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18 - 효와 패륜

從心所欲 2020. 1. 9. 16:55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는 아무리 신하들의 압박이 심했더라도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끝까지 보호해주었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광해군이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뜻을 고집했다면 후세는 또 그를 어떻게 평가했을 것인가? 이미 그런 단초는 광해군이 영창대군의 처벌과 김제남의 국문을 계속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자 성균관의 유생들이 올린 상소에도 나타난다.

“역적 의(㼁)가 비록 어린 아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흉도의 귀중한 이용물이 된 나머지 그를 왕으로 옹립하기로 했다는 설이 적도의 공초(供招)1에 낭자하게 나왔으니 이런 대역(大逆)의 이름을 몸에 지니게 된 이상 천지 사이에 용납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지친(至親)이라는 연고와 우애하는 정 때문에 시일을 끌기만 한 채 차마 법을 적용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른바 법이라는 것은 천하의 공(公)에 속한 것이요 정(情)이라는 것은 일 개인의 사(私)에 속한 것이니, 전하께서 어떻게 일 개인의 사 때문에 만세의 공을 없앨 수가 있겠습니까. 옛날 성인들의 예를 찾아보더라도 주공(周公)은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죽였고 우리 태종(太宗)은 방석(芳碩)을 죽였는데, 모두 천하와 종묘사직을 위해 계책하면서 의심하지 않고 실행에 옮겼던 것은 사적인 은혜를 가볍게 보고 대의를 중히 여기면서 변고를 당해 제대로 권도(權道)를 발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2 

 

형제라는 사적인 정 때문에 역모 혐의를 받는 영창대군을 처벌하지 않으면 공의가 실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의(少義)를 위해 대의(大義)를 져버리지 말라는 것이니, 광해군에게는 비수와 같은 지적이었을 것이다. 

강도 일당을 국문하다 영창대군, 김제남을 비롯하여 대북의 반대세력인 서인들까지 제거해 버린 이 사건을 계축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계축옥사(癸丑獄事)라고 한다. 이 계축옥사를 중심으로 한 궁중의 비사(秘事)를 기록한「계축일기(癸丑日記)」라는 글이 있다.

인조정란 뒤에 철저하게 인목대비의 편에 서서 광해군을 비하하고 폄훼하려는 의도에서 써진 글이다. 작자는 인목대비의 측근 나인이라는 것이 통설이지만 대비자작설도 있고 영창대군의 누나인 정명공주(貞明公主)와 그 나인들의 합작이라는 설도 있다. 이 글에 나오는 인목대비의 말들이다.

“대군으로 말미암아 이런 화가 부모와 동생에게 미치니 어찌 차마 들을 수만 있으리까? 내 머리를 베어서 표를 보이니 대군을 데려다가 아무렇게나 처치하고 아버님과 동생을 놓아주옵소서.”

 

“(임금께서) 대군을 곱게 있게 해주시마 하고 여러 날 말씀을 해주시고 내전에서도 속이지 않겠노라고 극진한

투로 글월에 적으셨으니, 나의 이 서러움을 어디다 견주어 말할 수 있으리까마는 대군을 선왕의 유자(遺子)라

너그럽게 생각하사 하늘이 준 명을 고이 부지하여 살게 해주마고 거듭거듭 말씀을 하셨으니 이 말을 표로 알고

내어 보내 주겠습니다마는, 아버님과 동생을 죽게 하였으니 그 서러움인들 무엇으로 다 측량하여 말할 수

있으리까?  이제 둘째 동생과 어린 동생이 살아남았다 하니 바라옵건대 이 두 동생이나 살려주시면 대군을 내어

보내리다. 서럽게 죽은 가운데서나마 절사3나 되지 않도록 하여 주시기를 비나이다.”4

 

문득「한중록(恨中錄)」을 쓴 혜경궁 홍씨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끝까지 영창대군을 보호하려다 실패한 광해군을 비난하기 전에 자식대신 친정 식구를 살려달라는 인목대비가 먼저 패륜으로 지탄받아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인목대비는 19살 때인 1602년에 왕비로 책봉되어 궁중에 들어왔다. 그때 광해군은 28살이었다. 왕세자로 있은 지도 10년이 된 때다. 자신보다 나이가 아홉 살이나 어린 서모가 낯선 궁중에 들어왔다가 6년 만에 과부가 되었다. 후에 인목대비가 패륜을 지적한 광해군은 혼자 남은 서모 인목대비를 어떻게 대했을까?

 

《광해군일기》의 광해 2년 3월에는 여악(女樂)에 대한 기사가 자주 등장한다. 여악이란 궁중이나 지방관아에서 기생들이 행하는 가무와 풍류를 말한다.

