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41 - 의대증

從心所欲 2020. 4. 11. 10:56

나경언의 고변은 아무리 생각해도 뜬금없고 난데없는 구석이 많다. 기개를 목숨처럼 여기던 사대부 선비였다면 그나마 이해될 구석이라도 있지만 중인 아니면 상민 정도의 신분인 나경언이 무엇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일에 나섰는지가 의문이다. 조선시대 나경언의 신분은 조정의 일에 관여할 입장도 아닌데다 행위에 따른 실익도 없다. 양반이라면 그나마 나라를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고변을 하다 죽었다는 선비로서의 명예라도 남길 수 있다. 그렇지만 공공의 이익을 위한 양심선언이나 내부고발이 존중받는 지금 시대의 개념이 없던 때에 중인이나 상민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조정의 일에 끼어든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것도 상대는 14년째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 왕세자이다. 그야말로 기름을 지고 불에 뛰어든 격이다. 관료들의 역모를 고변했다가도 일이 잘못되면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목숨을 잃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하물며 왕세자를 고변한다는 것은 죽기로 작정하지 않고서는 나설 수 없는 일이다. 나경언은 밤새워 국문을 받고 다음날 바로 부대시처참을 당했다. 나경언의 이런 무모한 행동을 배후에 대한 의심없이 단지 개인의 돌발적인 행위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일까?

 

나경언의 공초 결과 고변이 무함(誣陷)이라는 결론이 났음에도 그로부터 20여일 뒤 사도세자도 죽임을 당했다. 만일 누군가가 사도세자를 처치하기 위하여 이 일을 꾸몄다면 그 목적은 훌륭하게 달성된 것이다. 영조도 나경언의 고변에 나타난 사도세자의 비행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그럼에도 영조는 분노하여 사도세자를 죽였다. 이 대목에서 영조가 무엇에 격발되어 사도세자를 죽였는가 하는 것은 후세의 궁금증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어쨌든 누군가의 의도대로 영조의 결심에 의하여 사도세자가 죽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사도세자가 죽음으로써 이익을 얻는 세력이다. 그 이익은 당연히 정치적인 것이다. 정치적 이익을 위한 싸움이 당쟁이며 그것은 배후 세력이 노론이든 아니든 간에 당쟁이다.

 

과연 나경언의 고변이 사도세자를 죽이는 직접적인 계기였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훈고기>에도 영조가 이전에 사도세자를 칼로 베려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영조가 전부터 사도세자를 죽일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사실 영조는 감정기복이 대단히 심한 임금이었다. 그래서 사도세자에 대한 감정도 그 기복이 심했다. 어느 때는 사랑했고 어느 때는 미워했다. 사도세자에 대해 좋지 않은 소식을 들으면 불같이 화를 내곤 했는데 사도세자를 칼로 치려했던 것도 그런 연장선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나경언의 고변이 있기 전에 이미 영조에게 사도세자를 죽이려는 마음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나경언의 고변이 일어난 영조 38년 5월의《영조실록》에는 당시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기사가 몇 개 있다.

 

(5월 1일)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거둥하여 진전(眞殿)에 전배하고, 세자를 거느리고 휘령전(徽寧殿)에 예를 행하였다.] 

 

(5월 10일)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지난번 춘방(春坊)의 단오첩(端午帖)을 보건대, ‘수서(手書)를 직려(直廬)에 내렸다.’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원량(元良)에게 어떤 수서가 있었는가?" 하니,

옥당 이미(李瀰)가 대답하기를,

"어제 춘방의 요속(僚屬)을 보았는데, 소조(小朝)에서 수서로써 궁관(宮官)에게 문대(問對)한 바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원량의 수서 및 궁관이 대답한 바를 가져와 아뢰라고 명하였다.

세자가 임금이 탈을 잡아 책망할까 두려워하여 궁관으로 하여금 고쳐 쓰느라 지체되었다. 임금이 오래도록 오지 않은 것에 노하여 춘방의 여러 강관(講官)을 파직하였는데, 얼마 후 수서와 문답이 이르렀다. 임금이 승지 박사눌(朴師訥)에게 《주서(朱書)》 복선 화음(福善禍淫)의 문대(問對) 조(條)를 읽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질문이 좋다."

하고, 또 《주역(周易)》 쾌괘(夬卦)의 문답 조를 읽게 하였는데, 박사눌 등이 아뢰기를,

"세자의 물음이 아주 훌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까 지체한 것을 내가 알고 있다. 원량이 평소 겁이 많아서 내가 탈을 잡을 것을 두려워하여 정서(正書)해서 가져 온 것이다." 하였다.

