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이 죽자 13세의 어린 세자 숙종이 조선의 19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숙종은 즉위하자 송시열을 원상(院相)으로 삼고자 하여 한양으로 부르면서 효종의 능지(陵誌)를 지었던 송시열에게 현종의 능지를 지어 올리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자 송시열은 자신이 "(복제 때에) 범죄를 한 것이 지극히 중하여 서울 가까운 곳에서 대죄(待罪)한 지가 이미 한 달이 되었습니다. 선침(仙寢)이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어찌 차마 갑자기 무죄로 자처하면서 임금 계신 곳에 드나들 수가 있겠습니까?"하며 이를 사양하였다.
그런 와중에 진주의 곽세건(郭世楗)이라는 유학(幼學)이 상소를 올렸다. 송시열이 두 번에 걸쳐 복제를 잘못 정한 주범이고 이를 바로 잡은 것이 현종인데, 그런 죄인 송시열로 하여금 현종의 능지를 쓰게 하는 것은 현종의 성덕을 더럽히는 일이라는 내용이었다.
►원상(院相) : 왕이 죽은 뒤 졸곡(卒哭)까지의 스무엿새 동안 어린 임금을 보좌하여 정무를 맡아보던 임시 벼슬. |
지금의 관점에서는 상복을 얼마나 입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한 일이기에 이렇게 몇 십 년을 두고 논란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예(禮)는 곧 사회질서이고 질서는 곧 나라를 운영하는 규범이었다. 따라서 예법을 바르게 하는 것은 국가의 중대사일 수밖에 없었다.
숙종이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 이런 일도 있었다. 관학(官學)에서 생도를 가르치는 관원이 사망하였는데 그 아들이 정신이상이라 상주가 되어 상을 치를 형편이 못 되었다. 그래서 손자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상주 노릇을 하였다. 당시 상가(喪家)에서는 이 문제를 단독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고 당대 예학의 최고 권위자라는 송시열에게 묻고 또 예조에도 물어서 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말거리도 되지 않는 이 일을 놓고 왕과 영의정, 영중추부사, 좌의정이 모여 논의를 하였다. 숙종은 손자가 아버지 대신 상복을 입는 것은 살아있는 아비를 죽은 자로 만든 것이니 손자를 처벌하는 것은 물론, 예법을 어긴 상가를 찾은 문상객들까지 벌을 주려고 하였다. 하지만 대신들이 변호하고 극구 말린 끝에 겨우 “다시 이 같은 폐단이 없게 하라”는 교시를 내리는 것으로 그칠 수 있었다.
곽세건의 상소에 서인들이 나서서 송시열을 변호하며 곽세건을 국문하여 단죄(斷罪)하기를 청했다. 하지만 숙종은 “유생(儒生)의 상소는 쓰고 안 쓰는 데 있을 뿐”이라며 거절했다. 그러면서 현종의 능지는 송시열 대신 김석주(金錫冑)에게 맡겼다.
시간이 갈수록 숙종은 과거의 복제사건을 중대 사안으로 받아들이면서 송시열이 사종지설로 선왕들을 능멸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현종의 행장(行狀)은 송시열의 문인인 대제학 이단하가 지었다. 이단하는 송시열이 복제를 잘못 정한 것을 현종이 바로 잡았다는 내용을 두루뭉술하게 기록하였다. 그러자 숙종은 이를 분명하게 기술하라고 몇 번을 되돌려 보냈다. 그럼에도 이단하가 스승을 생각하여 마지못해 고치는 시늉만 하자, ‘스승에 대한 사표(師表)만 알고 임금의 군명(君命)은 모른다’며 삭탈관작 하여 문외출송(門外黜送)시키고 다시는 벼슬자리에 등용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실록에 기록된 숙종의 모습은 13살의 임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호하고 냉철하였다.
숙종의 이런 태도에 남인들은 송시열을 공격하며 파직시키고 귀양 보내기를 청하고 나섰다. 이에 대사성(大司成) 남구만(南九萬)은 ‘의리로 보아 어진 사람을 상해하고 바른 사람을 미워하는 무리와 조정에 함께 낄 수 없습니다’는 사직상소를 올리며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는 송시열을 존중하고 예우하셨는데, 겨우 두 세 달이 지나자 성심(聖心)이 문득 바뀌니, 중외(中外)에서 다들 전하께서 살을 에듯 물이 점점 젖어드는 듯 참소하는 말에 동요되지 않으시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국가는 안정할 데를 모를 것이니, 어찌 위태하지 않겠습니까?’하고 숙종의 태도를 힐난하였다.
