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19 - 서궁과 대비

從心所欲 2020. 1. 11. 11:04

모든 역사 기술은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비시켰다는 점을 과장되게 부각하여 광해군을 폭군으로 몰아 세우고 있다.

500년 가까운 이 정치적인 억지 프레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광해군은 죽어서도 억울하기만 할 것 같다.

 

인목대비의 친정 아버지인 김제남과 관련된 인물들을 국문하는 중에 ‘선조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인목왕후와 김제남이 의인왕후의 능인 유릉(裕陵)에 무당들을 잇달아 보내어 저주(咀呪)하였다‘는 진술이 나왔다. 의인왕후(懿仁王后)는 선조의 첫 번째 왕비로 1600년에 사망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목대비의 궁 안에서도 ’차마 듣지도 말하지도 못할 일들’이라고 표현된 저주의 무술(巫術) 행위가 있었다는 진술도 나왔다.

 

물론 후세의 서인 사관들은 이 진술이 모두 꾸며낸 것이라고 《광해군일기》 기사에 사론(史論)을 달았지만, 그것은 인조정란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세력들이 인목대비를 보호하고 광해군을 폄훼하려고 넣은 변명에 불과하다.

죄인들을 심문한 공초를 통하여 이 사실을 알게 된 광해군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인목대비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인목대비에 대한 효심에 변함이 없었다. 인목대비를 폐비하자는 주장은 이미 계축옥사 때부터 있었지만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폐비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5년 5월 25일 12번째 기사

장령(掌令)1 정조, 윤인 등이 역모에 관련된 모후의 처리 문제를 제기하며 사직을 청하다

 

.........(전략) 이는 종묘사직에 죄를 지은 것으로서 모후(母后)의 도가 끊어진 것입니다. 전하에게 있어서는

모자간의 정리가 지극하다 할지라도 종묘사직에 있어서는 끊어야 할 악이 분명히 드러난 셈인데 오늘날 신하된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장차 모후로 대접해야 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천지 신인(神人)의 주인 되시는 몸이니

역모를 참여해 들었던 모후와 한 궁궐 내에 함께 계실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

 

신들의 소견이 이러하기에 오늘 궐하에서 양사가 회동하였을 때에 ‘전하께서 전에 없던 망극한 변을 만나셨으니

평상시의 도리로 처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마땅히 모후와 각각 다른 궁에 거처함으로써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다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더니, 좌우가 모두 중대한 사안이라고 하면서 어려워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자리를 파하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막대한 논을, 끝내는 섣불리 발론하게 된 결과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 모두가 신들의 소견이 짧고 얕은 탓으로 신임을 충분히 얻지 못한 결과이니 신들이 어떻게 감히

스스로 옳다고 여기면서 거만하게 그대로 있겠습니까. 속히 먼 곳으로 쫓아 보내도록 명하시어 신하로써

망언한 죄를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덕이 없는 몸으로 몇 년 동안 자리를

더럽히면서 신민에게 죄를 지은 탓으로 이런 변고가 있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 노릇 하는 것도 즐겁지 않고

얼굴만 달아올라 곧장 땅 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데 그것도 안 되기에 스스로 애통해 할 따름이다. 최유원

등에게도 어찌 의견이 없겠는가. 그대들은 물러가 생각해 보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사헌부 관리들이 인목대비와 그 아버지 김제남이 의인왕후에 저지른 죄악은 종묘사직에 역모의 죄를 지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광해군이 인목대비에 대한 개인적인 의리에 얽매어 이들을 제대로 벌 주지 않는다고 힐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이러한 악행을 저지른 인목대비를 자신들이 왕의 어머니로 모시는 것이 타당한 일인지를 반문하고 있다.

자신들의 생각으로는 광해군과 인목대비가 한 궁궐 안에 같이 거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러한 의견을 대신들에게 개진하였으나 대신들이 이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못한 까닭에 애초에 말을 꺼낸 책임을 지고 자신들이 물러나겠다고 왕을 간접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광해군은 사헌부 관리들의 사직은 말리면서도 그들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차마 받아들일 수는 없던 것이었다.

