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접하는 조선의 역사는 왕의 역사이고 집권계급인 사대부의 역사이다. 그래서 우리가 배우는 역사에서 일반 백성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기는 쉽지 않다. 질고에 시달려 저항하는 백성들의 삶은 도주, 유망, 도적, 폭도 등으로 표현되어 집권계층인 자신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집단으로 묘사되기 일쑤다. 집권층인 사대부와 관료들은 늘 백성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정작 저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는 일은 늘 자신들의 명분이나 이익에 관한 것이지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일은 없었다. 그런 조선 역사에서 딱 한 번 백성에 대한 정책 문제로 사대부가 갈라선 적이 있었다.
공납(貢納)은 각 지역에 토산물을 할당하여 국가의 수요품을 조달하는 제도로 정식 이름은 공물상납제도 (貢物上納制度)이다. 공납에는 중앙 관서와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상납하는 공물(貢物), 지방의 토산물을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進上), 지방 관청(官廳)에서 필요한 물품을 바치는 관수(官需) 등이 포함된다.
이것들은 공안(貢案)1에 수록된 정규적인 상공(常貢)이고 이외에도 필요에 따라 수시로 거두는 별공(別貢)도 있었다. 따라서 백성들에게 공납은 전세나 역(役)보다도 부담이 훨씬 컸는데, 그 부과나 징수 과정의 불합리함 때문에 백성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부과의 문제점은 공납의 부담을 소득이 아닌 가구를 기준으로 할당한 것이다. 즉, 각 주(州)·현(縣)을 단위로 공납할 토산의 현물을 중앙에서 배정하면, 주와 현에서는 배정된 공물을 다시 각 민호(民戶)에 배정하는데, 그 과정에서 100억 부자나 기초생활수급자 가구나 모두 1가구로 쳐서 부담해야 될 공물을 균할 배분한 것이다. 영세 가구의 부담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징수과정에서는 방납업자와 향리의 결탁으로 백성들은 비싼 값을 치르고 방납업자를 통해서만 공납할 수밖에 없는 비리가 만연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공물의 종류가 많다 보면 당연히 공물에 따라 부담이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 있게 마련인데 세력 있고 부유한 지주들은 관리들과 결탁하여 가벼운 공물을 배정받고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은 부담이 무거운 공물을 배정받는 일도 흔했다.
이런 공납제도에 처음 변화가 생긴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전란으로 종래의 공납제에 따른 징수에 여러 문제점이 발생하자 유성룡(柳成龍)이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건의하여 실시하게 되었다. 대공수미법은 각 군현에서 상납할 모든 물품의 가격을 쌀로 환산하여 그 수량을 도별로 합산해서 전토에 고르게 부과·징수하게 한 것이다. 이를 호조에서 수납하여 공물의 구입경비로 쓰는 한편, 군량으로도 보충하게 하였었다. 하지만 대공수미법은 전란이 끝나면서 시행이 중지되었는데 이원익이 이 법의 편익을 보완하여, 광해군 즉위 초에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고 우선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한 것이 대동법(大同法)이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즉위년(1608) 5월 7일 2번째 기사
전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의논하기를,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공물(貢物)이 각사(各司)의 방납인(防納人)들에 의해 중간에서 막혀 물건 하나의 가격이 몇 배 또는 몇 십 배, 몇 백 배가 되어 그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었는데, 기전(畿甸)2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그러니 지금 마땅히 별도로 하나의 청(廳)을 설치하여 매년 봄가을에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두되, 1결(結)당 매번 