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21 - 인경궁의 진실

從心所欲 2020. 1. 19. 15:58

 

{일본인이 그린 조선국왕성지도 (朝鮮國王城之圖), 19세기 상상화로 추정]

 

[<조선국왕성지도(朝鮮國王城之圖)>, 채색판화, 일본에서 1894년에 제작, 37.1 x 72.9 cm, 일본 와카야마 시립박물관 소장, '이씨 조선의 수도, 한성에 있는 왕궁 경복궁을 부감한 비단 그림’이라는 해설이 있지만 실제 보고 그린 것이 아닌 상상화로 추정된다]

 

광해군은 1610년에 창덕궁, 그리고 1616년에는 창경궁의 중건을 마쳤다. 순서대로라면 다음은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을 중건할 차례다. 그런데 광해군은 경복궁을 재건하는 대신 인왕산 밑에 인경궁(仁慶宮) 건설을 시작하고 나중에 경희궁이 된 경덕궁(慶德宮) 공사도 거의 동시에 시작한다. 이 두 궁궐 건축을 꼬투리로 서인들은 광해군에게 ‘무리한 궁궐건축으로 정란을 자초한 폭군’이란 올가미를 씌우는데 성공했다. 서인들의 프레임은 대략 여섯 가지다.

1) 불필요한 인경궁을 대규모로 건축하려 했다.

2)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말을 듣고 시기하여 그 자리를 뺏어 경덕궁을 지었다.

3) 무리하게 두 궁궐 건축을 동시에 진행하여 백성의 고초가 심했다.

4) 수천 채의 만가를 철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5) 궁궐을 건축하는데 풍수지리 등 사술에 매달렸다.

6) 교하로 천도하려고 했다.

 

가짜뉴스는 하나의 팩트에다 뇌피셜을 덧붙이거나 몇 가지 팩트를 뇌피셜로 연결고리를 만드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그 뇌피셜에 반대되는 팩트는 감추고 말하지 않는다. 서인들이 편찬한 《광해군일기≫의 인경궁 건설 과정이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9년(1617) 1월 18일 3번째 기사

선수 도감이 아뢰기를,

"비망기로 ‘현재 쓰고 있는 법궁(法宮)에 혹 사고가 있을 경우 옮겨갈 곳을 미리 강정해 두는 것이 옳다. 경복궁(景福宮)은 공사가 아주 커서 오늘날의 물력을 가지고는 결단코 쉽사리 조성을 의논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인왕산(仁王山) 아래에다 잘 요리해서 지나치게 높고 크게 하지 말고 시원하고 깔끔하게 짓는다면 편리할 듯하다. 속히 긴 담장을 쌓고 남아 있는 재목을 가지고 조하(朝賀)를 받을 정전(正殿)을 짓기만 한 다음 다시 형세를 살펴서 다 짓는 것이 더욱 좋을 듯하다. 선수 도감으로 하여금 상세히 살펴서 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도감의 제조인 호조판서 이충, 예조판서 심돈, 병조참판 이병이 모두 정고(呈告)1 중에 있어서 좌기(坐起)할 수가 없습니다. 제조인 이충·심돈·이병을 명초(命招)하여 출사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같이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이것이 인경궁(仁慶宮)의 역사를 일으키는 시초였는데, 당초에는 단지 이궁(離宮)2만 짓도록 명한 것이었다.】

 

이것이 서인이 기록한 《광해군일기≫에 광해군이 인경궁 건설을 거론한 첫 번째 기사이다. 광해군은 이때에 인경궁을 건설하려는 의도와 그 규모를 분명히 밝혔다. 그런데 사관은 어디서 주워들은 얘긴지 그 전 해인 1616년에 이런 사론을 기록해 놓았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8년(1616) 3월 24일 1번 기사

【왕이 성지(性智)와 시문룡(施文龍) 등에게 인왕산 아래에다 새 궁궐의 터를 잡게 하였다. 왕이 이의신(李懿信)의 말을 받아들여서 장차 교하(交河)에 새 도읍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중론(衆論)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에 성지와 시문용 등이 왕에게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키려는 뜻이 있음을 알고 몰래 인왕산 아래가 궁궐을 지을 만하다고 아뢰자, 왕이 크게 기뻐해서 즉시 터를 잡으라고 명하였다. 이에 이이첨이 비밀히 아뢰기를,
"교하에 대한 의논을 정지하고 이곳에다 궁궐을 지으면 백성들이 반드시 
앞 다투어 달려올 것이다."고 하였다.
이 당시에 여러 신하들이 교하의 일에 대해 앞 다투어 간쟁하였었는데 
인왕산 아래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시 간쟁하지 못하였다.】

