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14 - 선조의 몽진기

從心所欲 2019. 12. 28. 06:52

설민석 강사는 TV강의에서 왜군이 조선에 쳐들어와서 당황한 것 중의 하나가 조선에 군사가 없는 것과

왕이 성을 버리고 도망간 일이라고 하였다. 선조가 의주로 파천(播遷)한 일은 이승만이 6·25전쟁 발발

다음 날 새벽 기차타고 피난 간 사건과 더불어 국가 지도자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사례로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선조가 피신하며 시간을 번 덕에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와 왜적과 대항할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 선조가 계속 한양에 남아있었다면 왜군이 한양을

점령한 순간 왜구의 한반도 지배가 300년 앞당겨 일어났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선조실록≫ 에는 선조의 몽진(蒙塵)1 행적을 엿볼 수 있는 기사들이 꽤 있다. 기사 중에는 선조가 일국의

왕인지 아니면 일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치졸한 소인배인지 분간이 안 되는 언행도 보인다. 그렇지만 결론이

역시 ‘전란이 일어나자 백성을 버리고 혼자 도망간 임금’으로 귀결될지라도 당시의 기록을 통해 선조의

행적을 직접 확인하고 그때 호종하던 신료들은 무슨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남의 말만 듣고 막연한

추측을 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이다. ≪선조실록≫에서 선조의 몽진과 관련된 기사만 추려보았다.

 

● 선조 25년(1592영) 4월 13일 첫 번째 기사

왜구(倭寇)가 침범해 왔다. ...(중략)..... 2백 년 동안 전쟁을 모르고 지낸 백성들이라 각 군현(郡縣)들이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졌다. 오직 밀양 부사 박진(朴晉)과 우병사 김성일이 적을 진주(晉州)에서 맞아 싸웠다.

성일이 아장(牙將) 이종인(李宗仁)을 시켜 백마를 탄 적의 두목을 쏘아 죽이니 드디어 적이 조금 물러났다.

 

● 선조 25년 4월 28일 4번째 기사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와 징병체찰사(徵兵體察使) 이원익(李元翼)과 최흥원(崔興源), 우부승지 신잡,

주서(注書) 조존세(趙存世), 가주서 김의원(金義元), 봉교 이광정(李光庭), 검열 김선여(金善餘) 등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원익에게 이르기를,

"경이 전에 안주(安州)를 다스릴 적에 관서지방2의 민심을 많이 얻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경을 잊지

못한다고 하니, 경은 평안도로 가서 부로(父老)들을 효유하여 인심을 수습하라. 적병이 깊숙이 침입해 들어와

남쪽 여러 고을들이 날마다 함락되니 경성(京城) 가까이 온다면 관서로 파천해야 한다. 이러한 뜻을 경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하니, 원익이 배사(拜辭)하고 물러갔다.

상이 또 최흥원(崔興源)에게 이르기를,

"경이 해서지방(海西地方)3을 잘 다스렸으므로 지금까지 경을 흠모한다고 한다. 지금 인심이 흉흉하여

토붕와해(土崩瓦解)4의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윗사람을 위해 죽는 의리가 없어졌으니, 경은 황해도로 가

부로(父老)들을 모아서 선왕(先王)의 깊은 사랑과 두터웠던 은혜를 일깨워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단결시키는

한편 군사들을 소집하여 혹시라도 이반자가 생기지 않도록 단속하여 거가(車駕)를 영접하라."하니,

흥원이 명을 받고 원익과 더불어 배사(拜辭)하고 물러가 그날 즉시 떠났다.

 

이 기사를 보면 선조는 이때 황해도를 거쳐 관서지방으로 파천할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기사의 뒷부분은 우부승지 신잡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주청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다가 선조의 미움을 사서 결국 유배까지 가게 된 이후 세자 건저는 입 밖에 내지도 못하던

사안이었는데 국란이 일어나자 대신들이 이 문제가 시급하다고 생각하여 신잡에게 이 건을 주청하도록 한

것이다. 신잡은 정철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이산해의 문인이자 탄금대(彈琴臺)전투를 지휘하다 자결한

신립의 형이기도 하다.

