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37 - 과유불급

從心所欲 2020. 3. 26. 15:43

조성복의 세제 청정 요구를 받아들였다가 취소한 경종은 이틀 뒤 다시 시임(時任), 원임(原任) 대신들을 불러 모으고는 "나의 병근(病根)이 날로 점점 더하여 나을 기약이 없으니, 일찍 저사(儲嗣)를 정한 것은 실로 대리(代理)를 행하게 하려고 한 것이었으며, 이를 자성(慈聖)께 품(稟)한 지 오래 되었으나, 책례(冊禮)를 이제 막 거쳤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제 여러 신하들이 나의 본의를 알지 못하고 대간의 상소로 인하여 나온 것처럼 여겨서 쟁론(爭論)이 분분하기 때문에 우선 환수하여 나의 뜻을 보이고, 조성복(趙聖復)의 망령되고 경솔한 죄를 다스린 것이다. 공사(公事)는 적체되고 수응(酬應)이 절박하니, 일체 그저께의 비망기에 의해 거행하여 조섭(調攝)하는 방도를 온전하게 하라."는 비망기를 내렸다. 뜻밖의 조치에 세제 청정을 추진했던 노론 세력조차 그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워 일단은 반대를 하고 나섰다. 며칠간 대신들이 나서서 왕에게 명을 거둘 것을 청했지만 경종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런 상황에 정작 곤경에 처한 것은 연잉군이었다. 세제 건저로부터 시작해서 청정에 이르기까지, 가만있는 자신을 자꾸 주변에서 들먹여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는 일이 계속 벌어지는 상황에, 잘못되어 경종의 노여움이라도 사게 되는 날에는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연잉군으로서는 좌불안석과 두려움의 나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연잉군은 자신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상소를 올려 자신에 대한 명을 거두어달라는 상소를 반복해서 올리고 왕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였다. 하지만 경종도 노론이 연잉군을 내세워 자신을 압박하는 행위가 연잉군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연잉군에 대한 사사로운 미움이나 시기는 없었다. 오히려 경종이 이복동생인 연잉군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들도 있다.

 

경종이 다시 마음을 바꿔 세제 청정을 하교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워낙 병치레를 많이 했던 경종이 만사가 귀찮아져서 진심으로 연잉군에게 정사를 맡기고 싶어 했던 것인지, 아니면 신하들의 속마음을 떠보려고 했던 것인지는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경종이 계속 청정 하교를 철회하지 않자 노론의 영의정 김창집과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좌의정 이건명 등이 모여 의논한 뒤 ‘세제에게 정사를 전부 맡기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니 정유년의 절목에 의하여 품지(稟旨)해 거행하도록’ 하라는 차자(箚子)를 올렸다.

▶ 품지(稟旨) : 품(稟)은 임금에게 보고하여 아뢴다는 의미이고 지(旨)는 임금의 뜻이나 결재란 뜻으로, 특정 사안을 보고하여 임금의 결재를 받는 것.

▶ 차자(箚子) : 관료가 국왕에게 올리는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

 

정유년 절목이란 1717년 경종이 세자로서 청정할 때 용인(用人), 형인(刑人), 용병(用兵)의 세 가지를 제외한 업무를 맡았던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전부는 말고 일부만 맡기자는 이야기였다. 노론의 입장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세제가 정무에 참여하면 그것만으로도 세제의 위치가 그만큼 굳건해지는 것이니 자신들의 목적은 달성되는 셈이었다. 대신들은 차자를 올린 뒤 사흘간 계속한 정청(庭請)을 그치고 물러났다. 노론 대신들은 이로써 자신들의 최종의사를 왕에게 전달했으니 이제 최종결정은 왕의 몫이라고 통보한 셈이다. 아마도 경종이 자신들의 차자를 받아들일 것으로 예상했을 것이다.

