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16 - 승자의 기록

從心所欲 2020. 1. 2. 15:17

흔히 역사를 승자(勝者)의 기록이라고 한다. 물론 기록은 패자도 남길 수 있다. 하지만 승자의 권세가 살아있는 한,

세상에서 인용되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그리고 승자의 영향력이 지속되는 한 그 기록은 계속 반복되어 인용되고

재생산되면서 패자의 기록을 반박하는 논리까지 보강되어 어느 순간 반박불가의 정사(正史)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면 패자의 역사는 그 세월 속에서 무시되고 부정되면서 야사(野史)로 전락한다. 만일 우리가 아직도

일제 치하에 있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지금 어떻게 전해지고 있을까? 만일 지금까지 군부독재가 계속되었다면 5·16

쿠데타는 어떻게 미화되고 5·18 민주항쟁은 어떻게 폄훼되었을까?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년) 1월 4일 3번째 기사

사헌부가 아뢰기를,

"근래에 시중의 잠상배(潛商輩)들이 적진 가운데를 드나들면서 군사 기밀을 누설하는 자가 적도들과 몰래

결탁하고 있으나 종적을 찾기가 어려워 여론이 통분해 한 지 오래입니다. 작년 7월 사이에 우변 포도청

(右邊捕盜廳)이 소문에 따라 사노(私奴) 이덕룡(李德龍)이라고 칭명(稱名)하는 자를 붙잡아 가두었는데,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이 공공연하게 석방하기를 청하고 또 본청(本廳) 서원(書員)의 처를 가두었는데

대장이 구차히 그의 청을 따라 감히 석방했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좌변(左邊)포도청에서

사노 희남(希男)이라 칭하는 자를 잡아가두었더니, 진(珒)과 정원군(定遠君) 이부(李琈)가 종이에다

서명하여 또 청을 넣었습니다. 군기를 누설하는 것이 어떤 죄악입니까. 죄가 있든 없든 법관에게 넘겨

추핵(推覈)해야 하는 것인데 진과 부는 존귀한 왕자로서 극악한 사람을 옹호하였고 대장인 자 역시 끝까지

규명하지 않고 아부하여 따랐으니 모두 무도한 일입니다. 임해군 진과 정원군 부는 함께 파직을 명하고,

우변 포도대장은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살펴서 천천히 결정하겠다." 하였다.

 

전란 중 왜구에게 조선의 군사 기밀을 알려준, 요즘으로 말하면 간첩을 잡았는데 왕자들이 풀어주라고 손을 쓰고,

죄를 조사하여야 할 포도대장은 왕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조사도 안 했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정원군은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아들로 신성군의 동생이자 광해군의 이복

동생이다.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능양군이 후에 정변을 통하여 왕이 된 인조다.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년) 9월 22일 7번째 기사

사헌부가 아뢰기를,

"변란 뒤에 더욱 두려운 것은 민심(民心)입니다. 민심을 한번 잃어버리면 도둑의 화란이 가볍지 않을 터이니,

오늘날은 오직 백성들을 위무하여 민심을 결속시키는 것으로써 급무를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정원군(定遠君) 이부 등이 후궁(後宮)을 배종(陪從)하여 서쪽으로 내려갈 적에, 그의 궁노(宮奴)를 방종하게

놔두어 지공(支供)이 풍부하지 못하다면서 향소(鄕所)를 마구 구타하고 기명(器皿)을 부수었습니다.

또 족속(族屬) 및 아는 사람들을 많이 거느리고 궁노라고 칭탁하여 더욱 공궤(供饋)1를 요구하였으며,

불법으로 쇄마(刷馬)2를 차지하여 타거나 짐을 싣도록 함으로써 처음 마전(麻田)에 이르렀을 때에는

쇄마 수가 30필에 불과하던 것이 매 읍(邑)마다 더 색출한 까닭에 수안(遂安)에 이르러서는 거의 2백 필에

이르렀으므로 연로(沿路)의 백성들이 분주하게 음식을 제공하고 쇄마를 징발하느라 원망하는 소리가

자자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성천(成川)에 이르러서는 끝없이 폐단을 저질러 온갖 물품을 마련하도록 요구하였는데 그 수에

있어서 한이 없어서 조금이라도 여의치 않으면 궁노가 바로 왕자(王子)에게 하소연하고 그러면 왕자는

금지시켜 단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대로 따라서 그들이 멋대로 구는 것을 조장함으로써 온 부(府)의

민심으로 하여금 이미 흩어지게 하였습니다. 본부(本府)에 머무른 지 날짜가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그 폐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래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지난해 북도(北道)의 변이 본보기가 되고도

남을 텐데 오히려 경계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삼도(三道)가 모조리 어육(魚肉)이 되어버린