 

사관이 난데없이  이 날에 사관 자신의 의견을 늘어놓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사론이 왜곡의 의도를 갖고 악의적으로 작성된 것임은 아래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위 사론이 쓰여진 5달 뒤의 기사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8년(1616) 8월 20일 4번째 기사

선수 도감이 아뢰기를,

"비망기에, ‘수리를 하는 데에 사용하고 남은 재목과 기와를 보관해 둘 곳을 속히 마련하되, 인왕산 아래와 경복궁 모처 중에서 선택하여 임시 가옥을 잘 지어 두껍게 지붕을 이어서 저장해 두었다가 뒷날의 용도에 사용하게 할
일을 속히 잘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처음부터 기와를 굽는 일은 신 이충
(李沖)이 담당하였습니다. 사전(四殿) 및 각 아문은 이미 모두 덮었고 지금 비록 덮지 못한 곳이 약간 있기는 하나 20여 눌(訥)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까지 계산해서 제하고 나면, 남은 것들의
숫자는 대아련(大牙鍊)이 
거의 70여 눌이고 중아련(中牙鍊)도 그 정도이며 상와(常瓦)도 60여 눌이나 됩니다.
모두 합해서 계산하면 
2백여 눌이 넘습니다. 방전(方磚)이 20여 눌이며 반전(半磚)이 15, 16눌이며 방초(防草)가
4눌입니다. 
혈전(穴磚)이 1백여 장(張)이며 용두(龍頭), 토수(土首), 연가(烟家), 잡상(雜像) 등의 물품이 또한 많이 
남았습니다. 이것들은 다 아주 긴요하게 쓰이는 물품이니 모두 함께 모아 저장해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해와 올해에 성안의 방민(坊民)과 경강(京江)의 마부(馬夫)들이 운송을 하느라 지쳐 곳곳에서 원망을
하고 있으니 지금 또 이들에게 책임을 맡겨서는 안 되겠습니다. 위의 각종 기와 및 잡상 등의 물품들은, 
마태(馬駄)로 맞추어 계산해 보면 9천 5백여 바리가 되고 수레로 맞추어 계산해 보면 1천 9백여 부(部)가 되는데 그 운송비도 쌀로 계산하면 4백여 석이고 목면으로 계산하면 25동쯤 됩니다. 도감에 쓰고 남은 쌀과 포목이 넉넉하게 있으니 쌀과 목면으로 이렇게 계산하여 운송비용을 지급하고 실어다 수성동(壽城洞) 공가(空家)로 들여다가 수직(守直)하게 하면 허술하게 될 걱정도 없을 듯하고 내외의 도성 백성들도 작으나마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황공하게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 일은 도감이 파국(罷局)한 뒤에는 때맞춰 수송해 들이지 못할 것이니 이달 안으로 서둘러 거행하고, 수직 내관으로 하여금 적당한 숫자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엄하게 지키게 하라. 금군(禁軍) 두세 명을 아울러 차정해 보내서 십분 착실하게 지키도록 하라." 하였다.

 

성지와 시문룡이 인왕산 아래에 궁궐을 지을 만하다고 해서 왕이 크게 기뻐했다는 기사가 나온 다섯 달 후에도 광해군은 인경궁을 짓겠다는 계획이 없었다. 이 기사에 인왕산이란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창경궁을 재건하고 남은 자재를 적재해둘 후보지 중의 하나로 거론된 것뿐이다. 인경궁을 지을 생각이 있었다면 선수도감을 해체할 이유도 없고 선수도감이 해체되어 자재 운반이 제대로 안 이루어지는 일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때 남은 자재들은 인왕산 밑에다 쌓아놓게 되었다. 그런데 자재란 쌓아놓기만 하면 유실되고 훼손되기

마련이다. 광해군은 그런 걱정을 안 했을까? 광해군은 그 자재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다 위의 1617년 1월 18일

기사에 나오는 비망기를 내렸을 것이라는 추론이 더 합리적이지 않은가? 우선은 정전 하나만 짓고 나머지는 형세에 따라 차차 진행하자고 한 이유도 남은 자재의 양을 감안하여 내린 결론이었을 것이다.

 

위의 기사에 나오는 성지(性智), 시문룡(施文龍), 이의신(李懿信)은 서인 사관들이 지목하는 대표적 술사(術士)들이다.

