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정란 주도 세력들은 광해군에게 36가지에 달하는 죄목을 들이댔는데 그 중에서도 명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잊고 오랑캐인 후금과 가까이 한 것을 큰 죄로 꼽았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단순히 서인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광해군 때의 대북세력도 마찬가지였고 어쩌면 조선 전체 사대부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했다. 인조와 조정의 실권을 잡은 서인들은 광해군이 강홍립을 통하여 후금과 연결해 놓은 핫라인을 끊어버리고 친명배금 노선을 취하였다. 지피지기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차버린 것이다.
후금에서는 1626년 9월 누르하치가 죽고 누르하치가 낳은 16명의 아들 가운데 8번째 아들인 홍타이지(皇太極)가 그의 뒤를 이어 2대 칸[汗]이 되었다. 뒤의 청태종(淸太宗)이다. 홍타이지는 즉위 전부터 조선에 대한 화친 방침에 반대하여 주전론을 주장해왔던 인물인데 칸의 자리에 오르자 자신의 생각을 바로 실천에 옮겼다. 1627년 1월 아민(阿敏)에게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홍타이지가 이때 조선의 침공을 강행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는 물자부족이었다. 여진족은 명나라와의 교역을 통하여 필요한 물자를 조달해왔었는데 명과의 전쟁으로 명은 물론 조선과의 교역도 중단되어 물자부족이 심각한 상태였다. 따라서 필요한 물자를 조선에서 충당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목적이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조선의 가도(椵島)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毛文龍) 휘하의 명나라 군대였다.
광해군 13년인 1621년, 후금이 요동(遼東)을 공격했을 때 요동 도사(都司)로 있던 모문룡은 후금과의 전투에 패주하여 조선의 평안도 철산군(鐵山郡) 앞바다에 있는 가도로 도망 왔었다. 당시 가도의 주민은 대부분이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어서 모문룡은 이들로 민병대를 편성하여 요동(遼東) 수복을 꾀하면서 종종 후금의 배후를 습격하곤 했었다.
이런 이유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만일 조선의 국경 경비가 견고했다면 후금은 명나라와 대치 상황이었기에 많은 군대를 움직여 조선을 침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1624년 평안북도 병마절도사로 있던 이괄이 휘하 군사를 이끌고 내려와 난을 일으키면서 조선의 북방 경비체계가 무너졌는데 그 후 이것이 다시 정비되지 못한 상태였다. 덕분에 후금은 3만이라는 적은 군사만으로도 쉽게 조선을 침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후금은 애초부터 속전속결로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고 가능한 빨리 돌아가기 위하여 미처 한양까지 오지도 않고 황해도 평산에 머물면서 조선에 협상을 요청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이고 그 해 3월 3일 인조는 강화도에서 후금의 사신을 맞아 향을 피우고 맹세문을 낭독한 뒤 그 맹세문을 불태우는 화친 절차를 치렀다. 도승지가 낭독한 맹세문의 내용이다.
"조선 국왕은 지금 정묘년 모월 모일에 금국(金國)과 더불어 맹약을 한다.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화친을 결정하였으니 이후로는 서로 맹약을 준수하여 각각 자기 나라를 지키도록 하고 잗단 일로 다투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요구하지 않기로 한다. 만약 우리나라가 금국을 적대시하여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며, 만약 금국이 불량한 마음을 품고서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역시 하늘이 앙화를 내릴 것이니, 두 나라 군신은 각각 신의를 지켜 함께 태평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 천지 산천의 신명은 이 맹약을 살펴 들으소서."1
이에 후금에서는 남목태(南木太)라는 대신이 나서 맹세를 하였다.