좌의정 정치화(鄭致和), 우의정 김수항(金壽恒), 병조판서 이상진(李尙眞)과 같은 다른 서인들도 나서 송시열을 변호했다.하지만 숙종은 마침내 숙종1년 1월에 송시열을 덕원부(德源府)로 귀양 보냈다.
► 덕원부 : 지금의 함경남도 원산 ► 즉위년과 즉위 1년의 차이 : 왕위를 정상적으로 계승한 경우는 왕위에 오른 해를 즉위년으로 칭한다. 선왕을 대우하기 위해서다. 즉, 현종이 사망한 1674년은 현종 15년이면서 숙종 즉위년이다. 그래서 숙종 1년이라고 하면 실제로는 즉위 2년차인 1675년이 된다. 하지만 중종이나 인조처럼 연산군과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경우에는 즉위년을 따로 표시하지 않고 바로 즉위 1년으로 칭한다. 광해군이 물러난 1623년은 광해 15년이자 인조 1년이 된다. |
당시 송시열은 서인의 영수였으므로 송시열에 대한 서인들의 구명 노력은 계속 이어졌다. 조정에서 뿐만 아니라 지방 유생들도 계속 상소를 올렸는데 숙종은 그런 상황을 보면서 ‘송시열의 일당들이 다만 송시열이 있는 줄만 알고 군신(君臣) 간에 정해진 의리는 아랑곳없이 말을 조작하고 비방을 일삼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중 숙종 5년에 송시열과 송준길의 문인이었던 생원 송상민(宋尙敏)이 송시열을 변호하기 위하여 복제에 대한 예론의 시말(始末)을 정리하여 소위 <석곡봉사(石谷封事)>로 알려진 책자를 올렸다. 석곡은 송상민의 호이고 봉사는 남이 보지 못하도록 밀봉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가리킨다. 숙종은 이에 대하여 “위로 선왕(先王)에 언급하고 아래로 조정 신하들을 모함하니 나의 분함이 끝이 없다.”며 “역률(逆律)로 논단(論斷)하여 국법을 바로 잡으라.”고 명했다. 송상민은 글을 올린 지 5일 만에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그리고 송시열은 다시 거제도로 옮겨져 위리안치 되었다.
남인들은 송시열에 대한 처벌에는 한마음이었지만 그 처벌의 경중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선조 때 세자건저 문제로 불거진 정철의 처벌 수위를 놓고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갈렸던 상황이 다시 재현된 것이다. 송시열에 대해 더 강력한 처벌을 원하는 강경파는 허목, 윤휴, 권대운 등이었는데 이들을 청남(淸南)이라고 불렀다. 반면 온건한 입장이었던 영의정 허적을 중심으로 한 인물들은 탁남(濁南)이라고 했다. 청남 중에서도 특히 윤휴(尹鑴)가 송시열에 대하여 강경했는데, 이는 개인적 구원(舊怨)이 있었던 까닭이다.
