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재앙을 이기기 위하여 왕이 힘써야 할 10가지 - 6

從心所欲 2022. 4. 9. 08:42

9목의 여덟 번째 항목은 <사치불가불금(奢侈不可不禁)>이다.

 

사치(奢侈)를 막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사치가 폐해가 됨이 심합니다. 하늘이 온갖 물건을 낳되 사람이 그것을 취하여 쓰니 사람은 온갖 물건의 주인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이·목·구·비(耳目口鼻)의 욕망이 있는데 그 욕망이 끝이 없고, 물건은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서 나는 것인데 그 나는 것에 한정이 있습니다. 욕망은 끝이 없기에 천하의 물건으로 한 사람을 받들어도 넉넉하지 못하고, 나는 것은 한정이 있기에 한 사람이 천하의 물건을 다 써도 모자랍니다. 하늘이 낸 물건을 다 없애어 하늘이 노하고, 백성의 고혈을 짜서 백성이 원망하여, 원망을 쌓고 노여움을 쌓는데도 알지 못하면, 쟁탈이 일어나서 난망(亂亡)이 뒤따를 것입니다.

근래 왕자(王子)의 집은 극도로 넓고 크게 하려고 힘쓰고 화려하고 사치하게 하는 것을 앞 다투어 숭상하여, 백성의 집을 헐어 치우고 여염에 가로 뻗쳐 지어서 마룻대를 높이고 들보를 겹쳐 궁궐과 비슷하게 하며, 혼인의 예(禮)에 있어서도 수레·의복·집기로 갖추는 것을 무엇이나 다 극진히 화려하게 하는데, 사대부의 집도 따라서 이를 본뜹니다. 큰 집과 사치한 혼례가 재물을 손상하고 분수를 넘는 것이 끝이 없으니, 앞으로 폐단을 바로잡기 어려울 것입니다. 언관(言官)이 늘 토목일의 폐단을 논열(論列)하여 마지않아도 전하께서 막연하게 들으시는 까닭은 반드시 ‘사대부는 초야에서 일어나 고조·증조가 쌓은 업적이 없어도 집을 크게 세우고 혼례를 극진하게 갖추는데, 더구나 당당한 한 나라 임금의 아들, 딸로서 도리어 집을 높이고 혼례를 갖추지 못하겠느냐.’고 생각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그 죄가 본디 사대부에게 있으나, 임금이 스스로 닦는 도리로 말한다면, 위에서 근원을 밝혀 아래에서 본받게 하여야 마땅합니다.
또 일설이 있는데, 사치로 그 아들, 딸을 기르는 것은 그 아들, 딸을 사랑하기 때문이나, 그 사랑하는 방법이 도리어 해치는 방법이 되기에 알맞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검약하면 복을 얻고 사치하면 해를 부르는 것이 하늘의 이치입니다. 지금 보는 것으로 말하자면, 큰 집이 겨우 이루어지자 문득 꺼릴 것이 생겨 여염으로 피하여 가서 살고 주문(朱門)은 비워 잠가 두므로, 겨우 한 세대가 바뀌면 곧 폐가가 되어 자손으로서 보유하는 자가 거의 없으니, 이것은 한정 있는 재물을 써서 보탬 없는 집을 지은 것입니다. 【왕자, 왕녀가 혼인하여 분가하거나 시집갈 때에는 나이가 겨우 열 두세 살인데, 집은 크고 사람은 적으며 방은 넓고 나이는 어려서 두려운 마음을 일으키기 쉬우므로, 모두가 피하여 가서 살고 집은 비운다.】
▶주문(朱門) : 높은 관직에 있는 귀인(貴人)의 집이라는 뜻. 예전에는 고귀한 사람의 집 문에 붉은 칠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예전에 종실(宗室)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성품이 자못 겸허하고 소박하여 화려한 집에 살기를 싫어하여서 초가를 지어 늘 그 안에서 살았는데, 마침내 수(壽)가 아흔에 미치고 자손이 번성하였으니, 이것은 근래의 일 중에서 명백한 증험입니다. 지금의 사치는 본디 온갖 폐단의 근원이고 그 근원은 궁금(宮禁)에 있는데, 나라의 근본이 쇠하고 관가의 창고가 비는 것이 다 여기에서 말미암고 또한 이것이 충분히 원망을 일으켜 재변을 가져올 만하니, 전하께서 살피시기 바랍니다.
▶효령대군(孝寧大君) : 태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이보(李?).

 

9목의 마지막 항목은 <간쟁불가불납(諫諍不可不納)>이다.

