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34 - 사씨남정기

從心所欲 2020. 3. 13. 09:58

집권을 한 서인들은 남인들에게 자신들이 당한 것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함이완으로 하여금 역모를 고변하도록 자리를 깔았던 우의정 민암과 그 아들 민종은 물론 함이완도 사형 당했다. 갑술환국 후 1년 동안 남인들은 14명이 사형되고 67명이 유배되었고 삭탈관작, 파직 등의 벌을 받은 인원도 50명이 넘었다. 이 와중에 남인의 역모를 고변했던 김인도 역시 사형당하고 같이 고변에 참여했던 다른 두 사람은 유배되었다. 이들이 남인의 역모를 고변하고도 처벌을 받은 이유는 서인들의 선제적 자기 방어적 조치 때문이었다. 새로 영의정에 임명된 남구만은 숙종에게 국문이 계속되면 무고한 사람이 희생될 수 있다는 이유로 고변 사건을 조속히 마무리 지을 것을 건의하고 허락을 받아냈다. 이들의 고변은 남인들이 주도한 국문 과정에서 서로 말이 안 맞아 남인 위관들이 무고로 결정하려던 상황이라 서인들은 서둘러 고변자들을 처벌하고 사건을 마무리함으로써 자신들의 공작 사실을 은폐하려 했을 것이다. 숙종이 고변자의 처벌을 허락했다는 것은 숙종도 고변이 무고임을 인정했다는 이야기고 그럼에도 이를 빌미로 환국을 일으켰다는 것은 숙종에게 다른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혹을 갖게 한다.

 

갑술환국을 단행한 며칠 뒤인 숙종20년 4월 9일, 숙종은 ‘폐비 민씨를 사가에서 별궁으로 옮기게 한 뒤 수직(守直)하고 늠료(廩料)를 주는 일을 거행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리하여 민비는 서궁(西宮)의 경복당(景福堂)으로 옮기게 되는데 승정원에서 “옛날 신하의 정례(情禮)로서는 문안하는 절차가 없을 수 없겠습니다."라고 건의하자 숙종은 이를 허락하였다.

▶ 수직(守直) : 건물이나 물건 따위를 맡아서 지킴

▶ 늠료(廩料) : 조선 시대 벼슬아치들에게 주던 봉급

 

《숙종실록》숙종 20년 4월 12일 에는 ‘왕비 민씨가 서궁의 경복당에 입어(入御)하는 과정’이라는 기사가 있다.

 

[임금이 먼저 경복당에 이르러 기다리니, 옥교가 이르렀다. 임금이 옥교 앞에 서서 궁인(宮人)에게 명하여 발[廉]을 걷게 하니, 비가 옥교에서 나와 땅에 엎드려 사죄하려 하였는데, 임금이 붙들어 일으키고 이어서 앞서 가서 경복당에 들어가니, 의물(儀物)과 제구(諸具)가 다 상례와 같았다. 임금이 비에게 자리에 오르도록 청하니, 비가 자리를 피하여 죄를 빌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다 내가 경솔하였던 허물이니, 회한(悔恨)이 그지없으나, 또한 다시 어찌 미치겠는가? 내가 번번이 충언(忠言)을 살피지 못한 것을 지극히 회한하는데, 그대에게 어찌 빌 만한 죄가 있겠으며, 또한 어찌하여 반드시 이렇게 겸양하여야 하겠는가?" 하였다.

비가 또 스스로 인퇴(引退)하는 말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애매한 정상을 환히 알고 지난 뉘우침을 많이 말하였거니와, 오늘의 일은 일마다 합당하여 다 이치에 순한데, 어찌하여 이토록 스스로 인퇴하는가? 다시는 그런 말을 내지 말기 바란다.“하고, 두세 번 타일러 정녕하게 반복하였다. 이어서 세자에게 명하여 와서 뵈게 하였는데, 비가 일어나려 하니, 임금이 말리며 말하기를, "앉아 있어야 마땅한데, 어찌하여 반드시 일어나야 하겠는가?" 하였다.]

