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29 - 패가망신

從心所欲 2020. 2. 19. 07:38

[경복궁 동편 건춘문과 동십자각, 지금은 복개된 담 옆의 중학천, 국립중앙박물관]

 

[경복궁 동십자각, 1907년 독일인 촬영]

 

“잘 나갈 때 조심하라.”는 옛말이 있고, “여차하다 한방에 훅 간다.“는 요즘말도 있다.

숙종 즉위 이래 7년 가까이 남인은 서인을 물리치고 별 어려움 없이 정권을 주도하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남인 허적이 그 기간 내내 영의정 자리에 있을 만큼 남인의 입지는 탄탄한 것처럼 보였다. 남인 내에서 소위 청남으로 불리는 허목, 윤휴, 권대운 등은 여전히 송시열의 처벌 수위를 높이고 서인의 나머지 세력에 대한 처벌을 도모했지만 국정을 운영하는 허적을 비롯한 탁남 입장에서는 문제를 시끄럽게 만들기를 원하지 않았다.

 

숙종 6년(1680년) 3월, 숙종은 71세가 된 영의정 허적에게 안석(案席)과 지팡이를 내려 주었다, 안석과 지팡이는 궤장(几杖)이라는 물품인데 70세 이상의 연로한 대신들에게 왕이 내리던 하사품이었다. 그런데 숙종은 이에 더하여 ‘1등의 음악’을 내려 주었다. ‘1등의 음악’의 형식과 의미는 알 수 없지만 그때까지도 허적이 숙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얼마 후인 3월 28일, 허적은 자신의 조부가 시호(諡號)를 받은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였다. 하필 잔칫날에 비가 왔는데, 잔치 사실을 알고 있던 숙종은 비가 오자 왕실에서 사용하는 기름칠한 천막인 유악(油幄)을 허적의 집에 보내주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랬더니 기름 천막은 이미 영상 집에서 가져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숙종은 대노했다. 아무리 영의정이라도 왕실의 물건을 자신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가져간다는 것은 왕인 자신과 왕실을 능멸한 행위라고 생각한 것이다. 숙종은 “한명회도 감히 이런 짓은 하지 못했다.”며 격노했다.

 

숙종은 바로 "공조판서 유혁연(柳赫然),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 포도대장 신여철(申汝哲)을 모두 곧 명하여 부르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는 훈련대장직을 남인의 유혁연에서 서인이면서 자신의 장인인 김만기로 바꾸고, 총융사에는 신여철, 수어사에는 김익훈(金益勳)을 임명하였다. 어영대장은 척신(戚臣)인 김석주가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두었다. 핵심 군직(軍職)을 모두 남인과 관계없는 인물들로 바꾼 것이다. 이는 당시 허적이 영의정인 동시에 전시 사령부(司令府)로서 외방 8도(道)의 모든 군사력을 통제하였던 도체부(都體府)의 도체찰사(都體察使)로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숙종은 유약에 대한 보고를 듣고는 바로 이런 조치를 취했다.

 

허적의 잔칫집에는 당시 허적의 위상을 대변하듯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자리에는 남인들뿐만 아니라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도 참석해 있었다. 그런데 잔칫집에 있던 김만기에게 임금이 긴급하게 부르는 패(牌)가 전달되었다. 또한 남인 유혁연도 허적의 잔칫집에서 숙종의 패를 받았다. 왕이 갑자기 잔칫집에 사람을 보내어 무장(武將)들을 불러들이니 잔칫집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면서 잔치도 파장이 나버렸다. 이때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주위에서 허적에게 “무슨 변고가 있을 것 같으니 삼정승이 함께 들어가 잘 말씀드리면 화를 방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고 말했더니 허적이 “작년 시월 경부터 상께서 우리를 대하는 기색이 악화되어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 같네”라고 답했다 한다.

 

《숙종실록》에 의하면 3월 29일, 숙종은 철원에 귀양 가있던 서인의 전 좌의정 김수항을 사하여준다. 또한 “근래 공도(公道)는 멸하여 없어지고 사의(私意)는 크게 행하여, 관원의 천거 임용 때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한쪽 사람만 임용하게 된다. 그러므로 권세가 한쪽으로 편중되어 자못 교만하고 방종한 습관이 있어서, 비록 과실이 있더라도 조금도 서로 바로잡는 도리가 없고 기탄하는 마음도 아주 없다.”며 남인 이조판서 이원정(李元禎)을 삭탈관작하고 문외출송 하는 명을 내렸다. 또 다음날에는 좌의정과 우의정이 사직을 청하자 숙종은 이를 모두 받아들였다.