 

간쟁(諫諍)을 받아들이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임금은 자기 자신의 눈과 귀만으로는 밝게 보고 들을 수 없으며 반드시 많은 사람이 보고 들은 것을 모은 다음에야 밝게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예전의 거룩한 임금은 그 총명한 생각이 범상한 뭇 사람으로서는 그 한 부분도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의 간언(諫言)을 즐겨 받아들인 까닭은 착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 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스스로 상등 가는 거룩한 자질을 지니고 묻기를 좋아하는 덕을 가지시어 무릇 결점을 논열하는 일이 있으면 받아들여 잘못으로 여기고 스스로 책망하시니 성탕(成湯)이 신하의 간언을 받아들인 것도 이보다 더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는 간언을 따르는 아름다움이 점점 처음만 못하여 받아들이지 않는 빛이 혹 겉으로 나타나고, 진언할 즈음에 너그러이 용납하는 것을 보일 뿐이고 채용하는 실속이 없으며, 재변을 당하며 자신을 책망하는 것도 겉치레만 일삼고 직언을 구하는 분부가 없으시니, 직언을 듣기 싫어하고 허물을 고치는 데에 인색하신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이뿐만 아니라, 대간이 조금 굳게 논집(論執)하는 것이 있어서 위의 뜻에 거슬리면 곧 특명을 내어 문득 다른 벼슬로 옮기시니, 지적하여 말할 만한 자취는 없으나, 물정에 혹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성탕(成湯) : 중국 상(商)나라의 초대 임금.

저번에 직언을 구하신 뒤에 글을 올린 자【기해년(1539년, 중종 34년) 에 한산 군수(韓山郡守) 이약빙(李若氷)이 상소한 것을 가리킨다.】가 우연히 꺼릴 일에 저촉되었으므로 그를 곧 죄주려고 삼성(三省)에 명하여 추국하게까지 하셨고, 혹 가문이 천한 자가 일을 말하면【경자년(1540년, 중종 35년) 에 노인 한석(韓碩)이 상소한 것을 가리킨다.】 조정을 어지럽히려는 자라고 분부하셨으니, 이것은 직언을 구하는 것으로 나라 안에 함정을 만든 것입니다.
각각 품은 생각을 아뢴 데에 마땅하지 않은 말이 있더라도, 임금은 그 가운데서 착한 것만을 가려서 쓸 따름인데, 어찌 망령되게 말한 사람에게 노여움을 가하여야 하겠습니까. 간쟁이란 임금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라, 국가의 복입니다. 말로 죄를 입는다면 누가 천둥 같은 위엄을 무릅쓰고 보탬이 없는 말을 아뢰려 하겠습니까. 저번에 나라의 권세가 간사한 자의 손에 떨어져 위망(危亡)이 조석에 달려 있었는데도 사람들이 감히 한 마디 말씀도 아뢰어 저촉하지 못한 것이 이 때문입니다.
그때에 그 정상을 지적하여 말하는 자가 있었다면, 간흉(奸兇)의 창끝에 다쳤을 뿐더러 역린(逆鱗)의 노여움을 받아, 몸이 가루가 되고 뼈가 부서졌을 것은 결코 의심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감(聖鑑)에서 조금은 뉘우치셔야 할 터인데 병통의 근원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물정이 답답해하고 재변이 생기는 이유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대저 무릇 결점을 아뢰어 간하는 것은 임금의 잘못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성덕(聖德)이 갖추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니, 전하께서 더욱더 살피시기 바랍니다.
▶역린(逆鱗) : 용(龍)의 턱 밑에 거꾸로 난 비늘. 사람이 이것을 건드리면 용이 노하여 사람을 죽인다고 했다. 용은 임금을 상징하므로 임금의 역정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신들이 보건대, 전하께서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셨는데도 다스리는 도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백성을 아끼는 마음을 가지셨는데도 백성의 고통이 없어지지 않고, 하늘을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셨는데도 하늘의 견책이 날마다 내려오며, 넓고 그윽한 곳에 계실 때에는 늘 몸을 편히 두지 못하고 경계하며 덕음(德音)을 낼 때에는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뜻을 많이 나타내시는데도 보탬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 세대를 보면 다스려져서 일이 없다 할지라도 실상은 헤아리지 못할 근심과 구제하기 어려운 걱정이 있어서 어두운 데 숨어 있지도 않고 밝은 데 드러났는데, 대신(大臣)은 예사로 여겨 버려둘 뿐 건의하여 밝히는 것이 없고, 소신(小臣)은 소홀히 여겨 직무를 잘 거행하지 않아, 눈앞의 결함만을 기워 가며 시일을 보냅니다.
신들이 사사로운 근심과 지나친 헤아림으로 밤낮으로 생각하니, 물 한 방울이나 티끌 하나의 만 분의 일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여, 감히 소원하게 말하지도 못하고 감히 격렬하게 말하지도 못하고서, 이른바 열 가지 일로 하나하나 지적하여 말하였는데, 이것은 오늘날 바삐 힘쓸 일이고 전하께서 절실히 경계하실 일입니다. 소신의 죄를 끌어댈 겨를도 없고 대신의 잘못도 거론할 겨를 없이 굳이 성궁(聖躬)에 책망하기를 바라는 까닭은, 참으로 천하의 큰 근본이 성궁에 달려 있고 천하 고금에 통달하는 도리가 성궁으로 말미암는 것이므로 이렇게 하지 않고서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것은 그런 이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한 강(綱)에 마음을 다하고 아홉 목(目)에 도리를 다하여 날로 성학(聖學)을 진취시키시어 지금의 폐단을 바로잡고 하늘의 견책에 응답하소서. 그러면 종사(宗社)가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전교하였다.

