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26 - 일장춘몽

從心所欲 2020. 2. 7. 17:17

효종이 왕에 오르기 전의 호칭은 봉립대군(鳳林大君)이다. 봉림대군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첫째 아들인 소현세자와는 일곱 살 차이로, 두 사람은 모두 병자호란 때 중국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 심양과 북경에서 같이 8년을 지냈지만, 두 왕자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소현세자는 당시 청에 유입된 서양 문물과 사상에 큰 관심을 가졌고 직접 아담 샬과 같은 서양 신부를 만나 교류도 했다. 또 실질적 조선의 외교적 창구가 되어 청과 담판하고 조정하는 중에 청나라 조정의 신임을 얻으면서 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반면 봉림대군은 서양 문물에 경탄하거나 특별한 관심도 없었고 반청(反淸)의 감정을 갖고 있었다. 이런 두 왕자의 소식은 역관과 사은사를 통하여 조선의 조정에 전해졌고 청나라에 치욕을 당한 인조는 소현세자에 대하여 몹시 분개했다. 결국 소현세자는 고국에 돌아와 2달 만에 죽고 봉림대군이 왕위를 계승했다. 봉림대군이 비록 인조의 둘째 아들이기는 하지만 종법(宗法)에 의하면 봉림대군은 왕위 계승자가 아니다. 죽은 소현세자의 맏아들이 왕위를 계승해야 했다. 하지만 인조는 세자빈을 사사하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귀양을 보내 그 중 두 아들을 죽게 하면서까지 기어코 봉림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효종은 즉위하자 곧 대군시절 스승이었던 송시열을 벼슬자리에 불렀다. 이때 송시열은 벼슬에 나아가며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밝힌 상소문을 올렸다. 이를 <기축봉사(己丑封事)>라 하는데 그 핵심은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讐雪恥)였다. 존주대의는 춘추(春秋)대의에 의거하여 명나라를 중화(中華)로, 청나라를 오랑캐로 구별하면서 명나라가 망한 상황에서 중화문화를 계승 발전시킬 나라는 조선뿐이라는 것이며, 복수설치는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할 것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송시열의 주장은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송시열이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효종은 왕위에 오른 뒤부터는 좋아하던 술도 일체 끊고 심기일전, 복수설치의 의지를 다져나갔다. 하지만 강력한 북벌 의지에도 불구하고 효종은 즉위 초에 그 뜻을 강력히 펼칠 수가 없었다. 첫 번째로는 김자점(金自點)이라는 인물의 분탕질 때문이었다.

 

김자점은 인조정란의 1등 공신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과거에 급제하지도 않고 관직에 진출하여 영의정까지 오르며 인조 치세 내내 승승장구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어느 순간부터 당시의 조정에서는 드물게 친청(親淸)파가 되었다. 김자점은 1643년 진하 겸 사은사로 그리고 다음 해인 1644년에는 사은 겸 주청사로 청나라에 연속으로 다녀왔다. 그러면서 청나라 사신이나 조선의 역관 무리들과 결탁하여 청나라와의 친분을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삼았다. 김자점은 인조가 아끼던 후궁 귀인 조씨(趙氏)가 세자빈인 강빈(姜嬪)과 사이가 안 좋은 것을 이용하여 조귀인으로 하여금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다거나 소현세자가 조선에 돌아오면 청에서 인조를 몰아내고 소현세자를 왕에 앉힐 것이라는 등의 말을 전하도록 하여 소현세자에 대한 인조의 분노를 키워 결국 소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또한 1646년에는 인조가 소현세자빈 강씨(姜氏)를 죽이려는 생각이 있음을 간파하고, 인조의 수라상에 독약을 넣은 뒤 그 혐의를 강빈에게 뒤집어 씌워 사사되게 했고, 이듬해 소현 세자의 세 아들을 모두 제주에 유배 보내는 데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런 후 1647년에는 조귀인의 소생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자신의 손자인 김세룡(金世龍)을 혼인시켜 자신의 입지를 더욱 곤고히 하였다.

 

그런데 1649년 후원자인 인조가 죽고 효종이 새로 즉위하자 사헌부에서 현직 영의정인 김자점을 바로 탄핵하고 나섰다.

 