광해군이 이들의 농간에 놀아났다는 것이다. 성지는 승려이고 시문룡은 왜란 때 참전했다가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명나라 군인이다. 광해군은 궁궐 건축을 하면서 풍수지리에 대하여 두 사람의 자문을 받았다. 성지는 사대부들이 집을

지을 때 풍수를 봐줘서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데 광해군과 만나게 된 계기는 알 수 없다. 시문룡은 경남에 살고 있었는데 광해군이 직접 불러올렸다. 광해군은 전각 배치나 향배 등에 대하여 이들이 현장을 둘러보고 올린 풍수 지리적 의견을 들었다. 이들의 의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될 때는 해당 관청에서 논의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결과에 따라 따를 때도

있었고 따르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이를 두고 사관들은 광해군이 사술을 좋아했다고 평했다.

그런 논리라면 조선의 수도인 한성은 사술에 의해 자리 잡은 도시이고 경복궁도 사술에 의해 지어진 궁궐이다. 지금도 건축을 할 때는 입지에 대한 여러 가지 검토와 조사를 실시한 뒤에 결정한다. 조선시대의 입지 조건에 대한 사전 검토와 조사가 풍수지리다. 따라서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건물인 궁궐을 짓는데 그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판단이라고 생각했을 풍수지리를 무시하고 짓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닌가? 

하다못해 지금의 기독교인들도 풍수에 나쁘다면 그런 것들을 피해 집을 짓는다. 광해군에게 이런 비난을 쏟아낸 사관들도 정작 자기 조상의 장례를 치를 때는 지관을 불러 묏자리 잡고 지관에게 하관시간까지 받아 묘를 썼을 것이다.

 

또 다른 인물 이의신은 《광해군일기》에서는 지리학교수, 지관(地官), 술관, 술사 등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사실 그는 통례원의 관리였다. 조정의 조회와 의례행사에서 의전업무를 담당하는 인의(引儀)라는 관직에 있던 인물로 풍수지리에 대한 지식도 있었던 듯하다. 그가 광해 4년(1612) 9월에 광해군에게 교하 천도를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승정원은 이 상소를 광해군에게 올리면서 ‘성상께서는 읽어보신 뒤 그의 죄를 엄하게 배척하여 인심을 안정시키소서’하고 아뢨다. 그런데 이 상소문을 읽어본 광해군은 그 내용 어딘가에 검토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를 예조(禮曹)에 의논해보라고 내려 보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광해 4년(1612) 11월 15일 3번째 기사

술관 이의신(李懿信)이 상소하여, 도성의 왕기(旺氣)가 이미 쇠하였으므로 도성을 교하현(交河縣)에 세워 
순행(巡幸)을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니, 왕이 예조에 내려 의논토록 하였다. 
예조 판서 이정귀(李廷龜)가 
회계하기를,

"삼가 이의신의 상소를 보건대, 장황하게 늘어놓은 말들이 사람을 현혹시킬 뿐 무슨 뜻인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풍수(風水)의 설은 경전(經傳)에 나타나지 않은 말로 괴상하고 아득하여 본디 믿을 수 없습니다.......(중략)......
이 소장이 들어오면서부터 사람들이 마음을 안정하지 못하고 서로 뜬소문에 동요되어 더러는 
‘성상께서 이 말을 믿는다.’ 하고, 더러는 ‘새 궁궐에 나가지 않는 것은 이 말 때문이다.’ 하여, 원근이 모두 놀래고 현혹되어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성명께서는 요망한 말들을 물리치고 멀리하여 성상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속히 법궁(法宮)에
나아가 뭇사람들의 의심이 풀리도록 하소서. "

 

이정귀가 회계한 내용 중에는 고려 때의 묘청까지 들먹이며 이단(異端)이 국가에 해독을 끼치는 일에 대하여 논박하였다. 논의해보라고 내려 보낸 안건에 대하여 예조판서가 마치 자신이 교하로 천도할 것을 결정한 것처럼 달려드는 것을 보고 광해군은 어이가 없었겠지만, 좋은 말로 자신의 뜻을 다시 설명하며 이렇게 답했다.

