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과 왜(倭) 15 - 왜(矮)놈

從心所欲 2020. 10. 8. 16:45

일본을 우습게 아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물론 때로는 열등감과 시기심이 더 크게 작용한 때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의 밑바탕에는 적어도 일본에게는 지지않는다는 결기와 오기가 늘 있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일본 또한 우리를 한 수 아래로 보고 무시해왔다. 서로가 서로를 무시하는 두 나라는 이제는 아예 대놓고 상대방을 혐오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일본이 언제부터 우리를 무시하게 되었을까? 국경을 마주한 나라들 간의 숙명처럼 태생적 경쟁심과 시기심이 서로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이 감히 우리를 넘볼 생각을 갖게 된 시기는 생각보다 짧다. 명치유신(明治維新) 이전 에도막부시절의 왜국은 쇼군이 바뀔 때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어떻게든 조선의 통신사를 자국에 초청하려고 애를 썼었다. 그랬던 왜국이 우리보다 앞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 근대화의 전형(典型)을 제시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라는 인물이 1885년 자신이 창간하고 운영하는 신문인 시사신보(時事新報)의 사설에 이런 글을 게재하였다.

 

【오늘날의 (국제 관계를) 도모함에 있어서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의 개명(開明)을 기다려 더불어 아시아를 흥하게 할 여유가 없다. 오히려 그 대오에서 탈피하여 서양의 문명국들과 진퇴를 같이하여 저 청나라와 조선을 대하는 법도 이웃 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사이좋게 대우해 줄 것도 없고, 바로 서양인이 저들을 대하듯이 처분을 하면 될 뿐이다. 악우(惡友)를 사귀는 자는 더불어 오명(惡名)을 피할 길이 없다.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아시아 동방의 악우(惡友)를 사절해야 한다.】

 

이웃 나라인 조선과 중국을 ‘나쁜 친구’로 규정하면서, 이 나쁜 친구들과 의절하고 이른바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가자’는 탈아입구(脱亜入欧)를 주장한 것이다. 이 주장은 일본이 기존의 중국 중심의 아시아 질서로부터 벗어나 문명개화를 통하여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아시아적 질서를 구축하자는 자신들의 진로에 대한 방향 설정뿐만 아니라 조선은 일본의 지도를 받아야 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나라라는 의미까지 밑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었다. 이후 서구 문물로 재정비한 일본이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을 점령하면서 후지카와 유키치의 주장은 일본의 제국주의화를 합리화하는 논리로까지 확대 재생산되는 동시에, 왜국인들 정신세계의 밑바탕이 되어버렸다. 1984년부터 발행된 일본 화폐 1만엔권에 이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의 사진이 새롭게 오른 것만 보아도 그의 주장에 대한 왜국인들의 공감대는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의 전통적 왜국관은 어떤 것이었을까?

1397년 조선이 명나라 태조(太祖)에게 보낸 표문(表文)에 경박하게 희롱하고 모멸한 내용이 있다 하여, 이 표문을 교정했다는 죄로 명나라에 불려간 예문춘추관학사(藝文春秋館學士) 권근(權近, 1352 ~ 1409)에게 명나라 황제가 24개의 제목(題目)을 내어주며 시를 짓게 한 일이 있었다. 그 시제(詩題) 가운데 상망일본(相望日本)이란 제목이 있었다. 이에 대한 권근의 시(詩)이다.

 

東望洪濤外  동으로 바라보면 큰 파도 넘어,

倭奴稟性頑  왜놈[倭奴]의 타고난 품성이 완악합니다.

未嘗霑聖化  한 번도 성인(聖人)의 교화 못 받아,

常自肆兇奸  항상 흉악하고 간사합니다.

剽竊侵隣境  남의 것을 노략하고 이웃나라 침범하면서,

偸生寄海山  바닷가 산기슭에서 도둑질로 살아갑니다.