"조선 국왕은 지금 대금국 이왕자(二王子)와 맹약을 한다. 두 나라가 이미 아름다운 화친을 맺었으니, 이후로는 마음과 뜻을 함께 하여야 한다. 만약 조선이 금국을 적대시하여 병마를 정비하거나 성보(城堡)를 새로 세워 불선한 마음을 갖는다면 하늘이 앙화를 내릴 것이며 이왕자도 만일 불량한 마음을 갖는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다. 만약 양국의 두 왕이 마음을 같이 하고 덕을 같이 하여 공도로써 처신한다면 하늘의 보호를 받아 많은 복을 누릴 것이다."2
이렇게 돌아간 후금은 9년 후인 1636년, 청이라는 나라 이름으로 다시 조선을 침략한다. 병자호란이다. 그 결과 조선과 청의 양국 관계는 '형제의 맹'에서 '군신의 의'로 바뀌었고 그 이후 조선은 250년 가까이 청나라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흔히 이 병자호란을 얘기할 때면 주화파와 척화파가 무슨 큰일이나 한 것처럼 등장하는데 어차피 패전국이 될 상황에서 그까짓 자존심 싸움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서로 싸우려면 진즉에 친명(親明)파와 친청(親淸)파로 나뉘어 싸웠어야 마땅했다. 인조와 그 밑의 신하들은 정묘호란 이후 9년 동안 도대체 그 자리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세월을 보냈는가?!
조선이 건국 이래 200년 동안 외적의 침입에 대한 큰 염려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북쪽에서의 침략 위협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倭)라는 적을 간과했던 것은 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역사적으로 왜가 조선의 주목을 받을만한 위협이 되지 못하는 잔챙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에게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자 전부라 할 만한 국가였다. 그런데 그 중국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국가를 책임진 자들이라면 그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 변화가 나라에 어떤 영향을 줄지 밤새 고민해도 모자라지 않는가? 백번 양보해서 정묘호란 한번쯤은 그럴 수도 있다 치자. 그러면 정묘호란을 통해 무언가 배웠어야 하지 않는가?!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이 왜란으로 거의 멸망하게 된 조선을 도와 구원하여준 은혜라면, 그 은혜 때문에 다시 또 나라를 멸망의 길로 끌고 가는 것이 나라의 운명을 책임진 자들이 할 짓인가? 친명이든 친청이든 조선의 백성에게야 무슨 상관인가? 사대부들의 헛된 명분 논리에 왜 나라와 백성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자기들 문화가 최고이고, 모든 것은 중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중화(中華)사상은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민족이나 국가를 이적(夷狄)으로 구분하는 화이사상(華夷思想)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화족(華族)인 자신들을 둘러싼 사방의 이민족을 북쪽은 흉(匈)이라는 오랑캐로, 남쪽은 만(蠻), 서쪽은 융(戎), 동쪽은 이(夷)라는 오랑캐 이름을 붙였다. 저들의 눈에 조선은 그저 동이(東夷)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데 같은 오랑캐 취급을 받는 조선이 후금을 오랑캐라고 깔보며 그들이 중국을 장악해가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였다. 지나가던 짱깨 개가 웃을 일이 아닌가!
조선 사대부들의 정신승리는 청이 중국의 실질적인 주인이 된 뒤에도 오랫동안 계속 되었다. 1780년 박지원이 청나라를 다녀온 뒤 쓴 『열하일기』에 청나라의 연호가 들어있다고 ‘오랑캐의 연호를 사용한 글(虜號之稿)’이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明)이 망한지 150년이 가까운 그 때에도 사적인 글에서는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숭정(崇禎)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개인적으로야 명을 숭상하든 청을 오랑캐취급하든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라 일을 맡은 자리에서는 그런 개인감정이 국익에 앞서서는 안 되는 것쯤이야 입으로만 나라 걱정하는 사람들조차도 말로는 다 아는 얘기다. 그런데 쇠퇴하는 명나라와 새롭게 떠오르는 후금을 보면서도 후금에 대한 대책은 전혀 생각지 않다가, 후금이 먼저 정묘호란 때 맺은 약속을 파기했다거나 무리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을 요구하고 ‘군신의 의(義)’로 개약(改約)하자고 요청하여 척화배금(斥和排金)을 주장하게 되었다는 말은 책임을 상대방에 떠넘기려는 사후 변명에 불과하다. 후금이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된 핵심은 조선이 후금과의 외교에 실패했다는 얘기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조선은 겉으로는 후금에 대한 사대의 예를 갖추는 모양새를 취하며 어떻게든 외교적으로 후금의 신뢰를 얻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뿐이다. 속마음이 얼굴에 나타나 상대방이 알아챈 것이다.
