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20 - 가짜뉴스

從心所欲 2020. 1. 15. 09:37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두 채의 궁궐을 건축하면서 10년 동안 토목공사를 그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버려 1593년 10월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왕족의 사저(私邸)로 쓰이던 곳을 궁으로 개조하여 그곳에서 15년간을 지냈다. 선조가 죽을 때까지도 선조가 지내던 곳의 명칭은 정릉동 행궁이었다. 행궁(行宮)이란 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물던 별궁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조선의 왕이 자기 거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상황이었다.

 

태조3년에 창건된 경복궁, 태종 11년에 창건한 창덕궁, 성종15년에 창건한 창경궁까지 선왕들이 세워놓은 3개의 궁을 임진왜란 때 선조가 다 태워먹었다. 선조는 미안해서 궁을 다시 짓지 않고 정릉동 행궁에서 지냈다고 했다. 선조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본 광해군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루라도 빨리 궁을 재건해서 민망해하고 죄스러워했던 아버지의 명예를 되살려주고 싶지 않았을까? 사실 이것은 부자지간의 의리로 논할 문제도 아니다. 선왕들의 유산을 되돌려놓고 왕조의 권위를 세우는 것은 왕조시대 왕의 당연한 직무이다. 궁궐은 왕조의 상징이다. 궁궐은 단순히 왕과 그 가족의 주거공간이 아니다. 국정의 공간이며 또 백성에게 왕조의 위엄을 드러내고 국가의 권위를 나타내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광해군일기》를 통하여 광해군의 궁궐 건축과정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기사에 팩트는 적고 광해군이 궁궐 건축을 무리하게 진행했다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의 조각 기사와 거기에 달린 광해군을 폄훼하는 사관들의 주관적인 사론(史論)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나도는 광해군의 무리한 궁궐건축에 대한 비난은 거의 대부분 이 의도된 사론에서 나온 이야기들이라는 사실이다.

 

●광해군일기[정초본] 26권, 광해 2년 3월 26일 임인 1번째기사
항복1이 아뢰기를,

"궁궐도감(宮闕都監)의 일은 신(臣)도 관장하였는데 대저 지금의 사세는 당초와는 다릅니다. 환도(還都)한 뒤에 궁궐 셋이 모두 불에 타버렸으니, 예부터 어찌 궁궐이 없는 임금이 있겠습니까. 다만 여러 업무를 미처 감당치 못하는데 먼저 큰 역사를 거행하니 인정이 자못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국상을 당한 후로 앞에서 일하는 신하들이 모두 죄를 당하였고 당시 의논도 그 역사를 중지하려고 하므로 소신은 말하기를 '이미 재목과 인력을 모았으니 중도에 폐지하여 후일의 폐단을 더할 수 없습니다.’ 하였고, 이원익도 그렇게 여겼으므로 그대로 중지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 재목과 인력을 궁궐에 사용하면 오히려 여유가 있었을 것인데, 마침 중국 사신이 온 것과 겹쳐서 태반을 접대하는 비용으로 전용하였고, 지금 수리하고 다시 짓는 것에  대해서는 부득이 백성에게 피해를 주고 재목을 다시 배정하니 지방의 백성들이 이러한 내용을 알지 못하고다시 새 궁궐을 짓는다 여겨 원망이 자자합니다. 길례(吉禮)를 거행하고 집을 수리할 재목은 본래 비축한 것이 있어 평상시에도 선공감(繕工監)2이 물품을 진상했었는데, 지금은 각도에 배정했다고 하니, 그 말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고,