願將天討去  하늘의 뜻 받들어 토벌하여서,

問罪凱歌還  죄를 묻고 개선(凱旋)하여 돌아오소서.

 

이때는 아직 명나라나 조선이 모두 왜국과 외교관계가 없던 시절이기는 하지만 조선에게 왜국은 그저 왜구(倭寇)의 무리일 뿐이었다. 외교관계가 이루어진 뒤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조선이 왜국과 외교관계를 유지한 단 하나의 이유는 왜구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이 왜국에 바란 것은 다른 것도 아니고, 그저 남의 나라 기웃거리며 피해주지 말고 저들끼리 잘 살라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도적질과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가 간덩이가 부어오르면 그간 쌓아온 신뢰관계는 아무 쓸모없는 휴지장이 되고 왜적(倭敵)으로 변하여 조선을 침략하곤 했던 것이다.

 

근래 일본 아베내각이 우리에 대해 강경모드로 일관하는 것을 아베진영의 돌출적 행위로 이해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은 늘 자신들이 해결할 수 없는 내부문제가 발생하면 그 해결책을 바깥에서 찾았고 그 대상은 늘 가까운 우리였다. 임진왜란은 물론이고, 막부정치가 종료되면서 다시 또 남아도는 무사들이 문제가 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일본은 이미 1873년부터 자기들끼리 조선을 침략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었다. 그때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아직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기에 다만 그 실행이 몇 십 년 뒤로 미뤄진 것뿐이었다. 작금의 일본의 대한(對韓) 강경노선 역시 이와 같은 선상에서 이루어진 일이지 결코 아베의 개인적이고 우발적인 행동이 아닌 것이다.

 

왜국은 근대 이전에 정신적으로 한 번도 조선을 넘어서본 적이 없던 나라와 민족이다. 왜국이 조선보다 물질적으로 풍성했던 시기에도 그들은 늘 조선이 자신들보다 문화적으로 앞선 나라라는 암묵적 사고 속에서 살았다. 또한, 조선이 그들을 아래에 놓고 본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뒤 우리의 역사를 왜곡한 것은 그런 왜국의 조선에 대한 오랜 열등감의 반사작용이었다. 왜곡하여 비하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자신들의 우리에 대한 지난 역사가 치욕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에도막부시대에 조선과 대등한 관계를 가질 것을 주장한 인물이 있었다. 1709년, 도쿠가와 이에노부[德川家宣]는 6대 쇼군에 오르게 되자 자신의 유학사부(儒學師傅)였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를 에도성에 데리고 왔다. 하쿠세키는 쇼군과의 개인적 친분을 바탕으로 막부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정치와 경제에 대한 개혁안을 올려, 막부의 정책 입안에 깊게 관여하였는데 그 중에는 조선과의 외교의례에 관한 사안도 있었다.

 

그는 우선 조선과 일본 사이의 국서에 사용되는 쇼군의 칭호를 양국이 모두 ‘일본국왕’으로 통일할 것을 주장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인 1607년, 1617년, 1624년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보낸 국서에는 쇼군을 ‘일본국왕’으로 표기하였었는데, 이는 조선에서 ‘일본국 대군(日本國 大君)’으로 쓴 것을 대마도에서 조작한 것이었다. 또한 일본에서 조선에 보내는 국서에도 '일본국왕 OOO'의 명의로 되어있었지만 이 역시 ‘일본국 OOO'라고 쓴 것을 대마도가 변경한 것이었다. OOO에는 당시의 쇼군 이름이 들어갔다. 이런 대마도의 조작행위가 발견되어, 1636년부터 조선은 쓰던 대로 ‘일본국 대군(大君)’이란 칭호를 썼고 일본도 ‘일본국 OOO'라고 예전 방식을 따랐다. 하쿠세키는 이를 모두 ’일본국왕‘으로 통일하여 ’조선국왕‘으로 표기하는 조선과 대등한 자격으로 국서를 교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조선통신사 빙례개혁(聘禮改革)‘이라 하여 통신사에 대한 향응을 대폭 축소하여 연로(沿路)의 접대를 5개소로 간소화하고 통신사의 쇼군 접견의례를 이전 1회에서 3회로 늘리는 한편 조선왕의 국서 전달을 종전 수역당상(首譯堂上)이 하던 것을 정사(正使)가 하도록 바꾸었다. 이는 통신사의 대우를 격하시키고 막부 쇼군의 권위를 높이려는 목적이었다.

