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23 - 고군분투

從心所欲 2020. 1. 28. 12:23

중종이 정란을 일으킨 신하들에 의하여 옹립된 왕인 반면, 인조는 자신이 직접 거사를 주도하여 왕이 되었다. 인조정변에 대해 기술된 주요 사료는 《인조실록》과 이긍익이 지은『연려실기술』1이다. 이들 기록들은 모두 광해군의 실정으로 인조정란이 일어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인조를 포함한 역모세력은 도끼로 돈화문을 부순 뒤 궁궐로 쳐들어갔고 정변이 성공했다는 확신이 들 무렵 궁궐에 불을 질렀다. 정변에 나서면서 가족들에게 ‘궁궐에 불길이 보이지 않으면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자결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집을 나섰기 때문에 궁궐에 불을 질러 자신들의 정변 성공을 알리려는 의도였다고  자신들이 쓴 실록에 기록하였다.

 

정변 세력은 광해군의 패륜과 실정을 정변의 이유로 앞세웠지만 사실은 각자 자신들이 처해있던 상황에 따라 정변의 필요성에 뜻을 모았을 뿐이다. 인조 개인으로는 광해군에 대한 원한이 왕위 찬탈로 이어진 것이고 서인 세력은 대북 일당독재로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정세의 변환을 꾀한 것이었다. 인조와 서인들의 정변을 당시 백성들이 열렬하게 반겼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정란의 일등 공신 중 하나인 이서(李曙)2는 정변 직후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갑자기 광해군을 폐출하고 새 임금을 세웠다는 소식을 들은 나라 사람들은 새 임금이 성덕이 있는 줄 알지 못했으므로 상하가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성패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터에 위세로서 진압할 수도 없어서 말하기 지극히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이 전 왕조 때의 원로로서 영상(領相)에 제수되어 여주로부터 입조하자 백성들의 마음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위세로서 진압할 수도 없어서’라는 표현에서 보듯 정변에 대한 반발 조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원익은 서인이 아닌 남인이다. 서인들은 자신들이 정변을 주도하고도 남인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세워 외연을 확장하는 모양새를 취해야 될 정도로 정변에 대한 명분이 취약했다.

인조정변 다음 해인 1624년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켜 수도 한양에 입성할 때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사실 또한 저들의 정란이 백성들에게 별 다른 지지를 받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한양을 떠나던 날, 그를 따라 피난길에 나선 백성들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일설에는 한강변에서 배를 타려 했을 때 백성들이 인조가 탈 배를 숨겨놓기까지 했다는 말도 있다.

이괄의 난은 실패했지만 이는 정란으로 왕에 오른 인조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정란을 일으켜 성공만하면 개나 소나 왕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인조는 이괄과 자신이 다름을 보여줘야 했다. 그래서 그를 추대한 공신들과 사림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追崇)했다. 이는 단순히 효심에 의해 이뤄진 행동이 아니라, 종법(宗法)적 정통성을 만들어 자신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이른바 정원군의 새문동 옛집의 왕기(王氣) 설(說)도 같은 맥락에서 조작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선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그리고 인조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국가와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겼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사실 두 경우는 다르다. 왜란이 왜구의 야욕에 의하여 발생한 것으로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사전 봉쇄할 수 없는 전란이었다면 호란은 조선이 자초하여 만들어낸 전란이다.

 

[ 누루하치(누르가치), 천명제(天命帝) <天命皇帝朝服像>]

 

만주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조선과 명나라가 모두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틈을 타 1616년,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후금(後金)을 세웠다. 이 후금이 남만주의 비옥한 농토를 탐내면서 명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이에 명나라는 정유재란 때 조선에도 파견되었던 양호(楊鎬)를 총지휘관으로 삼아 10만 대군으로 후금 토벌에 나서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도 공동 출병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직접 겪고 또 왕위에 올라 전란의 피해를 수습하고 있던 광해군은 또 다른 전란이 조선에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임진왜란 때 도움을 받은 명나라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광해군은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의 휘하에 1만 3000명의 병력을 파병하면서 강홍립에게 명군(明軍)을 돕다가 전장에서의 형세를 판단하여 향배(向背)를 달리할 것을 비밀리에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명군이 사르훠(薩爾滸)전투에서 대패하고 계속 수세에 몰리자, 강홍립은 남은 군사 5천명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한 뒤 조선의 출병이 불가피했던 점을 후금에 해명하였고 이에 후금은 조선군의 파병을 문제 삼지 않았다. 이것이 광해 11년인 1619년 2월의 일이었다.