●효종실록, 효종 즉위년(1649) 6월 16일 2번째 기사

집의 김홍욱(金弘郁), 장령 이석(李晳)이 인피하기를,

"영의정 김자점은 원훈 대신(元勳大臣)으로 선조(先朝)의 지우(知遇)를 입어 총애가 비할 데 없었으니 힘과 충성을 다해 보답하기를 생각해야 마땅한데도 공의(公義)의 중함을 생각지 않고 오로지 사리사욕만을 꾀해 저택의 크고 화려함이 참람하게도 공궁(公宮)에 비길 만하며, 전장(田庄)이 온 나라 안에 널려 있고 뇌물이 그 문으로 폭주하며, 대단한 권세로 조정을 유린하여 관원들을 마치 노예처럼 꾸짖고 모욕합니다. 국가를 저버리고 거리낌 없이 방자한 그의 짓거리를 사람들이 모두 좋지 않은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오히려 존귀한 수상(首相)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맑고 깨끗한 정치에 누를 끼치고 있으니 여정(輿情)이 분해하며 침을 뱉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효종은 김자점이 선왕(先王)의 훈신(勳臣)이었던 점을 내세워 탄핵을 따를 수 없다고 했으나 연이은 양사의 탄핵에 일단 김자점을 파직시키고 다음 해 봄에 중도부처(中道付處)를 명하여 홍천현(洪川縣)에 유배하였다. 그러자 김자점은 유배지에서 심복 역관을 시켜 청나라에 새 왕이 옛 신하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 한다며, 인조의 능인 장릉(長陵)의 지문(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은 사실을 그 증거로 보냈다. 일국의 영의정까지 지낸 자가 자신의 처지가 불리해졌다고 나라의 운명을 걸고 도박하는 매국행위를 서슴지 않은 것이다. 이에 청나라는 즉시 조선의 국경지대에 군대를 증강하는 한편 사신을 파견해 조사에 나섰다. 다행히 이 일은 잘 무마가 되었지만 효종으로서는 청나라의 감시 속에서 북벌을 추진하는 일에 극도로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김자점은 홍천에서 광양(光陽)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는데 김자점이 거기서 아들 김익(金釴)을 앞세워 조귀인의 큰 아들인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계획했다는 고변이 나와 결국 복주(伏誅)되고 만다. 또한 조귀인도 딸 효명옹주와 함께 궁으로 무녀(巫女)를 불러들여 임금이 거처하는 대전과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그리고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의 처소에 뼛가루 등을 파묻어 저주를 행하고, 승려들과 불상을 세워서 효종을 무고(巫蠱)했다는 죄목이 밝혀져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사사(賜死)되었다. 후세는 이를 당시 조정의 대청(對淸) 강경파가 친청(親淸)파를 숙청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효종이 김상헌(金尙憲)·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배청(排淸)파를 중용하여 즉위기간 내내 북벌(北伐)을 추진한 사실과 대비한 기술이지만, 당시 조선의 조정에 딱히 친청파라고 부를만한 세력은 없었다. 그저 김자점과 그와 가까웠던 세력을 제거한 사건일 뿐이다.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청의 허락 없이는 군대를 정비하거나 성과 요새를 구축하는 등의 독자적 군비(軍備) 강화행위를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효종은 즉위 초, 왜정(倭情)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남부지역에만 소극적인 군비를 펼 수 있었을 뿐 자신의 의중에 있는 적극적 군비계획을 시행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위 나선정벌이라 불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인들이 흑룡강(黑龍江) 일대에 진출하여 성을 쌓고 곡물과 광물자원 등을 획득하기 위한 경제활동을 전개하면서 점차 청나라 영토인 송화강(松花江) 방면으로 진출하다가 청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청나라는 군사를 동원하여 이들을 격퇴하려 하였지만 총포로 무장한 러시아인들에게 계속 연패하자 임진왜란 이후 조총을 사용하고 있는 조선에 총수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효종 5년인 1654년, 함경도 병마우후 변급(邊岌)에게 조총군 100명과 초관(哨官) 50여 명을 지원군으로 주어 파견하였는데 조선군은 교전 7일 만에 러시아군을 패퇴시키고 개선하였다. 이것이 1차 나선정벌이다. 나선(羅禪)은 당시의 러시아를 지칭하는 말이다.

 

[조선의 나선정벌]

 

1652년부터 북벌의 선봉부대격인 어영청을 대폭 개편, 강화하고 금군(禁軍)을 기병화하는 등 내부적으로 군제를 강화해 왔던 효종은 나선정벌을 계리로 남방은 물론 북방지대에도 나선정벌을 핑계로 산성 등을 수리하는 등 군비를 적극적으로 확충하기 시작했다. 또한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하멜(Hamel,H.) 등을 훈련도감에 들여 조총·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량하고 보수했다.

 

효종은 1659년에 송시열과 독대한 자리에서 북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피력했다.

“저 오랑캐는 반드시 망하게 될 형편에 처해 있소. 경(卿)이 지난번 주자의 말씀을 들어 오랑캐가 중원의 인재를 얻어 중국의 제도를 배우면 점점 쇠약해진다는 것이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오. 지금의 한[汗]이 비록 영웅이라고는 하나, 주색에 깊이 빠져있어 그 형세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오. 오랑캐의 일은 내 익히 알고 있소. 신하들은 모두 내가 군대를 다스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나,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있소. 그 이유는 청을 물리칠 좋은 기회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정예화된 포병 10만을 길러 두었다가 기회를 봐서 저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쳐들어갈 계획이오.”

 

북벌에 대한 효종의 이런 의지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그것을 뒷받침할 국가적 재정이 부족했다. 또 북벌을 실행할만한 호기도 찾아오지 않았다. 청나라는 효종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강한 나라가 되면서 국세(國勢)도 안정되어 조선이 쉽사리 넘볼 나라가 아니었다. 결국 효종의 북벌에 대한 꿈은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말았다.

 

[청나라와 명나라 영토 비교]

 

효종은 북벌정책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욕심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은 왕권이 강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효종은 방패막이 겸 동반자로 재야의 영수인 송시열을 중용하여 사림세력의 반발을 억제하고 이들 세력들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북벌을 추진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송시열은 북벌론을 실천에 옮길 인물은 아니었다. 송시열의 북벌론은 명에 대한 사대(事大)관념에서 나온 것으로, 군신관계였던 명을 파멸시킨 청에 대해 관념적인 복수심은 있어도 현실적으로 청에 복수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북벌론은 애초부터 동상이몽에 불과했다. 특히 이때 송시열의 관심은 예학(禮學)에 있었다.

 

[효종과 왕비 인선왕후 장씨의 능인 여주영릉(寧陵),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여주시 사진]

 

참고 : 조선왕조실록,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박영규, 1996, 들녘), 인물한국사(정성희, 장선환), 인명사전(2002. 인명사전편찬위원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