 

정식으로 왕비의 자리로 복귀하는 것도 아닌데 숙종이 폐위시킨 민비를 궁으로 불러들이는 과정을 보면 예(禮)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성심을 다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숙종이 언제 다시 민비를 불러들이기로 결정했는지는 알 수 없다. 숙종은 4월 9일 민비를 별궁으로 옮기게 하라는 하교를 내리면서 “지난해에 한 대신(大臣)이 폐인을 별궁(別宮)으로 옮겨 두자는 일로 차자(箚子)를 올리기에 윤허한 바 있었으나, 다시 생각하니 폐치(廢置)한 지 오래지 않고 세자가 아직 아보(阿保) 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렇게 처분하는 것은 너무 갑작스러움을 면하지 못하므로, 우선 정침하고 시행하지 않았다.”고 한 것을 보면, 숙종은 진즉부터 때가 되면 인현왕후를 복위시킬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 시기는 바로 세자의 위치가 안정되었느냐 아니냐에 딸렸던 것이다. 따라서 숙종의 민비에 대한 조치는 급작스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전부터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이어지는 기사이다.

▶ 아보(阿保) : 보모(保母)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해 동안 사제(私第)에 어렵고 괴로움을 갖추 맛본 것이 다 내 허물이다. 이제 내 뜻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이렇게 하고서야 여러 해 동안 답답하고 슬펐던 마음을 펼 수 있다. 더구나, 온 나라 신민이 누구인들 기뻐하지 않겠는가? 뭇사람의 뜻이 같이하는 것이고 내 마음도 편할 것인데, 어찌 그대의 한 마디 말 때문에 국가의 큰 일을 지레 고치겠는가? 그대는 안심하여야 한다."

하니, 비가 청사에 나가 두세 번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이 날 저녁에 궁인(宮人) 영숙(英淑)을 밖으로 내치고, 또 희빈(禧嬪)에게 명하여 별당(別堂)에 물러가 있게 하고, 이어서 비에게 함께 대내(大內)로 돌아가기를 청하였으나, 비가 자리를 피하여 굳이 사양하며 엎드려서 일어나지 않았다.

임금이 먼저 가면서 상궁(尙宮)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중전(中殿)을 시위(侍衛)하여 침전(寢殿)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상궁에게 중죄가 있을 것이다." 하니, 궁인(宮人)이 좌우에서 시위하고 전후에서 부축하여 양심합(養心閤)에 침장(寢帳)을 마련하였다.]

▶ 양심합 : 동궐도에 따르면 양심합은 창덕궁 대조전의 남동쪽 행각으로 희정당의 후원과 연접해 있던 방이다. 경복당도 창덕궁 대조전 서쪽에 있던 건물이다. 통상 서궁과 별궁은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을 뜻하지만 기사에서의 서궁은 민비를 위한 별도의 궁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 침장 : 침실에 두르는 휘장

 

숙종은 같은 날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국운(國運)이 안태(安泰)를 회복하여 중곤(中壼)이 복위하였으니,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는 것은 고금을 통한 의리이다. 장씨(張氏)의 왕후 새수(王后璽綬)를 거두고, 이어서 희빈(禧嬪)의 옛 작호를 내려 주고 세자(世子)가 조석으로 문안하는 예(禮)는 폐(廢)하지 않도록 하라."고 장옥정을 왕비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였다. 그리고 4월 21일에는 태묘(太廟)에 고함으로써 인현왕후의 복위(復位)에 따른 모든 절차를 마쳤다.

 

많은 사람들이 인현왕후는 현숙하고 가련했던 반면 장희빈은 간악하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현왕후가 어떻게 현숙했고 장희빈이 어떻게 간악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장희빈이 인현왕후 대신에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 그렇게 추정할 뿐이다. 이런 근거 없는 편향된 시각은 어떤 의미에서 세뇌의 결과일 수도 있다. 인현왕후는 서인의 여인이고 장희빈은 남인의 여인이다. 수백 년 동안 집권한 서인들이 이후 두 사람에게 어떤 틀을 씌웠을지는 잠깐만 생각해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최전선에는 물론 사관들이 있었다.

 

[이때에 희빈(禧嬪)이 비빈(妃嬪)의 지위에 물러나 있어서 분수에 편안치 못하고 원독(怨毒)이 뼈에 사무쳐 양전(兩殿)의 기거(起居)의 예(禮)를 일찍이 한 번도 행하지 않았고, 세자가 때때로 가서 살피면 문득 손을 잡고 체읍(涕泣)하였으며 세자는 한 말도 꺼내지 않고 물러나니, 궁중(宮中)의 시어(侍御)하는 사람들이 조정에서 또한 일후(日後)의 도모(圖謀)를 할 줄로 알아서 두려워하여 공경하여 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희빈의 심복 시녀(侍女) 두 사람이 어두운 밤을 타서 대내(大內)의 침어(寢御)의 곳을 출입하면서 조금도 돌아보아 거리낌이 없는데도 감히 꾸짖어 금하는 자가 없었으니, 궁인(宮人)의 연로(年老)한 자가 혹은 이것으로써 그윽이 근심했다고 한다.] (숙종21년 9월 4일 1번 기사)