8말씩 거두어 본청(本廳)에 보내면 본청에서는 당시의 물가를 보아 가격을 넉넉하게 헤아려 정해 거두어들인 쌀로 방납인에게 주어 필요한 때에 사들이도록 함으로써 간사한 꾀를 써 물가가 오르게 하는 길을 끊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거두는 16말 가운데 매번 1말씩을 감하여 해당 고을에 주어 수령의 공사비용으로 삼게 하고, 또한 일로(一路) 곁의 고을은 사객(使客)이 많으니 덧붙인 수를 감하고 주어 1년에 두 번 쌀을 거두는 외에는 백성들에게서 한 되라도 더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오직 산릉(山陵)과 조사(詔使)의 일에는 이러한 제한에 구애되지 말고 한결같이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법의 시행에 있어서는 농민의 편익을 위하여 산군(山郡)에서는 쌀 대신 잡곡이나 무명[綿布], 베[麻布]로 대신하게 하였다. 이후 인조 1년에는 호조의 건의로 대동법이 강원도와 충청도, 전라도로 확대 실시되었다. 그러나 실시되던 해와 그 이듬해에 잇달아 흉년이 왔고 각 지방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 시행세칙의 미비점들이 드러나는 사이 이를 틈탄 지주와 방납인들의 반대 공작으로 인조 3년에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대동법은 폐지되고 말았다. 지주들은 가호(家戶)가 아닌 토지 면적을 기준으로 부과되면서 세금이 많아지니까 반대했고 방납인들은 자신들의 누리던 폭리와 특혜가 사라지니까 반대했고 탐관오리들은 비교적 투명한 징세과정 때문에 수탈을 하기가 어려워지니까 반대했다. 대동법이 농토가 많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 먼저 실시되지 못하고 경기도와 강원도에 우선 실시하게 된 것도 하삼도에 땅을 많이 갖고 있던 양반 지주들의 반발이 컸던 까닭이었다. 그런데 인조 16년인 1638년 충청감사로 있던 김육(金堉)이 대동법을 확대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인조실록, 인조 16년 9월 27일 2번째 기사
충청 감사 김육(金堉)이 치계하기를,
"선혜청(宣惠廳)의 대동법(大同法)은 실로 백성을 구제하는 데 절실합니다. 경기와 강원도에 이미 시행하였으니 본도(本道)에 무슨 행하기 어려울 리가 있겠습니까. 신이 도내(道內) 결부(結負)의 수를 모두 계산해 보건대, 매결(每結)마다 각각 면포(綿布) 1필과 쌀 2말씩 내면 진상하는 공물(貢物)의 값과 본도의 잡역(雜役)인 전선(戰船), 쇄마(刷馬)3 및 관청에 바치는 물건이 모두 그 속에 포함되어도 오히려 남는 것이 수만입니다. 지난날 권반(權盼)이 감사가 되었을 때에 도내의 수령들과 더불어 이 법을 시행하려고 하다가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만약 시행하면 백성 한 사람도 괴롭히지 않고 번거롭게 호령도 하지 않으며 면포 1필과 쌀 2말 이외에 다시 징수하는 명목도 없을 것이니, 지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은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당시 이런 김육의 건의에 비변사에서도 “공사(公私) 양편 모두가 이로울 것이고 서울과 지방이 모두 편리할 것”이라며 찬성 의견을 냈는데도 대동법의 확대 실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조정에 양반 지주의 편을 들어 대동법에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저들은 논의한다고 시간만 질질 끌다가 유야무야시키고 말았다. 효종 즉위년에 우의정으로 있던 김육은 다시 또 대동법의 확대 실시를 들고 나섰다.
●효종실록, 효종 즉위년(1649년) 11월 5일 4번째 기사
우의정 김육(金堉)이 상차(上箚)4하기를,
"왕자(王者)의 정사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보다 우선할 일이 없으니 백성이 편안한 연후에야 나라가 안정될 수 있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천변(天變)이 오는 것은 백성들의 원망이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부역(賦役)에 시달려 즐거이 살면서 일할 마음이 없으니, 원망하는 기운이 쌓이고 맺혀 그 형상이 하늘에 보이는 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인군이 재변을 만나면 두려워하며 몸을 기울여
수성(修省)하는 것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고 오직 백성을 보호하는 정사를 행하여 그들의 삶을 편안케 해주는 것뿐입니다.