황신3은 아뢰기를,

"신이 호조에 있기 때문에 준례로 영건제조(營建提調)를 겸하였습니다. 당초 재목을 배정한 뒤에 낭청을 양호(兩湖)와 황해도·강원도 등에 보내어, 영건청(營建廳)에 나와서 바치는 미포(米布)를 제외하고 긴요하지 않은 공물(貢物)은 삭감하여 값을 주도록 하였으나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여러 사람을 동원시키는 것은 일반입니다. 그 폐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궁궐에 관한 일은 지난번 대간의 계사(啓辭)를 보았는데, 아마도 나의 본뜻을 상세히 알지 못한 듯하다. 대저 창덕궁(昌德宮)은 법궁(法宮)과는 달리 전각(殿閣)이 많지 않고 간격이 협소하여 평상시 들어갈 때에도 항상 수용하기 어려워 궁인(宮人)들은 나누어 창경궁(昌慶宮)으로 들어가곤 했다. 지금은 자전(慈殿)께서 마땅히 창경궁으로 납시어야 하니 대략 수리해야 하고, 그 역사를 인하여 아울러 긴요한 두세 곳에 짓고자 하니, 이는 평상시 규정 이외에 별도로 지으려는 것이 아니다. 재목은 영건청에서 상세히 마련하고 남는 숫자는 헤아려 삭감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궁궐도감(宮闕都監)은 이미 선조 39년인 1606년에 설치되어 그때부터 궁궐을 지을 자재를 준비하여 창덕궁의 내전 일부 건물을 건축하였다. 선조가 승하하던 1608년 1월에는 종묘의 재건을 시작하여 5달 뒤 광해군 때 완료되었다. 그런데 비축했던 자재를 중국 사신들 접대비용으로 전용해서 써버렸기 때문에 다시 자재를 마련하려다 보니 백성들의 피해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 이항복과 황신의 논지다. 선조 때 설치한 궁궐도감은 광해군 1년 10월에 혁파되었다. 하지만 각사 및 행랑, 곳간, 동궁의 수라간 등 몇 곳은 미장을 끝내지 못했고, 담장을 쌓고 벽돌을 까는 일도 미처 하지 못했다는 보고에 광해군은 국조도감의 부속 조직인 영건청(營建廳)으로 하여금 이 일을 맡아 처리하도록 지시하였었다. 그런데 2달이 지나자 사헌부로부터 시작해서 삼사가 나서 영건청을 혁파할 것을 청하기 시작하였다. 발단은 영건청에서 정릉동 행궁에 축조공사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마땅히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오로지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돌보아 미연에 대비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어찌 다시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원성과 하늘의 노여움을 더하여서야 되겠습니까.....조속히 영건청을 혁파하여 그 공사를 중지하소서.”

왕이 신하를 나무라는 듯한 질타에 광해군은 “궁궐의 공사도 완성하지 못한 곳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마무리를 하여야 하고, 더구나 자전(慈殿)이 거처하는 궁은 미처 수리하지 못한 곳이 꽤 많으니 중도에서 그치기가 어렵다.”며 영건청 혁파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간관들은 그 다음해 3월까지도 몇 달간 계속 영건청의 혁파를 주장했다. 위의 기사는 그런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이항복과 황신이 광해군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광해군은 자신의 뜻이 궁궐을 거대하게 새로 지으려는 것이 아님을 설명한 것이다. 이런 후에야 영건청을 혁파하자는 소리가 그쳤다.

 

《광해군일기》의 궁궐 건축 관련 기사를 보면 대부분의 경우 신하들은 궁궐 건축에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신하들은 늘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폐단과 자재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어려움을 거론했고 광해군은 늘 이를 안타까워했다. 그러는 사이 궁궐의 보수나 건축은 늘 제대로 진척이 안 되었다.

승리자의 역사를 대변하는 이들은 이러한 광해군과 신하들의 입장 차이를 광해군의 무리하고 과도한 궁궐 건축의 증거로 내세운다. 그래서 광해군을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무능한 폭군으로 연결시킨다. 유치한 반문이지만 조선 역사에 언제 백성들이 함포고복했던 시절이 있었던가? 사대부들만 편한 시절 말고 백성들도 같이 편안했던 시절 말이다.