 

● 선조 25년 4월 28일 4번째 기사 후속

신잡(申磼)이 아뢰기를,

"사람들이 위구심(危懼心)을 갖고 있으니 세자를 책봉하지 않고는 이를 진정시킬 수 없습니다. 일찍

대계(大計)를 정하시어 사직의 먼 장래를 도모하소서."하니, 상이 그 말이 옳다고 하였다. 주서(注書)5

사관(史官) 등이 아뢰기를, "춘궁(春宮)이 오래도록 비어 있으니 일찍 세자를 책봉하는 일을 누군들 원하지

않겠습니까. 세자를 세운다면 인심이 진정될 것입니다."하고, 잡도 아뢰기를, "이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진정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실로 아뢴 바와 같다면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겠는가. 대신들은

빈청(賓廳)에 있는가?" 하였다.

존세(存世)가 아뢰기를, "이러한 때에 대신들이 어떻게 감히 집으로 물러가 있겠습니까. 다들 빈청에

있습니다."하니, 상이 불러들이라 하고, 이어서 전교하기를, "내가 편복(便服)으로 대신을 인견할 수는 없다.

예(禮)에 맞지 않으니 내전으로 들어가 옷을 바꾸어 입은 후에 인대(引對)하겠다." 하였다.

잡이 나아가 상의 옷자락을 잡고 아뢰기를,

"이러한 때를 당하여 작은 예절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대신들을

불러들이라." 하였다.

잡이 주서(注書)를 시켜 대신들을 불러 오게 하였다. 영의정 이산해와 좌의정 유성룡이 들어와

입시석(入侍席)에 앉아서 오랫동안 어탑(御榻) 앞에 나아가지 않으니 좌우의 사관(史官)들이 그들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서 전교를 듣게 하였다. 대신들이 앞으로 나아가니 상이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위태로움이 이와 같으니 다시 형적(形迹)을 보존할 수가 없다. 경들은 누구를 세울 만하다고

생각하는가?"하니,

대신들 모두가 아뢰기를, "이것은 사신들이 감히 아뢸 바가 아니고 마땅히 성상께서 스스로 결정하실

일입니다."하였다.

이렇게 되풀이하기를 서너 차례 하자 밤이 이미 깊었건만 상은 그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산해가 허리를 굽히고 자리를 피하려 하자, 잡이 말하기를, "오늘은 기필코 결정이 내려져야 물러갈 수

있습니다."하니, 대신은 다시 자리로 나아갔다.

상이 약간 미소를 띠고 이르기를, "광해군(光海君)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그를 세워 세자로 삼고

싶은데 경들의 뜻에는 어떠한가?" 하였다.

대신 이하 모두 일시에 일어나 절하면서 아뢰기를, "종묘사직과 생민들의 복입니다."하였다.

신잡이 아뢰기를, "이현(梨峴)에 있는 궁(宮)6을 호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초봄에 날을 골라 책립(冊立)하려고 했던 것인데 그때 마침 덕빈(德嬪)7의 장례가

채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지연되었다. 광해가 내전에 들어온 지 벌써 3일이나 되었는데 이현의

빈 궁을 호위해서 무엇하는가."하였다.

신잡이 아뢰기를, "예조 판서 권극지(權克智)는 집이 문(門) 밖에 있는데 밤이 이미 깊었으니 유문(留門)8

하고 명패(命牌)9하여 제반 일을 밤새워 준비할 것으로 승전(承傳)을 받들어 시행하게 하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주서(注書)와 사관(史官)들은 대신으로 하여금 바깥에 나가 속히 거행하도록

주선하라."하였다. 대신 이하 모두가 차례대로 물러나왔고 잡(磼)이 즉시 나와 교지를 내렸다. 이것은 대개

며칠 전에 세자 책봉에 대한 상소가 많았던 까닭에 상이 마음속으로 정한 바가 있었던 참인데 이날 잡 등이

합문(閤門)10 밖에서 의논을 정하여 들어와서 이렇게 아뢰었던 것이다.

