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35 - 청정(聽政)

從心所欲 2020. 3. 17. 16:04

[18세기 정선 그림 속의 사직단(社稷壇)]

 

[현재의 사직단, 서울특별시 사진]

 

장희빈의 죽음이 서인에게 꼭 반가운 일만은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숙종으로부터 시한폭탄을 건네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세자가 왕위에 오른 후 연산군 때 폐비 윤씨로 인해 일어났던 사화와 같은 대참사가 다시 재현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정치 경험이 많고 노회한 인물이 많은 노론에서는 세자가 왕이 되는 것을 바랄 리가 없었다. 장희빈이 죽은 해인 1701년 숙종은 41세, 장희빈이 낳은 세자는 14세, 숙원 최씨가 낳은 연잉군은 8세, 후궁 명빈 박씨가 낳은 연령군은 3세였다. 어쩌면 노론은 이때 이미 암묵적으로 숙원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을 세자의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장 세자의 즉위를 염려하여 움직일 상황은 아니었다. 1702년에 두 번째 계비의 자리에 오른 인원왕후(仁元王后)가 왕자를 생산한다면 그 또한 새로운 변수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세자 이윤(李昀)은 어머니 희빈 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았던 어린 시절에는 총명함으로 칭송을 받았고 숙종도 하나 뿐인 왕자라 극진히 배려했다. 하지만 장희빈이 폐출되고 사사되면서 점차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모했다고 하는데 어린 나이에 겪은 온갖 수난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다. 거기다 다른 왕자들이 생기면서 숙종으로부터도 견제와 미움을 받아 심한 우울증까지 앓았다는 말도 있다. 숙종은 때로 세자에게 “누구의 자식인데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라고 했다고도 한다. 또한 세자에게는 후사가 없었는데 이도 숙종이 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긴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태종과 세조 이래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던 숙종 치하라, 표면적으로는 세자 문제에 대한 별 잡음 없이 세월이 흘렀다.

 

숙종 43년인 1717년 7월 19일 숙종은 세자에게 청정(聽政)하게 한다는 하교를 내린다. 5년 동안 시달려온 안질 때문에 정무를 보기 어려워 세자에게 이를 넘기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숙종의 나이 57세에다 병을 얻었고 세자의 나이도 서른이 되었으니 이는 원만한 왕위계승을 위해서라도 바람직한 일로,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며칠 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윤지완(尹趾完)이 시골에서 도성(都城)으로 올라와 상소(上疏)를 올렸다. 그 시작은 이렇다.

 

[신(臣)이 병상(病狀)에 누워 숨이 장차 끊어지려는 가운데 삼가 듣건대, 성상(聖上)께서 연석(筵席)에서 이러저러한 분부를 춘궁(春宮)에 언급하셨는데 온 조정(朝廷)이 두려워 떨고 있으며 여러 사람의 마음이 소란하여 평온하지 못하다고 하니, 이것이 진실로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이것이 진실로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숙종 43년 7월 28일 기사)

 

‘이것이 진실로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의 원문은 ‘是誠何事?’이다. 왕에게 올리는 상소문에 이를 두 번이나 반복할 정도로 윤지완은 숙종이 내린 처사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일설에는 이때 여든 둘의 윤지완은 상소를 들어주지 않으려면 죽여 달라는 의미에서 널을 짊어지고 올라왔을 정도로 비분강개한 상태였다. 그런데 윤지완이 지적한 부당한 처사는 세자에게 청정을 하라는 명(命)을 내린 것이었다. 윤지완은 또한 이러한 왕의 명령을 당연히 말렸어야할 대신들이 그러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논박했다.

 

[계속해서 청정(聽政)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오늘날 세자의 심정과 처지는 생각건대 반드시 떨리고 송구스러워 편안하지 못하여 갑자기 명령을 받들기가 곤란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殿下)의 자애스런 마음으로써 말하더라도 어찌 간곡히 개도(開導)하여 위로하는 도리에 불만족스러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노신(老臣)의 천박한 소견에는, 우선 억지로 하기 어려운 명을 천천히 하도록 하고 세자로 하여금 항상 측근에 모시게 하여 문안하고 시탕(侍湯)하는 여가에 정사(政事)에 참여하게 한 다음 큰일은 품정(稟定)하게 하고 작은 일은 재결(裁決)하게 하신다면 성궁(聖躬)께서 수응(酬應)하는 번거로움을 덜게 되고 국사가 지체되는 걱정이 없게 될 것이니, 그 위안(慰安)하는 방도와 훈도(訓導)하는 의리가 둘 다 마땅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청정(聽政)하는 일에 이르러는 천천히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삼가 가슴속에 개연(慨然)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날 등대(登對)했던 대신은 진실로 이치에 의거하여 간쟁(諫爭)함으로써 기어이 명령을 환수하게 했어야 하는데도 계획은 이에서 나오지 않고 도리어 참여하여 결단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니, 신은 삼가 애석하게 여깁니다.] (숙종 43년 7월 28일 기사)

▶ 춘궁(春宮) : 동궁. 세자. 

