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22 - 능과 묘

從心所欲 2020. 1. 21. 17:49

이미 베어놓은 나무 때문에 생각지도 않게 인경궁 건축의 규모가 커지게 되자, 인경궁이 들어설 자리에 있는 가옥을 철거하고 그 곳의 주민들을 이주시켜야 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대하여 인목대비는 물론 사관들도 궁궐을 짓느라 광해군이 수천 채의 민가를 철거했다고 비난했다. 이 말을 들으면 마치 광해군이 왕권을 이용하여 민가를 마구잡이로 그것도 무자비하게 헐어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서인들이 기록한 실록에 따르더라도 광해군이 취한 조치는 근대의 청계천 주민 이주나 용산 재개발지역 주민 이주 때보다도 훨씬 더 세심했다.

 

●광해군일기, 광해 9년(1617) 3월 19일 6번째 기사

전교하였다.

"이궁(離宮)의 담장 안에 사는 백성들의 가사(家舍)와 그 구입 원가에 대해 상세히 숫자를 헤아려서 서계하라.

 

●광해군일기, 광해 9년 5월 3일 2번째 기사

전교하였다.

"이궁의 성 안으로 들어간 집의 주인을 일일이 서계하고 철거한 집에 대해 값을 보상해 주는 일을 지금까지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그 뜻을 모르겠다. 선수 도감으로 하여금 속히 살펴서 거행하게 하라."

 

●광해군일기, 광해 9년 5월 25일 1번째 기사

전교하였다.

"반경(盤庚)의 천도(遷都)가 삼대(三代) 때 있었는데도1 오히려 근거 없는 말을 퍼뜨려 인심을 선동하는 걱정을 면치 못하였다. 더구나 지금같이 인심이 불측한 때이겠는가. 신궐(新闕)의 역사가 실로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나, 위에서는 항상 마음속이 편치 않다. 물력(物力)이 부족한 것이나 목석(木石)을 실어 나르는 등의 일은 모두 족히 염려할 것이 못 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화합시키는 것이 실로 급선무이다. 비록 가가호호 유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궁성 안으로 들어간 집에 대해서 일일이 값을 지급해 준다면 백성들의 마음을 혹 위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전후로 전교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고, 중사(中使)가 나갔을 때에도 여러 차례 말해 보내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서계하지 않고 있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새로 들어간 소세양(蘇世讓) 등의 집터도 아울러서 속히 서계하고 이달 안으로 일일이 값을 지급해 주라. 이상의 일을 선수 도감에 말하라."

 

 

그간 이궁에 대한 궁호(宮號)를 대제학에게 검토시켰으나 마땅한 이름을 정하지 못하여 당분간 신궐(新闕)로 부르기로 결정되었다. 위의 기사에서 보듯 광해군이 불도저식으로 민가를 밀어 없앤 것이 아니라 지금의 공공개발 토지를 수용하는 절차와 하나도 다르지 않게 수용되는 택지에 대한 보상을 기본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광해군은 이주하는 백성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빠른 보상을 재촉했다. 광해군의 여러 번에 걸친 지시에도 불구하고 보상 절차가 신속히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은 나라에서 보상한다니까 수용되는 땅에 대하여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경우들이 생겨 그 실태를 파악하느라 시간이 지연되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또 뜬금없는 일이 일어난다.

 

●광해군일기, 광해 9년 6월 1일 1번 기사

전교하였다.

"새문궁(塞門宮) 근처에 사는 조관(朝官)과 사서인(士庶人)들이 전일에 전교한 뜻을 무시하고 지레 자신들의 집을 철거하니, 듣기에 몹시 놀랍다. 속히 도감 및 한성부로 하여금 방문(榜文)을 걸어 알리게 하고, 당해 부(部)의 관원으로 하여금 각별히 개유하게 하라. 그리고 지금 이후로는 집을 철거하고 나가는 자가 있으면 일일이 중하게 다스릴 일을 명백하게 개유하고, 이미 철거한 사람들의 이름을 속히 상세하게 서계하여 십분 엄하게 금지시켜서 가사(家舍)를 철거하지 못하게 하라. 이상의 일을 영건 도감에 말하라."