●선조 25년 4월 29일 첫 번째 기사

광해군을 세워 세자로 삼았다. 세자가 동궁(東宮)으로 나오니 요속(僚屬)과 백관들이 진하(陳賀)하였다.

 

●선조 25년 4월 30일 첫 번째 기사

새벽에 상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오니 백관들과 인마(人馬)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 상과 동궁은 말을 타고 중전 등은 뚜껑 있는 교자를 탔었는데 홍제원(洪濟院)에 이르러

비가 심해지자 숙의(淑儀) 이하는 교자를 버리고 말을 탔다. 궁인(宮人)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걸어서

따라갔으며 종친과 호종하는 문무관은 그 수가 1백 명도 되지 않았다. 점심을 벽제관(碧蹄館)에서 먹는데

왕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으나 동궁은 반찬도 없었다. 병조 판서 김응남(金應南)이 흙탕물 속을

분주히 뛰어다녔으나 여전히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고, 경기 관찰사 권징(權徵)은 무릎을 끼고 앉아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선조 25년 5월 1일 2번째 기사

풍덕 군수(豐德郡守) 이수형(李隨亨)이 길에서 배알하고 약간의 어선(御膳)을 준비했다. 백관들도

얻어먹었고 아래로 군량과 말먹이까지도 모두 준비해 주었으며 따로 쌀 5석을 바치니 상이 즉시

호위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저녁에 개성부(開城府)에 도착했다.

 

 

5월3일 아침, 우승지 신잡(申磼)은 선조가 직접 쓴 사민(士民)들을 위무하는 교서(敎書)를 들고 경성으로

가다가 중간에 한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왔다.

 

●선조 25년 5월 3일 13번째 기사

신잡(申磼)이 돌아왔다. 상이 인견하고 하문하기를, "적세(賊勢)가 어떠하던가?" 하니,

잡이 아뢰기를, "유시(酉時) 말에 혜음령(惠音嶺)에 도착했다가 도로 동파(東坡)로 왔는데, 이각(李珏),

성응길(成應吉) 등이 적을 방어하지 못하고 다들 이미 후퇴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이미 강을 건넜는가?"하니,

잡과 이상홍(李尙弘)이 아뢰기를, "어제 저녁에 이미 입성했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곳에서 무엇을 하겠는가? 속히 피하는 것이 마땅하겠다."하니,

잡과 상홍이 아뢰기를, "오늘 아침 장계(狀啓)에 오늘 떠나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기에 머물 수 없다."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오늘은 미처 떠날 수 없으니 내일 조용히 거둥하소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 떠나 금교(金郊)에 가서 자려고 한다."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밤에 떠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겁을 먹으면 뜻밖의 변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내일 일찍 떠나셔야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른 말 하지 말고 속히 출발하라."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할 수 없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산(平山)을 거치지 않고도 다른 길이 있는가?"하니,

상홍(尙弘)이 아뢰기를, "용천(龍泉)에서 자비령(慈悲嶺)을 넘는 길이 있으나 천험(天險)입니다."하였다.

상이 다시 이르기를, "평양에 닿을 수는 있겠는가?"하니,

잡이 아뢰기를, "여기서는 조치할 수 없지만 서경(西京)11 으로 행행(行幸)하신다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상호도 아뢰기를, "신이 서경을 보았는데 역시 천험입니다."하고,

두수는 아뢰기를, "먼저 황해 감사를 보내어 일로(一路)에 개유(開諭)하게 해야 합니다.

만약 경동(驚動)된다면 사람들이 틀림없이 놀라서 흩어질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상(右相)은 나가서 모든 일을 정돈시키라."하니,

상홍이 아뢰기를, "경성의 부고(府庫)는 이미 전부 다 타버렸으므로 적들은 얻은 것이 없을 것이어서

틀림없이 서둘러 이곳으로 올 것입니다."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그렇겠다. 속히 나가 일을 서두르라."하였다.