▶ 시탕(侍湯) : 부모의 병환에 약시중하는 일 

▶ 성궁(聖躬) : 임금의 몸을 높여 부르는 말. 성체(聖體)라고도 함 

▶ 품정(稟定) : 임금이나 윗사람에게 아뢰어서 의논하여 결정함

▶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 조선시대 중추부에 두었던 정1품 관직. 중추부는 특정한 관장사항 없이 문무의 당상관으로서 소임이 없는 자들을 소속시켜 원로대신을 대우하던 기관이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윤지완의 이 상소는 뜬금없는 주장처럼 들린다.

원래 청정은 갓 등극한 왕의 나이가 어려 정사를 돌보기 어렵거나 왕이 노쇠하고 병이 들어 정사를 돌보기가 힘들 때 행해지는 것이 상례다. 재위 중인 왕이 청정을 한다는 것은 왕위 계승까지도 고려하는 상황이기에 절대 신하가 먼저 입 밖에 낼 수 없는 사안이다. 항상 왕이 먼저 거론하고 신하들은 이를 막는 모양새를 취하는 것이 정상적인 상황이다. 그런데 청정 하교를 내리기 전 숙종은 행판중추부사 이유(李濡),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이명(李頤命)를 접견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숙종은 오히려 청정을 망설이고 신하들은 적극적으로 숙종에게 청정을 건의했다. 이는 신하들이 정사를 세자에게 맡기고 왕 자신은 뒷전으로 물러나라는 이야기이니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윤지완의 상소에 대신들이 숙종에게 결단할 것을 청했다고 한 것은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일까? 그 단서는 이어지는 윤지완의 상소에서 엿볼 수 있다.

 

[원임대신(原任大臣)이 명초(命招)를 어긴 것은 진실로 사기(事機)와 경중(輕重)을 알아야 한다는 원칙에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독대(獨對)한 일에 이르러서는 상하(上下)가 서로 잘못했다는 것을 면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어떻게 상국(相國)을 사인(私人)으로 삼을 수가 있으며 대신(大臣)도 또한 어떻게 여러 사람들이 바라보는 정승의 지위를 임금의 사신(私臣)으로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숙종 43년 7월 28일 기사)

▶ 명초(命招) : 임금이 명패(命牌)로 신하를 부르는 것.

▶ 상국(相國) : 정승

 

윤지완은 임금이 대신을 독대한 것에 대하여 왕과 신하가 모두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숙종은 이 모든 일이 있기 전인 그 날 낮에 승지와 사관도 없이 좌의정 이이명을 독대했다. 왕이 신하를 만날 때는 어느 경우라도 승지와 사관이 같이 입시하도록 되어있는데 이 날의 독대는 이런 규례를 어긴 것이었다. 이 일이 뒤에 두고두고 문제가 되자 사관은 그 상황을 설명하는 구구절절한 기사를 실었지만 그래봐야 사후 변명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왕도 알고 대신도 알면서 단 둘만의 만남을 강행한 것에 대하여 당연히 의혹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그 만남 뒤에 세자 청정이 공식적으로 논의되고 결정이 되었으니 숙종과 이이명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두 사람만이 나눈 얘기라 그 진실은 끝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여러 추측이 나돌았다. 다만 숙종이 이이명에게 연잉군과 연령군의 안위를 부탁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당시 소론은 숙종과 이이명 사이에 밀계가 있었고 그 밀계는 세자를 청정시켜 세자의 실정(失政)을 유발한 뒤 이를 빌미삼아 세자를 폐위시키고 연잉군을 추대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처사에 반발했고 윤지완이 청정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숙종이 대신들을 접견하고 나눈 기사를 보면 독대 때에 숙종이 전선(傳禪)의 뜻을 밝혔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노론 대신들이 당장 왕위를 물려주는 대신 세자의 청정을 강력히 추천했을 것이다. 세자를 지지하지 않는 노론의 입장에서는 세자가 바로 왕이 되는 것보다는 그나마 세자 청정이 더 나은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 전선(傳禪) : 임금이 살아 있으면서 세자나 후계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물러나는 것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세자의 청정이 거론된 열흘쯤 뒤인 숙종43년 8월 1일부터 세자가 청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세자 청정의 업무 중에 용인(用人), 형인(刑人), 용병(用兵)의 세 가지는 제외되었다. 노론 대신들은 세자의 청정을 주장하고도 정작 이를 종묘에 고함으로써 변경할 수 없는 조치로 확정짓는 데에는 미온적이었다. 앞뒤가 안 맞는 이런 태도는 세자 청정에 관련하여 노론의 드러나지 않은 계략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혹을 가중시켰다. 그리고 그동안 겉으로는 잠잠했던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후 숙종의 병세가 전혀 호전되지 못하여 세자는 그 후 3년간 청정하였고 숙종은 마침내 47년이라는 긴 재위기간을 끝내고 1720년 6월 8일 승하하였다. 숙종의 나이 60세였다.

 

[종묘, 문화재청]

 

참고 : 조선왕조실록,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1997, 석필),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