▶수역당상(首譯堂上) : 통신사(通信使)를 수행하던 세 사람의 당상 역관(堂上譯官) 가운데 정3품 이상의 정사(正使)를 수행하는 역관.

 

이러한 하쿠세키의 주장에 당시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양국의 외교를 중재했던 대마도번의 유학자이자 외교관인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의 거센 반발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숙종 37년인 1711년의 통신사행에 실제로 적용되었다. 그러나 하쿠세키가 물러난 1719년부터는 다시 원래대로 환원되었고, 조선이 보내는 국서의 쇼군 호칭도 다시 ‘일본국 대군’으로 바뀌었다.

 

[<국서누선도(國書樓船圖)>, 58.5 x 1524cm . 조선통신사 일행이 오사카의 요도가와[정천(淀川)]에서부터 물이 얕아 일본이 제공하는 누선(樓船)으로 바꾸어 타고 이동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일본 막부 화가가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히 어느 시기의 통신사를 그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선두 부사선.]

 

[<국서누선도(國書樓船圖)> 중 정사가 타고 있는 국서선(國書樓)]

 

[국서선 확대]

 

[<국서누선도> 중 종사관선]

 

중국에서 일본인을 경멸할 때 쓰는 욕으로 샤오르번[小日本]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하찮은 일본’, ‘도량이 좁은 일본’, "어린아이 같은 일본‘이라는 뜻이라 한다. 하지만 중국은 일본에 대한 통찰이 많이 부족한 듯하다.

 

요즘에는 더 신박한 말들이 많지만 예전에는 우리도 일본인을 왜놈이나 쪽바리라고 비하해왔다. 쪽바리 또는 쪽발이는 일본인들이 엄지발가락과 나머지 발가락들을 나누는 일본식 버선인 다비에 게다를 신은 모습을, 두 쪽으로 나누어진 짐승의 발을 가리키는 말인 쪽발에 비유한 것이라 한다. 성경에서 쪽발은 부정한 짐승으로 정의되는 기준이 되기도 하는데, 거기까지 개념이 확대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우리가 왜놈이라고 부를 때는 나라 이름인 왜국의 왜(倭)를 빌려다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난쟁이 왜(矮)’의 의미로 왜놈이라 부른다. 과거나 지금이나 왜인의 신체가 우리에 비해 볼품이 없기는 매한가지지만 우리가 신체를 빌미로 그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부르는 ‘왜놈’의 의미에는 남에게 피해를 주고도 그런 일이 없는 체 하고, 자신이 반성할 일에 남을 탓하고, 입으로 내는 말과 속마음이 달라 진실한 구석이 없고, 강약 약강으로 비열하고, 남을 이간질하면서도 정직한 체하고, 진실을 보면 외면부터 하고, 앞에서는 웃으며 화해하고 뒤돌아 남몰래 칼을 가는 치졸함에다 아시아에 살면서 서구인인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그 정신질환적 사고방식까지를 모두 아우르는 것이다.

 

업무 때문에 일본을 50번 가깝게 다녀오고도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은 다르다는 무지몽매한 생각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자초지종도 모르면서 자국이 한국에 하는 분풀이를 70% 이상 지지하는 왜놈들은 국민이나 정부나 그놈이 그놈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을 끝까지 감추려고만 하는 정권이나 그런 정권을 70년 이상 변함없이 지지해온 놈들이나 그저 모두 같은 왜놈들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