판에 서로(西路)만이 그런대로 믿을 만한데, 왕자가 또 그곳을 무너뜨리고 있으니 참으로 지극히

한심스럽습니다. 정원군 부와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를 모두 파직시키소서. 그리고 검찰사(檢察使)

신잡(申磼)과 수행한 재신(宰臣) 구사맹(具思孟)과 허잠(許潛)은 폐단을 끼치는 일을 좌시하고 단속하지

않아 도무지 위임하여 보낸 의의를 망각하였으니, 모두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헌부(憲府)와 간원(諫院)에 답하기를,

"이 일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폐단을 저지른 하인이 없지는 않겠지만 주인이라고 해서 꼭 그것을

다 안다고 할 수 없는데 어찌 이토록 까지 해야 하겠는가. ,,,(중략)... 지금은 우선 추고하거나 파직시킬 필요가

없다. 재신에게 글을 내려보내 각별히 단속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35년(1602년) 9월 13일 3번째 기사

간원이 아뢰기를,

"이달 10일 초저녁에 정원군의 가노(家奴) 7인이 창기를 끼고 하원군의 집 앞을 지나는데, 하원군의 가노들이

불의에 달려나와 길을 막고 창기를 다투다가 이어 격투가 벌어졌습니다. 정원군의 가노들이 즉시 자기네의

온 무리를 이끌고 불을 밝힌 채 몽둥이를 들고 하원군의 궁 안으로 달려들어 무수히 난동을 부리며 가산을 때려

부쉈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라 하원 부인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외의 일이 생길까 염려하여 모든

시비(侍婢)들을 불러 옹위를 받고 있을 때 정원군의 가노들이 함부로 시비들을 몰아내고 부인을 색문동

신궁(新宮)으로 데려다 한 곳에 가두었습니다. 영제군 이석령과 익성군 이향령이 기별을 듣고 달려와 백방으로

애걸했으나 문을 열어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정원군에게 달려가 고하니, 궁노의 참소가 이미

들어간 뒤이므로 정원군이 직접 그 궁에 도착하여 구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방자하게 성을 내며 ‘채워

놓은 내 궁문을 어떤 사람이 당돌하게 열려고 하는가.’ 하면서 마구 책망을 하였으니 현저하게 그 일을 지시한

듯한 정상이 있었습니다. 석령 등은 부인에게까지 모욕이 미칠 것이 두려워 울면서 풀어주기를 청하여 4경이

지난 뒤에야 겨우 빠져나와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원 부인 이씨(李氏)는 대원군 집 며느리며 정원군에게는 백모(伯母)가 되는데 어떻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도리상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정원군 이부는 파직불서(罷職不敍)3

명하시고 정원의 궁노는 천한 노복으로서 궁가의 세력을 빙자하여 제 주인 집의 존속에게 이처럼 심한 욕을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강상(綱常)에 관계된 일이니 일일이 적발해 나국하여 율에 따라 죄를 정하도록 명하소서.

종부시(宗簿寺)의 관원들은 평소에 검찰하지 않아 이러한 변이 일어나게 했으니, 아울러 파직시키고 제조는

추고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일은 극히 해괴하다. 살펴서 조처하겠다." 하였다.

 

하원군은 선조의 형이다. 그러니까 하원군의 부인은 정원군의 큰어머니이다. 그런데 정원군의 하인들이 그 집에 가서

행패를 부리고 큰어머니를 끌어다 가두었다. 이에 놀란 하원군의 아들들이 달려와 어머니를 풀어달라고 울며 사정을

해서 겨우 선심쓰듯이 풀어줬다는 것이다. 하원군의 아들들은 남도 아닌 바로 정원군의 조카들이다.

이런 정원군이 광해군 11년인 1619년 40세로 죽었다. 인조 때에 서인들이 편찬한 광해군일기에는 당연히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사망기사인 졸기(卒記)가 들어가 있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11년 12월 29일 6번째 기사

원종대왕(元宗大王 : 정원군(定遠君)을 추존한 칭호)이 훙(薨)하였다. 대왕은 어려서부터 기표(奇表)가 있었고

천성이 우애가 있어 특별히 선조(宣祖)의 사랑을 받아 전후로 선물을 내려준 것이 왕자에 비할 수 없이 많았다.