 

이후 광해군 7년에 세간에서는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비하려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광해군이 어떻게 하면 이런 소문을 그치게 할지를 정인홍에게 묻는 기사가 나온다. 그러다 광해 9년인 1617년 11월 5일에 유학(幼學)들이 대비의 폐출을 상소한 것을 기점으로 그 이후 2달 동안 대비를 폐출하라는 상소가 계속 이어졌다. 그 가운데 11월 25일, 100명에 이르는 관학 유생들이 연명으로 폐비를 요구하며 올린 상소에는 인목대비의 죄를 이렇게 나열하였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서궁의 죄악은 말하기에도 참혹합니다. 요사한 무당을 신봉하여 의인 왕후의 능묘에

저주를 행하라고 요구한 결과 썩은 뼈를 능위에 묻어 욕됨이 지하에까지 미치게 하였으며 살점에다가 왕후의

휘를 써가지고 까마귀와 솔개에게 나누어주어 먹게 한 것이 첫 번째 죄입니다.
아들 이의(李㼁)2를 귀하게 만들려고 억누르기를 도모하여 여우 뼈와 나무로 만든 인형을 궁궐 안 각처에다
묻었으며 흉악한 소경을 은밀히 끌어들여 요사스런 경문을 외우게 한 것이 두 번째 죄입니다.
선왕이 병이 났을 때 밖으로는 최영경·홍로와 결탁하여 형세로 서로 의탁하였으며 은밀히 역적 이진(李珒)3
약속하여 왕위를 그에게 물려주었다가 이의가 성장하기를 기다려 넘겨주려고 한 것이 세 번째 죄입니다.
남몰래 김제남을 사주하여 대군집의 종 1천여 명을 단속하여 은밀히 각 부서(部署)에 배치해서 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활용하게 한 것이 네 번째 죄입니다.
좌의정 정인홍이 최영경을 공격한 상소가 들어오자 감히 간악한 마음을 먹고 기회를 틈타 세자를 바꾸려고
선왕에게 울면서 고하여 엄한 하교를 누차 내리게 해서 나라의 근본이 위태로울 뻔한 것이 다섯 번째 죄입니다.
선왕이 세상을 하직하던 날에 유언을 조작하여 자기 아들인 이의를 여러 재상에게 부탁하여 보호하게 한 것이
여섯 번째 죄입니다.
성상이 임어하신 후에는 무당에게 저주를 행하게 해서 여러 해 동안 계속하여 닭·개·양·돼지 등의 짐승을 대궐
뜰에다 버리지 않는 날이 없는 등 기필코 성상을 해치고야 말겠다는 심산이었으니, 이것이 일곱 번째 죄입니다.
김제남을 사주하여 불평분자들과 결탁하고 무사들과 짜서 나라에 틈이 생길 때를 기다렸다가 국정(國政)을
옮기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여덟 번째 죄입니다.
발칙한 말을 지어내어 전하를 속이고 그의 족속들에게 말을 퍼뜨렸으며 심지어는 반역의 잔당으로 하여금
흉측한 격문에 써넣게 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아홉 번째 죄입니다.
내탕고의 돈을 많이 꺼내서 서양갑에게 두둑하게 주어 왜국에 가서 결탁하여 외원(外援)이 되게 하였으며
이의를 세운 뒤에는 중국을 배반하려 하였으니, 이것이 열 번째 죄입니다." 

▶서궁(西宮) : 인목대비가 머물던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 여기서는 인목대비를 가리킨다.

 

사안이 너무 위험하고 중대한 탓인지 각지에서 올라오는 상소에도 간관들은 잠잠히 해를 넘겼는데 새해가 되자 1월 2일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을 필두로 관리들의 청(請)이 시작되었다. 급기야 1월 6일에는 모든 백관이 대비의 폐출을 청하고 나섰다. 이에 광해군은 "내가 너무도 불행하여 또 이런 변을 만났는데 듣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다."고 답했다. 그 이후는 계축옥사 때와 같은 상황이 다시 반복된다. 한 달 가까이 괴롭힘을 당한 끝에 백관이 또 다시 몰려오자 광해군은 할 수 없이 한 발 물러섰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10년 1월 28일 3번째 기사

 