홍길동으로 대표되는 농민무장대가 출몰하기 시작한 것이 이미 1500년대이고, 임꺽정이 출현한 것은 선조 바로 전인 명종 때였다. 이미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반 양민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지기 시작했는데 거기에 임진왜란까지 겹쳤다. 이것을 모두 그 시대 왕의 잘못이라고 하는 것은 불공정하다. 조선시대 왕은 누구나 백성들의 삶이 편안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신하들이 백성들의 삶이 편안해지는 것이라고 올리는 계책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면 왕들은 모두 수용했다. 그럼에도 조선 백성들의 삶이 편안하지 않았던 것은 법의 문제보다 그 시행상의 문제였다. 법의 시행과 감독은 관리들의 책임이다. 시행 과정을 감독하고 잘못을 시정하고 법에 문제가 있으면 개선할 방법을 찾아 법을 보완하는 것이 일을 맡은

관리들의 의무다. 그런데 사대부 관리들은 입으로는 백성을 말하면서도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된 일에는 입을 다물고 정작 백성의 실질적 이익에는 무관심하여 자신들의 의무를 소홀히 했던 탓에 백성들의 삶이 어려웠던 것이다. 물론 연산군과 같은 폭군의 시대나 인조와 같은 저능한 왕의 시대는 예외라 하더라도 백성이 겪는 질고의 대부분은 관리들의 무능에서 온 것이다. 조선에 이름난 유학자들은 많았지만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한 명신(名臣)은 드물었다. 왕들은 수시로 암행어사를 보내어 백성의 삶을 살폈지만 관리나 사대부들은 자신들이 편하면 곧 태평성대라고 생각했던 이기주의자들이었다.

 

광해군은 정말 백성들의 어려움은 아랑곳하지 않고 궁궐건축에 광분하였을까?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즉위년 3월 2일 3번째 기사

전교하기를,
"근래 해사(該司)4의 공사(公事)를 살펴보건대, 산릉山陵)5의 일 때문에 군정(軍丁)을 징발하고 잡물(雜物)을 복정(卜定)6한 색목(色目)이 매우 번다한데, 이는 모두 백성들에게서 책판(責辦)7하는 것이어서 내가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앞으로 조사(詔使)8의 사행(使行)이 계속해서 나올 터인데 그때의 징독(徵督)9은 반드시 이것의 몇 배가 될 것이다.

 

궁궐의 역사(役事)는 사세가 용이하게 다시 거행하기 어렵고 도감(都監)에 있는 미포(米布)는 모두가 백성들에게서 나온 것이니, 고을에 저장해 놓은 아직 상납(上納)하지 않은 숫자를 해조(該曹)10에서 일일이 조관(照管)11하여 우선 산릉과 조사 등의 일에다 옮겨 사용함으로써 백성들의 힘이 일푼이나마 펴지게 해야 한다. 단, 궁궐도감에 저장된 미포는 이미 옮겨다 쓰고 나서 또 이를 외방에 가정(加定)하는 것은 매우 온편하지 못한 처사이다. 그리고 시장에서 무역(貿易)하는 것은 이것이 해사(該司)에서 눈썹이 타는 듯한 급박함을 해결하기 위한 데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매양 이를 규례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시민(市民)도 또한 나의 백성인데 그냥 물화(物貨)만 가져오고 그 값을 지불하지 않는 것은 매우 무리한 일이다. 무역해다가 쓴 것에 대한 값은 일일이 준급(准給)하고 이 뒤로는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무역하기를 즐겨하여 거듭 백성들에게 원망을 끼치는 일이 없게 하라. 이런 내용으로 대신에게 이르라."

 

이미 즉위하자마자 궁궐 건축으로 백성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교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저질러놓고 이항복과 황신은 그 책임을 왕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광해군은 즉위년 5월에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였다. 선혜청은 고을에서 진상하는 공물의 폐해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세(田稅)는 물론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신역보다도 더 백성들을 힘들게 한 것이 공납이었다. 원래는 각 지역별로 지역 특산물 위주로 조정에 필요한 공물을 진상하는 취지의 제도인데, 갖가지 명목으로 공물을 진상해야 되는 횟수가 늘어난 것은 물론, 중간 관리와 향리의 농간으로 비싼 값을 주고 방납인(防納人)의 물건을 사서 진상해야 되는 상황으로 변질되었다.