숙종은 4월 2일 우찬성 윤휴(尹鑴)를 귀양 보내라는 사헌부 장령의 건의를 바로 받아들이고 이어 허견(許堅)을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라는 건의도 허락한다. 허견은 허적의 서자(庶子)이다. 허견은 “아비의 적자(嫡子)가 없음을 다행으로 삼고, 아비의 늙음을 타서 아비의 권력을 빙자하여, 교만·사치·음란·방탕한 행동과 간사하게 취하고 속여서 빼앗는 일은 나라에 말이 시끄럽게 전파되고 청간(請簡)을 만들어 팔도에 두루 다니면서 수로로 수송하고 육로로 운반하여 뇌물이 저자와 같으며, 상인(商人)에게 반만(半萬)의 금(金)을 약탈하고 영역(嶺驛)에 백 명이 넘는 종[奴]을 협박해 빼앗았으며, 기타 간사한 짓을 한 것은 다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라는 이유로 탄핵되었다.

청간(請簡) : 청탁하는 편지
영역(嶺驛) : 영남의 역

 

허적(許積)은 4월 1일에 ‘모든 것이 자신의 죄’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이에 숙종은 “본직(本職)에 힘써 부응(副應)하라."는 말로 답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바로 다음날인 4월 2일에는 갑자기 ‘전 영의정 허적이 상소하여 도체부(都體府)와 내국제조(內局提調)의 임무를 사임하기를 청하니, 모두 허락하였다.’는 가사가 나온다. 하루 사이에 허적이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것인데 영의정 허적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내막과 과정을 기록한 기사는 따로 없다.

 

허견이 개인적 패륜 행위로 탄핵되어 귀양길에 오른 불과 며칠 뒤인 4월 5일, 허견이 인조의 손자이며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인 복선군(福善君)과 함께 역모를 도모하였다는 고변이 올라왔다. 숙종 초에 허견이 복선군에게 “주상의 춘추(春秋)가 젊으신데 몸이 자주 편찮으시고 또 세자[儲位]가 없으니, 만약 불행한 일이 있으면 대감이 임금 자리를 면하려도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근자에 이르러서는 허견이 훗날 군사를 동원할 계획으로 이천에 주둔하고 있는 도체찰사부 소속 군대를 훈련시켰다는 내용도 있었다. 당연히 국청이 열리고 귀양 가던 허견은 다시 잡혀와 국문을 받고 4월 12일 능지처사 당하였다. 또한 대궐 밖에서 대죄(待罪)하던 허적도 4월 9일 국청에 잡혀와 국문을 받았으나 직접적 관련은 없다고 보아 일단 벼슬을 깎고 백성의 신분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하지만 집요한 서인들의 공세에 한 달 후인 5월 11일 허적 역시 사사되고 만다. 허적과 허견의 재산도 모두 몰수되었다. 그야말로 패가망신(敗家亡身)한 것이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 자리에 있으면서 임금에게 궤장을 받고 할아버지가 시호 받은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떠들썩하게 벌였던 날에서 불과 한 달 보름 만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허적 초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허적이 사사된 며칠 뒤 윤휴도 사사되었고 유혁연도 사사되었다. 숙종은 자신의 아버지 현종의 4촌 형제들인 복선군과 복창군은 죽이고 복평군은 절도에 위리안치시켰다. 이로써 남인 정권이 몰락하고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를 1680년인 경신년에 정국이 바뀌었다는 의미로 경신환국(換局)이라 하는데 서인들은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 불렀다. 남인을 물리치고[출(黜)], 서인이 올라섰다[척(陟)]는 의미다. 여기까지 보면 허적이 자식 관리를 잘못한 것이 발단이고 기름 천막을 유용한 것이 기름을 부어 불을 붙인 사건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는 이를 김석주(金錫冑)라는 척신과 서인들이 오랜 계획 끝에 이루어낸 합작품으로 본다.

