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과 왜(倭) 8 - 통신사(通信使)

從心所欲 2020. 9. 23. 10:53

조선이 왜국 막부에 사절을 파견한 것은 총 20회로 임진왜란 전이 8회, 임진왜란 후가 12회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7년부터 세 번에 걸쳐 파견된 사절단을 ‘회답겸쇄환사’라고 부른 것 외에는 모두 통신사(通信使)로 불렸다. 인조 14년인 1636년부터 파견된 통신사들은 막부의 새로운 관백(關白)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1590년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백(關白)을 자처하면서부터, 이전에 쇼군[將軍]이라 불리던 막부의 수장(首長)은 관백(關白)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임진왜란 이후 대마도를 통하여 통신사를 파견하는 절차는 대체로 동일하였다.

일본에서 새로운 관백이 책봉되면, 대마도주는 막부의 명령을 받아 조선에 그 사실을 알리는 관백승습고경차왜(關白承襲告慶差倭)를 먼저 파견한다. 그리고는 이어서 다시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는 통신사청래차왜(通信使請來差倭)를 파견한다. 그러면 조선에서는 예조가 이 사실을 보고하여 통신사 파견 여부를 조정에서 논의하고, 결정되면 이를 부산의 왜관(倭館)에 알린다.

 

그러면 대마도주는 조선과 통신사 일행의 도왜(渡倭)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또다시 신사영재판차왜(信使迎裁判差倭)를 부산왜관에 파견한다. 통신사 파견에 따른 구체적인 사항이 협의되면, 예조에서 이를 조정에 알리고 조정에서 논의를 거쳐 결정이 나면 통신사 일행이 구성된다.

숙종 8년인 1682년에 개정, 정비된 통신사 편제에 의하면 총인원은 577인에 달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후 파견된 통신사절에 실제로 이 인원이 다 채워진 적은 없다. 가장 많았을 때가 숙종 37년인 1711년의 500명이었고, 가장 적었을 때는 마지막 통신사였던 1811년(순조 11년)의 330여명 수준이었다.

 

통신사 일행이 한양을 출발하여 동래부에 도착하면 다시 대마도에서 파견된 신사영빙재판차왜(信使迎聘裁判差倭)가 이들을 대마도까지 인도하고, 이후에는 대마도주의 안내로 왜국의 에도[江戶, 뒤의 東京]까지 왕복하게 된다. 통신사 일행이 임무를 마치고 대마도로 돌아오면 다시 대마도주가 임명하는 신사송재판차왜(信使送裁判差倭)가 이들을 부산까지 호행(護行)하고 안내하였다.

 

통신사의 왕래 일정은 때에 따라 차이가 있어 짧게는 5개월에서 길게는 1년이 소요되었다. 사행기간에 여름이나 한 겨울이 끼면 시간이 더 걸렸다. 통신사 일행이 육로를 따라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하는 데만 2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고 한다. 부산에 도착하면 이들을 위한 연향이 베풀어지는데, 초기에는 충주, 안동, 경주, 부산의 4곳에서 베풀어졌다가 민폐 때문에 후기에는 부산 한곳에서만 행해졌다. 부산에 도착하였다고 바로 떠나는 것이 아니고 길일(吉日)을 택하여 출발일을 정하고, 또 떠나는 날에는 반드시 해신제(海神祭)도 지냈다.

 

통신사 일행이 타고 가는 배는 수군통제사영(水軍統制使營)과 경상좌수사영(營)에서 준비하였다. 사람이 타는 기선(騎船) 3척은 정사(正史), 부사(副使), 종사관(從事官)의 3사(使)가 각기 다른 배를 이용하고, 짐 싣는 배인 복선(卜船) 3척이 뒤따라 모두 6척으로 편성되었다. 이 배들은 대마도주가 보낸 선단의 인도와 호위를 받아 대마도의 와니우라[鰐浦]에 입항하여 대마도주의 연향을 받는다. 그 후, 다시 대마도의 안내를 받아 이키도(壹岐島)에서 후쿠오카현(福岡縣), 아카마세키[赤間關]를 거쳐 열도의 내해를 따라 거슬러 올라간다.

▶아카마세키[赤間關] : 시모노세키[下關]

 

[통신사 행로, 일본정부관광국]

 

이후 통신사는 왜국 각 번(藩)의 향응과 호행을 받으면서 해로를 따라 오사카[大阪]에 이른 뒤, 타고 온 6척의 배는 몇 명의 경비요원과 함께 남겨두고 이후는 왜국의 각 지역 다이묘[大名]들이 제공하는 배를 타고 열도의 요도우라[淀浦]에 상륙한다. 여기서부터는 인마(人馬)의 도움을 받아 육로로 교토[京都]로 향했다. 무로마치[室町] 막부 때에는 여기가 종점이었지만, 에도[江戶] 막부 때에는 1617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1620년대 특별히 건설하였던 ‘조선인가도(朝鮮人街道)’를 지나 에도까지 갔다.

▶번(藩) : 에도시대[江戸時代]에 1만석이상의 영토를 보유했던 봉건영주인 다이묘[大名]가 지배했던 영역.

 

[통신사 숙소로 사용되었던 교토의 서본원사(西本願寺), 교토에는 동본원사(東本願寺)도 있는데 두 곳 모두 통신사 일행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막부는 내외에 막부의 위엄과 권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각 번으로 하여금 최고 수준의 의례로 통신사 일행을 대접하게 하였다. 통신사 일행을 맞이하는데 왜국에서 1,400여 척의 배와 1만여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고도 한다. 통신사 일행이 지나가는 번(藩)들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접대에 소요되는 거액의 비용으로 인하여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접대비용으로 각 번의 1년 예산이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여서, 한 때 왜국 내부에서는 통신사에 대한 접대를 간소화하는 방안이 대두되어 실제로 1711년에 한 번을 그렇게 시행했으나 곧 다시 원래대로 환원되었다.