곽이 아뢰기를, "출성(出城)하는 날 이미 옥문을 열었으니, 이제 지나는 고을마다 살인범과 도적 이외는

모두 석방하심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과 의논해서 처리하라." 하였다.

 

●선조 25년 5월 3일 15번째 기사

상이 김명원(金命元)의 군사가 패배했다는 말을 듣고 포시(晡時)12에 개성부(開城府)를 떠나 밤에

금교역(金郊驛)에 도착하였다.

 

●선조 25년 5월 7일 1번 기사

상이 중화에서 평양으로 들어갔다.

 

●선조 25년 5월 8일 9번째 기사

대신들이 아뢰기를, "동궁을 책봉한 지 이미 오래인데 사방에서 아직도 모르고 있으니 이런 내용을

중외에 널리 유시하소서. (하략)....“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선조 25년 6월 10일 1번 기사

상이 평양에 있었다. 이때에 왜적들이 멀리서 온 까닭에 지치고, 사방의 곡식을 말끔히 치워버렸기

때문에 노략질하여도 소득이 없자, 가마니에 모래를 담아 강가에다 커다랗게 쌓아 위장해 놓고서

우리에게 축적된 곡식이 있는 것처럼 과시하였고, 강가에서 말을 달리기도 하고 혹은 성을 향하여

탄환을 발사하기도 하였다. 이어 강가에다 글을 걸어 놓아 강화를 끊임없이 요청하니, 성안이 흉흉하여

조정 의논이 강계(江界)로 행행(行幸)하자고 하기도 하고 혹은 함흥으로 행행하자고 주청하기도 하였다.

부제학 심충겸(沈忠謙)이 양사(兩司)와 각각 요속(僚屬)들을 거느리고 날마다 세 번씩 북도(北道)로 피할

것을 주청하여 드디어 의논이 결정되었다. 이리하여 이희득(李希得)을 북도 순검사(北道巡檢使)로 삼아

먼저 가서 행재소(行在所)의 모든 일들을 조치하도록 하였다.

중전(中殿)이 함흥으로 가기 위하여 궁속(宮屬)들이 먼저 나가자, 평양 군민(軍民)들이 난을 일으켜

몽둥이로 궁비(宮婢)를 쳐 말 아래로 떨어뜨렸으며, 호조 판서 홍여순(洪汝淳)은 길에서 난병(亂兵)을

만나 맞아서 등을 다쳐 부축을 받고 돌아왔다. 거리마다 칼과 창이 삼엄하게 벌여 있고 고함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는데 모두들 대가(大駕)가 성을 나가지 못하도록 하려 하였다. 풍원부원군 유성룡이 전에도 성을

지키자는 계책을 고수하여 삼사(三司)와 서로 다투었는데 이때에도 여러 신하들과 상 앞으로 바로 들어갔다.

상이 궁전(弓箭)을 차고 뜰 가운데에서 산보(散步)하면서 승여(乘輿)가 준비되었다는 보고를 기다리다가,

성룡 등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전상으로 올라가 앉으니, 성룡 및 승지(承旨) 이괵(李?), 봉교(奉敎)

기자헌(奇自獻)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왜적의 문서(文書)에 ‘앞으로 강화가 이루어지면 돌아가겠다.’고 하였으니, 원하옵건대

상께서는 이곳에 머물러 계시고 서쪽으로 행행(行幸)하지 마소서."하니,

자헌이 아뢰기를,

"만약 여기에서 서쪽으로 가면 성지(城池)나 기계(器械)가 여기만한 곳이 없으니 여기를 떠나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그렇지만, 왜적의 강화를 청하는 문서를 믿을 만한 것이라고 한다면

왜적이 동래·상주에 있을 적에도 모두 문서를 보냈었는데도 점점 깊숙이 쳐들어 왔으니, 이것은 문서를

가지고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 문서는 참으로 믿을 수 없는데, 이것을 믿고서 평양을 떠나지 않을

계획을 한다면 잘못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자헌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하니,