방납인(防納人)이란 ‘공납을 막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들은 공납자(貢納者)가 직접 공물을 구하여 진상하는 것을 막고 자신들의 물건들로만 공납할 수 있도록 향리들과 결탁한 업자들이다. 업자들은 폭리를 취했고 그만큼 백성들의 고통과 부담이 커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여 공물을 쌀로 대신 내게 하고 선혜청에서 그 쌀로 필요한 공물을 사서 필요한 곳에 보내주도록 한 것이다. 또한 정해진 세율에 따라 거두되 1년에 두 번만 거두고 그 외에는 절대 다른 명목으로 더 거둘 수 없게 하는 장치도 마련했다. 이를 대동법(大同法)이라고 하며 우선적으로 경기도에 먼저 시험 실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 좋은 뜻의 제도도 시행상에 관리와 향리들의 갖가지 농간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신하들은 이 대동법 시행의 문제점은 해결하지 않고 몇 년 뒤에 다시 광해군에게 8도 실시를 건의했다. 광해군은 이미 법 시행의 문제를 알고 이 법 때문에 “본청(本廳)의 하인들이 교활한 짓을 하는 소굴”이 되어가고 있다며 “팔도에는 절대로 경솔하게 동시에 시행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 왕도 아는 문제점을 신하들이 몰랐을 리 없다. 관리들이 진정 백성을 위해 전국적으로 시행해야할 법이었다면 그 해결책을 들고 다시 나타났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여 대동법은 광해군 치세 기간 내내 경기도에만 시행되었다. 이를 두고 후세는 또 광해군이 이 좋은 법의 전국실시를 반대했다는 비난을 해대고 있다.

이이가 했던 말이다 ;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은 실질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니, 정치를 하면서 시의를 알지 못하고 일을 하면서 실질적인 것에 힘쓰지 않는다면 비록 성현이 서로 만난다 할지라도 효과를 거둘 수 없다.” “시의(時宜)라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便通)하여 법을 만듦으로써 백성을 구하는 것이다.”

 

광해군은 광해 3년(1611년)에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리고 계속 경운궁에 머물다가 1615년에 창덕궁으로 옮겼다. 이를 두고도 마치 광해군이 인목대비는 경운궁에 처박아놓고 자기 혼자만 새로 지은 궁으로 이어한 것처럼 매도하는 글을 지금도 써대는 사람들이 있다. 《광해군일기》에는 이미 광해 2년 9월부터 광해군에게 창덕궁으로 이어할 것을 간청하는 기사들이 나온다. 그렇지만 광해는 그때부터도 5년이나 더 경운궁에 머물렀다. 대신들의 간청에도 광해군이 계속 경운궁에 머문 이유에 대하여 실록에는 명확히 나와있지 않다. 그러나 《광해군일기》에 사관들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7년 4월 2일 1번째 기사
왕이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앞서 왕이 경운(慶運) 행궁에 길한 기(氣)가 있다는 것을 들었고 창덕궁은 일찍이 내변(內變)을 겪었으므로, 창덕궁이 비록 중건되었지만 거처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臺臣)들이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가 이때 이르러 대내(大內)에 요사스런 변괴가 많았으므로 곧 택일하여 이어하였다. 그런데 택일하여 갈 때 귀신을 쫓는 술법을 많이 써서 서울 사람들이 크게 놀라워했다.】

 

기사의【 】부분은 사관의 사론이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광해군을 옹호하는 입장이라면 이렇게 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왕은 창덕궁이 수년전에 새로 중건되었음에도 자전이 경운궁에 머물기를 원하므로 부모에 대한 도리로 이어하지 않았다. 계축옥사 중에 친가와 영창대군에 미친 화(禍)로 자전이 왕을 자식으로 대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원망이 쌓인 후에도 왕은 자전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경운궁에 머물다가 계속되는 대신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옮기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내전이 상(喪)을 당하였고 역옥(逆獄)이 계속 일어나므로 나라에 일이 많아 여기까지 미칠 틈이 없었다."고 답한 일이 있는데 본인의 복잡한 감정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사 중에 언급된 ‘창덕궁의 내변’은 아마도 연산군이 창덕궁에서 폐위된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광해군이 재수를 따지고 반란을 걱정하여 궁궐을 옮기지 않았고 또 궁궐을 옮기는데 사술을 썼다는 말은 아무리 광해군을 폄훼하는 입장에서 쓴 사론이라도 자신들이 쓴 《광해군일기》 속에 드러난 광해군의 모습과 비교해도 참으로 치졸하고 참람하다.

