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27 - 대비의 상복

從心所欲 2020. 2. 11. 07:00

조선은 건국 때부터 유학(儒學)을 국가의 학문으로 삼았다. 유학은 춘추전국시대의 유학에서 한당(漢唐)의 훈고학(訓詁學), 송명(宋明)의 성리학을 거쳐, 청(淸) 때에는 고증학 으로 변모하였다. 조선은 그 중에서도 특히 주자의 이기철학(理氣哲學)을 형이상학적 원리로 삼는 성리학(性理學)에 심취했다. 성리학은 그 학문 자체가 목적이 아닌 학문이다. 성리학은 유학 본래의 목적 실현을 위해 먼저 철학적으로 그 근거를 규명하는 학문이다. 즉, 유학의 목적은 윤리 도덕적 완성이고 이는 유학의 근본정신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을 통하여 실현되는데, 성리학은 수기치인을 위한 방법론에 관한 학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성리학은 중국 송(宋)대에 공자와 맹자의 유교사상을 ‘성리(性理), 의리(義理), 이기(理氣)’ 등의 형이상학 체계로 해석한 학문으로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의 준말이다.

 

유학을 성리학으로 집대성한 주희는 유교 관련 책자들 중에서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사서(四書)라는 이름을 붙여 유학의 주요 경전으로 삼았다. 이 사서를 통하여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혈연 공동체와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 공동체의 윤리 규범을 제시하였는데, 특히 「대학」에 나오는 격물(格物)·치지(致知)부터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팔조목(八條目)을 개인의 수양과 국가의 통치를 위한 행위 규범으로 설정했다.

 

초기에 의리(義理)와 대의(大義)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던 조선 성리학은 16세기가 되면서 이론적 탐구가 심화되었는데 성리학의 우주적 원리보다는 인간 심성의 내적 움직임을 천명하는데 집중했다. 이기심성(理氣心性)에 대한 논의는 이언적(李彦迪)과 서경덕(徐敬德)을 거쳐 이황(李滉), 기대승(奇大升), 이이(李珥) 때에 그 절정을 이뤘다. 심성의 내적 움직임에 대한 논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학문의 관심은 심성의 외적 표현으로 옮겨갔다. 그것이 예(禮)이고, 예에 대한 이론적 탐구가 예학(禮學)이다. 조선의 예학은 이이(李珥)의 문인인 김장생(金長生)을 태두로 하여 그의 아들인 김집(金集), 그리고 김집의 문인인 송시열로 이어졌다.

 

예(禮)는 심성의 외적인 표현인 동시에 사회 윤리이자 질서로, 가까이는 한 개인의 일상적인 행위에서부터 크게는 왕가와 국가의 조직과 규범을 규제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기본 예전(禮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국가 의식으로서의 오례의(五禮儀)고, 다른 하나는 사대부 가정의 의례 준칙인 사가례(私家禮)다. 국가의 예전은 세종 때에 시작해서 성종 때에 완성된 『국조오례의』를 규범으로 삼고 사가례는 주희(朱熹)의 「가례」를 모범으로 삼았다. 그러나 국가의 상황이나 인간의 생활 양상은 다양해서 이런 예전에 규정된 것으로 명확히 적용할 수 없는 사례도 발생한다. 그런 경우에는 당연히 예전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나올 수밖에 없다.

 

1659년 5월 귀밑에 난 종기로 고생하던 효종은 침을 맞고 피를 흘린 뒤 갑자기 사망했다. 왕이 승하했으니 왕가와 조정의 신하가 상복을 입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때 효종의 계모인 조대비(趙大妃)가 상복(喪服)을 입는 기간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부모가 맏아들을 위해서는 삼년복을 입고, 나머지 아들들의 경우에는 일년복을 입는 것이 원칙이었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서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뒤를 이어 세자로 책봉되어 왕위에 올랐다. 왕통(王統)으로 보면 인조를 계승하였으나 가통(家統)으로 보면 맏아들이 아닌 것이다. 이에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이조판서 송시열(宋時烈), 우참찬 송준길(宋浚吉) 등이 의논하여 기년복(朞年服), 즉 일년복으로 정해 이를 시행하였다. 이는 효종을 인조의 둘째 아들로서 대우한 것이다.

 

그러자 예조참의 윤휴(尹鑴)가 반론을 제기하였다. 효종은 이미 왕통을 계승하였으니 맏아들로서 대우하여 조 대비가 삼년복을 입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중국 고대 지배층의 관혼상제(冠婚喪祭)에 관한 예법을 기록한 「의례(儀禮)」에 의거한 것이었다. 「의례」는 「주례(周禮)」,·「예기(禮記)」와 함께 삼례(三禮)로 불리는 예에 관한 주요 경서(經書)이다. 그러자 송시열도 같은 「의례」의 주석에 근거하여 ‘서자(庶子)는 장자가 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가통(家統)을 계승했어도 3년복을 입지 않는 네 가지 경우를 밝힌 사종지설(四種之說)을 동원하였다. 이 역시 「의례」에 있는 내용으로 송시열은 이 가운데 체이부정(體而不正)을 들었는데 효종은 아버지를 계승은 했으나[體而], 가통을 이은 적장자(嫡長子)는 아니[不正]라는 것이다. 죽은 소현세자 같은 경우는 적장자이지만[正而] 아버지를 계승하지 못한(不體) 것으로 정이부체(正而不體)가 된다. 모두 3년복을 입지 못하는 경우인 것이다.

