를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으로부터 외교사행으로 인정받으려 노력하였다. 이들이

조선으로부터 외교사행으로 접대받기에 가장 좋은 명분은 관백(關白)이나 대마도주의 경조사(慶弔事)였고, 통신사행이나 문위행(問慰行)에 관련된 사항들이었다. 조선 국왕이 막부장군(幕府將軍)에게 파견하는 사절이 통신사행(通信使行)이고, 조선 예조참의 명의로 대마도주에게 파견하는 사절이 문위행이다. 대마도주는 이 기회를 이용, 가능한 많은 사절을 보내 무역량을 증가시키려고 애썼다. 또한 조선에서도 이들을 허용하여 대마도주의 외교적 입장을 세워주어 왜국과의 관계를 안정시키고, 또 왜국에 대한 정보 수집의 기회로 삼았다.

 

[<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 지본채색 10폭 병풍, 각폭 81.5 x 46cm(전체 460cm), 국립중앙박물관. 상단이 병풍 우반부이고 하단이 좌반부이다.]

 

 

참고 및 인용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고중세사사전(2007,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