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31 - 노론 소론

從心所欲 2020. 3. 5. 16:04

예송논쟁으로 귀양 갔다가 풀려난 이후 송시열은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은 상황에서도 관직에 나오기를 삼갔다. 숙종이 여러 차례 직접 사람을 보내어 관직에 나올 것을 요청했으나 그는 번번이 사양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정치에서 완전히 물러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서인들로부터 대로(大老)라는 존칭으로 불릴 정도로 송시열은 여전히 서인의 실질적 영수 자리에 있는 인물이었다.

 

임술고변이 있기 3달 전인 숙종 8년 7월에도, 서인 영의정 김수항의 건의로 숙종은 송시열을 부르는 유시를 내리면서 박세채, 이상, 윤증도 함께 서울로 불렀다. 박세채(朴世采, 1631 ~ 1695)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송시열의 손자 송순석이 그의 사위였다. 이상(李翔, 1620 ~ 1690) 역시 송시열을 통하여 김집의 학통을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윤증(尹拯, 1629 ~ 1714)은 김집의 문하에서 주자(朱子)를 배웠고, 또한 후에는 김집의 권유로 송시열(宋時烈)에게서 『주자대전』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송시열과는 사제관계이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김집의 학통을 이어 받고 송시열과 연결된 서인들로, 경신환국을 통하여 영의정에 오른 김수항이 말하자면 자기 식구 챙기기에 나선 것이고 숙종이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숙종은 며칠 뒤 이들이 서울에 도착하기도 전에 박세채를 이조 참의에 , 윤증을 호조 참의, 이상을 형조 참의에 임명했다.

‘기필코 먼저 송시열을 올라오게 하고, 다음으로 이상, 윤증, 박세채를 불러 국사(國事)를 함께 하시라’는 건의에 따라 숙종은 계속 이들이 서울에 빨리 올라오도록 재촉했지만 당사자들은 각기 나름의 핑계를 대며 숙종의 부름에 바로 응하지 않았다. 특히, 수원에 머물면서 서울에 올라오지 않는 송시열을 불러올리기 위해 숙종은 승지로 직책이 바뀐 조지겸을 보냈다.

 

조지겸은 송시열을 만난 자리에서 임술고변에 대한 의혹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김익훈이 김환을 회유하고 협박하여 허새와 허영을 꾀어 역모로 죽게 하였으므로 그 자신이 반역한 것보다 더 나쁘다’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고 이에 대하여 송시열은 ‘그런 자는 죽여도 애석할 것이 없다’고 답했다. 이런 말을 전해들은 서인의 젊은 세력들은 이제 송시열이 서울에 올라와 조정에 나오면 무고를 일으킨 김익훈에 대하여 적절한 조치가 취해질 것을 기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송시열은 숙종이 부른지 다섯 달 만인 다음해 1월 중순이 되어서야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온 며칠 뒤 임금의 낮 경연(經筵)에 참석했던 송시열은 경연이 끝나자 "신이 죄를 기다리는 일이 있습니다.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문인이었던 조목(趙穆)은 이황이 죽은 뒤에 그의 자손을 보기를 마치 동기(同己)와 같이 하였습니다. 그가 관직에 있을 적에 지성(至誠)으로 경계하여 과실(過失)을 면하게 하여 주었으므로, 당시나 후세에서 모두 조목이 그의 스승을 위하여 도리를 다하였다고 일컬었습니다. 신은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수학(受學)하였으므로, 그의 손자 김익훈과 신의 정과 뜻이 서로 친한 것은 다른 사람과 자연히 다릅니다. 근일에 김익훈이 죄를 얻을 것이 매우 중한데, 신이 평소에 경계하지 못하여서 그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신은 실지로 조목의 죄인입니다." (숙종실록, 숙종 9년 1월 19일 2번째 기사)라고 우선 숙종에게 자신과 김익훈의 관계를 자진 신고했다. 그러자 숙종은 "이 일이 경(卿)에게 무슨 혐의가 되겠는가?"고 송시열을 안심시켰다. 이후 송시열은 김익훈의 처벌 문제에 대하여 입을 다물었다. 젊은 서인 관료들은 송시열이 김수항, 김만기 등 서인 노장세력을 만난 뒤로 입장이 바뀐 것으로 의심하면서 척신세력을 비호하는 태도를 보이는 송시열에 대하여 깊이 실망하였다.

 

한편, 송시열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 중 박세채와 이상은 계속된 왕의 출사 요청에 응해 조정에 나갔지만 윤증은 계속 사양하며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 박세채가 윤증에게 같이 국사를 논할 것을 청하고, 조지겸 역시 성의를 다해 올라오도록 권하자 마지못해 5월이나 돼서야 과천까지 올라왔지만 거기서 다시 임금에게 소(疏)를 올려 임금의 부름을 사양했다.