 

새문궁이란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의 옛집이다. 그 집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말에 광해군이 그 집을 뺏어 경덕궁, 즉 지금의 경희궁을 지었다고 서인들이 주장하여 지금은 역사의 정설처럼 굳어진 문제의 장소다. 그런데 그 집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집을 철거한다는 말에 광해군이 놀라고 있다. 《광해군일기》에는 이전에 어떤 연유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기사가 없다. 광해군은 그 날 또 다시 전교를 내린다.

 

●광해군일기, 광해 9년 6월 1일 3번째 기사

전교하였다.

"대내에 비록 요망스러운 변고가 있었으나 바깥으로 이어(移御)하는 것은 가벼이 할 수 없기 때문에 단지 합당한 곳을 수리해서 형세를 보아 처리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없게 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각 해사에서 위의 전교를 준행하지 않고 앞 다투어 여염집에다가 부표(付標)하여, 사람들이 놀라 집을 헐고 앞 다투어 피해 가니 몹시 놀랍다. 나의 마음이 편안치 않으니, 속히 영건 도감으로 하여금 각 해사에 말하여 이와 같이 해서 나의 죄를 무겁게 하지 말도록 하라. 이 뜻으로 본 도감에 말하라."

 

위의 기사에 따르면 광해군은 궁궐 안에 계속 요망한 변고가 일어나자 잠시 궁궐 밖으로 피하여 지낼 수 있는 집을 알아보도록 지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선택된 집이 새문궁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관리들이 광해군의 지시를 확대 해석하여 새문궁 주변의 집들에다 철거 대상이라는 딱지를 붙였고 이로 인하여 집을 철거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만 해도 광해군은 갑작스런 소식에 백성들이 입게 되는 피해를 염려하며 민가 철거를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불과 12일 뒤에는 전혀 다른 기사가 등장한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9년 6월 12일 2번째 기사

영건 도감이 아뢰기를,

"비망기로 새문궁의 궁호(宮號)를 서계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이 궁은 여경방(餘慶坊)에 있으니 경녕궁(慶寧宮)으로 부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다만 이어하기 이전에는 범범히 서별궁(西別宮)으로 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한 사안에 대하여 이렇게 기사들이 서로 뜬금없는 것은, 실록을 편찬하면서 사관들이 관련 기사들을 누락시킨 때문으로 보인다. 광해군을 몰아낸 이들이 왜 기사를 빼버렸는지는 조금만 생각해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어쨌든 세 개의 기사를 곰곰이 따져보면 이런 추리가 가능할 것 같다. 광해군이 정원군의 옛집을 궁 밖에 임시로 거할 처소로 정하여 이곳을 수리하여 옮길 계획을 세웠는데 관리들이 왕이 머물게 될 곳이니까 주변의 집들을 철거하는 조취를 취한 것이다. 경호상의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광해군이 창덕궁과 창경궁을 놓아두고 굳이 궁 밖의 거처를 물색한 이유에 대해서는 위 6월1일자 기사에 ‘요망스러운 변고’라고 짤막하게 나와 있다. 

이는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왜 하필 정원군의 집을 선택했는지에 대해 팩트를 기반으로 하는 정식 기사는 없다. 대신 궁호를 서별궁으로 정하기 하루 전 날짜에 사관이 끼어 넣은 사론만 있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9년 6월 11일 1번 기사