이에 소론의 좌참찬 최석항이 세제 대리청정의 명을 거둘 것을 상소하고 이어 우의정 조태구(趙泰耉)도 병든 몸을 이끌고 시약방(司藥房)에 머물면서 왕을 만나기를 청했다. 하지만 승정원의 노론 승지들은 탄핵 중인 신하는 왕을 만나거나 상소를 올릴 수 없다는 원칙을 내세워 왕에게 알리지도 않고 조태구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승정원과 조태구 사이에 서로 사람을 보내어 옥신각신 하는 사이, 퇴궐했던 노론 신하들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대궐로 달려왔다. 그런데 그 사이에 왕이 환관을 보내어 조태구를 만나겠다는 뜻을 전하여 조태구는 경종을 만나고 있었다. 조태구는 노론 대신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신이 살아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만일 반한(反汗)의 명을 얻지 못하면 죽음이 있을 뿐이며, 청을 허락받지 못하면 감히 물러가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노론의 입장이 묘해졌다. 거기다 행사직(行司直) 이광좌(李光佐), 지평 유복명(柳復明) 등이 거들며 더욱 힘써 간하자, 급기야 김창집도 ”반드시 도로 거두시게 하려는 뜻이 신 또한 어찌 여러 신하와 다르겠습니까? 이제 만약 전의 명을 도로 거두신다면, 신이 비록 만 번 죽을지라도 어찌 감히 마다하겠습니까?"고 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이어 다른 신하들도 같은 말을 올리자 경종이 마침내 명을 거두었다. 결국 노론은 경종에게 민낯만 드러내고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정청(庭請) : 국가에 중대사가 있을 때 세자(世子) 또는 의정(議政)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궁정(宮庭)에 이르러서 계(啓)를 올리고 전교(傳敎)를 기다림

▶시약방(司藥房) : 궁궐 내 각 문의 자물쇠와 열쇠를 관리하는 일을 맡아 보던 곳

▶반한(反汗) : 내린 명령을 취소하는 것

 

[김창집 초상, 숙종 45년인 1719년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한 행사에 참석한 관료들이 계(契)를 하고 궁중화원에게 의뢰해 만든 서화첩인 '기사계첩'에 수록. 김창집은 겸재 정선을 관직생활을 시작하도록 도와주었다. 정선은 그의 동생 김창흡의 문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노론이 서둘러 세제를 대리청정 시키려던 계획은 단순히 체면을 잃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저들도 이때까지는 자신들이 서두른 결과가 몰고 올 후폭풍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흔히 ‘다병무자(多病無子)’로 대표될 만금 경종은 늘 병에 시달렸고 그때까지도 후사의 기미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노론이 연잉군이 세제로 책봉된 것만으로 만족하여 조용히 때를 기다리기만 했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저들은 연잉군에 대한 숙종의 밀지를 받은 부담 때문인지 서둘렀고 그것이 결국은 화가 되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었다.

경종의 태도 변화에 힘을 얻은 소론은 드디어 본격적으로 노론을 공격하고 나섰다. 세제 대리청정의 일이 있고 한 달반쯤 후인 경종1년 12월 김일경을 필두로 한 사직(司直) 7명이 상소를 올려 조성복과 노론의 대신들을 탄핵하고 나섰다. 상소문에서 이들은 세제 대리청정의 절목을 올렸던 김창집, 이이명, 조태제, 이건명의 4대신을 ‘사흉(四凶)’이라고 지적했다. "강(綱)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군위 신강(君爲臣綱)이 세 가지 중에서 으뜸이 되고, 윤(倫)에 다섯 가지가 있는데 군신유의(君臣有義)가 다섯 가지에서 첫머리가 되니, 이것은 천상(天常)이고 민이(民彝)입니다.“라고 하면서 조성복과 사흉이 왕에 대한 불충(不忠)을 반성하지 않고 있으니 저들을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또한 우의정 조태구가 세제 청정 문제로 왕을 만나려 했을 때 이를 가로막은 승지와 조태구를 탄핵한 삼사(三司)를 처벌할 것도 요구하였다. 승지들이 이 상소를 비난하며 상소를 올린 자들을 처벌할 것을 간하자, 경종은 ‘나의 천심(淺深)을 엿본다.’며 꾸짖고는 이어 여러 승지를 파직하고, 삼사의 여러 신하를 일체 모두 삭출(削黜)하라는 명을 내렸다. 나아가 노론 대신들을 대거 축출하고 소론의 인물들을 등용하였다. 또한 상소의 소두(疏頭)였던 김일경은 이조참판에 임명했다. 이를 계기로 소론이 일거에 정국을 장악하는 형세로 전환되었는데 이것이 1721년의 신축환국(辛丑換局)이다.