이미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매양 꺾어 누르심이 너무 지나치시고 돈면(敦勉)하심이 부족하시니, 청컨대 온화하게 유시를 내려 예학(睿學)을 흥발(興發)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에 춘방을 파직하라는 명을 중지하였다.] 

▶조강(朝講) : 아침에 강연관(講筵官)이 왕에게 경서를 강론하는 일

▶춘방(春坊) :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별칭

▶수서(手書) : 손수 쓴 편지(便紙)라는 뜻으로,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에게 보내는 편지(便紙)를 일컫는 말.

▶직려(直廬) : 직을 서는 건물

▶원량(元良), 소조(小朝) : 세자(世子)와 세자 처소를 가리킴

▶문대(問對) : 유교(儒敎) 경서(經書)의 뜻을 묻는 것과 거기에 대(對)한 대답(對答)

▶강관(講官) : 임금이나 세자가 경연(經筵)이나 서연(書筵)을 할 때 경서 등을 강론하는 문관(文官)

▶돈면(敦勉) : 임금이 교지(敎旨)를 내려 사람들을 타일러 위로하고 독려하는 일

 

[영조 어진(御眞). 1744년에 그려 선원전(璿源殿)에 모셨던 어진을 1900년에 채용신(蔡龍臣 )과 조석진(趙錫晉)이 모사하였다. 족자, 견본채색. 110.5 x 61.8cm, 보물 제932호. 국립고궁박물관]

 

영조는 늘 사도세자가 학문에 열심을 기울이는지 감시와 점검을 했는데 위 5월 10일 기사도 영조의 그런 일상을 보여주고 있다. 세자가 공부한 내용을 빨리 안 가져 온다고 세자시강원의 강관들을 파직시켰다가 이내 취소하는 모습에서 영조의 불같은 성격을 볼 수 있다. 또한 평소에 세자를 얼마나 엄하게 대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도 보인다. 하지만 어디에도 영조가 세조를 죽일 생각까지 갖고 있다는 조짐은 없다. 영조가 이때까지도 세자의 학문을 염려하는 것은 세자가 나중에 훌륭한 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다. 따라서 적어도 나경언의 고변이 있기까지는 영조에게 사도세자를 죽일 마음은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사도세자도 자신의 목숨에 대한 염려없이 그 때까지 14년 동안 해온 청정의 임무를 담당하여 평소처럼 국사를 돌보고 있었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는 기사가 5월 3일, 8일, 13일에 나오고 15일에는 ‘왕세자가 시민당에 좌정하여 상참(常參)하였다’는 기사도 나온다. 

▶상참(常參) : 아침에 국왕을 배알하던 약식(略式)의 조회(朝會). 여기서는 신하들이 청정하는 세자를 알현하는 의식.

 

그런데 5월 20일에 갑자기 이런 기사가 나온다.

[왕세자가 시민당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비국 당상 이정보(李鼎輔)가 말하기를,

"《주역》에 이르기를, ‘망할까 망할까 하여 무더기로 난 뽕나무에 매듯 한다.’고 하였으니, 저하께서는 유념하시어 이로써 경계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마땅히 명심하여 경계하겠다." 하였다.]

▶비국 당상[備堂] : 비변사의 당상관

 

이정보의 말은 ‘언제나 비운(否運)이 이르지 않도록 철저한 대비를 하라’는 의미로, 고변이 일어나기 이틀 전에 한 이 말이 그냥 일상적인 발언인지 아니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의미심장한 말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이틀 후인 22일에 나경언의 고변이 일어났다. 이 소식을 한 밤중에 홍봉한으로부터 전해들은 세자는 크게 놀라 홍화문(弘化門)에 나아가 엎드려 대죄(待罪)하였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세자는 자신이 장차 죽게 될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세자는 그렇게 이십여 일을 대죄하였지만 결국 영조의 분노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의 《영조실록》기사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세자가 곡하면서 땅에 엎드려 영조에게 애걸하며 개과천선(改過遷善)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영빈(暎嬪)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는데, 영빈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誕生母) 이씨(李氏)로서 임금에게 밀고(密告)한 자였다.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서 국본(國本)을 흔들려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영빈 이씨는 사도세자를 낳은 생모다. 그 생모가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 불리한 말을 하여 영조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지만, 태어난 날 바로 정성왕후의 아들로 입적하여 그녀를 친모처럼 섬기고 살았으니 사도세자와 생모 사이에는 별 다른 정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영빈 이씨도 품안에 넣어 키운 자식이 아니니 사도세자에 대해 애틋한 정도 없으려니와 정성왕후와 사도세자의 관계를 보면서 오히려 섭섭한 점이 더 많았을 수도 있다. 그렇기로서니 이 판국에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 불리한 말을 왕에게 전했다는 것은 역시 그 배경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역심설의 주장대로 만일 영조가 사도세자의 역모나 역심 때문에 사도세자를 죽였다면 당연히 동조한 일당에 대한 처벌도 뒤따랐어야 마땅할 것이다. 사도세자를 가둔 다음날 환관 박필수와 여승(女僧) 가선이 죽었고 며칠 뒤에는 13일 세자를 폐할 때 휘령전 마당에 따라 들어왔던 세자시강원과 익위사(翊衛司) 관원을 모두 파직시켰다. 그리고 소론 영수 조재호가 과거에 세자를 비호하는 말을 했던 것이 문제되어 변방에 안치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이것이 전부다.