"이제 이 상소를 재삼 보건대, 한 강과 아홉 목이 다 도리에 맞으니, 더욱 살펴서 하늘의 견책에 응답하겠다."

 

[엘리자베스 키스 <금강산 마하연>, 다색목판, 38 x 26cm, 1928년, 송영달 소장]

 

이 기사 말미에 사관이 이런 사론을 달았다.

 

사신은 논한다. 기묘년에는 선비가 빈빈(彬彬)히 배출하여 성하게 쓰이게 되었는데, 위에서도 뜻을 돋우어 다스릴 도리를 강구하였다. 이 때문에 진강(進講)할 때에는 서로 논란을 거두지 않아서 혹 해가 저물 때도 있었다. 그 뒤로는 위에서 학문에 힘쓰기는 하였으나 점점 처음만 못하여 때로 싫어하는 빛을 자못 나타내었는데, 간사한 남곤(南衮)과 심정(沈貞)이 뜻을 맞추어 끼어들어, 몰래 홍경주(洪景舟)를 꾀어 중간에서 궁금(宮禁)에 통하게 하여, 사림(士林)을 가리켜 청류(淸流)가 조정의 정사를 어지럽힌다 하여 거의 다 제거하였다. 남곤이 또 진언(進言)하기를 ‘성학이 이미 고명하십니다……’ 하니, 이때부터는 경연(經筵)에서 진강할 때에 글을 두 번만 읽으면 곧 책을 덮고 물러갔다. 위에서는 문난(問難)에 뜻이 없고 아래에서도 위축되어 진언을 하지 못하니, 남곤의 계책이 공교하고 간사하다 하겠다. 그 폐단을 무궁하게 끼친 것도 어찌 까닭 없이 그렇게 되었겠는가. 대저 임금에게 조금이라도 게으른 생각이 있으면, 소인이 그 틈을 타서 끼어 들어가니, 두렵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빈빈(彬彬) : 겉과 속이 모두 조화롭게 갖추어짐.

사신은 논한다. 기묘년에 남곤·심정의 무리가 조광조(趙光祖) 등을 꺼려서 해치려 하였으나 아직 발동하지 못하였는데, 그때 홍경주의 딸이 귀인(貴人)이 되었다.  남곤 등이 홍경주와 결탁하여 귀인을 통해 매일 참소하여 임금을 현혹하게 하고 나서, 남곤 등이 몰래 신무문(神武門)으로 들어가 아뢰어, 사림을 일망타진하였다.
그 뒤에  심정·이항(李沆) 등이 권세를 독차지하여 방자하게 굴다가, 다시  김안로(金安老)와 사이가 나빠지자 김안로를 꺼려 귀양 보냈다.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전에 이미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었는데, 이를 통하여 아뢰었으므로 적소(謫所)에서 소환되어, 드디어 은밀히 임금에게 아뢰도록 시키고 겉으로는 허항(許沆) 등을 시켜 공박하니, 심정 등이 다 패하였다. 김안로가 심정과 이항을 제거하고 나서 흉악하고 방자한 것이 날로 쌓여 갔는데, 정유년(1537년, 중종 32년)에 왕비의 친족인 윤안인(尹安仁)·윤원로(尹元老)가 김안로를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김안로에게 미움을 받았고, 위에서도 김안로가 나쁜 줄 알았으나 누르기 어려웠다. 마침내 윤임(尹任)이 대사헌(大司憲) 양연(梁淵)에게 말하여 논핵(論劾)해서 주벌(誅罰)하였는데 윤임도 외척이다.
▶귀인(貴人) : 후궁(後宮) 에게 내리는 내명부(內命婦)의 종1품 관작(官爵).
▶신무문(神武門) : 경복궁(景福宮)의 북문.
▶공주(公主) : 중종의 큰딸인 효혜공주(孝惠公主).
▶김안로(金安老) : 아들 김희(金禧)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혼인해 중종의 부마(駙馬)가 된 것을 계기로 권력을 남용하다가 유배되었다. 1531년에 유배에서 풀려난 뒤 다시 서용되어 도총관(都摠管), 예조판서 , 대제학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다시 임용된 이후부터 당시 동궁(東宮)이었던 인종의 보호를 구실로 실권을 장악해 정적(政敵)과 뜻에 맞지 않는 자를 축출하는 옥사(獄事)를 여러 차례 일으켰다. 1537년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유배되었다가 곧이어 사사되었다.

 

 

출처 : 《중종실록》 중종 36년(1541년) 4월 2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