 

[만주실록 中 <강공립솔병귀항도(姜功立率兵歸降圖)3>, 후금의 4패륵4에게 투항하는 강홍립]

 

하지만 이것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공식적 행보가 아닌 광해군의 독자적이고도 은밀한 결정이었다. 명나라의 쇠퇴와 후금의 발흥이라는 중국의 정세 변화를 주시한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외교 노선을 취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명(明)을 은혜의 나라, 부모의 나라로 숭상하고 있는 조선의 관리들에게 광해군의 발상은 배은망덕으로 매도될 것이기에 광해군은 그들과 이런 생각을 나눌 수조차 없었다. 광해군은 변화하는 정세에 무지한 신하들 사이에서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었다. 강홍립이 후금에 투항했다는 소식에 조선의 관리들은 분기탱천하여 즉각 강홍립을 논죄하고 그 가족을 구금할 것을 요청하고 나섰다.

 

●광해군일기[중초본], 광해 11년 4월 8일 1번 기사

비변사가 아뢰기를,

"적신(賊臣)5 강홍립 등이 명을 받고 싸움터로 나갔다면 오직 적만을 쫓아야 할 일입니다....(중략)....신하로서 적에게 항복하는 것은 천하에 가장 나쁜 행실입니다....(하략)....“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계사를 보니, 뜻은 좋다. 그러나 내 비록 혼미하고 병들어 맑은 정신은 아니지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경들은 이 적을 어떻게 보는가? 우리나라의 병력을 가지고 추호라도 막을 형세가 있다고 여기는가? 지난해 격문이 왔을 때부터 내가 우려하던 것은 징발한 병사를 보내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본래 견고하지 못하고 군병은 평소에 교련되지 않아서 하루아침에 몰고 들어가면 전쟁에 도움이 못 된다는 것을 진달하되, 서둘러 경략이 나오기 전에 주달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면 비록 오늘날에 패배를 당하더라도 지난해에 주달한 것과 서로 부합되었을 것이니 어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경들은 나의 뜻은 헤아리지 않고 막으려고만 하고 있는데 단지 사정을 주달하는 것이 무슨 사리에 어긋난 점이 있다고 끝내 내 말을 이행하지 않는단 말인가. 나는 이것이 통탄스럽다.

 

지난해 군병을 들여보낼 때 경들은 마치 일거에 탕평할 것처럼 여겼는데, 병가(兵家)의 일이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옛사람들이 감히 가벼이 사용하지 아니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명나라에서 만약 군병을 진열하여 무력을 과시하고 중국의 국경을 굳게 지킨다면 마치 호랑이나 표범이 산 속에 있는 형세와 같아 적이 비록 날뛴다고 하더라도 감이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점은 생각지 않고 가벼이 깊이 들어갔으니 반드시 패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었다.

내가 이 점을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우려하고 답답해하다 보니 마음의 병이 더욱 심해져 마치 미친병을 앓는 형상과 같았는데 좌우에 있는 사람 중 그 누가 모르겠는가. 이제 우려하던 것과 같이 되었으니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적의 용병(用兵)하는 지혜와 계략을 실로 당해내기 어려우니 앞으로의 화환을 예측할 수 없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위한 계책으로는 군신 상하가 마땅히 잡다한 일은 버리고 오로지 부강에만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군병을 양성하고 장수를 뽑고 인재를 등용하며, 백성의 폐막을 풀어주어 인심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며 둔전(屯田)을 크게 개척하며 무기를 만들고 익히며 성지(城池)와 척후 등을 모두 정비해야만 믿을 곳이 있어서 위급할 때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혹 태만하거나 소홀히 한다면 큰 화가 즉시 닥칠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강홍립 등의 사건에 있어서도 비록 적에게 항복하였다고 하나 이처럼 급하게 다스릴 것이 뭐가 있겠는가. 강홍립 등이 불행히 적진 중에 함몰6되었으나 보고 들은 것들을 밀서로 계문하는 것이 무엇이 안 될 것이 있는가. 진실로 본사의 계문과 같이 한다면 비록 노중(虜中)7에 함락되었더라도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하여 보내지 않아야 옳다는 말인가. 아, 묘당8에 사려 깊은 노성(老成)한 인재는 거의 죄다 내쫓아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젊고 일에 서투른 사람이 비국에 많이 들어갔으니 국가 운영을 잘 못하는 것은 이상하게 여길 것조차도 없다.

