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1일.
【아침에는 비가 조금 내리다가 늦게는 개었다.
마주수(馬州守)가 말을 전하여 사시(巳時)에 함께 떠나자고 약속하더니, 늦어서야 마주수가 먼저 떠난 것을 들었다. 세 사신과 원역(員役)들은 오사모(烏紗帽)에 홍포(紅袍)를 갖추고, 비장(裨將)들은 융복(戎服)에 고건(櫜鞬)으로 국서(國書)의 전배(前陪)가 되어, 위의(威儀)를 갖추어서 차례로 떠났다. 일행의 종자(從者)도 다 고운 옷으로 갈아입고 배행(輩行)하여 정제하였다. 왜인은 전어관 2인이 교자 앞에 보행으로 벌여 가고, 교군의 옷도 죄다 새롭다.
▶사시(巳時) : 십이시(十二時)에서는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이십사시(二十四時)에서는 오전 아홉 시 반부터 열 시 반까지. ▶전배(前陪) : 벼슬아치가 행차할 때나 상관을 배견할 때에 앞을 인도하던 관리나 하인 |
어제 지난 참(站)부터는 마을이 두어 리(里)도 사이 뜬 곳이 없다. 저자 거리를 다 지나니 길이 바닷가에 나 있는데, 왼편은 인가(人家)요 오른편은 바다 둑에 아주 가깝다. 둑 아래에 작은 배가 고기비늘처럼 모여 있는데, 풍랑이 마침 일어 키 까불 듯이 움직이는데도, 배 안에서 구경하는 늙은이나 젊은이나 태연하여 두려운 빛이 없다. 2 ~ 3리쯤 가니, 길 양쪽 가의 거리가 갑절이나 더 화려한데, 지붕 위에는 다 흰 흙을 새로 칠하여 깨끗이 다듬어지고 곱게 빛나는 것이 마치 눈 내린 뒤의 광경 같다. 누대(누대(樓臺))의 발[簾]이 금수(錦繡)로 서로 비추고 이따금 큰 집 두셋이 동와(銅瓦)로 덮여 있어 햇빛에 번쩍인다. 혹 잠깐 문을 열고 그 틈으로 구경하는 자가 있으면, 길가에서 쇠지팡이를 끌며 경계하는 자와 교자 앞의 금도(禁盜)가 손뼉을 치고 소리 질러 조금도 못 열게 한다.
1정(町) 사이는 30~40보에 지나지 않으나, 정마다 이문(里門)이 있고 문안에는 금도청(禁盜廳)을 두었는데, 강호에서 30리 안에 설치한 이문이 여든 아홉 곳이다. 간간이 10여 길 되는 네 기둥을 세우고 큰 나무로 중방(中枋)을 가로 꽂아, 차차로 사다리를 이루어서 꼭대기에 이르고, 위에 판잣집 한 간을 설치하여 전후좌우를 굽어보게 된 것이 있는데, 바로 금화(禁火)를 위하여 감시하는 곳이라 한다.
홍교(虹橋) 대여섯을 지나가는데, 다리 밑에는 구경꾼이 배를 잇대어 뭍을 이루었다. 성문을 들어가니, 좌우의 석축(石築)이 거의 두 길 남짓하고, 문의 제도는 또한 돌 홍예(虹霓)로 만들고, 아름드리 기둥을 세우고서 위에는 다락을 짓고 밑에는 문을 설치하였는데, 규모가 크고 튼튼하니 참으로 이른바 철관이다.
▶홍예(虹霓) : 무지개 같이 휘어 반원형의 꼴로 쌓은 구조물. 홍교(虹橋)는 홍예다리. |
오시(午時)에 관소에 이르렀다. 관소는 본원사(本願寺)인데, 절은 강호의 동쪽에 있어 곧 저자 가운데이다. 관소의 문을 들어가니, 10여 간의 행각(行閣)을 새로 지어서 누각 댓돌 위에 잇대었는데, 위에는 가는 서까래를 깔고 두꺼운 유지(油脂)를 발라서 비와 볕을 가리었다. 마주 봉행이 댓돌 아래에서 맞이하여 절하고, 두 관반(館泮) 상총개(上總介), 수리대부(修理大夫)가 청상(廳上)에 나와 맞아하기에 마주 두 번 읍(揖)하고서 지나갔다. 관사(館舍)의 굉장하고 화려함이 서경(西京)보다 나은데, 강호의 3백 남짓한 절 중에서 이것이 가장 작은 절이라 한다.】
▶관반(館泮) : 외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한 벼슬아치 |
다음날 아침.
【수역(首譯)이 들어와 고하기를,“영접관이 와서 전하기를, ‘관백에게 전명(傳命)할 날짜는 이달 27일로 가리고, 돌아가는 길에 오르는 날은 다음달 13일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마도에서 타버린 막부에 전할 예단(禮緞)의 부족한 것이 도착하지 않아, 통신사측에서는 왜국에 국서를 전하는 날을 미루어줄 것을 요청했다. 왜국에서는 예단이 부족하더라도 정해진 날짜에 할 것을 주장했다가 결국 통신사의 요청을 들어주어 국서를 전달하는 전명일(傳命日)을 6월 1일로 옮겨주었다. 다행히 그 사이에 조선에서 다시 마련해 보낸 예단들이 무사히 도착하였다.