▶ 양전(兩殿) : 숙종과 인현 왕후.  ▶ 기거(起居) : 문병(問病) 문안(問安)  ▶ 체읍(涕泣) :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욺 

▶ 일후(日後)의 도모(圖謀) : 뒷날을 위해 어떤 계책을 세움   ▶대내(大內) : 내전(內殿)

 

사관이 장희빈을 폄훼하려는 의도로 작성한 기사인 것이 한눈에 보인다. 그런데 장희빈을 힐난할 것이 얼마나 없었으면 이런 글을 썼을까 싶다. 원독이 사무쳤다거나 훗날을 도모했다는 것은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는 사관의 뇌피셜에 불과하다. 왕과 왕비에게 문안하지 않았다는 비난은 왕비 자리에 있다 쫓겨난 장희빈에게 차마 꺼낼 말이 아니다. 장희빈의 시녀들이 왕과 왕비의 침전이 있는 곳을 야밤에 출입하여 어떤 나이 든 궁녀가 심히 걱정했다는 이야기에 이르면 사관의 붓 쥔 손이 부끄러울 듯싶다. 어느 때인가 한번 있었던 일을 침소봉대하여 무슨 큰 일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꾸민 사관의 수작을 보면 기레기의 원조를 대하는 느낌이다. 장희빈이 뒷날을 도모했기 때문에 두려워서 궁 안의 사람들이 장희빈을 공경하여 섬겼다는 사관의 설명은 악의(惡意)가 가득하지만 앞뒤가 안 맞는다.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고도 공경을 받았다는 자체가 오히려 평소 장희빈의 품행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찾아온 아들의 손을 잡고 말없이 흐느끼는 장희빈의 모습과 간독(奸毒)함은 실로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러면 사관들이 기록한 인현왕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보다 앞서 대행왕비(大行王妃)가 병들어 누워 있을 때에 민진후(閔鎭厚) 형제가 입시(入侍)하니,

왕비가 하교(下敎)하기를,

"갑술년에 복위(復位)한 뒤 조정의 의논이 세자(世子)의 사친(私親)을 봉공(俸供)하는 등의 절목(節目)을 운위하면서, ‘마땅히 여러 빈어(嬪御)들과는 구별(區別)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때부터 궁중의 사람들이 모두 다 다 희빈에게로 기울어졌다. 궁중의 구법(舊法)에 의한다면 빈어에 속한 시녀들은 감히 대내(大內) 근처에 드나들 수가 없는데, 희빈에 속한 것들이 항상 나의 침전(寢殿)에 왕래하였으며, 심지어 창(窓)에 구멍을 뚫고 안을 엿보는 짓을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침전의 시녀들이 감히 꾸짖어 금하지 못하였으니, 일이 너무나도 한심했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귀신의 재앙[所祟]이 있다.’고 한다. 궁인 시영(時英)이란 자에게 의심스러운 자취가 많이 있고, 또한 겉으로 드러난 사건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어떤 사람이 주상께 감히 고(告)하여 주상으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하겠는가? 다만 나는 갖은 고초를 받았으나, 지금 병이 난 두해 사이에 소원은 오직 빨리 죽는 데 있으나, 여전히 다시 더하기도 하고 덜하기도 하여 이처럼 병이 낫지 아니하니, 괴롭다." 하고, 이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숙종27년 9월 23일 1번 기사) 

▶ 갑술년 : 1694 숙종 20년  ▶ 빈어(嬪御) : 빈첨(嬪妾).

 

아! 이것이 일국의 국모인 왕비의 말인가 아니면 시기심에 가득 찬 여염집 아녀자의 넋두리인가! 병든 왕비가 자기 형제들을 만나 기껏 한다는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 대한 모해와 험담뿐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모두 장희빈 편에 선 이유를 왕이 세자가 자신을 낳은 생모(生母)에게 조석 문안을 드리게 한 데서 찾고 있다. 말 어디에 왕비의 풍모와 부녀자의 현숙함이 있는가?