 

《숙종실록》숙종 9년(1683) 5월 5일 기사는 당시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전(前) 참의(參議) 윤증이 부름을 받고 과천(果川)에 이르러 소를 올려, 화(禍)를 만나 원통함을 품고 감히 명(命)을 받들지 않는 사정을 아뢰니, 승지를 보내 돈면(敦勉)하여 들어오게 하였다. 윤증이 또 진소(陳疏)하여 힘써 사양하므로, 잇달아 사관을 보내 효유(曉諭)하여 불러오게 하였으나, 윤증은 배회하며 나오지 않다가 돌아갔다. 윤증이 과천에 이르렀을 때 박세채가 가서 만났는데, 윤증이 말하기를,

"지금 나갈 수 없는 이유가 셋이 있다. 남인(南人)의 원한[怨毒]을 화평하게 할 수 없는 것이 그 하나이고, 삼척(三戚)의 위병(威柄)을 제지(制止)할 수 없는 것이 하나이며, 우옹(尤翁)의 세도(世道)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삼척(三戚)이란 두 김가(金家)와 민가(閔家)를 가리킨 것이다. 그때 윤증은 이미 송시열을 배반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뒷날의 화복(禍福)을 깊이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박세채와 더불어 같이 자면서 밤새도록 나눈 이야기는 모두 송시열을 헐뜯고 해치는 말이었으며, 또 박세채에게 반드시 송시열과 각립(角立) 하여 줄 것을 권하였다.

►우옹(尤翁) : 송시열(宋時烈)

►각립(角立) : 서로 버팀.

 

[명재 윤증 측면전신좌상, 110.0 × 81.0㎝, 장경주 作, 1744년(영조 20), 보물 제1495호,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명제(明齋) 윤증은 윤선거의 아들이다. 윤선거(尹宣擧, 1610 ~ 1669)는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외손이자 김집의 문인이기도 해서 서인의 대표적 계보를 이어온 인물로 한 때는 송시열, 윤휴와 모두 친밀한 사이였다. 예송 문제로 윤휴와 송시열이 원수지간이 되자 윤선거가 중간에서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하였는데, 이를 두고 송시열은 윤선거가 자기에게 두 마음을 가진다고 의심을 하면서 윤선거에게 윤휴와 절교하라고 종용하기까지 하였었다.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가 죽은 후 1673년에 윤선거의 연보와 박세채가 쓴 행장을 가지고 과거 스승이었던 송시열을 찾아가 아버지의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그 때 송시열은 윤선거가 윤휴와 절교하지 않은 일을 들먹이며, 자신은 윤선거에 대해 잘 모른다며 묘지명을 소홀하게 기술하며 윤증이 부탁한 ‘강도(江都)의 일’에 대한 부탁도 들어주지 않았다.

‘강도의 일’이란 병자호란 때인 1636년 12월에 윤선거가 어머니, 부인 등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가 어머니와 다시 강화도를 빠져나온 사건이다. 윤선거는 강화도에 피난을 갔을 때 김익겸(金益兼), 김상용(金尙容) 등과 함께 강화도에서 순절(殉節)하기로 약속을 했었다. 하지만 뒤에 윤선거는 남한산성에 있는 부친과 함께 죽기로 마음을 바꿔 어머니와 함께 강화도를 빠져나왔는데 끝내 남한산성에 들어가지는 못하였다. 윤선거와 약속했던 이들과 윤선거의 부인 이씨는 이듬해 1월 강화도에서 순절하였다. 결과적으로 윤선거는 약속을 어기고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다는 오명을 얻게 되었다. 윤선거는 유배 가는 아버지를 따라 충청도 영동으로 내려가서도 ‘강도의 일’을 부끄러이 여겨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28세의 젊은 나이 때부터 충청도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몰두했었다.

 

윤증은 아들로써 아버지의 불명예를 막고 싶어 ‘강도의 일’에 대한 기술을 빼고 싶어 부탁을 했겠지만 송시열은 자구만 조금 수정하고 글의 내용은 고쳐주지 않았다.