백관이 초계하니, 답하기를,

"내 운명이 너무도 기구하여 하늘에 어여삐 여김을 받지 못하여 이런 큰 변고를 만났으므로 밤낮으로 목 놓아

울었다. 내 몸이 상하는 것이야 걱정할 것이 못되지만, 유릉(裕陵)에 흉악한 짓을 자행하여 선후(先后)를

저주한 이 일이야말로 신자(臣子)로서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극한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산처럼 분노하고 마음속으로 일제히 통분해 하자 경들이 대궐 뜰을 가득 메우고 의논하면서 날마다 세 번씩

다그쳤으므로 형세상 끝내 저지하기는 어려웠기에 우선 백관의 조알(朝謁)을 정지시킴으로써 중외(中外)의

인심에 답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부득이해서 나온 일이었지 어찌 그렇게 한 것이 과인의 본심이었겠는가.

걱정되고 두려우며 안타깝고 위축되는 심정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런데 생각지 않게 경들이 나의 뜻을

살피지 못하여 백관들을 이끌고 얼어붙은 대궐 뜰에 모두 모여 직무도 폐기한 채 따를 수 없는 일을 억지로

청하고 있다.

돌아보건대 내가 무슨 마음으로 이 변고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경들이 일단 종묘사직과 관계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상 내가 줄곧 거절할 수만은 없는 처지이다. 지금 이후로는 단지 서궁(西宮)이라고만

칭하고 대비(大妃)의 호칭은 없애도록 하라. 그리고 다시는 폐(廢)라는 글자를 거론하지 말아 사은(私恩)과

의리 모두가 온전하게 되도록 하라. 공봉(供奉)을 감손(減損)하는 절목(節目)에 대해서는 일일이 자세하게

의논하여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광해군이 일단 '대비'라는 호칭을 쓰지 않는 것을 허락하였지만 그렇다고 바로 폐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목대비의 지위를 낮출 것인지를 정한 뒤 왕의 허락을 받아야 정식으로 폐비절차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좌의정 한효순, 우의정 민몽룡 등 15명은 1월 30일에 모여 인목대비를 폄손(貶損)하는 절목을 의논하였다.

이들이 합의한 인목대비의 폄손 절목은 이렇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10년 1월 30일 2번째 기사

 

존호(尊號)를 낮추고 전에 올린 본국의 존호를 삭제하며, 옥책(玉冊)4과 옥보(玉寶)5를 내오며, 대비라는

두 글자를 없애고 서궁(西宮)이라 부르며, 국혼(國婚) 때의 납징(納徵), 납폐(納幣) 등 문서를 도로 내오며,

어보(御寶)6를 내오고 휘지표신(徽旨標信)7을 내오며, 여연(輿輦)8 의장(儀仗)9을 내오며, 조알(朝謁)10·

문안(問安)·숙배(肅拜)11를 폐지하고, 분사(分司)12를 없애며, 공헌(貢獻)13을 없애며 서궁의 진배

(進排)14는 후궁(後宮)의 예에 따르며, 공주의 늠료(廩料)15와 혼인은 옹주(翁主)의 예에 따르며, 아비는 역적의

괴수이고 자신은 역모에 가담했고 아들은 역적의 무리들에 의해 추대된 이상 이미 종묘에서 끊어졌으니 죽은

뒤에는 온 나라 상하가 거애(擧哀)16하지 않고 복(服)을 입지 않음은 물론 종묘에 들어갈 수도 없으며, 궁궐

담을 올려 쌓고 파수대를 설치한 다음 무사를 시켜 수직(守直)하게 한다.

 

하지만 신하들이 내놓은 이 폄손 절목을 광해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무려 10개월 동안 거의 매일 같이

신하들이 이 폄손 절목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광해군은 끝내 거절했다.

광해군은 애초에 대비의 호칭만 양보하고 그냥 인목대비가 지내던 대로 지낼 수 있게 해주려던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비시키고 서궁으로 쫓아냈다는 말은 무지하고 악의적인 표현이다.

처음 왕비시절부터 인목대비는 서궁으로 이름이 바뀐 경운궁에서 그냥 계속 살았다. 오히려 그 서궁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게 했어야 쫓아내는 것이다. 광해군은 대비라는 이름만 내주고 그것을 방패로 인목대비를 보호한

것이다. 서궁(西宮)은 오히려 인목대비를 살린 이름이다.