【새 궁궐을 새문동(塞門洞)에다 건립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였다.
"성지(性智)가 이미 인왕산 아래에다
신궐을 짓게 하고, 술인(術人) 김일룡(金馹龍)이 또 이궁(離宮)을 새문동에다 건립하기를 청하였는데, 바로 정원군(定遠君)의 옛집이다. 왕이 그곳에 왕기(王氣)가 있음을 듣고 드디어 그 집을 빼앗아 관가로 들였는데, 김일룡이 왕의 뜻에 영합하여 이 의논이 있게 된 것이다. 인왕산의 터는 두 구역이 있는데, 하나는 사직 담장의 동쪽에 있고 또 하나는 인왕동(仁王洞)에 있는 바, 바로 소세양(蘇世讓)의 청심당(淸心堂) 터이다. 성의 담장은 양쪽이 함께 하였으나 전우(殿宇)는 서로 달라서 실로 두 개의 대궐이었는데, 새문동에 또 하나의 대궐을 지어서 셋째 대궐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한꺼번에 공사를 시작하여서 제조와 낭청이 수백 명이나 
되었으며, 헐어버린 민가가 수천 채나 되었다. 여러 신하들이 먼저 한 궁궐을 지어 이어(移御)한 뒤에 차례차례 공사를 일으키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들지 않았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모두들 성지를 허물하여 그의 살점을 먹고자 하였다.
그러자 성지가 노하여 조사(朝士)들에게 말하기를 "이 한 중놈의 모가지는 조만간에 잘려서 
도랑에 내던져 질 것이다. 다만 나는 인왕산의 새 터만 정하였을 뿐으로, 지금 세 대궐의 역사를 한꺼번에 일으키는 것은 본래 나의 뜻이 아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어찌하여 한 마디 간언이라도 올려 중지시키지는 않고 한갓 나만 탓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는데, 듣는 자들이 이 말을 듣고는 부끄러워하였다." 】

 

이 사론은 중간에 있었던 과정에 대한 사실들을 빼버려 기사의 일관성이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하여 사관이 작성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관은 자신이 쓴 사론에 누가 새 궁궐 건립을 의논했는지 조차 밝히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사실인양 적었다.

광해군은 이미 왕이다. 만일 정원군의 집에 정말 왕기가 있어 광해군이 그것을 염려했다면 그곳을 훼손시켜 흉지(凶地)로 만드는 것이 풍수지리의 일반 상식이 아닌가? 그곳에다 궁궐을 짓는 것은 집터의 왕기를 실현하는 것일 텐데 서인 사관들이 그렇게 자주 거론하는 광해군 주변의 술사들이 그걸 부추겼다는 얘긴가?

 

《광해군일기》의 다른 사론들과 마찬가지로 이 사론은 광해군을 시기에 찬 인물로 묘사하여 폄훼하는 것은 물론이고 거기에 한 가지 목적이 더 있었다. 인조가 왕이 된 것을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인조는 원래 왕이 될 사람이었다는 논리다. 사론을 가장한 이런 논리가 처음도 아니다. 이 기사 2년 전의 기사에도 사관은 같은 논리로 사론을 달았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7년 윤8월 14일 6번째 기사

【.....왕은 평소 능창군 전의 모습이 범상치 않다는 말을 들어온 데다 또 정원군의 새문동 사제(私第)와 인빈(仁嬪)의 선영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으로 항상 의심해 왔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크게 놀라 밤중에 옥사를 일으켰다..... 】

 

●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7년 11월 17일 4번째 기사

능창군2 이전의 졸기

【왕이 이미 정원군의 집에 왕성한 기운이 있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그 집을 빼앗아 경덕궁 터로 삼았다.】

 

사관의 곡필(曲筆)이 역사의 정설로 둔갑해버린 현실에 분노가 치민다. 궁궐 관련한 세세한 것까지 기록하고 있는 다른 기사들에 비하여 정작 가장 중요하다할 그 발단에 대해서만 사료에 근거한 기사는 없고 자신들의 사론으로 채웠다. 애초 광해군이 정원군의 옛집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려 했던 이유가 담긴 사료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맞지 않아 사관들이 그 사료를 없애버린 것이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다.