후금의 목적은 명나라지 조선이 아니었다. 저들로서는 중원으로 진공해야 되는데 조선이 자신들의 뒤를 칠지도 모른다는 후고지우(後顧之憂)를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병자호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는 청이 명을 멸망시키고 나서 8년간 인질로 잡고 있던 소현세자를 바로 풀어준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고려 때, 요(遼)나라와 송(宋)나라 사이에서 고려는 조선과 거의 같은 상황에 처했었지만 서희(徐熙)가 상대 거란의 의중을 정확히 꿰뚫은 덕분에 말만으로 거란을 되돌려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에는 서희 같은 안목이나 판단력을 가진 인물이 없었다. 어쩌면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적 성향 때문에 애초부터 그런 안목이나 판단력이 불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나마 뒤늦게 남한산성에 갇힌 상황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청과의 강화를 주장하고 끝까지 성사시켜 나라가 더 절단 나는 것을 막았던 최명길(崔鳴吉)3을 저들은 실록에 “기민하고 권모술수에 능했다”고 적어 평가절하 하였다. 광해군은... ‘여진족을 사모하고 후금을 흠모하여 명나라 몰래 뒤에서 후금과 서로 연락을 취했다’고 적지 않은 것이 신기한 일이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보다보면 때로 답답하다 못해 분노가 치미는 출연자들을 보게 된다. 조선 역사의 인조와 서인들의 모습이 딱 그렇다. 머리 나쁜데 고집까지 세면 어떻게 깨우쳐줄 방법이 없다. 저들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고도 바뀌지 않았다. 거기다 인조는 청나라에 대한 원한으로 자신 때문에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미워하고 며느리인 세자빈과 손자들을 죽여 버리는 패륜까지 저질렀다. 이것이 어떻게 저들이 광해군에게 들이댔던 패륜의 기준과 비교나 할 수 있는 일인가?
인조는 소현세자를 죽였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소현세자가 인조를 위하여 청 세조가 아끼던 벼루를 얻어와 인조에게
바치자 인조가 그 벼루를 소현세자의 얼굴에 던져 그걸 맞고 급서했다는 야사(野史)가 있을 정도로 인조의 소현세자에 대한 미움은 컸다. 《인조실록》에는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外人)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하였다....”라고 소현세자의 죽은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외부적으로는 학질에 걸렸다 죽은 것이라 말을 퍼뜨렸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치료를 담당했다 죽게 한
의원에 대한 논죄를 거절하고 계속 의원을 비호하였다. 이런 정황으로 인하여 소현세자가 독살 당했을 가능성이
당대부터 제기되었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인질로만 8년의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조선인 포로와 도망자의 속환문제, 청나라의 군사적 요구와 물화의 무역 등 청나라와 조선 사이의 정치·경제적 각종 현안에 대한 창구역할을 맡아 조정하고 처리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외교 창구가 되어 청나라 조정에서의 조선에 대한 우호적 환경을 조성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요즘으로 치면 대사나 로비스트 역할을 한 것이다. 조선 조정은 그런 소현세자의 노력을 제대로 알거나 평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소현세자가 기개를 꺾고 청나라와 내통하는 것으로 여겼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대한 로비를 혼자 담당했다. 로비에 필요한 비용도 필요했지만 조선 조정으로부터의 지원은 기대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이 또한 자체 조달해야 했다. 그래서 사무역(私貿易)을 하였는데, 이를 주관한 인물이 소현세자의 아내이자 세자빈인 강빈(姜嬪)이었다.