영조는 세자의 역심에 관해서는 입도 뻥긋한 일이 없다. 사도세자가 칼을 들고 창경궁 수구를 통해 나갔다가 돌아왔다거나 궁궐 뒤쪽에 굴을 파고 그 안에 무기를 숨겨두었다는 <한중록>의 기록에 의지하여 너무 많은 상상력이 동원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 대목에서 드는 또 하나의 의문은 '영조는 왜 사도세자를 9일간이나 뒤주에 넣어 죽이는 잔혹한 방법을 썼을까?' 하는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사약을 먹여 죽이는 방법은 역모죄와 같은 중죄인에게 내리는 벌로, 그럴 경우 본인뿐만 아니라 그 후손에까지 역적의 자손이라는 불명예가 따라 붙게 된다는 것이다. 영조는 세손인 정조에게 그런 멍에를 씌우고 싶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현고기>에 영조가 사도세자를 칼로 죽이려했다는 기록도 있고, 임오화변 때도 영조는 먼저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했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나경언을 국문하던 날, 사도세자가 나경언과 대질을 원했다가 야단을 맞고 자신의 화증으로 인해 실언을 했다고 곧바로 뉘우치자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차라리 발광(發狂)을 하는 것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어쩌면 이 말은 발광을 하면 그것을 빌미로 사도세자를 죽일 수 있는 명분을 찾겠다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사도세자는 언제부터 왜 광증을 갖게 되었을까?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날의《영조실록》기사에 사관은 이렇게 기록했다.

 

[처음에 효장 세자(孝章世子)가 이미 훙(薨)하였는데, 임금에게는 오랫동안 후사(後嗣)가 없다가, 세자가 탄생하기에 미쳤다. 천자(天資)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정축년, 무인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임금이 경희궁(慶熙宮)으로 이어하자 두 궁(宮) 사이에 서로 막히게 되고, 또 환관(宦官)·기녀(妓女)와 함께 절도 없이 유희하면서 하루 세 차례의 문안(問安)을 모두 폐하였으니,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후사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양 종국(宗國)을 위해 근심하였다.](영조 38년 윤5월 13일)

▶효장세자(孝章世子) : 정빈(靖嬪) 이씨(李氏)에게서 난 영조의 첫 아들. 숙종 45년인 1719년 태어났고 10살 때인 1728년에 죽었다.

▶훙(薨) : 훙서(薨逝)하다. 죽다.

▶천자(天資) : 천품(天稟), 타고난 자질

▶대리(代理) : 대리청정

▶정축년 : 1757년(영조 33년), 정성왕후가 사망한 해

▶무인년 : 1758년(영조 34년)

▶종국(宗國) : 원래는 예속(隸屬)된 나라가 종주(宗主)로 받드는 나라를 뜻하나 여기서는 조선을 뜻함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것은 15살 때부터다. 그때부터 질병이 생겼다고 했다. 사도세자의 병은 의대증(衣帶症)으로 알려져 있다. 의대증은 옷 입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강박증이라고 하는데 세자는 옷을 입는 도중에 종종 광증을 보였다. 그렇다고 세자가 옷을 벗고 지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옷을 갈아입을 때 증세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세자는 옷을 갈아입는 것을 싫어하여 계속 입은 옷에서 냄새가 심했다는 기록도 있다. 거기다 분노조절장애 증상도 있었다. 그래서 발작하면 옷시중을 들던 사람들을 죽였다.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린 뒤에는 위 기사에도 나오듯 자신이 한 일을 후회했다. 그러니까 늘 광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옷을 입들 때만 나타나는 증세였던 것이다. 평소에도 발작이 있었다면 청정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증세가 심해진 것은 정성왕후 사망 즈음이라 했고 그때 사도세자는 23살이었다.