 

조선왕조실록은 우리 민족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조선의 제1대 태조부터 25대 철종에 이르기까지 한 왕조 472년의 역사를 매일의 기록으로 남긴 것은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그 높은 가치로 인하여 1997년에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그렇지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들을 모두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는다면 역사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게 될 수도 있다. 어떤 기록이든 아무리 노력해도 기록자의 주관이 어느 정도 작용할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의도를 가지고 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의도를 가지면, 쓰고 싶은 것은 늘려 쓰고, 쓰고 싶지 않은 것은 줄이거나 뺄 수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왜곡이 가능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당파의 이해가 갈리는 사건에 대한 기록들이 그렇다. 특히나 자신의 당파를 대변하는 사관들의 사론은 읽기에 참담할 정도다. 서인에 반대되는 세력은 모두 음험하고 흉악하며 많은 결점을 감추고 행세한 위선자들인 반면 자신들의 행위는 언제나 당당하고 옳다.

 

김석주(1634∼1684)는 효종‘때 대동법의 실시에 전력을 다했던 김육(金堉)의 손자다. 그의 아버지는 병조판서를 지낸 김좌명(金佐明)이고 김좌명의 동생은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아버지인 김우명(金佑明)이었다. 따라서 김석주는 명성왕후의 사촌이자 숙종의 외당숙이다. 김석주는 또한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와도 인척관계로, 인경왕후의 아버지인 김만기(金萬基)는 그의 처 외사촌이었다. 집안으로는 서인의 대표적인 명문가이면서 왕실과의 든든한 인맥까지 갖춘 김석주였다.

 

김석주는 할아버지가 한당(漢黨)을 대표했기 때문에 송시열이 속한 산당(山黨)과는 자연히 거리가 있었고 산당이 집권하고 있을 때는 그런 영향으로 요직에 중용되지 못하였다. 그러다 2차 예송 때 김석주가 서인임에도 남인의 허적 등과 같은 입장을 취하여 송시열, 송준길, 김수항을 비판하였고, 결국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 정권이 수립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김석주는 숙종이 즉위 때부터 요직에 기용했었는데 이후 남인 정권의 세력이 강화되자, 김석주는 다시 서인들과 가까워졌다. 김석주의 이런 행동은 숙종의 뜻이었을 수도 있다. 신하들의 세력이 비대해지는 것을 좋아하는 왕은 없다. 숙종은 예송에 대한 분노 때문에 서인을 내쳤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인이 독주하는 정국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비록 남인 정권을 내칠 생각까지는 아니더라도 서인의 동정을 파악하는 동시에 남인을 견제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이다. 숙종의 뜻을 간파한 김석주는 여러 정보원을 통하여 입수한 정보를 이용하여 막후에서 정국을 주무르려고 했다. 숙종 5년 2월에 서인인 한성부 부윤(府尹) 남구만(南九萬)이 허견(許堅)의 비행과 윤휴가 황해도와 평안도의 벌목을 금지한 소나무 수천 그루를 베어다가 집을 짓는다고 상소를 올린 일이 있었는데 이 일도 김석주가 사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견의 비행이란 허견이 김석주의 작은 아버지인 김우명의 첩을 때려 이가 부러지게 한 것과 남의 아내를 납치하여 욕을 보인 일이었다. 하지만 이때는 숙종의 허적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던 때라 오히려 남구만이 귀양을 갔다.

 

김석주는 이에 그치지 않고 이듬해 천막 유용사건으로 숙종이 허적에 대하여 분노하자 그 틈을 이용하여 정원로(鄭元老)라는 인물을 동원하여 허견의 역모를 고변케 했고 이것이 성공하여 결국 남인 정권이 물러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경신환국 때에 공을 세운 자들을 보사공신(保社功臣)에 책봉하였는데, 김석주는 보사공신 1등으로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당시에도 세론은 허견의 역모는 김석주가 사건을 조작한 것으로 보았다.

 

[김석주초상, 178 x 130cm, 견본채색, 17세기 중국 방문시 그린 것으로 추정, 실학박물관]

 

 

참고 : 조선왕조실록,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1997, 석필), 인물한국사(신병주, 장선환),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