 

"예로부터 새로 도성을 세운 제왕이 많았으나 본디 세웠던 도성을 아주 버린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의신의 
방술이 정미하다고 내가 지나치게 믿는 지의 여부를 예관이 어떻게 아는가. 새 궁궐로 곧 옮기려고 했으나 
내전이 상(喪)을 당하였고 역옥(逆獄)이 계속 일어나므로 나라에 일이 많아 여기까지 미칠 틈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터무니없고 근거도 없는 말로서 이 말을 믿는다고 임금을 지척(指斥)
3하고, 또 ‘법궁에 나가지 않는 것이
이 말 때문이다.’ 하니, 너무 놀랍다. 앞으로는 이러한 등의 말을 경솔하게 
내지 말도록 하라. 소장의 끝에 있는
회계의 일은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상의하여 의계(議啓)토록 하라." 
하였다.

 

광해군은 교하로의 천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행궁을 건설하는 것은 검토해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2품 이상 대신들에게 논의를 시켜 의견을 들었으며 또 비변사에는 교하 지역을 살펴보고 형세를 그려오라는 지시도 내렸다. 그러자 양사가 합계하여 이의신을 벌주고 교하에 대한 명(命)을 거둘 것을 3달 동안 요청했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5년 4월 20일 1번 기사

양사가 합계하여 이의신을 율에 따라 정죄(定罪)할 것과 교하(交河)에 가서 살펴보도록 하는 일을
속히 
중지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지리상 형세가 좋으면 보장(保障)으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인데 안 될 것이 뭐가 있는가. 지관(地官)이 자기
방술(方術)에 입각하여 진언한 것 역시 그다지 죄줄 일이 못 된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위의 기사를 끝으로 양사에서 교하에 관한 건으로 광해군에게 문제를 삼은 기사는 없다. 아마도 광해군은 비변사에서 교하를 살펴본 결과를 받아보고 더 이상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오늘날 현대 정부의 정책 검토과정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왕이 단독으로 무엇을 결정한 것도 아니고 안에 대하여 예조나 대신들로 하여금 검토하게 한 것은 지금의 정책 결정과정에 비견될 정도로 민주적이다. 그리고 검토결과 안(案)은 폐기되었다. 이것이 교하천도설의 전말인데 이것을 어떻게 ‘교하로 천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고 표현하는가?! 교하에 대한 상소를 올린 이의신은 사간원과 사헌부에 단단히 찍혔던 모양이다. 양사는 1년이 지난 후에도 이의신을 처벌하라고 광해군을 갈궜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6년(1614) 6월 14일 3번째 기사

지난해부터 양사가 이의신의 죄를 청하는 일을 연계하였는데, 답하기를,

"역대에 모두 두 도읍이 있었다. 주(周)나라는 만세가 우러러 본받는 나라인데 호경(鎬京)과 낙양(洛陽)이 있었고, 지금 명나라에도 남경과 북경이 있다. 의신(懿信)이 국가를 위하여 큰 계획을 진달한 것은 이궁을 창건하자는 데
불과할 따름이다. 한번 개부(開府)4를 명하자 뭇 노여움이 불과 같이 치솟으니 이미 우리나라 
인심의 좋지 못함을 알았다. 하물며 정지한 뒤에 추급하여 논하여 법률대로 하기를 청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극진히 하는 사람을 모두 주벌할 수가 있겠는가. 조정에서 마땅히 참작해서 
처리할 것이다. 비록 일백 의신의
말이라도 그 사이에서 경중을 가름할 것이 뭐있겠는가. 언론이 중도에서 
지나친 것은 진실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냥 두는 것이 옳다.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서인 사관이 인조의 기사에 덧붙인 사론을 본뜬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 【품위 있고 지혜롭도다! 왕의 말씀이여.】

애초 정전(正殿) 하나만 먼저 지으려고 했던 인경궁은 왜 공사가 커져 버렸을까? 《광해군일기》에 그 이유가 명확히 드러나는 객관적 기사는 없다. 다만 그 과정을 유추해볼 수 있는 기사가 하나 있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9년(1617) 4월 27일 4번째 기사

전교하였다.