 

대국 섬기는 성의를 더욱 다하여 붙들어 잡는 계책을 조금도 해이하게 하지 말고 한창 기세가 왕성한 적을 잘 미봉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국가를 보전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이다. 그런데 이것을 버려두고 생각지 않은 채 번번이 강홍립 등의 처자를 구금하는 일만 가지고 줄곧 계문하여 번거롭게 하고 있으니, 나는 마음속으로 웃음이 나온다. 본사에서 누차 청하는 뜻을 나 또한 어찌 모르겠는가. 천천히 선처하여도 진실로 늦지 않다. 오직 국가의 다급한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할 것이다. 노추(奴酋)9의 서신이 들어온 지 이미 7일이 되었는데 아직도 처결하지 못하였다. 국가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하늘의 운수이니 더욱 통탄스럽기만 하다." 하였다.

 

변하는 국제 정세 앞에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앞날을 두고 고뇌하는 광해군의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하지만 두 차례의 호란을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 인조 때의 사관들은 이 기사 말미에 이런 사론을 달았다. 

 

당초에 강홍립 등이 압록강을 건너게 된 것은, 상이 명나라 조정의 징병 독촉을 어기기 어려워 억지로 출사(出師)시킨 것이었지, 우리나라는 애초부터 그들을 원수로 적대하지 않아 실로 상대하여 싸울 뜻이 없었다. 그래서 강홍립에게 비밀리에 하유하여 노혈(虜穴)10과 몰래 통하게 하였던 것인데 이 때문에 심하(深河)의 싸움에서 오랑캐의 진중에서 먼저 통사를 부르자 강홍립이 때를 맞추어 투항한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구금되어 있으면서 장계를 써서 종이 노끈을 만들어 보냈는데, 화친을 맺어 병화를 늦추자는 뜻을 자세히 언급하였다. 정응정 등은 도망쳐 온 것이 아니고 오랑캐가 풀어 보낸 것인데, 보는 이들은 모두 노추(奴酋)가 전쟁을 늦추려는 계획이라고들 하였다.

 

광해군이 강홍립의 출정 전부터 미리 투항하도록 계획을 세웠다고 헐뜯는 것이다. 저들에게는 나라의 미래보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광해군일기[중초본], 광해 11년 4월 8일 2번째 기사

양사가 합계하기를,

"장수란 삼군(三軍)의 사명(司命)으로서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기 때문에 고금천하의 법 중에 군율만큼 엄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강홍립(姜弘立)·김경서(金景瑞) 등은 자신이 원수(元帥)가 되어 적지에 깊숙이 들어가서는 중국 장수와 함께 힘껏 싸워 목숨을 바치지 않고 도리어 투항을 청하여 적의 뜰에 무릎을 꿇었으니, 신하의 대의가 땅을 쓸듯이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심지어는 노적의 후한 향응을 편안히 받으며 노추의 친위병을 많이 거느리고 신하가 되기를 달게 여겼으니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한 국가의 모욕이겠습니까.

김응하(金應河)11는 한낱 무부인데도 전쟁에서 죽음을 아끼지 않을 줄 알았으니 이 밖의 장사들은 모두가 김응하의 죄인인 셈입니다. 어찌 통탄스럽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버젓이 장계에 직함까지 쓰고 화친을 맺으라고 청하는 말이 한 마디뿐만이 아니었으니 비록 만번을 죽인다 하여도 어찌 그 죗값을 다 치를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강홍립, 김경서의 가족 및 정응정 등을 모조리 잡아서 구금하라고 명하심으로써 군율을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고상한 말은 국사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강홍립 등의 죄를 논할 때가 어찌 없겠는가. 젊은이들의 부박한 논변은 잠시 멈추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주위에 누구하나 털어놓고 의논할 상대도 없이 국가와 백성의 명을 걸고 자신의 판단만으로 명과 후금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 외교를 해야 했던 광해군은 얼마나 외롭고 답답했을까? 그 후 2년이 지나도 신하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안타까워 광해군은 에둘러 조선이 중국과 오랑캐 사이에서 현명히 처신하여야 될 상황임을 환기시킨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13년(1621) 6월 1일 3번째 기사

전교하였다.