▶사직(司直) : 5위(五衛)에 속하는 정5품의 무관직(武官職)

▶천상(天常) : 하늘이 정한 인간의 도리. 곧 군신, 상하, 존비 따위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질서

▶민이(民彝) : 사람으로서 늘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道理)

▶천심(淺深) : 얕음과 깊음

▶소두(疏頭) : 연명(連名)으로 상소를 올릴 때 제일 먼저 이름을 적는 우두머리

 

이로써 경종의 뜻은 명확해졌다. 그것을 안 소론이 노론 대신들의 파직만으로 만족할 리가 없었다. 신축환국이 일어나고 석 달 후인 1722년 3월, 목호룡(睦虎龍)이란 자가 ‘역적으로서 성상(聖上)을 시해(弑害)하려는 자가 있다’며 고변을 해왔다. 숙종의 죽음 전후에 경종을 죽이려는 음모가, 그것도 세 가지나 되는 방법으로 모색했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혹은 칼로써 한다.’는 것은 김용택이 보검(寶劒)을 백망에게 주어 선왕의 국애(國哀) 때 담장을 넘어서 궁궐로 들어가 대급수(大急手)를 행하려고 하는 것이고, ‘혹 약(藥)으로써 한다.’는 것은 이기지·정인중·이희지·김용택·이천기·홍의인·홍철인(洪哲人)이 은(銀)을 지상궁(池尙宮)에게 주고, 그로 하여금 약(藥)을 타게 하여 흉악한 일을 행하는 것이니, 이것은 경자년에 반 년 동안 경영한 일이었습니다. 이른바 소급수(小急手)란 폐출(廢黜)를 모의하는 것으로서 이희지가 언문(諺文)으로 가사(歌詞)를 지어 궁중(宮中)에 유입(流入)시키려 하였는데, 모두 성궁(聖躬)을 무고하고 헐뜯는 말이었습니다.”](경종 2년 3월 27일 2번째 기사)

▶국애(國哀) : 백성 전체가 상복을 입는 왕실(王室)의 초상(初喪)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숙종의 초상을 말함.

▶경자년 : 경종 즉위년인 1720년

▶성궁(聖躬) : 성상(聖上). 임금의 몸을 높여 부르는 말

 

그런데 이 고변에 거론된 인물들은 모두 노론 명문가의 자제들이었다. 고변 내용이 충격적일만큼 중대한 사안이었기에 관련자들에 대한 국문은 무려 8개월이나 지속되었다. 그 결과 소론이 ‘사흉’이라고 지목했던 4명의 노론 대신들을 포함하여 20여명이 사사되었고, 국문 중에 매 맞아 죽은 인원이 30여명, 가족이라는 이유로 잡혀와 교살(絞殺)된 인원이 13명,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 유배 114명에다 그 외에 연좌된 인물만도 173명이나 되었다. 이를 신임옥사(辛壬獄事)라 하는데 1771년 신축년과 1772년 임인년, 2년에 걸친 옥사라 하여 각 해의 앞 자를 따 신임옥사라고 부른다. 노론은 자신들이 화를 입었다하여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불렀다.

목호룡의 고변은 당대에 이미 조작 의혹이 짙었는데, 앞서 조성복과 노론 4대신을 고변하였던 김일경이 그 배후로 지목되었다. 목호룡의 고변 중에는 연잉군과 관련된 부분도 있었는데 옥사(獄事)를 조사하던 여러 신하들이 고변서 가운데 동궁에 관련된 내용을 삭제하고 조사하지 말 것을 경종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은 덕분에 연잉군은 화를 입지 않았다. 역모에 관련된 경우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로 경종이 연잉군을 아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종실록》은 영조 때에 편찬되었음에도 노론 사관이 아닌 소론의 시각으로 작성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노론이 다시 자신들의 관점에서 《경종수종실록》을 편찬하고 앞서 편찬된 《경종실록》을 없애려 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이를 막아 현재까지 두 실록이 모두 전해지고 있다.]

 

[경종수정실록]

 

 

참고 : 조선왕조실록,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1997, 석필),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