6월 1일 미명에 망궐례를 치르고 관소를 출발하여 관백을 보러가는 길가의 모습부터 시작하여 조명채는 이날의 일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 가운데 통신사 일행이 관백을 만나 예식을 거행하고 술을 마시는 의식을 거행하기까지의 과정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대광간(大廣間)에 이르니 곧 관백(關白)이 좌정하는 정당(正堂)이다. 영(營) 안의 대청은 무릇 3층인데, 당우(堂宇)와 발[簾]ㆍ섬돌의 제도는 마주수(馬州守)가 사는 집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세 사신이 마주수의 안내로 예식 행할 곳을 자세히 살핀 뒤에 외헐소(外歇所)에 돌아와 좌정하였다. 조금 뒤에 마주수가 일어나 세 사신을 인도하여 들어가서 내헐소(內歇所)를 가리켜주니, 이른바 송간[존안(尊顔)]이라는 것이다. 국서를 칸막이 된 벽에다 모셔 놓은 다음 세 사신은 국서를 향하여 벌여 앉고, 마주수는 꺾어진 모퉁이에 앉았다. 북쪽 벽 아래를 보니 왜관(倭官) 수십 인이 둘러앉아 있다.
▶외헐소(外歇所) : 빈객(賓客)이 머물러 쉬도록 집의 안채 밖에 마련한 장소. 외부 대기실. ▶내헐소(內歇所) : 빈객(賓客)의 내부 대기실. |
그들을 물어보니 각 주의 태수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는 모양이 빼어나고 깨끗한 자가 없지도 않았다. 앞서 말한 ‘검고 붉은 적삼을 입고 뒤섞여 앉았다.’고 한 자는 강호의 백관(百官)이라 하는데, 용모와 거지(擧止)가 면면이 어리석고 누추하여 지나는 길에서 본 여느 왜인만도 도리어 못하였다.
각종 예단(禮緞)을 궤가(櫃架)에 담아서 대광간의 서헌(西軒)에 벌여 두고, 예단마(禮緞馬)는 흰옷 차림에 검은 원관을 쓴 자가 동쪽 뜰아래 끌고 섰는데 안갑(鞍匣)을 벗겨 버렸으니, 그 안장의 빛깔이 선명함을 드러내기 위한 듯하다. 수집정이 영(營) 밖 툇마루에 앉아 안을 향해 사후(伺候)하더니 그가 머리를 숙여 부복한 뒤에야 비로소 관백이 나오는 줄을 알았다.
▶사후(伺候) : 웃어른의 분부를 기다리는 일 |
외뿔 모자에 붉은 옷을 입은 자가 갑자기 서둘러 나와서 입을 오므려 휘파람 소리를 내어 사람들의 떠드는 것을 금지한다. 수집정이 일어나 나와서 마주수에게 눈짓으로 나오게 한 다음 마주 부복하여 말을 전하더니, 마주수가 일어나서 수역(首譯)에게 전달하여 예식 행하기를 청한다. 수역이 국서를 받들고 세 사신은 뒤를 따라 영 밖에 나가 서서 마주수에게 국서를 전하니 마주수가 양손으로 받들고 대광간 앞까지 가서 약간 꿇어앉는 시늉을 하고서 곧바로 일어나 전(殿) 안으로 들어가 또 고가(高家)의 모(某)에게 전하여 전 위에 놓아둔다. 이른바 고가의 모라는 자는 곧 품관이 높은 사람이다.
▶고가(高家) : 고가(高家)는 왜국의 대표적 명가문(名家門) |
세 사신이 송간에 돌아와 앉아서 보니, 풍절건((風折巾)을 쓰고 푸른 옷을 입은, 집사(執事)하는 여러 왜인들이 손에 각종 예단을 받들어 당 안으로 들어가고, 말은 끌고 나간다. 그러고서 마주수가 일어나서 사신을 인도하여 예식 행하기를 청한다. 사신이 들어가 제 2층 자리 위에 서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서 관백을 바라보니 제1층에 앉았는데, 머리에 쓴 것은 외뿔 모자 같고 몸에는 검푸른 빛깔의 비단 도포를 입었으며, 얼굴빛은 야위고 가무스름하며 좁은데다가 길쭉하여 마치 타다 남은 고목 그루터기와도 같았다. 이때 한더위를 당하여 좌우의 창 가리개를 뜯어 버리지 않은데다가 당(堂) 또한 깊숙하여 앉은 자리가 가려서 분명히 볼 수는 없었으나, 관백의 자리 뒤에 모시고 앉은 자가 두서넛 있는 듯하고, 좌우에도 붉은 옷을 입고 꿇어앉은 자 두서넛이 있을 따름이요, 이밖에는 임금다운 위의(威儀)가 전혀 없었다.