"적의 형세는 날로 치열해지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병력과 인심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다. 고상한 말과 큰 소리만으로 하늘을 덮을 듯한 흉악한 적의 칼날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적들이 말을 타고 들어와 마구 짓밟는 날에 이들을 담론으로써 막아낼 수 있겠는가. 붓으로 무찌를 수 있겠는가. 널리 조정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무슨 일에 도움이 되겠는가.
대개 중국 사람들이 비록 귀순을 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란 천리에 퍼지고 듣고 보는 이가 매우 많은데 하필이면 이 길을 통해서 나오겠는가. 하물며 중국의 사신은 이웃 나라에 편지나 가지고 오가는 사람이 아니다. 이후로 글의 격식을 고치고 만포(滿浦)12를 경유하여 나오도록 하는 일에 대해서는 다시 유시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도록 하고 뒤에 절대로 중국 사람들의 이목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그리고 파견되어 나온 
오랑캐가 있는 곳으로 자세하게 답장을 보내되, 다만 강홍립 등의 서장(書狀)만을 받아서 올려 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오중고(吳仲庫) 등에게는 말하기를 ‘이 적의 세력이 크다. 옛날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임금들 중에는 역시 자신을 낮추어 후한 예를 차리는 경우가 있었으니, 이 적이 어찌 이러한 의도가 없을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나라는 이미 
요양을 상실하여 중국에 조공하는 길이 끊어졌으며 군대는 보잘것없이 약하니 임시로 둘러대는 말로 잘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른바 ‘조서의 글’이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면 몰래 베끼도록 하고 받지 않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것은 종묘사직의 존망에 관계되는 것이니 경들은 다시 더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하여 좋은 방법으로 잘 처리하도록 하라."

 

양사와 대신들은 계속 강홍립을 논죄할 것을 청했지만 광해군은 서두를 것 없다고 그들을 달래면서 끝까지 버텨냈다.

강홍립(姜弘立, 1560 ~ 1627) 장군은 김경서 등 10여 명과 8년 동안 후금에 억류되어 있다가 인조 5년인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선도로서 입국하여 강화(江華)에서의 조선과 후금 간의 화의를 주선하였다. 정묘호란이 그나마 빨리 끝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공로다. 그러나 강홍립은 곧 역신(逆臣)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 당하고 그해 7월, 병으로 사망하였다.

 

참고 : 조선왕조실록, 한국사사전(2015. 김한종 등),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한국사(정성희, 장선환)

 

  1. 이긍익(李肯翊 : 1736~1806)이 지은 조선시대 사서. 이긍익은 “이 책은 사람들의 귀나 눈에 익은 이야기들을 모아 분류하여 편집한 것이요, 하나도 나의 사견으로 논평한 것이 없다. 나는 사실에 의거하여 수록하기만 할 뿐 그 옳고 그름은 후세사람들의 판단에 미룬다.”고 밝혔을 만큼 저자의 사견은 없이 해당 사건에 대한 앞선 학자들의 기술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특징이다. 다만 각 기사의 끝에는 인용서목을 밝혀두었다. [본문으로]
  2. 이서(1580 ~ 1637) : 정란 당시 장단(長瑞) 부사와 경기 방어사를 겸직하고 있었다 [본문으로]
  3. 홍립의 홍(弘)자를 공(功)자로 쓴 것은 피휘(避諱)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4. 패륵은 청나라 때 만주인 종실(宗室)에게 주어지던 작위(爵位) 가운데 하나로 부장(部長)이라는 뜻. [본문으로]
  5. 반역하거나 불충한 신하 [본문으로]
  6. 재난을 당하여 멸망함 [본문으로]
  7. 포로가 된 상태 [본문으로]
  8. 비변사 [본문으로]
  9. 후금의 건국자인 누르하치를 내려 보고 부르던 말. [본문으로]
  10. 오랑캐의 소굴 [본문으로]
  11. 김응하(金應河, 1580∼1619) : 무관으로 도원수 강홍립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후금정벌 원정에 나서 명나라 장군 유정(劉偪)의 군사와 같이 건주위(建州衛) 정벌에 종군하였다. 이때 명나라 군사가 경솔히 행동하여 곤경에 빠져 도독 유정은 자살하였다. 김응하는 부하 3천명을 거느리고 적의 군사 6만과 대치하여 앞에 포병(砲兵)을 내세우고 반격하여 적을 물리쳤다. 그러나 갑자기 태풍이 일어나 모래 속에 싸이게 되자 군사들이 흩어지는 바람에 적병에게 포위되어 싸우다 전사하였다. [본문으로]
  12. 조선 시대 평안도 강계도호부(江界都護府)에 있던 압록강(鴨綠江) 가의 마을 이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