성룡이 자헌에게 말하기를, "비록 그렇지만 신의(信義)가 있다면 어찌 믿지 않겠는가." 하였다. 대개

이때의 여론이 성룡의 전일 왜적과 통신(通信)한 것을 잘못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자헌이 성룡의 말을

인하여 왜적과 통신하는 일을 말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날 성안의 난병(亂兵)들이 소란을 피워 그치지

않으므로 중전(中殿)이 끝내 길을 떠나지 못하였다. 관찰사 송언신(宋言愼)이 그 휘하(麾下)를 시켜 난을

주동한 사람 두어 명을 참수(斬首)해서 효시(梟示)하여 군중을 경계하니 군중들이 마침내 진정되었다.

 

왜군이 대동강 건너편까지 이른 상황에서 선조와 신료들은 이후의 행로를 놓고 논의하는데 평안도의 강계와

함경도의 함흥을 놓고 의견이 분분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반면 유성룡은 왜군과의 강화협상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평양에 머물기를 주장하였다. 이때까지도 국경을 넘어 명나라로 가는 방안은 공식적으로 거론되지 않고 있다.

 

[선조 몽진로(蒙塵路), 전북도민일보 그래픽]

 

 

●선조 25년 6월 11일 1번 기사

상이 평양을 떠나 영변으로 향하였다.

 

●선조 25년 6월 11일 5번째 기사

상이 심충겸 등의 의논을 따라 북도(北道)로 향하려 하자, 좌의정 윤두수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영변은 예전부터 철옹성(鐵甕城)이라고 불리던 곳이니 당분간 여기로 피하여 왜적의 형세를 관망하다가,

위급한 일이 있게 되면 차츰 중국과 가까운 용만(龍灣)으로 향하고 아울러 구원병을 청하여야 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 25년 6월 13일 1번 기사

상이 안주에서부터 비를 무릅쓰고 영변부로 들어가니, 성안의 아전과 백성들은 모두 산골짜기로 피하여

들어갔고 관인(官人) 5∼6명만 있을 뿐이었다.

 

아마 이때 선조는 영변에서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하다. 윤두수가 철옹성이라고 하던 영변의 모습이 이런

상태였으니 선조는 속으로 조선에서는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 같다. 그리하여 갑자기

북쪽 강계 방향이 아닌 서쪽의 정주(定州)로 가라는 지시를 내린다.

 

●선조 25년 6월 13일 3번째 기사

전교하였다.

"본 고을이 조폐(凋弊)하여 음식물을 제공할 수 없다고 하니 내전이 이곳에 도착한 뒤에 세자는 이곳에

머물도록 하고, 대전(大殿)은 바로 박천(博川)으로 가 가산(嘉山)을 지나 정주(定州)로 갈 것이니 모든

일을 즉시 예비하여 떠날 수 있도록 하라. 이런 뜻으로 즉시 시종(侍從)을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조치하여 준비하도록 하라."

 

●선조 25년 6월 13일 7번째 기사

이날 저녁에 또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흥원이 아뢰기를,

"윤두수(尹斗壽)의 장계(狀啓)를 보니 왜적의 형세가 이미 위급하여 이곳에 머무르는 것도 불안합니다.

내전의 행차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운산 군수(雲山郡守) 성대업(成大業)이 도로를 약간 알기 때문에

그에게 머물러 있도록 하였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전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하자,

곽이 아뢰기를, "내전께서는 필시 운산(雲山)에 도착하셨을 것이니 적로(賊路)와 조금 멀어졌을 것입니다."

하고, 흥원이 아뢰기를, "대가(大駕)가 운산으로 가시면 내전과 서로 만나실 것입니다."하였다.

곽이 아뢰기를, "지금 여기에 들어온 대신(大臣)들이 밖에 있을 적에 모두들 만약 강계로 가려면 운산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밤새도록 가면 운산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신하들의 뜻은 모두 나를 인도하여 강계로 가려는 것인가?"하였다.