4이 왕위에 올라 골육을 해치고는 더욱 대왕을 꺼렸다. 능창대군(綾昌大君)을 죽이고는 그 집을 빼앗아

궁으로 만들고, 인빈(仁嬪)의 장지(葬地)가 매우 길하다는 말을 듣고는 늘 사람을 시켜 엿보게 해서 죄에 얽어

해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왕5은 걱정과 답답한 심정으로 지내느라 술을 많이 마셔서 병까지 들었다. 그는 늘

말하기를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집의 창문 아래에서 죽어 지하의 선왕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하였는데, 훙할 때의

나이가 40세였다. (하략)

 

 

[1935년 김은호가 당대 전해진 원종의 옛 어진을 바탕으로 그린 초상화. 1954년 부산에서 보관 중 화재로 불에 타 오른쪽 몸체 부분이 소실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

 

[1872년 제작된 원종 어진. 역시 1954년의 화재로 왼쪽 부분이 소실되었다.]

 

기사를 보면 효심과 우애심이 두터운 아주 아까운 인물이 자식을 억울하게 잃고 비통하게 살다가 애석한 죽음을 맞은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그 개망나니 짓을 하고도 한 번도 선조에게 제대로 따끔한 벌을 받지 않은 것을 보면 선조의

사랑을 받기는 받았던 모양이다. 가짜 뉴스는 무엇을 말하는가 보다 무엇을 말하지 않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인조는 죽은 자기 아버지 정원군을 조선의 왕으로 만들었다. 조선 역사에 죽은 뒤 왕자를 의미하는 군(君)에서 왕으로

추존된 경우는 단종과 이 원종 밖에 없다. 이것이 승자의 기록이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 지 15년 만에 인조반정에 의해 쫓겨났다. 인조반정은 대북이 정권을 주도한 광해군 시절, 철저히 배제되고 압박받았던 서인들이 위기감에서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능양군을 끌어들여 일으킨 정변이다. 유교의 주요

덕목인 임금은 의롭고 신하는 충성스러워야 한다는 군신유의(君臣有義)를 저버린 데다 동생이 형을 몰아낸 것이니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당위성을 증명해야만 대의명분이 설 수 있다.

인조반정의 ‘반정’을 정권을 뒤엎은 정변의 의미로만 해석하기 쉽지만, ‘반정(反正)’은 ‘본래의 바른 상태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즉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니 그 잘못됨은 광해군이고, 광해군의 잘못이 크면 클수록 자신들의 행위는

더 정당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광해군일기≫는 그런 입장에서 편찬된 역사기록이다. 없는 사실을 만들어 조작하지는 않았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말하지 않은 많은 진실들로 인하여 결국 저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광해군을 그렸을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후세의 우리는 그것을 정사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인조 이후에 단 한번이라도 정권이 서인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면 광해군과 인조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져 지금과는 다른 기록도 남았을 것이다. 광해군은 왕으로 추존되고 인조는 능양군으로 남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조 때에 북인은 완전이 씨가 말라 당파 자체가 없어졌다. 그리고 서인은 그 후 300년간 조선의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인조는

‘잘못을 바로 돌린’ 왕이 되고 광해군은 연산군과 동급의 패악한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실록(實錄)은 죽은 왕의 재위기간에 대한 역사이다. 왕의 사후에 실록 편찬이 결정되면 춘추관에서 매일 기록한 

시정기(時政記)와 춘추관 소속의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기록하여 보관했던 문서를 취합하여 실록청에서 편찬한다.

하지만 폐위되어 묘호(廟號)가 추존되지 않은 왕은 실록청이 아닌 일기청을 열어 편찬한다.

조선에는 3개의 일기(日記)가 있었다.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 다.

그러나 노산군은 숙종 때에 묘호가 단종으로 추존되어 겉표지가 ≪단종실록≫으로 바뀌었다.

≪광해군일기≫는 1624년에 시작하여 인조 11년인 1633년에 편찬이 완료되었는데 실록 편찬으로는 이례적으로

긴 시간이 걸렸다. 선조 42년의 기록은 1년 5개월, 인조 27년의 기록은 1년 11개월, 영조 53년 기록은 3년 6개월 만에

모두 완성되었다. 그런데 ≪광해군일기≫는 인조반정 다음 해인 1624년부터 편찬이 시작되었지만 광해군의 15년 기록을 편찬하는 데는 무려 10년이 걸렸다.

 

≪광해군일기≫에 대하여 지금 나도는 해설에 의하면 그 해 3월에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 때문에 광해군 때의 시정기와 정원일기(政院日記) 등 사료가 될 기록들이 많이 흩어져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래서 편법으로 즉위 이후의 조보(朝報)7와 사관(史官)으로 있던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집에 보관했던 가장사초(家藏史草), 사대부 집안의 개인 일기, 

상소문의 초고, 야사(野史) 등을 이리저리 끌어 모아, 이를 바탕으로 편찬하였다는 것이다.