다만 정태화의 만류로 체이부정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큰아들이나 큰며느리의 경우는 모두 1년복을 입는다는『국조오례의』의 규정을 내세웠다. 이후로도 윤휴와 송시열 간에 더 논쟁이 계속되었지만 조대비의 상복은 결국 1년복으로 결정되었다. 이를 ‘예를 놓고 다퉜다’고 해서 예송(禮訟)이라 하고, 기해년(1659)의 일이라 해서 기해예송이라 부른다.

 

그런데 15년 뒤인 1674년, 효종의 비(妃)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張氏)가 죽었다. 그러자 역시 계모인 조대비의 상복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다시 문제되었다. 복제(服制)에는 맏며느리가 죽으면 시어머니는 1년복을 입게 되어 있고, 둘째며느리가 죽으면 9개월만 상복을 입는 대공복(大功服)을 입도록 되어 있었다. 다시 또 효종의 비를 맏며느리로 보느냐 둘째며느리로 보느냐의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처음 예조판서 조형(趙珩)이 기년복으로 안을 세웠으나 영의정을 비롯한 대신들은 효종비의 복제가 효종과 같을 수가 없다며 대공복으로 바꿨다. 그런데 몇 달 후 대구의 유학(儒學) 도신징(都愼徵)이 이 복제가 잘못되었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현종실록 22권, 현종 15년 7월 6일 무진 1번째기사 1674년

“대왕대비께서 인선 왕후를 위해 입는 복에 대해 처음에는 기년복으로 정하였다가 나중에 대공복으로 고쳤는데 이는 어떤 전례를 따라 한 것입니까? 대체로 큰아들이나 큰며느리를 위해 입는 복은 모두 기년의 제도로 되어 있으니 이는 국조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바입니다. 그리고 기해년 국상 때에 대왕대비께서 입은 기년복의 제도에 대해서 이미 ‘국조 전례에 따라 거행한다.’고 하였는데, 오늘날 정한 대공복은 또 국조 전례에 벗어났으니, 왜 이렇게 전후가 다르단 말입니까........(중략)

더구나 일찍이 국가에서 제정한 예에 따라 기해년에는 큰아들에게 기년복을 입어주었는데, 반대로 지금에 와서는 국가에서 제정한 뭇 며느리[衆庶婦]에게 입어주는 복을 입게 하면서 《예경(禮經)》에 지장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 의리가 후일에 관계됩니다. 왜냐하면, 대왕 대비의 위치에서 볼 때 전하가 만일 뭇 며느리한테서 탄생한 것으로 친다면 전하는 서손(庶孫)이 되는데, 대왕대비께서 춘추가 한이 있어 뒷날 돌아가셨을 경우 전하께서 대왕 대비를 위해 감히 중대한 대통을 전해 받은 적장손(嫡長孫)으로 자처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중대한 대통을 이어받아 종사의 주인이 되었는데도 적장자나 적장손이 되지 못한 경우가 과연 있었습니까. 전하께서 적장손으로 자처하신다면 양세(兩世)를 위해 복을 입어드리는 의리에 있어서 앞뒤가 다르게 되었으니 천리의 절문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기해복제(己亥服制) 때에는『국조오례의』에 따랐다가 이번에는 왜 『국조오례의』를 따르지 않는지, 그것이 결국 효종을 적장자로 인정하지 않아서 현종도 적장손으로 인정하지 않는 불충(不忠)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를 반문하였다. 결국 이는 정태화의 만류로 송시열이 감추려 했던 체이부정의 문제임을 지적한 것이다.

현종은 이 소를 보고 대신들에게 이렇게 된 경위를 의논해서 보고하라고 명했다. 하루의 논의 끝에 기해복제는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이번에는 고례(古禮)를 따랐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현종은 기준을 바꾼 이유를 추궁하였다. 현종 15년 7월 13일의 실록에는 ‘맏며느리가 아닌 중서부(중자와 서자의 부인)가 죽었을 때 입는 상복’으로 기준을 바꾼 이유를 묻는 현종의 질문에 영의정을 비롯한 대신들이 답변에 쩔쩔매는 모습이 생생히 담겨있다. 결국 대신들은 전에 송시열이 주장한 체이부정설을 인용해 효종이 맏아들이 아닌 까닭임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현종은 이에 분노하며 대비의 상복을 『국조오례의』에 따라 일년복으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기해복제 때 복제에 대해 처음 이의를 제기한 윤휴는 원래 남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윤휴의 주장에 남인들이 동조하면서 예송은 서인과 남인의 대결 양상으로 바뀌었다. 당시 서인이 주도하는 정권에 셋방살이하던 남인들은 이 복제에 대한 논쟁으로 서인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현종은 복제를 잘못 정한 죄를 물어 예조 판서, 참판, 참의와 정랑을 모두 하옥시켰다. 또한 영의정 김수홍을 춘천에 중도부처(付處)시켰다. 그리고는 남인 인물들을 예조판서, 판의금, 대사간과 사간 자리에 등용하고 남인 허적을 영의정에 제수했다. 이렇게 남인들의 등용문이 넓어지는가 싶던 때에 현종이 갑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고 열이 나는 병이 들더니 열흘 만에 사망했다. 어머니 인선왕후 장씨가 사망한지 6달도 안된 때의 일이었다.

 

[숭릉(崇陵) 효종과 그 비 명성왕후 김씨의 능,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內, 경기도청 사진]

 

[숭릉 정자각(보물 제1742호), 문화유산뉴스 사진]

 

 

참고 :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