 

궁궐을 지으면서 철거된 집이 정말 수천 채인지는 알 수 없지만 광해군은 이들의 피해를 보상했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9년 6월 27일 7번째 기사

영건 도감이 아뢰기를,

"삼궁(三宮)의 가사(家舍) 및 공터의 값을 해조로 하여금 시가를 기준으로 해 헤아려 보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궁와가(宮瓦家) 한 칸의 값이 포목 4필이고, 사와가(私瓦家) 한 칸의 값이 포목 2필 반이며, 빈터 10칸의 값이 포목 2필 반이고, 동산(東山) 50칸의 값이 포목 2필인 것으로 마련하였습니다. 일체 시가에 준해서 값을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서 나의 부덕으로 말미암아 대내(大內)에 유고가 있는 탓에 장차 두 궁전을 건립하게 되었다. 그러니 원망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일이 실로 부득이한 데에서 나왔으니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또 어찌 가물(價物)을 줄여 주어서 나의 부덕을 더할 수가 있겠는가. 이번에 마련한 숫자가 지나치게 적으니 백성들의 원망이 더욱 많을 것이다. 다시금 참작해서 마련하여 아뢰라." 하였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9년 7월 3일 4번째 기사

전교하였다.

"서별궁의 담장 안으로 들어간 민가에게 반드시 빈터를 속히 지급해 주어 그들로 하여금 옮겨가서 편안히 살게 한 뒤에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 옳다."

 

궁궐 건축에 대하여 신하들의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9년 6월 28일 4번째기사

영건 도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이미 창덕궁·창경궁·경운궁 등의 궁궐이 있는데 신궐을 또 짓고 있는바, 한 도성 안에 궁궐이 지나치게 많은 듯합니다. 그런데 지금 또 서별궁에다 전우(殿宇)를 조성해서 궁궐 모양을 만들 경우, 철거를 당한 무지한 백성들이 어찌 국가의 사세상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하소연하면서 원망하는 소리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민정(民情)이 관계된 바로, 이 역시 염려하여야 합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다시금 생각을 더하시어 결단을 내리셔서 편의한 데 따라 잘 처리하소서. 그러면 몹시 다행스럽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뜻이 참으로 옳다. 다만 창덕궁·창경궁·경운궁 등 세 궁궐이 만약 무고하다면, 내가 비록 임금답지 못하지만 어찌 시세를 모르고서 신궐을 짓고 서궁을 수리하겠는가. 세 궁궐이 모두 안전하고 깨끗지 못하여서 장차 거처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부득이 이 일을 하는 것이다.

 

“세 궁궐이 모두 안전하고 깨끗지 못하여서 장차 거처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가 무슨 뜻일까?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10년 5월 1일 9번째 기사

전교하였다.

"토목 공사를 내가 좋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대내(大內)에 사고가 생겼는데 경운궁(慶運宮)에도 요망한 변고가 일어나 옮겨갈 수 없게 되었고 보면 인경궁(仁慶宮)의 공사를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궁궐은 공사가 엄청나게 커서 완공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경덕(慶德)의 소궐(小闕)을 부득이 먼저 짓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도감의 제조(提調)와 도청(都廳)이 묘궐(廟闕)과 창경궁(昌慶宮) 공사를 진행할 때와는 다르게 으레 늦은 시간에야 출근하는가 하면 종일 감독하지도 않은 채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곤 하는데, 제조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도청까지도 그러하니 장난삼아 공사를 하는 식이 된 것도 괴이할 것이 없다. 그리고 제조가 무려 10여 인이나 되는데 날짜 별로 나와야 할 제조도 병을 핑계대고 출근하지 않는 때가 허다하니 날이 갈수록 더욱 해이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또 나무와 돌을 운반해 오는 것도 지극히 완만하고 군정(軍丁)을 모집한 것도 극소수이다. 이처럼 세월만 보내면서 요포(料布)만 낭비하고 있는데, 한 번 징병(徵兵)을 요구하는 자문(咨文)이 나온 뒤부터는 공사를 중지하라고 다투어 청하고들 있다. 만약 노적(奴賊)이 분란을 일으킨다면 다른 일이야 어떻게 꾀하겠는가. 그러나 혹 조금씩이라도 사태가 안정되어 간다면 이미 벌채해 놓은 재목과 이미 모아놓은 미포(米布)를 어떻게 하겠는가. 이 일은 크고 화려한 것을 좋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궁실을 짓도록 명한 것은 안타깝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 나온 것이니, 외부의 말에 현혹되지 말고 다시 더 단속하여 속히 공사를 끝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10년 5월 16일 2번째기사