사신이 송간으로 물러나와, 수역을 시켜 사예단(私禮單) 단자를 집사하는 자에게 전달하여 들이게 하였더니, 집사하는 자가 광간(廣間)으로부터 나와 각종 사예단을 수납한 뒤에, 집정이 나와서 또 마주수에게 말을 전하여 사신에게 예식 행하기를 청한다. 사신이 당 안 제 3층에 들어가서 또 사배례를 행하였다. 이번에는 사예단으로 예식을 행하기 때문에 또 1층을 내려서 절한 것이니 역시 전례이다.
▶사예단(私禮單) : 조선 시대에 왜국에 가는 통신사 일행이 사적으로 가져갔던 예물 단자(單子) |
사신이 송간으로 물러나오니, 세신(世臣) 정이소부두(井伊掃部頭) 및 수석 집정(執政)이 나와서 사신과 마주 앉았는데, 세신이란 이는 사람됨이 꽤 빼어나고 명랑하였다. 마주수를 눈짓으로 불러 앞에 엎드리게 하고 운운하는 바가 있더니, 마주수가 수역에게 전하기를,
“관백이 사신과 술을 같이 마시자는 명이 있었습니다.”
하므로, 사신이 자리를 옮겨 앉아 사례하기를,
“이와 같이 술을 같이 마시자는 말씀을 받으니 감격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하였다.
▶세신(世臣) : 대대로 한 가문이나 왕가를 섬기는 신하 |
세신 등이 드디어 일어나 들어가고, 마주수가 사신을 인도하여 들어가서 차례대로 제 3층 동편 자리 위에 앉았다. 외뿔 모자에 누런 옷을 입은 자가 먼저 관백의 앞에 상을 올리고 또 차례로 세 사신 앞에 상을 올린다. 상과 그릇은 모두 흰 삼목(杉木)인데 황률(黃栗)ㆍ인복(引鰒)ㆍ다시마 세 그릇뿐이었다.
▶황률(黃栗)은 말린 밤. 인복(引鰒)은 납작하게 펴서 말린 전복 |
집사하는 자가 관백에게 상을 올린 뒤에 마주수가 정사(正使)를 인도하여 제 2층에 올라 가 앉았다. 술병을 잡은 자가 있어 왼손으로 잔을 올리고서 술을 따르며, 정사가 잔을 들어서 받고 다시 들어서 다 마신 다음 잔을 상 위에 도로 갖다 놓으면, 집사하는 자가 또 관백에게 잔을 올린다. 그래서 술잔을 왕래하는 절차가 종사관(從事官)에게 이르는데, 모두 정사와의 의식과 같다. 술은 별품(別品)이 아니고 잔은 토배(土盃)이다. 술이 한 순배 돈 뒤에 집사하는 자가 차례로 상을 거둔다. 세 사신이 제 3층 중앙에 들어가서 사배(四拜)한 후 물러나오고, 행중(行中)의 여러 사람들도 상상관(上上官)에서 각 원역의 종에 이르기까지 차례차례로 그 위치를 낮추어서 모두 절을 하였다.
집정이 나와서 마주수를 시켜 관백의 명을 전달하기를,
“잔치를 몸소 행하고자 하나 사신이 불편할 듯하므로 종실(宗室)로 하여금 잔치를 모시게 하였으니, 한껏 즐기고 파하시오.”
하므로, 세 사신이 치사(致謝)한 다음, 하직하고서 당 안으로 들어가 사배를 하고, 송간으로 물러나오자, 관백은 곧 안으로 들어갔다.】
통신사 일행은 6월 13일 에도를 떠나 귀국길에 올라, 7월 19일 새벽에 대마도에 도착하였고, 7월 23일 대마도를 출발했으나 바람 때문에 다시 대마도의 방포에 정박하여 바람을 기다리는 고생 끝에 윤 7월 13일 새벽에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배에서 우리나라 경내의 여러 산들이 보이고 대마도가 안개 속에 까마득하여질 때, 배 안의 사람들이 서로 환성을 지르며 기뻐할 만큼 오래고 험한 길이었다.
조명채는 그때 배안에서 느낀 감상을 이렇게 적었다.
【손가락을 꼽아 날을 세어 보니 복명(復命)을 이 달 안에 할 수 있으매, 견마지성(犬馬之誠)에 스스로 기쁨을 견디랴! 출국한 뒤로 자식들의 죽음을 연달아 당하였으나, 다만 국사가 의리에 중하므로 목석처럼 참아서 오늘날 살아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 방문에 들어서면 홀로 견디지 못할 아픔이 있을 것이매, 때로는 여러 사람들이 기뻐 뛰는 것을 보니 스스로 몰래 눈물이 흐름을 금치 못하겠다.】
▶복명(復命) : 명령(命令) 받은 일을 집행(執行)하고 나서 그 결과를 보고함 |
참고 및 인용 : 한국고중세사사전(2007, 한국사사전편찬회), 봉사일본시문견록(조명채, 노원마신 한국유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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