 

이괄은 음력 2월 11일 한양에 입성했지만 전세가 불리해져 그날 밤에 이천으로 도망갔다가 3일 후인 14일에 부하

장수에게 살해되었다. 한양에 머문 것이 하루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 급박한 상황에서 이괄이 광해군의 사초에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으며 사관들이 사초를 잃어버릴 일이 어디 있었겠는가? 하물며 사관들에게 사초는 자신의 생명과 같은 문서다. 그런 문서를 허투루 관리해서 하루 사이의 난리에 흩어져 버렸다는 것은 그저 사초를 쓰지 않은 핑계를 끌어다 붙인데 불과하다.

정묘호란 때문에 지연되었다는 핑계도 있다. 하지만 정묘호란은 1627년에 두 달간 있었던 전쟁으로 그 때 후금(後金)의 군대는 황해도 평산 까지만 내려왔다 조선과 강화를 맺고 서둘러 돌아갔다. 혹 이때문에 지연되었다고 해도 몇 개월이다.

 

≪광해군일기≫가 다른 실록 편찬에 비하여 유독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있는 대로 쓰는 것과 만들어 쓰는 것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광해군일기≫는 편찬하기 시작 전부터 광해군의 시정기(時政記)에 과장된 내용이 많다며 이를 수정해야 된다는 논의가 있었을 정도니 ≪광해군일기≫의 편찬이 어떤 시각에서 이루어졌는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몰아낸 왕의 훌륭함이

드러나면 그것은 곧 자신들의 부당함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러니 빼고, 넣고, 뜯어 붙이고 하느라 얼마나 골을 팼겠는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광해군일기≫를 부실한 사초에, 편향된 시각으로 편찬된 기록이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광해군일기≫는 초고를 수정한 중초본(中草本·)과 중초본을 바탕으로 완성한 정초본(正草本)이 각각 전한다.

중초본은 태백산사고(史庫)에 보관했었기에 태백산본이라고도 하고 정초본은 강화도 정족산사고와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사고에 분장해서 정족산본, 적상산본이라 부른다. 조선왕조의 모든 실록은 모두 활자본으로 간행했는데, 유독

≪광해군일기≫만은 필사본으로 남아있다. 광해군의 궁궐 재건으로 국가 재정이 궁핍해서 못했다는 설명들이 있지만,

이는 전형적인 서인의 변명을 답습하는 것에 불과하다. 

개인적으로는 그냥 하기 싫어서 안 한 것이라 본다. 이는 역으로 ≪광해군일기≫가 자신들이 원하는 만큼 광해군을 깎아내리지 못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광해군일기 적상산사고본]

 

[광해군일기]

 

서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미 간행된 실록을 고치는 유례없는 짓을 벌였다. 정변으로 정권을 잡자마자 서인들은

곧바로 광해군 때 북인(北人)에 의하여 편찬된 선조실록을 수정할 생각을 갖고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 수정에 들어간 것은 인조 21년인 1643년으로 그 후 3년간 진행되다가 중간에 10년 정도 중단되었다. 효종 8년인 1657년에 다시 시작하여 그 해에 완성하였다. 《선조수정실록》은 《선조실록》과 중복되는 내용은 피하면서 빠진 사실을 보충하고

서인들의 입장에서 왜곡됐다고 판단한 사론을 수정하였다.

특히 동서분당과 정여립(鄭汝立)의 반란으로 촉발되어 수많은 동인들이 희생된 기축옥사, 그리고 자신들의 활약이

미미했던 임진왜란에 대한 기사를 보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선조수정실록》은 선조 시대에 대한 서인들의

자기변명이자 승자의 기록인 것이다.

 

이런 나쁜 선례는 그 후에도 반복되었다. 서인이 남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으면서 《현종개수(改修)실록》을

편찬했고, 정미환국으로 잠시 등용된 소론이 이의를 제기하여 《숙종실록》 각 권의 끝에다 자신들이 넣고

싶은 기사를 보충해 넣거나 기사를 수정한 《숙종실록보궐정오(補闕正誤)》, 노론에 불리한 기사(記事)가

많다는 이유로 경종실록을 수정한 《경종수정실록》등이 나오게 되었다.

승리한 자의 구차한 변명은 이렇게 기록되어 역사로 남고 패자의 변명은 들을 기회조차 없다. 혹 있더라도

그것은 야사로 치부될 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원래의 실록을 없애지 않은 것이다.

 

 

 

참고 :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윗사람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등 생활에 필요한 것을 제공함 [본문으로]
  2. 조선 시대 지방에 배치한 관용의 말 [본문으로]
  3. 관직을 빼앗고 다시는 관직에 임명하지 않는 것 [본문으로]
  4. 광해군 [본문으로]
  5. 정원군 [본문으로]
  6. 승정원에서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기록한 승정원일기 [본문으로]
  7. 조선시대 조정의 소식을 알리는 관보(官報). 담기는 내용은 승정원에서 선정하고 발행은 조보소에서 담당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