사관들이 편찬한 《광해군일기》에는 앞뒤가 안 맞는 기사들도 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광해 7년 4월 6일 1번 기사

선수청12이 아뢰기를,

"궐내의 건축하는 일은 공사가 대단히 크고 체면도 중한데, 각사를 호령하고 공장을 불러 모으는 일은 진실로 선수청의 두서너 직질이 낮은 관원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별도로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헤아려 조처하는 일은 해조에 문의하라. 삼조 판서를 예겸제조로 삼아 부지런하고 성실한 제조·낭청·감역관은 묘당과 자세히 의논하여 알맞은 인원을 헤아려 선정해서 환경전(歡慶殿)·문정전(文政殿)·명정전(明政殿)과 경운궁(慶運宮)13을 수리하라." 하였다.

【〈이것이 토목의 시초이다.〉 왕이 궁궐을 크게 지으려고 우선 옛 궁전을 수리한다는 명목으로 인경(仁慶), 경덕(慶德) 양궁을 창립하였는데, 공역이 9년이 되어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가를 헐어버린 것이 거의 천여 채에 이르렀고 벌목하는 조도관(調度官)이 사방으로 나뉘어 나갔다. 이 때문에 팔도가 분주하였고 민력은 탕진되었다. 〈또 경복궁(慶福宮)을 중건하고 경복궁으로부터 각도(閣道)를 만들어 인경궁(仁慶宮)에 연결하고자 하였는데, 미처 시작하기 전에 반정(反正)의 거사가 있었다.〉 이때 "성안에 궁궐이 가득하고 조정에 재상이 가득하니 시사가 반드시 변할 것이다."는 참언이 있었는데, 〈대체로 역적을 토벌하였다는 위훈(僞勳)으로 재상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져 결국에는 그 참언과 부합되었다고 하였다.〉 】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10년 4월 8일 6번째 기사

전교하였다.

"새 궁전을 건축하는 공사는 대개 대내(大內)에 일이 있었기 때문에 실로 어쩔 수 없이 행하게 된 것인데 혹시 백성을 병들게 하지나 않을까 하고 늘 걱정하느라 한시도 마음이 편치를 않았다. 듣건대 요사스러운말들이 또 일어나 듣는 이들을 미혹시키고 있다 하는데, 주자동(鑄字洞) 근처에 또 궁궐을 지으려 한다고도 하고 혹은 경복궁(景福宮)과 인경궁(仁慶宮)을 이어지게 하는 공사를 벌인다고도 하여, 도성 백성들을 동요시키고 원근에서 듣고는 놀라게 하고 있다 한다. 이렇듯 인심이 불측한 때를 당하여 말을 만들어 내 군중을 현혹시키는 자는 효수(梟首)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방(榜)을 걸어 개유(開諭)함으로써 여론을 진정시킬 일을 한성부로 하여금 상세히 살펴 거행토록 하라."

 

《광해군일기》[중초본]을 바탕으로 [정초본]을 편찬하던 사관들은 아마 깜짝 놀랐을 것이다. [중초본]의 광해 7년 기사와 광해 10년 기사의 앞뒤 아귀가 안 맞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7년 기사의 사론에는 광해군이 경복궁에서 인경궁까지 각도를 만들어 연결하려고 했다는데, 그로부터 3년 후의 기사에는 그런 소문이 나도는 것을 광해군이 걱정하는 기사가 있는 것이다. 결국 광해 7년의 [중초본]기사는 [정초본]에서 빠져버렸다. 그럼에도 광해군이 경복궁에서 인경궁까지 지붕을 씌운 행각을 지으려했다는 소리는 지금까지도 광해군의 무리한 궁궐건축을 비난하는 단골 소재로 등장하되고 있다. .