 

흔히 인목대비 폐비 사건을 세간의 민심을 거스르고 대북 세력과 광해군이 합작하여 독단적으로 해치워버린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또한 사실이 아니다. 그 당시에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비운과 비련의 아이콘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그것은 인조정란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광해군의 폐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 오히려 인목대비는 왕족으로 역모에 이름이

오르고도 살아남은 아주 희귀한 케이스다. 서인들이 편찬한 《광해군일기》에는 조정의 신하들 말고도 인목대비를

빨리 폐출시키라거나 심지어는 죽이라는 유생과 유학자들이 올린 상소의 흔적이 수도 없이 남아 있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10년 1월 29일 8번째 기사

 

유학 이훤(李萱), 임징지(任徵之), 조유황(趙有璜), 권문욱(權文郁), 임원(任援), 이송수(李松壽), 김신(金愼),

이광홍(李光弘), 서국재(徐國材)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어제 삼가 성상의 비답을 보았습니다. 신들은 물론 전하의 효성이 지극하다는 것과 종묘사직을

부탁한 뜻을 생각하시는 것이 절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성상의 비답에 ‘단지 서궁이라고

칭하라.’고 분부하신 점에 대해서는 신들이 갈수록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경운궁(慶運宮)은 바로

법궁(法宮)입니다. 일단 궁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상 하루라도 아무 이름이 없는 사람을 이곳에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대비라는 이름이 이미 없어졌는데 어찌 그대로 법궁에 거처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공(支供)17하는 절목(節目)을 자세히 정하게 하셨는데 이 일은 더욱 신들이 예상치 못한 것입니다.

지공이라 하는 것은 바로 나라 사람들이 지공하는 것을 말하는데, 어찌 나라 사람들이 지공하는 것을

가지고 나라 사람들이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원수로 여기는 자에게 지공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하의 처지에서는 그저 어주(御廚)18의 물건을 가지고 끊임없이 개인적으로 보내신다면 혹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신자(臣子)19의 입장에서 합법적으로 작정할 경우에는 비록 지푸라기 하나라도 의리상

지공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지공하는 일을 없애고 속히 본가(本家)에 돌려 보낸

다음, 태묘(太廟)에 고하고 중국 조정에 주문(奏聞)20하여 신민의 소원을 통쾌하게 풀어 주소서."

하였는데, 의정부에 계하하였다.

 

하도 신하들의 청과 상소가 몰려들고 그 내용도 한결같다보니 광해군도 진력이 났는지 한 상소에는 이런 답변도 했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10년 5월 13일 3번째 기사

전라도 진사 이해(李垓)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서궁(西宮)이 사직을 위태롭게 하려 한 그 죄악이 흘러넘치므로 초야에서 항장(抗章)을 올리고 삼사가 잇달아

발론하고 있으며 백관들이 조정에서 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관계를 끊어야 하는 데도 끊지

않으시고 폄손하는 절목에 대해서조차 아직 윤허를 내리지 않고 계십니다. 오늘날의 의론으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문(奏聞)한 뒤에 폐출하는 것이고 하나는 폐출한 뒤에 주문하는 것인데, 이 둘 중에서

택하여 좋은 쪽으로 처치해야 할 것입니다.

서궁이 있는 곳은 바로 선왕의 법전인데 아직도 태연히 그 속에서 거처하고 있으니, 바깥 집으로 옮겨놓은 뒤

숙위(宿衛)와 시어(侍御)와 공헌(貢獻)과 문안(問安) 등의 일을 모두 정지시키고, 고복(誥服)21은 천자가 하

사한 것인 만큼 속히 내어 따로 보관해두고 황명(皇命)을 기다리는 것이 사리상 당연합니다. 신들의 소를

속히 정부에 내리시어 급급히 거행토록 하시고, 이와 함께 상소하는 유생들을 막고 다른 고을로 내쫓은 함평

현감(咸平縣監) 박정원(朴鼎元)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렇게 무더운 날씨에 멀리 와서 소장을 진달하다니 나라를 위한 정성이 참으로 가상하기만 하다. 서궁의 일은

내가 차마 듣지 못하겠는데, 절목을 행하는 일은 조정에서 참작하여 처리할 것이다. 그리고 지방 수령을 지방의

소장(疏章)22 때문에 그냥 처치해 버린다면 뒷날 폐단이 생길 듯도 하다. 이런 뜻을 잘 알고 물러가 자신의

공부나 하도록 하라." 하였다.