3월 8일에는 사헌부에서 15일에는 홍문관에서 그리고 다시 19일에는 사헌부가, 20일에는 사간원에서 여악 설치를 반대하는 청을 올렸으나 광해군은 이를 모두 물리쳤다. 그 후로도 간관들의 반대는 계속되었다. 그러면 광해군은 왜 신하들이 이처럼 반대하는 여악을 고집했을까?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2년 3월 15일 3번째 기사

사헌부에서 여악의 설치에 대해 반대를 건의하였으나 불허하다 또 여악(女樂)을 설치하지 말 것을 아뢰니,답하기를, "시골 마을의 필부(匹夫)가 어버이를 위할 때에도 또한 기쁘게 해주는 일이 있다. 국가가 비록혼란하다 하더라도 위에 자전(慈殿)5이 계시니, 만약 풍정(豊呈)의 예를 행한다면 어찌 쓸쓸하게 해서야되겠는가. 이는 고집스럽게 다툴 일이 아니니, 번거롭게 고집하지 말라."하였다.

 

광해군은 한 달 전인 2월 17일에 인목대비에게 휘호를 올리는 것과 그때에 인목대비를 위해 진풍정(進豊呈)하는 일에 대하여 검토해서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진풍정(進豊呈)은 조선시대에 나라의 큰 경사를 맞이하여 거행되는 궁중연(宮中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의식(儀式)이 장중한 행사이다. 풍정(豊呈)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이를 축하하기 위해 신하들이 임금에게 음식을 바치던 일‘을 의미한다. 광해군은 인목대비에게 휘호를 올리면서 축하하는 잔치도 함께 열어 인목대비를 기쁘게 해주려는 생각이었다.

광해군의 명령을 받아 예조에서 검토하여 올린 전례에 따르면 진풍정에는 여악이 들어있었고 광해군은 여악을 설치하여 진풍정을 준비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자 간관과 대신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위의 기사에서 보듯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위한 배려에서 여악을 고집한 것이다. 하지만 신하들이 이를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 광해 2년 3월 23일 7번째 기사

사헌부와 사간원이 여악에 관한 일을 연계(連啓)하니,답하기를,
"우리나라는 조종조(祖宗朝) 때부터 여악을 설치한 지가 오래되었다. 난리를 치른 이후로 모든일이 보잘것없이 시작되었지만 이번에 다시 여악을 설치하는 것은 어찌 내가 즐기기 위해 하는 것이겠는가.다만 위로 자전(慈殿)이 계시어 풍정(豊呈)의 의식을 대략 갖추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양(羊)이라도보존한다6는 뜻이 실로 그 속에 있으니, 내 뜻을 잘 알아서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후에도 신하들의 반대는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광해군은 끝까지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진풍정은 여러 사정으로 인하여 미루어지다가 결국 1년 반이나 지난 후인 광해 3년(1611년) 11월 8일에 열렸다.

《광해군일기》에는 ‘통명전(通明殿)에서 진풍정 연회를 행하였다’는 짧은 기사만 있어 인목대비가 이 잔치를 어떻게 생각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기사들을 통하여 광해군의 인목왕후에 대한 효심은 선조가 죽은 후에도 변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신진찬도병(戊申進饌圖屛)》8첩 병풍 중 <통명전진찬도(通明殿進饌圖)>7, 비단에 채색, 각 136.1 x 47.6cm, 국립중앙박물관]

 

[《무신진찬도병》중 제1, 2폭인〈인정전진하도(仁政殿陳賀圖), 헌종이 창덕궁 인정전에서 대왕대비전과 왕대비전에 존호를 가상(加上)한 뒤 교서를 반포하고 백관들이 진하례를 올리는 장면]

 

[《무신진찬도병》중 제7폭인 <통명전헌종회작도(通明殿憲宗會圖)〉중 여악이 춤추는 모습 세부 확대]

 

그리고 진풍정 연회가 열리기 하루 전날의 기사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3년 11월 7일 1번째 기사

전교하였다.
"명년 정월이 되어야 자전(慈殿)께서 창경궁(昌慶宮)으로 이어(移御)하실 것이니 내가 먼저 옮겨와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뭇 신하들의 여망을 어기기가 어려웠던 데다가 대혼(大婚)의 기일이 촉박한 까닭으로 부득이 먼저 온 것이다. 지금 자전께서 경운궁(慶運宮)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신다는데, 나 혼자만 여기 남아 있으면 문안(問安)하는 등의 일에 불편한 점이 많을 뿐만 아니라 도리로 헤아려 보아도 매우 미안한 일이다. 오는 18일에 대비전(大妃殿)을 모시고 동시에 경운궁으로 돌아갔다가 연말에 가서 다시 길일을 택하여 창경궁으로 아주 옮길 것이니, 각사의 문서는 긴요한 것 이외에는 옮겨 가지 말라."

