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30 - 공작정치

從心所欲 2020. 2. 26. 13:13

공작정치(工作政治).

현대 정치에나 어울릴 듯한 이 말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김석주였다. 1680년의 경신환국으로 남인 정권을 몰아낸 김석주는 숙종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 우의정으로서 호위대장을 겸직하며 권력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허견의 옥사 때 1백여 명 이상의 남인들을 처형하고 유배 보낸 것만으로는 미흡하다고 느꼈는지 김석주는 경신환국 때 살아남은 복평군과 남인의 잔여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숙종 8년인 1682년 10월, 갑자기 연달아 세 건이나 역적모의가 있다는 고변이 들어왔다. 후세에 ‘임술삼고변(壬戌三告變)’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임술년 10월 21일 김환(金煥)이 남인 유생(儒生) 허새(許璽) 등이 복평군(福平君)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몄다고 고변했고 그 사흘 뒤에는 김중하(金重夏)가 남인 민암(閔黯) 등이 역모를 도모했다고 고변했으며 10월 27일에는 김익훈이 승정원(承政院) 아방(兒房)에 나아와서 김환의 고변에 덧붙여 남인 유명견(柳命堅) 등을 왕에게 밀계(密啓)하였다.

아방(兒房) : 군영의 우두머리 장수인 장신(將臣)이 대궐 안에서 머물러 자는 곳

 

이 세 건의 고변이 모두 김석주의 기획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치 공작이었다는 사실은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이 조선시대 당쟁의 역사를 정리한 <당의통략(黨議通略)>과 송준길,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었던 권상하(權尙夏, 1641 ~ 1721)의 시문집 <한수재집(寒水齋集)> 등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당의통략 표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진]

 

[당의통략 내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진]

 

[한수재집 내지]

 

김석주는 먼저 김환을 포섭하여 간자(間者)로 삼았다. 김환은 원래 서인이었으나 남인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한 덕에 남인 정권에서 발탁되어 사간원과 홍문관에서 벼슬했던 인물이다. 김석주는 김환에게 “남인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는데 증거를 찾지 못했으니 남인들 틈에 들어가서 정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면서 “모두 내 손에 달린 일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달래는 한편 “명을 따르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고 위협하면서 돈을 주어 용산에 사는 남인 허새와 허영의 옆집으로 이사 가게 하여 그들과 친분을 쌓고 말의 빌미를 잡아 고변하도록 사주했다. 그런데 김환이 김석주의 지시에 따라 공작을 펼치던 때에, 김석주가 사은사로 북경에 가게 되었다. 그러자 김석주는 심복인 어영대장 김익훈(金益勳)에게 뒷일을 맡겼다. 김익훈은 김장생(金長生)의 손자로, 조카인 김만기(金萬基)의 딸이 숙종비 인경왕후였다. 숙종이 즉위하면서 어영대장 등 군권(軍權)의 요직을 지내다가 경신환국 때 적극 참여하여 보사공신(保社功臣) 2등에 봉해졌다. 김석주와 같은 훈척 세력으로서, 송시열(宋時烈) 등과의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병권을 장악하고 정국을 주도하였던 인물이다.

 

김석주가 중국으로 가 자리를 비운 사이, 김환이 허새와 허영을 역모로 유인하려 꺼냈던 말 때문에 오히려 ‘김환이 역모를 꾸미는 것 같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었다. 그러자 김환은 자신이 역모로 고발될까봐 서둘러 허새와 허영을 역모로 고변했는데 공작의 총괄자가 없는 상황에서 돌발적으로 고변이 이루어지면서 혼선이 빚어지고 동시에 공을 탐낸 인물들이 뒤따라 고변에 가세하면서 세 건의 고변이 불과 며칠 사이에 일어나게 되었다. 역모사건이니만큼 당연히 국청(鞫廳)이 열렸고 먼저 잡혀온 허새와 허영은 서인 위관이 주도한 국문 과정에서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허새는 압슬형을 포함한 혹독한 형신 끝에 역모를 시인했고, 허영도 고문에 못 이겨 혐의를 시인하였다. 하지만 같이 잡혀왔던 이덕주(李德周)는 끝까지 혐의 사실을 부인하며 허새가 자백한 내용의 모순점을 반박하다가 결국 고문의 몽둥이질을 견디지 못해 죽고 말았다. 허새와 허영의 자백에도 불구하고 역모의 전체적인 단서는 밝혀지지 않았고 허새와 허영도 역모의 주범인 모주(謀主)에 대하여는 끝내 말하지 않아 복평군을 제거하려던 김석주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게다가 김중하의 고변과 김익훈의 밀계 내용은 당사자들의 대질 심문 결과 서로 말이 맞지 않아 결국 서인 위관들 조차 무고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역모로 고발되었던 민암과 유명견은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김환의 고변은 허새와 허영이 자백했기 때문에 사실로 인정되어 두 사람은 죽임을 당하고 김환은 고변한 공로로 정2품의 품계인 자헌대부(資憲大夫)를 제수 받았다. 물론 《숙종실록》에는 허새와 허영의 역적모의는 기정사실로 기록되었다.