대동법(大同法)은 역(役)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한 것이니 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입니다. 비록 여러 도(道)에 두루 행하지는 못하더라도 기전(畿甸)과 관동(關東)에 이미 시행하여 힘을 얻었으니 만약 또 양호(兩湖)5 지방에서 시행하면 백성을 편안케 하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방도로 이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졸곡(卒哭)6 후에 바로 의논했어야 했는데 객사(客使)가 마침 이르러 와서 아직까지 미루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객사가 이미 갔는데도 묘당(廟堂)의 논의가 조용해 들리지 않으니, 신은 못내 괴이하게 여깁니다. 만약 신이 나오기를 기다려 회의하려고 했다면 신은 불행하게도 병으로 누워 있으니 역시 일을 그르친 죽을 죄입니다. 신이 이 일에 급급한 것은 이 일은 즉위하신 초기에 시행하여야지 흉년이 들면 또 시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세운(歲運)이 조금 풍년이 들었으니 이는 하늘이 편리함을 빌려준 것입니다. 명년의 역사를 겨울 전에 의논해 정하여야 시행할 수 있습니다. 신이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신으로 하여금 나와서 회의하게 하더라도 말할 바는 이에 불과하니, 말이 혹 쓰이게 되면 백성들의 다행이요, 만일 채택할 것이 없다면 다만 한 노망한 사람이 일을 잘못 헤아린 것이니, 그런 재상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천하의 일은 서로 모순(矛盾)되기를 좋아하니, 자산(子産)이 이른바 ‘어찌 감히 당신의 얼굴이 내 얼굴과 같다고 하겠습니까.’7 한 것은, 신이 매우 깊이 개탄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고 성사시키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였으니, 신이 믿는 바는 오직 전하뿐입니다. 감히 별폭(別幅)에 써서 올립니다."
김육의 상차를 받은 효종은 이조판서 김집(金集)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김집은 시행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답했다. 김집은 김장생의 아들로 효종의 세자시절 스승이었던 송시열의 스승이기도 하다. 김집이 반대하니 그 제자인 송시열과 송준길도 반대하였다. 사실 김집과 송시열 등이 앞에 나섰을 뿐, 대부분의 관료들도 대동법 확대를 지지하지 않았다. 반면 대동법 확대를 찬성하는 쪽은 김육을 비롯하여 좌의정 조익(趙翼)과 김집에 앞서 이조판서를 지냈던 이시백(李時白) 등 소수에 불과했다. 효종 8년에 왕이 신하들과 대동법을 호남에 실시하는 문제들 토론할 때 당시의 병조판서였던 허적(許積)이 "이 일이 백성들에게는 편리하겠지만 또한 불편한 점도 있습니다. 현재의 대신들은 거개가 어렵게 여기고 있고 꼭 시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오직 김육과 이시백 형제 몇 사람들뿐입니다."8라고 할 정도였다.
정변으로 등극한 인조는 즉위의 정통성이 부족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재야의 여론을 주도하면서 후진을 양성하던 산림(山林)에 주목하여 이들을 적극 조정에 불러들이려고 애썼고 효종도 즉위하자마자 김집과 송시열, 송준길 등을 불러들이면서 조정에 차츰 산림을 따르는 무리가 늘어났다. 이들을 산당(山黨)이라 불렀는데 대동법에 반대한 반면, 대동법을 지지했던 김육, 조익, 이시백9 등은 대대로 벼슬하며 한양에서 살던 경화세족(京華世族)들이어서 한당(漢黨)이라 불렸다. 이것이 조선 역사에서 사대부들이 민생을 이유로 서로 갈라섰던 거의 유일한 경우다.
김육은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동법의 확대실시에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매달렸다. 대동법이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줄 뿐만 아니라 국가재정에도 커다란 도움이 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효종실록, 효종 즉위년 12월 3일 1번 기사
상이 대신 및 비국(備局)10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조익이 나아가 아뢰기를,
"왕정(王政) 가운데서 큰 것으로는 대동법(大同法)보다 큰 것이 없는데 어찌 한두 가지 일이 불편하다 하여 행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김육은 아뢰기를,
"대동법은 지금 모든 조례(條例)를 올렸으니, 전하께서 옳다고 여기시면 행하시고 불가하면 신을 죄주소서."
하니, 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동법 논의에 있어 효종은 별로 적극적이지 않은 태도를 자주 보였다. 김육은 대동법으로 김집과 갈등이 빚어지고 송시열, 송준길 등의 공격을 받는 와중에 효종이 결단을 안 내리자 수차례에 걸쳐 사직을 요청했다. 대동법은 결국 김육이 효종에게 건의한지 2년 만에 겨우 충청도만 확대 실시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효종실록, 효종 2년(1651) 8월 24일 3번째 기사
호서의 대동법(大同法)을 비로소 정하였다. 우리나라의 공법(貢法)은 너무나도 무너졌다. 서울에 있는 호탕하고 간교한 무리들이 경주인(京主人)이라고 하면서 제도(諸道)에서 공납하는 물품을 방납(防納)하고 그 값을 본읍(本邑)에서 배로 징수하였다. 그 물품의 값이 단지 1필(匹)·1두(斗)라 할 때 교활한 방법을 써 수십 필, 수십 석에 이르게 한다. 탐관오리들이 그들에게 빌붙어 이익을 꾀하는데, 마치 구렁텅이로 물이 몰려드는 것 같아 그 폐단이 점점 불어났다.