이런 소현세자의 노력을 사관은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가짜뉴스로 덧칠해놓았다.
●인조실록, 인조 23년(1645) 4월 26일 1번 기사 왕세자의 졸기
.....(전략).......그러나 세자가 심양에 있은 지 이미 오래되어서는 모든 행동을 일체 청나라 사람이 하는 대로만 따라서 하고 전렵(田獵)4하는 군마(軍馬) 사이에 출입하다 보니, 가깝게 지내는 자는 모두가 무부(武夫)와 노비들이었다. 학문을 강론하는 일은 전혀 폐지하고 오직 화리(貨利)만을 일삼았으며, 또 토목 공사와 구마(狗馬)5나 애완(愛玩)6하는 것을 일삼았기 때문에 적국(敵國)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크게 인망을 잃었다. 이는 대체로 그때의 궁관(宮官) 무리 중에 혹 궁관답지 못한 자가 있어 보도하는 도리를 잃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사관이 적국(敵國)이라 표현한 청에서는 소현세자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소현세자의 부음을 듣자 청나라 황제는 직접
칙서를 내렸다.
●인조실록, 인조 23년 윤6월 4일 2번째 기사
.......(전략)
상이 칙서 앞으로 나아가, 한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일배삼고두(一拜三叩頭)] 예를 행하고 이어 칙서를
받았는데, 그 칙서에 이르기를,"황제는 조선 국왕(朝鮮國王) 이휘(李諱)에게 칙유(勅諭)하노라. 사신이 북경에 옴으로 인하여 너의 세자가 갑자기
죽었다는 말을 문득 듣고 깊이 놀라고 애도하였다. 세자가 북경에 있을 때를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의 언어 행동이
눈앞에 선하여 대단히 애처로운 마음을 더욱 느낀다. 길이 생각건대, 동국(東國)이 옛 어진 임금을 본받아 우리 왕실을
보호할 훌륭한 제후국이 되리라 여겼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를 줄을 어찌 헤아렸겠는가. 아, 가슴 아프다. 특별히 공부상서(工部尙書) 흥능(興能), 예부계심랑(禮部啓心郞) 오흑(鄔黑), 통사관(通事官) 고아마홍(孤兒馬紅) 【 정명수이다.】을 보내어 향폐(香幣)7, 생례(牲醴)8, 부수(賻禭)9로 세자에게 유제(諭祭)10하게 하였으므로 이렇게 유시하노라."하였고, 다음으로 섭정왕(攝政王)11의 서신을 열어보니, 그 글에 이르기를,
"황숙부(皇叔父)인 섭정왕은 조선 국왕에게 글로써 위문합니다. 갑자기 세자의 부음을 듣고 깊이 놀라고 애도하였습니다. 세자는 은혜롭고 온화하고 돈후하고 정성스러워 문채가 금옥(金玉) 같았으므로, 국왕을 도와 덕화를 펴서 우리 왕실의 훌륭한 제후가 되기를 방금 기약했는데, 어쩌면 그리도 하늘이 착한 사람을 보우하지 않고 갑자기 중도에서 꺾어버린단 말입니까........(후략)"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고 한다. 그래도 이런 아쉬움은 남는다. 인조가 정란을 일으키지 않아 광해군이 계속 집권했다면....? 청나라에서 9년간 국제정치를 경험한 경력과 서양 문물에 대해 새로운 안목을 가진 소현세자가 왕위를 계승했다면.....?
「논어」에 있는 공자 말씀이다. “지위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그 자리에 설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를 걱정해야 한다.”
인조는 능양군 이종(李倧)으로 남아 있었던 편이 조선에 더 낫지 않았을까?
참고 :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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