"이궁의 터가 크지 않으니 적당한 크기의 재목을 쓰는 것이 옳다. 일찍이 사대부의 집을 조성하는 재목과 같은 크기의 재목을 베어오는 일 및 안에서 내려준 포목으로 관동(關東)의 재목을 무역하는 일에 대해 하교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며, 심지어는 중사(中使)5가 나아갈 때 안에서도 누누이 전교하였다. 그런데 도감에서는 전교를 무시하고 감히 감역관(監役官)6이 내려가기 전에 먼저 공문을 보내어 재목을 베게 하였다. 완도(莞島)의 경우에는 2백 16조(條)가 모두 대목(大木)으로, 비록 끌어내리고자 하더라도 한 달 안에 역사를 끝낼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며, 변산(邊山)의 경우는 3천 2백 20여 조나 되는 바, 함부로 벤 것이 이처럼 많으니, 몹시 놀랍다. 앞으로 법궁(法宮)은 형세상 조성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재목을 베어내는 
중대한 일을 어찌 범연히 공문을 보내어서 이 지경에 이르게 한단 말인가. 도감의 당해 제조와
도청·낭청을
모두 행공추고(行公推考)7하라. 그리고 이 서장을 급급히 의논해 처리하고, 일을 잘 아는 문낭청(文郞廳)8을 내일 안으로 말을 주어 내려 보내어 속히 가지고 오게 하라. 그리고 지금 이후로는 굵은 재목은 절대로 
베어내지 말고, 비록 혹 베어오더라도 반드시 문낭청을 보내어 상세히 살펴 베어 오는 일을 유념해서 착실히
거행하라. "

 

새로 지으려는 인경궁은 이때까지도 이름을 정하지 않아 이궁(離宮)으로 불렀다. 그 이궁 건축을 담당했던 도감(都監)의 책임자인 제조(提調)가 사고를 친 것이다. 왕이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알아서 큰 나무를 그것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베어놓은 것이다. 나름 일을 빨리 진행하기 위하여 취한 조치였겠지만 광해군의 생각과 달랐던 것이 문제였다. 

위 기사에서 알 수 있듯, 광해군은 장차 이 나무들을 경복궁을 복원하는데 쓰려고 생각했었는데 그 나무들을 덥석 베어버린 것이다. 

바로 이 말속에 인경궁의 공사가 커져버린 이유가 있어 보인다. 빠른 때에 경복궁의 복원이 어렵다면 이왕 베어놓은 나무로 인경궁을 애초 계획보다 확장하여 당분간 경복궁을 대신할 생각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다. 물론 그 자재로 경복궁을 복원할 수도 있었지 않느냐 하는 의문은 남는다. 길(吉)하지 못하다거나 지내기 불편하다는 등의 이유로 대대로 경복궁이 왕들에게 선호되지 않았던 궁궐이라는 사실과 연관성이 있을 수도 있고 경복궁 복원 공사의 규모와 시일에 따른 판단이었을 수도 있다. 사실 선조도 광화문과 근정전 등 경복궁의 주요건물만이라도 우선 지을 계획을 세우고 1606년에 궁궐영건도감(宮闕營建都監)까지 설치하였지만, ‘공사가 커서 1, 2년에 끝낼 수 없으므로 후에 일을 시작해야 한다’ 는 대신들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고종 때 중건된 경복궁의 도형인 <북궐도형>을 바탕으로 한 전각명>]

 

[<북궐도형>에 의거 작성된 일제 훼손 전 고종 때의 경복궁 조감도]

 

[경복궁 현황도]  

 

창건할 당시 경복궁의 건물 규모는 755칸에 불과했지만 계속 건물이 지어졌고 1867년 흥선대원군이 다시 중건했을

때는 7,225칸이 넘었으며 부속 건물까지 합치면 7,800칸 가까이 됐다고 한다. 선조 때 불 탄 경복궁을 그 2/3수준으로

어림잡는다 해도 5,000칸 정도나 되는 규모다. 25칸 크기의 근정전이 200개는 있어야 되는 규모다.

위 그림들을 비교하면 강녕전, 교태전 뒤쪽의 후궁숙소, 국립민속박물관자리의 제사공간과 궁녀처소, 그 아래의 소주방과 동궁지역에 너무나 많은 건물 숫자의 차이가 있다. 지금 경복궁의 건물 배치가 어딘가 휑해 보이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참고 :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조선시대 벼슬아치의 휴가. 심단(尋單) [본문으로]
  2. 별궁, 행궁(行宮) [본문으로]
  3. 웃어른의 언행을 지적하여 탓함 [본문으로]
  4. 관아를 설치하고 속관(屬官)을 두는 일 [본문으로]
  5. 왕의 명령을 전하던 내시(內侍) [본문으로]
  6. 선공감의 종9품 관직으로 국가의 공사를 감독하고 독촉하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하던 관직 [본문으로]
  7. 죄를 지은 벼슬아치에 대하여, 공무를 집행하게 하면서 심문(審問)하는 일 [본문으로]
  8. 비변사 등의 실무담당 종6품 관직인 낭청 중에서 문관(文官)을 가리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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