 

조선 통신사에 대한 왜국의 관심은 매우 높아, 통신사 일행이 통과하는 각 지역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통신사 일행이 머무는 객사에는 왜국의 학자, 문인들이 찾아와 조선의 관료, 학자들과 한문으로 필담(筆談)을 나누며 문화교류를 했고, 조선 학자와 화가의 그림과 글씨를 얻어가려는 사람들로 객사는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1636, 1643, 1655년에 파견된 통신사들은 도쿠가와의 묘소[日光東照宮]에 참배를 강요받기도 하였다. 또한, 1636년부터는 막부의 요청에 의하여 곡마단(曲馬團)의 공연을 하기도 하였는데, 1680년부터는 이를 위하여 마상재(馬上才)의 파견이 상례화 되었다.

▶마상재(馬上才) : 조선시대 무예이십사반(武藝二十四般)의 하나로, 각 영문(營門)의 마군(馬軍)이 달리는 말 위에서 하던 여러 가지 무예(武藝). 옆에 매어 달리기, 뒤에 엎디어 달리기, 거꾸로 서서 달리기, 자빠져서 달리기, 가로 누워서 달리기, 쌍마 타고 서서 총 쏘기 등의 묘기가 있었다.

 

[<조선통신사 내조도(來朝圖)>, 羽川藤永 그림, 일본고베시립박물관. 에도 시내 나혼바시를 지나는 1748년의 조선통신사 행렬]

 

막부가 길일을 택하여 통보하면 통신사는 막부를 방문하여 국서(國書)와 예물 목록을 적은 별폭(別幅)을 전하고, 그 후에 다시 조선 국왕의 국서와 예물에 대한 관백의 회답과 별폭을 받아야 돌아오게 된다. 이때 막부는 정사 이하 통신사 일행에게도 물품과 금은을 답례로 주는 것이 관례였다. 대마도주와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오는 귀로에도 각 번은 처음 올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또 향응을 제공하였다. 대마도로부터는 신사송재판차왜가 부산까지 동행하였다.

 

통신사들은 귀국 후 사행에 대한 견문록을 남기곤 하였는데, 지금 전하는 통신사 견문록으로는 고려시대 정몽주(鄭夢周)의 「봉사시작(奉使時作)」이 가장 오래되었다. 정몽주가 1377년 9월에 출발, 이듬해 7월에 돌아오는 사행 기간 중에 쓴 시를 모은 기록이다. 이때의 사행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왜의 협조를 얻는 데에 목적이 있었으며, 귀국하면서 많은 고려인(高麗人)을 데리고 왔다고 한다.

조선시대 것으로는 1471년, 신숙주(申叔舟)가 사행을 다녀온 뒤에 지은 「봉사시작(奉使時作)」과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가 제일 이른 것으로, 「해동제국기」에는 왜국의 지세, 국정, 교빙 내왕의 연혁, 조선 사신들에 대한 접대 등의 내용을 담았다.

▶봉사(奉使) : 사신(使臣)이 되다

 

아래 <조선국통신사행렬도(朝鮮國通信使行列圖)>는 인조 14년인 1636년에 파견된 통신사 일행의 에도 입성 행렬을 그린 것으로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그림이다.

그림의 크기는 전체가 30.7 x 595cm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그림은 <인조14년통신사입강호성도(仁祖十四年通信使入江戶城圖)>라고도 불린다. 당시 통신사의 정사는 임광(任絖), 부사는 김세렴(金世濂), 종사관은 황호(黃㦿)로, 사절단은 478명 규모였다.

 

[<조선국통신사행렬도>, 왼쪽부터 1 행렬 선두: 도훈도(都訓導), 삼혈수(三穴手), 월도(月刀), 장창(長鎗)]

 

[<조선국통신사행렬도>, 왼쪽부터 2 : 삼지창(三枝鎗), 나발(喇叭)]

 

[<조선국통신사행렬도>, 왼쪽부터 3 : 태평소(太平簫), 동고(銅鼓), 나각(螺角) 등 풍악수(風樂手)]

 

[<조선국통신사행렬도>, 왼쪽부터 4 : 삼혈수(三穴手), 포수(砲手), 나장(羅將), 마상재(馬上才), 군관(軍官)]

 

[<조선국통신사행렬도>, 왼쪽부터 5 : 군관(軍官), 고(鼓), 효(笅)]

 

[<조선국통신사행렬도>, 왼쪽부터 6 : 효(笅),금(琴), 적(笛), 가운데 줄 - 국서(國書), 소통사(小通事), 사자관(寫字官)]

 

[<조선국통신사행렬도>, 왼쪽부터 7 : 인신(印信), 병방군관(兵房軍官)]

 

[<조선국통신사행렬도>, 왼쪽부터 8 : 정사(正使), 자제군관(子弟軍官), 역관, 소통사]

 

[<조선국통신사행렬도>, 왼쪽부터 9 :  부사(副使), 자제군관, 역관, 소통사]

 

[<조선국통신사행렬도>, 왼쪽부터 10 :  종사관(從事官), 자제군관, 역관, 소통사, 도훈도(都訓導)]

 

[<조선국통신사행렬도> 행렬 후미 : 역관(譯官), 서기(書記), 의원(醫員)]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실크로드 사전(정수일, 2013, 창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