 

[창경궁 명정전.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궁궐의 전각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6년(광해군 8년)에 복원하였다.]

 

[1900년대 돈화문, 조선고적도보.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 대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9년(광해 즉위년)에 중수(重修)하였다.]

 

[돈화문, 뉴스인사이드 사진]

 

오래전부터 사관은 동호직필(董狐直筆)을 생명으로 삼았다. 권세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史實)을 바르게 기록(記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관들은 《광해군일기》에 이런 짓들을 했다.

《인조실록》의 사론은 어떨까? 인조정란이 일어난 이틀 뒤의 기사다.

 

●인조실록, 인조 1년 3월 15일 8번째 기사

대장 김류와 이귀에게 명하여 창덕궁(昌德宮) 화재 현장에 가서 그 수습을 감독하게 하였다. 대개 반정하던 날 밤에 호위병이 실화하여 궁전이 연소되고 광해의 별탕고(別帑庫)14가 모두 잿더미가 되었기 때문이다.

상이 이어 여러 신하에게 일렀다.

"부정하게 들어온 재물은 끝내 자기의 소유가 되지 않는 것이니, 지금 이 광해의 일에서 징험할 수 있는 것이다. 금후부터 임금과 신하 모두 이것으로 경계를 삼아야 할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폐조의 10여 년 동안 한도가 없이 마구 수탈하여 관직을 팔고 죄수를 파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다. 뇌물이 횡행하여 대궐문이 저자와 같이 되어 팔도의 재물은 탕갈되었으나 궁중은 차고 넘쳤는데, 일조에 불이 일어 문득 잿더미로 변하였다. 거울삼을 것이 멀지 않으니 바로 전대의 패망에 있다. 위대하도다, 왕의 말씀이여! 이는 참으로 종묘 사직의 복이로다.

 

이것이 용비어천가지 어디 동호직필하는 사관의 사론인가? 사관은 조선시대의 언론이다. 자신들의 호, 불호에 따라 기사를 작성하는 작태가 지금의 언론과 하나 다르지 않다. 자신들의 말대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만들며 지은 그 아까운 궁궐을 자기들 정권 잡느라 태워먹고도 그에 대한 일말의 미안함이나 가책도 없다. 나라의 이익보다 자신들의 집권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지금 정치인들의 작태와 판박이다.

 

가짜뉴스를 만드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반박이 들어오면 새로운 의혹으로 되치는 것이다.

"어쨌든 광해군이 궁궐 많이 지은 것은 사실 아닌가?!"

 

[창경궁 명정전 일대, 국가문화유산포탈 사진]

 

 

 

 

참고 :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1556 ~ 1618), 당시 좌의정 [본문으로]
  2. 조선시대 토목과 영선(營繕)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서 [본문으로]
  3. 황신(黃愼, 1560 ~ 1617) : 당시 호조판서 [본문으로]
  4. 해당 관청(官廳) [본문으로]
  5. 산릉은 임금과 왕비(王妃)의 무덤으로 인산(因山) 전에 아직 이름을 정하지 아니한 능(陵)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선조의 능 [본문으로]
  6. 조선시대 별공(別貢)이 있을 때 민호를 임의로 정하여 부과하던 불법적인 조세 [본문으로]
  7. 책임을 지워서 물건을 마련하게 함 [본문으로]
  8. 중국 사신(使臣). 중국 임금의 조칙(詔勅)을 가지고 온다 하여 이르던 말 [본문으로]
  9. 세금이나 물품 따위의 징수를 독촉함 [본문으로]
  10. 6조(曹) 중 해당이 되는 조(曹), 관련 부처. [본문으로]
  11. 살펴서 단속하거나 처리함 [본문으로]
  12. 창경궁 수리를 위해 설치했던 임시관청 [본문으로]
  13. 모두 창경궁내의 건물로 환경전은 침전(寢殿), 문정전은 편전(便殿), 명정전은 정전(正殿) [본문으로]
  14. 왕실의 재산을 보관하던 내탕(內帑) 외에 별도로 지은 왕실의 창고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