 

영조는 천한 신분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는 자격지심 때문에 더 좋은 임금이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다. 왕이 되어서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자신의 생활을 검소하게 유지했으며 백성을 사랑했다. 자신을 배척했던 소론을 품으려했던 탕평책도 좋은 임금으로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리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영조는 자신의 자식도 그런 왕이 되기를 원했다.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 더 훌륭한 왕이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래서 세자를 어렸을 때부터 엄하게 키웠고 특히 세자의 학습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과정은 자식 좋은 대학 보내려는 지금 부모들의 행태와 다름이 없었다. 감시하고 잔소리하고 야단치고 사사건건 간섭했다. 사도세자가 죽던 해 사도세자는 28살이었다. 그런데 위의 5월 10일 기사에서 보듯 영조는 그때까지도 세자가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했다. 그러면서도 같은 기사에 홍문관 관리가 영조가 사도세자를 대함에 있어 “매양 꺾어 누르심이 너무 지나치시고 돈면(敦勉)하심이 부족하시니”라고 지적했듯이 칭찬에는 인색했다.

 

거기다 영조의 성격은 불같았다. 화를 내면 언성이 높아져서 《영조실록》에는 왕이 언성을 높였다는 구절이 곳곳에 수도 없이 나온다. 신하들의 지적에 반성도 했지만 그 버릇은 평생 고쳐지지 않았다. 영조가 70을 넘긴 영조 40년에도 대사헌이 영조에게 “더구나 우리 전하께서는 보령이 8순을 바라다보는 때를 당하였으므로 서둘러 심신을 보양하고 정력을 아끼셔야 하는데 갑자기 일시의 번뇌로 인하여 지나치게 언성과 기색을 돋우시니, 그윽이 몸을 보존하고 정력을 아끼는 방법에 해가 되리라고 여겨집니다.”라는 상소를 올렸다는 기사가 있을 정도였다.

반면 신하들 앞에서 영조처럼 많은 눈물을 보인 왕도 없었다. 한마디로 영조는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로 가까운 신하들조차 대하기가 어려운 왕이었다. 영조는 국사가 뜻대로 안 되면 방문을 닫고 신하들을 안 만나거나 병이 들어도 의원을 들이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때로는 밥을 거르고 왕위에서 물러나겠다는 선언을 했다. 그때마다 세자는 영문도 모른 채 달려가 엎드려 대죄해야만 했다. 세자는 죽을 때까지 그 짓을 한 것이다. 사도세자는 열다섯 살부터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다. 말이 청정이지 근심걱정 많은 영조는 시시때때로의 잔소리도 모자라 왜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고 처리했느냐고 했다가 또 때로는 왜 혼자 처리하지 못하느냐 면박을 주었다. 거기다 신하들이 세자의 잘못을 흘리듯이 영조에게 알리면 또 질책이 떨어졌다. 신하들 앞에서 세자를 질책하는 일도 종종 있었으니 세자의 심정은 어땠을까? 영조로부터 세자가 느꼈던 위압감과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였을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평생을 겪은 이런 스트레스 속에서 오히려 미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자가 영조나 대신들을 만나는 일이 즐거웠을까?

 

이런 뇌피셜도 가능할 것이다. 세자는 어느 때부턴가 영조나 대신들을 만나는 일에 두려움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만나러 갈 채비를 하느라 옷을 갈아입으면서 두려움에 예민해졌다. 옷을 다 입으면 나가야 하니까 트집을 잡으면서 시간을 끌기 시작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다 갈수록 두려움이 커지면서 그 예민함이 광기로 변하여 발작하게 되었다. 부모들이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수많은 스트레스에 우울증을 비롯한 각종 정신질환에 고통 받는 요즈음의 청소년들을 보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왜 예전엔들 없었겠는가!

 

영조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아들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기대. 그에서 비롯된 사도세자의 광기. 그 두 가지를 교묘히 이용하여 사도세자를 축출한 정치 세력. 사도세자의 죽음을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을 듯싶다.

사실 이런 논쟁은 아무리 해도 끝이 없고 답도 나오지 않는다. 서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다고 해서 문제될 것도 없다. 특히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라면 굳이 어떤 주장에 경도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이런 여러 가지 주장에 마음을 열어 두는 편이 각 주장의 타당성과 허구성을 분별하는 객관적 안목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융릉, 중앙일보사진]

 

참고 :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