 

인목대비를 폐출하라는 신하들의 끈질긴 요구에도 광해군은 끝까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광해 10년 11월 27일에 ‘합사하여 서궁 폄손절목과 이광의 율(律) 적용을 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아니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끝으로 더 이상 이 문제는 《광해군일기》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 해인 광해 11년 1월 13일, 광해군은 ‘이후로 서궁과 저주에 관한 일은 조보(朝報)에 내지 말라’는 전교를 내린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인목대비 폐모(廢母)의 전말이다. 인목대비는 광해군 덕분에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에게 '패륜'이라는 말을 절대 입에 올려서는 안될 당사자였다.

 

인조정란이 일어난 날, 능양군을 비롯한 정변세력은 인목대비를 찾아가 정변사실을 알리고 어보를 올린 뒤 그 어보를 능양군에게 다시 내려 주기를 청했다. 즉 능양군을 왕으로 인정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기사 말미에 사관이 덧붙인 사론(史論)에는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향해 내뱉은 말이 실려있다.

 

.......그리고 대신·제장들이 모두가 왕위를 속히 결정할 것을 청했는데, 대비가 대답하지 않고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먼저 이혼(李琿)23의 부자의 머리를 가져와서 내가 직접 살점을 씹은 뒤에야 책명을 내리겠다." 24

 

인목대비의 광해군에 대한 분노를 강조하느라 인용한 말이겠지만, 인목대비의 심성과 교양을 드러내는 말이다.

 

[칠장사(七長寺) 전경 : 인종 1년인 1623에 인목대비가 칠장사를 김제남과 영창대군의 원찰(願刹)로 삼아 크게 중창하였다. 경기도 안성시(安城市) 이죽면(二竹面) 칠현산(七賢山) 소재, 안성시 사진]

 

 

 

참고 :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용어사전(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사헌부의 정4품 관직 [본문으로]
  2. 영창대군 [본문으로]
  3. 임해군 [본문으로]
  4. 국왕, 왕비, 대비, 왕대비, 대왕대비 등에게 존호를 올릴 때 송덕문을 옥에 새겨 놓은 간책 [본문으로]
  5. 존호(尊號)를 새겨 넣은 인장(印章) [본문으로]
  6.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례용 도장으로 존호, 휘호를 올릴 때 제작하여 보관하는 일종의 상징물 [본문으로]
  7. 궁중의 급변을 전할 때나 궐문을 드나들 때 표로 지녔던 신분증 [본문으로]
  8. 임금이 타는 수레와 가마 [본문으로]
  9. 의식에 사용되는 무기와 기구 [본문으로]
  10. 조정에서 임금을 뵙거나, 임금이 상왕(上王)이나 태상왕(太上王)을 만나 뵙는 것 [본문으로]
  11. 종친, 백관이 임금에게 공손히 절하는 예(禮) [본문으로]
  12. 중앙에 있는 관아(官衙)의 사무를 나누어 맡기기 위하여 다른 곳에 따로 설치한 관아. [본문으로]
  13. 공물(貢物)을 바침 [본문으로]
  14. 대궐이나 각 궁(宮), 관아(官衙)에서 쓸 여러 가지 물품을 호조(戶曹)나 해당 관아(官衙)에서 지급하는 것 [본문으로]
  15. 벼슬아치들에게 주던 봉급 [본문으로]
  16. 곡읍(哭泣)하는 예 [본문으로]
  17. 관비물품(官備物品)을 지급하는 것 [본문으로]
  18. 임금이 먹을 음식을 조리하는 부엌, 수라간(水刺間) [본문으로]
  19. 임금을 섬기어 벼슬하는 신하(臣下) [본문으로]
  20. 제후가 천자에게 사안을 아뢰는 것 [본문으로]
  21. 중국 황제가 제후국의 국왕을 인준(認准)하는 문서인 고명(誥命)과 지위에 따른 관복(官服)인 명복(命服) [본문으로]
  22. 상소(上疏)하는 글 [본문으로]
  23. 광해군 [본문으로]
  24. 광해군일기, 광해 15년 3월 13일 9번째 기사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