철이 아뢰기를, "어떤 계책이 좋은지 모르기 때문에 이처럼 하는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 일찍이 요동으로 갔었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의논이 일치하지 않아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처음부터 항상 왜적이 앞에서 나타난 뒤에는 피해 가기 어렵다는 일로 말하곤

하였다."하였다.

상이 명을 내려 성대업(成大業)을 불러들이도록 한 다음에 이르기를, "그에게 도로의 원근을 자세히

물어보라." 하였다.

【대업이 원신(遠臣)이기 때문에 직접 하문하지 않았다. 】

대업이 아뢰기를, "덕천(德川)·운산(雲山) 지경부터는 샛길이 있고, 개천(价川)에서 함흥(咸興)까지는

그 거리가 매우 가깝습니다."하고, 이어 아뢰기를, "강계는 서쪽으로는 의주로 가는 길이 있고 동쪽으로는

적유령이 있는데, 길이 좀 넓어서 적을 방어하기가 어려우니, 따로 매우 험준한 한 곳이 있습니다."하였다.

철이 아뢰기를, "이런 지역은 도적도 지나가기 어려운 곳입니다. 절벽이 천 길이나 되고 겨우 잔도(棧道)로

통행하는데 북쪽으로는 산융(山戎)과 통하고 서쪽으로는 의주(義州)와 연하였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강계로 갈 수 없으니 장차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하였다. 흥원이 아뢰기를,

"만약에 왜적의 소식이 없다면 함흥이 좋겠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곳에서 정주(定州)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하자,

모두 대답하기를, "이틀 길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하루 안에는 도달하기 어렵겠다."하고, 상이 이어 요동(遼東)으로 들어갈 일에

대하여 말하자.  흥원이 아뢰기를, "요동은 인심이 몹시 험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찌 갈 만한 지역을 말하지 않는가. 내가 천자(天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하였다.

상이 세자(世子)를 이곳에 주류(駐留)시켜 두고 떠나는 것이 괜찮겠느냐고 하문하자, 철(澈)이 아뢰기를,

"만약 왜적의 형세가 가까와지면 동궁도 어떻게 여기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하고,

철 및 흥원이 아뢰기를, "주서(注書) 2명과 한림(翰林) 2명이 안주(安州)에서부터 뒤떨어졌습니다."하였다.

상이 곽에게 하문하기를,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이 어떠한가?"하자,

곽이 대답하기를, "사람들의 말에 ‘전일에 왜적과 통신한 일이 있었으므로 명조가 지금은 비록 포용해주고

있지만 꼭 받아줄지의 여부는 기필할 수 없다. 만약 적병이 뒤쫓아 오면 반드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고

하는데, 이 말도 그럴 듯합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은 요동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하였다.

이때 비변사의 당상 이산보(李山甫)·이항복, 이성중(李誠中), 한준(韓準), 심충겸(沈忠謙) 등이

청대(請對)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신하들이 곧바로 들어가 진대(進對)하였다.

충겸이 아뢰기를, "소신이 비변사 당상이기 때문에 청대하였습니다. 내일 행차를 어떻게 정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들은 각각 생각한 바를 진술하고 싶습니다."하고,

준이 아뢰기를, "주상께서는 정주로 가시더라도 세자는 함경도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함경도에 왜적이 있으면 어찌할 것인가?"하자,

충겸이 아뢰기를, "가다가 왜적이 있으면 마땅히 물러나 함관(咸關)에서 보전하고 이것도 되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물러나 보전한다면 나라의 신민들이 촉망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부득이 창업할 때처럼 비바람을 무릅쓴 뒤에야 보전할 수 있습니다. 양궁(兩宮)이

한 곳으로 함께 가시면 사람들이 기대를 부칠 곳이 없게 됩니다."하고,

준이 아뢰기를, "세자는 북도로 가고 대가는 의주로 가신다면 명조에게는 반드시 구원병을 요청할 것으로

여겨 돌보아 주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하고,

항복이 아뢰기를, "소신의 생각도 시종 양궁이 나누어 주찰(駐札)하는 것을 옳게 여겼습니다. 명조에서도

반드시 포용하여 받아들일 것이고 거절할 리가 없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왜적의 손에 죽기보다는

차라리 중국에 가서 죽겠다."하였다.