또 임진왜란 이후로 공안이 더욱 문란해져서 계해년11에 강정(講定)하였으나 다과가 균등하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매우 원망하였다. 그래서 60년 이래로 의논한 자들이 대부분 속히 개정해야 된다고 말하였다. 혹자는 "선왕이 토지를 맡겨 준 뜻에 따라 공안을 개정하여 그 생산물을 징수해야 한다." 하기도 하고, 혹자는 "공안은 갑자기 개정하기 어려우니, 우선 양세(兩稅)의 제도에 의하여 1년 잡색(雜色)의 공물을 통틀어 계산한 다음, 그 많고 적음에 따라 그 값을 공평하게 정하고 쌀이든 베든 바로 서울로 실어 올려 물건을 무역해서 공물을 마련하게 하여 중간에서 이익을 꾀하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한다." 하는 등등의 의논이 분분하여 정해지지 않았다. 영의정 김육(金堉)이 대동법을 극력 주장하였고, 또 충청도는 공법이 더욱 고르지 못하다고 하여 먼저 시험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누차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혹자는 그것이 편리하다고 말하고 혹자는 그것이 불편하다고 말하였다. 이에 와서 상이 김육 등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고 그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익히 강론하여 비로소 호서(湖西)에 먼저 행하기로 정하였다.
대동법은 이후 1658년에는 전라도의 해읍(海邑)12, 1662년에는 전라도의 산군(山郡)13, 1666년 함경도, 1678년에는 경상도, 1708년에는 황해도의 순으로 확대 실시되었다.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 경기도에서 처음 시작한 이 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데는 무려 100년이 걸렸다. 언제나 개혁은 이처럼 힘이 드는 것이다. 그 힘든 과정 속에서 김육은 소신을 지키며 국가의 관리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1658년 김육이 죽자 효종은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하지만 역사에는 김육과 같은 인물은 잘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대동법시행 기념비’인 이 비는 ‘호서선혜비(湖西宣惠碑)’라고도 불린다. 대동법이 좋은 성과를 거두자 대동법 시행을 만인에게 알리고, 백성을 생각하는 그 덕을 기념하게 위해 김육 사후인 1659년(효종10)에 세운 것이다. 삼남지방을 통하는 길목인 평택에 설치한 것인데 원래 위치는 현재보다 100 m 아래 지점에 있던 것을 1970년대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참고 :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각주 2
- 조선시대 중앙의 각 궁(宮)과 사(司)가 지방의 여러 관부에 부과, 수납할 연간 공부(貢賦)의 품목과 수량을 기록한 장부 [본문으로]
- 조선 시대에 경기도 일대를 이르던 말 [본문으로]
- 지방에 배치하여 관용(官用)으로 쓰던 말 [본문으로]
- 관료가 임금에게 차자(箚子)를 올리는 일. 차자는 소장(疎章)의 일종으로 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간단히 사실만을 기록하여 올리며, 상소보다는 형식은 간단하면서도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 표현하는 이점이 있었다. [본문으로]
- 호남(湖南)과 호서(湖西). 즉 전라도와 충청도 [본문으로]
- 장사를 마치고 삼우제(三虞祭)를 지낸 뒤에 ‘수시로 곡하는 것’을 끝내기 위하여 지내는 제사로, 초상으로부터 3개월이 지난 뒤에 치러진다. [본문으로]
- 어찌 감히 당신의 얼굴이 내 얼굴과 같다고 하겠습니까 : 중국 초(楚)나라 때의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사람의 마음이 같지 않다는 뜻. [본문으로]
- 효종실록, 효종 8년 9월 20일 1번째 기사 [본문으로]
- 인조정란 때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된 이귀의 아들로 본인도 유생 신분으로 인조정란에 참가하여 정사공신 2등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다. [본문으로]
- 비변사 [본문으로]
- 1623년, 인조 1년 [본문으로]
- 바닷가에 있는 고을 [본문으로]
- 산읍(山邑), 산골에 있는 고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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