압슬형(壓膝刑) : 죄인을 기둥에 묶어 무릎을 꿇게 하고 꿇린 무릎 아래 사금파리 등을 깔아, 무릎 위에 압슬기를 놓고 누르거나 무거운 돌을 얹어 고통을 주어 죄상을 실토하게 하던 고문 방법

 

사건은 이렇게 종결되는 듯했지만 이 고변의 진실 여부는 물론 사건 처리 결과에 대하여 서인 내부에서조차 의혹이 제기될 만큼 분명치 않은 구석들이 많았다. 비슷한 내용의 고변이 하나는 역모로 인정이 되고 하나는 무고로 처리된 것도 의문이고, 역모에 대한 무고는 사형을 시키는 것이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2차, 3차 고변에 관련된 김중하(金重夏)와 전익대(全翊戴)에 대한 처벌이 유배로 끝난 것이 너무 괸대하다는 점에서 그 배후에 대한 의혹도 제기되었다. 이에 김육과 함께 대동법에 찬성했던 조익의 손자인 승지(承旨) 조지겸(趙持謙)이 “김중하(金重夏)와 전익대(全翊戴)에게 내린 형벌이 너무 가벼우니, 대간(臺諫)이 아뢴 바를 따르소서. 하고 숙종에게 아뢴 것을 필두로 서인의 젊은 관료들이 두 사람에 대한 재수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결국 귀양 간 전익대를 불러 다시 심문하자, 전익대는 김환의 사주였다고 자백했다. 김환을 국문하면 배후의 김석주와 김익훈이 드러날 상황이었다. 김석주가 발 빠르게 나서 서인 고위 관료들을 움직인 결과 김환은 국문도 하지 않은 채 귀양을 보내버리고 전익대는 사형시켰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꼬리자르기를 한 것이다. 무고를 기획하고 주도한 주범은 뒤에 숨어 온전하고 앞잡이는 귀양, 바람잡이 하수인은 사형을 당했다.

 

이에 대하여 후세의 이건창은 <당의통략>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때 사류(士類)들이 다투어 ‘김익훈이 남을 유인해 역모로 만들었으니 그 마음은 자신이 역적이 된 것보다 더 나쁘다’고 말했다” 또한 “모두 김석주와 김익훈이 사주한 것인데, 전익대만 후원자가 없었으므로 혼자 죽었다고 사람들이 일렀다”고도 기록하였다.

 

역모사건의 뒤처리가 명쾌하지 않았던 만큼 그 후유증은 계속되었다. 임술삼고변 있은 후 해를 넘겨 다음 해인 숙종 9년 4월 16일, 숙종이 시임(時任)과 원임(原任) 대신 및 예조당상(禮曹堂上)과 옥당(玉堂)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는 자리에서까지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은 무고한 자들을 국문하지 않고 처리한 처사가 그르다고 대간(臺諫)이 자신을 배척한 것에 대하여 변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 자리에서도 김수항은 김환을 두둔하며 김환을 국문하지 않은 자신의 처사가 옳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부제학 조지겸과 교리(校理) 심수량(沈壽亮) 등이 나서 "군사를 거느렸다는 말이 김환의 지시와 사주(使嗾)에서 나왔으며, 김환이 이미 꼬이고 협박하였습니다. 전익대의 경우는 협박을 당한 자로서 죽었는데, 꼬이고 협박한 자는 혼자 죄를 면하겠습니까? 공은 공대로 하고 죄는 죄대로 해야지 공으로 죄를 엄폐(掩蔽)하는 것은 불가합니다."고 반박하였다.

거론되는 인물은 김환이지만 사실은 그 배후인 김석주와 김익훈을 놓고 벌이는 공방이었다. 서인의 중진, 원로들은 왕의 척신인 김석주와 김익훈을 보호하려 하였고 젊은 신진세력은 정치 공작을 벌인 두 외척에 깊은 반감을 갖고 있었다. 숙종도 자신의 심복인 두 사람이 문제되는 것을 달가워할 리가 없었다. 이에 젊은 서인들은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이 나서 이 사건에 대하여 올바른 결론을 내주기를 기대했다.

 

 

참고 : 조선왕조실록,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1997, 석필), 인물한국사(신병주, 장선환),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