윤증이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윤선거는 윤증에게 송시열의 우뚝한 기상을 따라가기 힘드니 송시열의 장점만 배우되 단점도 알아두어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있었다. 윤선거는 생전에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을 송시열의 단점으로 생각하여 여러 번 편지를 보내 깨우쳐 주려 하였다. 윤증이 송시열에게 묘지명을 부탁하러 갈 때도 윤증은 아버지가 죽기 얼마 전 송시열에게 써놓았던 편지를 전해주었다. 그 마지막 편지에서 조차 윤선거는 송시열에게 '임금에게 사의(私意)가 없기를 바란다면 자기 사의부터 없애야 하고, 임금이 언로(言路)를 열어 놓기를 바란다면 자기부터 언로를 열어야 할 것이다. 좋으면 무릎에 올려놓고 미우면 못에 밀어 넣는 편협한 생각은 버리고 (남인들과) 소통하시라."고 당부했다.

 

송시열의 시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연보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1653년 윤7월에 충남 논산의 황산서원에서 송시열과 윤선거가 함께 만난 자리에서 송시열이 “하늘이 공자에 이어 주자를 낳은 것은 진실로 만세의 도통(道統)을 위한 것이다. 주자 이후에는 드러나지 않은 이치가 하나도 없고 명백해지지 않은 글이 하나도 없는데, 윤휴가 감히 자기 견해를 내세워 방자하게 억설(臆說)을 하는 것”이라며 윤휴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이에 윤선거는 “의리는 천하의 공물(公物)인데 지금 윤휴에게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은 무슨 일인가”라고 하며 “윤휴도 학문이 고명하기 때문에 주희와 다른 해석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박했다. 그러자, 송시열은 “윤휴 같은 참람한 역적을 고명하다고 한다면, 왕망·동탁·조조·유유도 모두 고명하다는 것인가?”라면서 “춘추의 법이 난신(亂臣)과 적자(賊子)를 다스릴 때는 반드시 그 추종자를 먼저 다스리는 법이니, 왕자(王者)가 나타나면 공(公)이 마땅히 윤휴보다 먼저 벌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했다는 것이다.

 

송시열은 주희를 절대 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오직 주희의 학문만을 법으로 여기며 그와 다른 사상이나 학설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 주자의 광신자였다. 묘지명을 부탁하러 갔던 윤증은 아버지와 동문수학하고 같이 관직에도 있었던 송시열이 죽은 아버지에 대해 보여준 태도에 송시열의 인격 자체를 의심하면서 결국 사제지간의 의리마저도 끊는 사이가 되었다. 따라서 위 《숙종실록》기사에 윤증이 “이미 송시열을 배반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라는 대목이야말로 사관이

윤증을 헐뜯기 위해 집어넣은 글귀에 불과하다.

 

[박세채 초상, 170.5 × 93.5㎝, 17세기 말경 중국화가가 그린 것으로 추정, 경기도 유형문화재 163호, 경기도박물관]

 

윤증이 과천에서 소를 올린 것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과천까지 찾아온 박세채와 만나 밤새 토론한 결과였다. 윤증은 박세채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첫째, 잇단 역옥(逆獄)으로 남인들이 원한을 가지고 있는데 남인과 서인 간의 원한를 해소하고 화평하게 할 방책이 있는지? 둘째, 정치에 부당하게 관여하고 있는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의 외가인 청풍 김씨 김석주, 숙종의 장인인 광산 김씨 김만기,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의 숙부인 여흥 민씨 민정중의 세 외척 가문을 물리칠 방법이 있는지? 셋째, 자기 당 사람만 등용하고 반대 당 사람을 무조건 배척하는 서인의 태도를 바꿀 수 있는지?

 

즉 윤증은 자신이 조정에 나간다면 무언가 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선결조건이라고 본 것이다. 윤증의 질문에 박세채는 별 다른 계책이 없음을 인정하였고 박세채도 윤증에게 더 이상 출사를 권유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윤증은 숙종에게 소를 올리고 다시 시골로 내려간 것이다. 윤증은 이후에도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녕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박세채는 윤증이 제기한 세 가지 문제가 모두 타당한 것임을 수긍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가 사직하고 만년에 기거하던 파주로 내려갔다. 사대부들의 신망을 받던 세 사람 중 윤증은 서울에 들어오지도 않고 과천에서 발길을 돌리고 박세채도 바로 고향에 돌아가자 송시열도 조정에서 물러나 금강산을 유람한 후 충청도 화양(華陽)으로 돌아갔다.

이후 김익훈의 무고를 재조사할 것을 주장했던 조지겸, 한태동과 남구만 등 서인의 젊은 층이 송시열에 등을 돌리고 윤증, 박세채를 지지함에 따라 소론(小論)으로 불리게 되고 서인의 중진인 김석주, 민정중, 김수항 등이 중심이 되어 송시열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남아 노론(老論)으로 불리면서 서인이 둘로 갈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 : 조선왕조실록,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1997, 석필),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