 

여기서 대혼(大婚)은 광해군의 아들 이질의 혼례를 말하는 것으로 전달인 10월 24일에 성균관 전적(典籍) 박자흥(朴自興)의 딸을 맞아 친영의 예를 행하였다. 이 혼례 때문에 경운궁에 있던 인목대비도 잠시 창경궁으로 처소를 옮겼었는데 다시 돌아간다고 하니 광해군도 따라서 경운궁으로 돌아가겠다는 내용이다.

이런 광해군의 전교에 사헌부, 사간원, 양사, 당상 , 삼사, 영의정이 나서서 경운궁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고 한 달 이상을 계속 말리는 바람에 환어는 지체되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끝내 신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12월 20일,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갔다.

 

경운궁은 지금의 덕수궁이다. 알려진 대로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살았던 개인집이었지만 전란 중에 궁궐이 불타 있을 곳이 없어 선조 때부터 왕이 거하게 된 곳이다. 덕수궁은 지금도 다른 궁궐에 비하여 전각 숫자가 많지 않지만 그 마저도 조선말에 지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광해군 때의 경운궁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하고 협소했을 것이다. 그 협소한 공간에 대비와 왕이 같이 머물러 있었다. 창덕궁의 내전은 선조 말에 공사를 시작하여 비록 일부이지만 새로 건물이 지어졌었다. 이미 5, 6월에 창덕궁에서 중국 사신을 위한 연회와 다른 의례도 치룬 기록들이 있다. 그래서 신하들은 일찍부터 광해군에게 창덕궁으로 이어할 것을 건의하였었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1년 10월 15일 1번 기사

승정원이 아뢰기를,
"새로 지은 궁궐에 이어(移御)하실 날짜를 신민들이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께서 삼년상이 끝나지 않았는데 화려한 궁전에 이어하는 것이 미안하다고 하시어 신들에게 하문하셨으니, 신들은 성인이 상중에 슬퍼하는 지극한 뜻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것을 우러러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왕가(帝王家)의 법궁(法宮)에 거처하는 제도에는 상중에 자리를 옮기는 절차가 없으므로 신들이 억측으로 단정할 수 없어서 대신들에게 의논할 것을 청했는데 대신들이 이미 의논을 드렸으니, 지금은 성상께서 결단하시기를 삼가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택일하는 데 있어서 불행하게도 내년에도 날이 없고 또 후년에도 날이 없을 경우 대신들이 염려한 것처럼 지연되어 오래 비워두는 걱정이 있을 듯합니다. 금년도 벌써 저물어 며칠이 남지 않았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 속히 결단을 내리시어 길일(吉日)을 선택하는 데 있어 형편에 따라 앞당기거나 물릴 수 있게 하여 신민들의 소망을 위로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계사를 보고 지극한 뜻을 모두 알았다. 그러나 여염에 있다가 상(喪)을 당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니, 평상시 임금들이 원래 법궁에 있다가 상을 당한 경우와는 사세가 다른 듯하다. 그러나 아뢴 뜻이 또한 그러하니 참작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대답은 이렇게 하였지만 광해군은 끝내 선조의 삼년상이 지날 때까지 계속 경운궁에 머물러 있었다.

 

 

참고 :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조선시대 형사 사건에서 죄인을 신문한 내용을 초록해 놓은 문서 [본문으로]
  2. 광해군일기, 광해 5년 5월 22일 18번째 기사 [본문으로]
  3. 절사(絶祀) : 자손이 끊어져 제사가 끊기게 됨 [본문으로]
  4.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2006. 진재교, 정병설 등)에서 인용 [본문으로]
  5. 임금의 어머니 즉, 인목대비 [본문으로]
  6. 논어(論語) 팔일(八佾)에 공자가 비록 구례(舊禮)나 허례(虛禮)라도 자신은 ‘옛 예(禮)를 아까워한다‘며 거론했던 고사(古事)의 내용을 인용한 말 [본문으로]
  7. 무신년진찬도병은 1848년 무신년에 당시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육순과 왕대비 신정왕후의 망오를 기념하여 창덕궁에서 열린 진찬 행사를 그린 병풍이다. 통명전진찬도는 두 번 째 장면으로 병풍 제3, 4첩에 해당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