형조 판서 조정(趙挺)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양궁(兩宮)의 공사를 정지하여 인심을 수습하소서. 군졸을 가려 훈련시켜서 위급한 사태에 대비하소서. 그리고 신의 본직(本職) 및 겸대한 영건 도감 당상의 직책을 체차하여 분수를 편안하게 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다. 다만 경이 내간(內間)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니 간략하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과인이 즉위한 뒤 경운궁(慶運宮)에 임어(臨御)해도 충분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오래도록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경운궁에 변고가 생겨 억지로 창덕궁으로 옮겼는데, 피해 갈 곳 역시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창경궁(昌慶宮)을 수선하라고 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창경궁 공사가 막 끝나자마자 요귀(妖鬼)의 재앙이 이 궁에서 먼저 일어나더니 창덕궁에까지 옮겨지고 말았다. 사세상 요귀가 작란하는 곳에 그대로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먼저 인경궁(仁慶宮)의 공사를 착수했던 것인데 그것도 다만 공사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소궐(小闕)만 우선 짓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근래 동궁(東宮)에 또 요괴스러운 변고가 일어났는데 옮길 만한 곳이 없어 그대로 고통을 받고 있는 중이다. 신자(臣子)의 의리상 어떻게 감히 이 공사를 중단하라고 청한단 말인가. 더구나 나무와 돌도 이미 준비되어 있고 공사도 반 이상 진척되었는데 말해 무엇 하겠는가. 뒷날 다시 짓는다면 그 폐단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 지금 우선 편한 대로 공사를 마친다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대내의 사고, 요망한 변고, 요귀의 재앙, 요귀 작란........이런 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유생들이 상소에서 거론한 “여우 뼈와 나무로 만든 인형이 궁궐 안 각처에” 묻혀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다른 괴사가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사관들은 이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만일 광해군이 헛소리를 했다면 충분히 사도세자 못지않은 정신병 환자로 만들 수 있었을 터인데도 말이다.

 

조선 왕릉 44개 중 40개가 지난 2009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원종으로 추존된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과 부인이 묻힌 장릉(章陵)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세자로 16년, 왕으로 15년의 자리에 있었던 광해군의 묘는 이 명단에 없다. 광해군이 묻힌 곳은 왕의 무덤인 능(陵)이 아니라 묘이다.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광해군 묘 입구. 들어가는 입구 조차 초라하다]

 

[광해군 묘, 왕릉이 아닌 일반인의 묘 형태다]

 

 

[뒤에서 본 광해군 묘]

 

[사후 추존된 인조의 아버지 원종의 묘, 김포 장릉]  

 

 

참고 :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각주 1

  1. 반경(盤庚)은 중국 상(商)나라의 제19대 왕으로 탕왕(湯王) 때의 도읍지였던 박(亳)으로 천도를 하고, 혼란스러운 정치를 바로잡으려 했다. 하지만 상나라는 이전에 이미 다섯 차례나 천도를 했기 때문에 상나라 백성들은 걱정과 원망을 하며 천도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반경이 제후와 대신들을 설득해 천도를 하였고 반경이 탕왕의 정치를 시행해 상나라를 부흥시켰고 천도한 박(亳) 지역을 '은(殷)'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상나라 시대의 유적지인 은허(殷墟)가 발견된 곳으로 상나라를 '은나라'로도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라 한다. [본문으로]
  2. 정원군의 아들로 인조의 동생, 역모에 연루되어 교동으로 유배되었다 자살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