세도 가문에서 태어나 온 나라의 축복을 받으며 왕비의 자리에 올랐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여 폐위 되었다 다시 왕비로 복귀하여 온 대신의 비호를 받으며 그 지위를 누리다가 병으로 죽은 여인. 천한 집 자식으로 태어나 궁녀로 들어갔다가 왕의 사랑을 받아 세자를 낳고 왕비 자리에 올랐지만 결국 왕이 버려 어미 노릇도 떳떳하게 하지 못하다가 자진(自盡)하라는 명을 받아 사약을 먹고 죽은 여인. 자세한 내막을 모르면 누가 더 가련한지 가늠할 수도 없는 두 여인을 두고 왜 늘 한쪽은 비련을 대표하고 다른 한쪽은 간독함의 상징이 되었을까?

 

이러한 프레임의 시초는 김만중이 지은 《사씨남정기》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만중(金萬中, 1637 ∼ 1692)은 숙종의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의 아버지 김만기(金萬基)의 동생이다. 그러니까 인경왕후의 숙부이다. 당연히 서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기에 정권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파직되고 유배되는 질곡을 겪었다. 숙종 15년인 1689년에도 장희빈의 모친에 대한 추문을 지어내고 궁중 기밀을 유포한 죄로 사형당한 홍치상의 일에 연루되어 김만중은 남해(南海)로 유배를 갔다. 김만중은 그곳에서 《사씨남정기》를 지었는데, 당시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상황에 대하여 자신이 바라는 결말을 소설의 형태를 빌려 써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사씨가 남쪽으로 쫓겨나게 된 사연'이라는 뜻의 소설이다. 중국을 무대로 한림학사 유연수가 아내 사정옥이 늦도록 자식을 낳지 못하자, 교채란이란 여인을 첩으로 들인다. 교씨가 아들을 낳고, 이어 사씨도 아들을 낳는데 장래에 불안을 느낀 교씨가 사씨에게 부정(不貞)의 누명을 씌워 쫓겨나게 하고 자신이 정실이 된다. 뒤에 유연수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사씨를 찾아나서 사씨를 정실로 삼고 교씨를 잡아 처형한 뒤, 사씨와 더불어 여든까지 화목하게 산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에서 유연수의 정실인 사정옥은 품행이 바르고 고운 성품을 지녔으며 유교적 윤리관에 충실한 어진 아내의 전형으로 그려지고 첩인 교채란은 자신의 욕망과 행복을 위해서 아들까지 죽이려 하는 위선적이고 교활하며 표독스러운 악녀로 묘사된다. 두 인물은 각기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빗댄 것으로 이해되고 읽히면서 이후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표상하는 이미지로 굳혀지게 되었다.

 

인현왕후는 숙종 27년인 1701년에 병으로 죽었다. 그러자 영조의 생모 숙빈(淑嬪) 최씨는 장희빈이 거처에다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게 했다는 고변을 하여 숙종은 한밤중에 장희빈에게 자진하라는 비망기를 내렸다. 그리고 장희빈의 궁녀들을 직접 국문하여 자백을 받아냈는데 그것이 진실의 고백인지 고문을 못 이긴 허위자백인지는 알 길이 없다. 사관들은 모두 장희빈의 간악함만을 기술했지만, 당시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은 세자를 낳아 기른 은혜를 생각하여 장희빈을 용서해주기를 청했고 뒤이어 공조 판서 엄집(嚴緝), 판부사 유상운(柳尙運)과 서문중(徐文重), 부교리 권상유(權尙游), 부수찬 이관명(李觀命) 등이 연이어 상소와 차자를 올려 장희빈 구명에 나셨다는 사실은 장희빈이 후세가 알고 있는 모습과는 다른 인물이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장희빈이 죽기 전에 무슨 말이라도 했다면 사관들이 그것을 빌미삼아 장희빈의 악독함을 드러내려했을 텐데 그런 기사마저도 없다. 장희빈은 모든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하고 담담히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그녀가 경종의 어머니다. 인현왕후가 죽은 지 2달만에 사사되었다. 같은 서오릉 안이지만 숙종과 인현왕후는 같이 묻혀있고 장희빈의 묘는 홀로 멀리 떨어져 있다.

 

[희빈장씨의 묘인 대빈묘(大嬪墓).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경내 위치. 원래는 광주시 오포읍 문형리에 있었으나 도시구획으로 묏자리에 도로가 생기면서 1970년 현 위치로 이장]

 

[명릉(明陵) : 서오릉 안의 숙종과 인현왕후의 묘, 문화유산뉴스사진.]

 

[명릉(明陵) : 숙종과 인현왕후의 묘 뒤편 왼쪽의 묘는 두 번째 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묘다, 문화유산신문 사진]

 

 

 

참고 :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