원래 윤휴와 송시열은 가까운 사이였다. 윤휴는 19세 때인 1635년, 속리산의 암자인 복천사(福泉寺)에서 송시열을 만나 서로 토론을 한 일이 있었다. 윤휴보다 10살 위인 송시열은 그 때 이미 학문적 명성을 얻고 있었을 때였는데, 두 사람이 서로 3일간을 토론한 끝에 송시열이 “30년간의 나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고 자탄할 정도로 어린 윤휴의 학문을 높게 평가했었다. 또한 후에 두 사람은 송시열과 같은 기호학파로서 예론에 밝았던 권시(權諰)와 각각 사돈관계를 맺게 되면서 따지자면 먼 친척뻘이니 서로 예를 갖춰야 하는 사이였다. 윤휴는 그 때까지 당파에 치우치지 않았던 인물이라 서인들과의 교류도 잦았다. 그런데 기해예송 때 송시열이 1년복을 시행하려 하자 윤휴가 “임금의 상(喪)에는 모두가 참최복(3년복)을 입는 것이 신하의 의리옵니다.”라고 제동을 걸었다. 이에 송시열이 “효종이 조대비를 모셨으니 조대비가 신하의 신분이 되어 3년복을 입는 의리는 없다”고 대응하였고, 윤휴는 주나라 무왕(武王)이 부모를 신하로 삼았던 고사를 인용하였다. 이에 송시열은 다시 “아들이 어머니를 신하로 삼는 법은 없다”는 주희의 말을 인용하면서 “후학이 어찌 이를 감히 반박하랴.”고 받아쳤다. 성리학이 모든 논리를 지배하는 조선에서 주자의 말은 절대적 권위를 갖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때 송시열이 주자를 거론한 데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일찍이 윤휴가 「중용(中庸)」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서 주석을 달았는데 주자(朱子)가 지은 「중용」의 주석서(注釋書)인 <중용장구(中庸章句)>와 그 해석이 달랐다. 그러자 송시열은 “하늘이 공자를 이어 주자를 냈음은 진실로 만세의 도통(道統)을 위한 것이다. 주자가 난 이후로 현저해 지지 않은 이치가 하나도 없고 밝아지지 않은 글이 하나도 없는데 윤휴가 감히 자기 소견을 내세워 마음대로 억설(臆說)한다”며 윤휴를 비난했다. 또한 “윤휴는 진실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서 모든 혈기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죄를 성토해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 사문난적이란 유교에 대한 주자의 교리를 다르게 해석하여 유교의 질서와 학문을 어지럽힌다는 비난인데 조선의 사대부에게는 오명(汚名)이자 치욕인 표현이다. 윤휴도 송시열의 자신에 대한 비난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또한 「논어」의 향당(鄕黨)편에 나오는 ‘마구간에 불이 났는데, 공자께서 퇴근하시어 “사람이 다쳤느냐?”라고 물으시고는,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셨다.’라는 구절을 윤휴가 주자와 다르게 해석한 것을 두고도 송시열은 윤휴를 맹비난했다. 그러자 윤휴는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인가? 주자가 찾아온다면 나의 학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공자가 살아온다면 나의 학설이 맞다고 할 것이다.”라고 응수하여 송시열의 분노를 더 키운 일이 있었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 주자와 주자학에 대한 송시열의 태도는 거의 맹신도 수준이었다. 송시열은 사서(四書)보다 사서에 대한 주자의 학설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송시열에게 종교인 주자학은 윤휴에게는 일개 학문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의 학문적 태도의 차이와 송시열의 윤휴에 대한 비난으로 양자 간에는 앙금이 쌓였을 것이다. 기해예송 때 윤휴의 반박도 그런 밑바탕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고 송시열이 주자를 들먹여 반박한 것도 그런 이유로 보인다. 결국 예송논쟁은 두 사람 사이를 더욱 악화시켰다. 송시열은 예송 이후 윤휴를 ‘도적 윤휴’라는 의미의 적휴(賊鑴), ‘거짓말 하는 도적’이라는 참적(讒賊)으로 불렀다고 한다. 스승이 윤휴를 이처럼 원수처럼 미워하니 그 문인들 또한 송시열을 따라 윤휴를 원수처럼 여겼다.
현종 말부터 2차 예송의 여파로 입지를 넓혀 온 남인들은 숙종 초 서인의 영수라 할 송시열을 유배 보냄으로써 승기를 잡았다. 숙종의 송시열에 대한 분노를 감지한 좌의정 김수항(金壽恒), 우의정 정지화(鄭知和)을 비롯한 서인 대신들은 연일 사직하겠다는 소를 올렸지만 숙종은 이를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예송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히 송시열에게 책임을 묻는 입장이었다. 서인들은 숨을 죽이고 어린 숙종의 심기를 살피는 처지가 되었다. 영의정 자리는 현종 말부터 남인의 허적이 계속 맡고 있었다. 남인이 득세하고 서인이 위축되는 정국이 숙종 5년까지 계속되었다.
참고 : 조선왕조실록,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1997, 석필),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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