충겸이 아뢰기를, "세자가 북도로 가면 혹 성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하고,

철이 아뢰기를, "요동으로 들어가겠다는 생각이 드러나자 인심이 해이되었는데, 하물며 참으로 요동으로

들어가는 경우이겠습니까. 일이 궁박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런 의논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논이 많으면 좋지 않은 것이다. 지금 백방으로 생각해 봐도 내가 가는 곳에는 왜적도

갈 수 있으므로 본국에 있으면 발붙일 땅이 없을 것이다."하였다.

흥원이 아뢰기를, "소신의 생각에는 요동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합니다. 들어갔다가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는 반드시 압록강을 건너갈 것이다."하였다.

충겸이 아뢰기를, "요동으로 들어가면 내전과 비빈은 어떻게 하시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 버려두고 갈 수 없으니 가려서 대동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그러자 항복 등이

아뢰기를, "부득이하면 지극히 간소하게 대동하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세자빈도 북도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든 일을 오늘 확정하는 것이 좋겠으니 동궁을 불러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소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종묘사직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세자가 함흥에다 봉안하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니,

성중(誠中)이 아뢰기를, "신은 당초 의논할 적에 요동으로 들어가는 것을 불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불가하게 여깁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슨 까닭인가?"하니,

성중이 아뢰기를, "들어가지 못할 성싶어서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느 곳으로 가야 하겠는가?"하자,

성중이 아뢰기를, "북도가 좋겠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은 피난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안남국(安南國)이 멸망당하고

스스로 중국에 입조(入朝)하니 명조에게 병사를 동원하여 안남으로 보내 안남을 회복시킨 적이 있었다.

나도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요동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세자는 북도로 가고 영상이

따라가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양궁이 나누어 이주하면 호종하는 관원으로서 북도로 가는 사람이 불가불 많아야

합니다."하자,

준이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미행(微行)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 좋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를 호종할 사람은 자원(自願)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근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려워하지 말고 각각 말을 해보라. 북도로 가는 것도 종묘사직의 중대한 일이니 불가불

많이 보내야 한다. 호판(戶判)13은 북도로 가는 것이 좋겠다. 나는 종묘사직에 죄를 졌으니 수행할

필요가 없다. 내가 나라를 떠나 지성으로써 사대(事大)하면, 명조가 반드시 포용하여 우리를 받아들일

것이요 거절까지는 않을 것이다. 경들은 병이 있는 것 같으니 모두들 북도로 가는 것이 좋겠다.

꼭 요동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형세가 어려우면 강계로 가더라도 해로울 것이 뭐 있겠는가."하니,

군신(君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충겸이 아뢰기를, "나인(內人)은 몇 명이나 분산하여 보낼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믿을 만한 수령에게

맡기면 그 친척이나 다름없이 받들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자와 함께 북도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요동으로 가는 데는 내전 및 두세 명의

비빈은 부득이 대동하고 가야겠다."하고, 또 이르기를, "중국으로 들어가면 구원병을 청하여

혹 우리나라를 회복시킬 수가 있을 성싶다."하자,

흥원이 아뢰기를, "중국에서 허락하여 주지 아니하면 그 걱정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城)과 해자는 깊고 견고한가?"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깊고 견고하며 5리마다 연대(煙臺)14가 하나씩 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덕형이 지난번 왜중(倭中)에서 돌아와 요동으로 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왜적을 어렵게 여긴 것일 것이다."하니,

충겸이 아뢰기를, "덕형의 소견은 처음부터 그러해서 상께서는 요동으로 피하고 세자는 북도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인견을 끝내고 나왔다.

 

결국 이날 선조는 요동으로 갈 생각을 굳히고, 광해군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을 받들고 본국에 머물도록

하였다. 이를 분조(分朝)라 한다. 분조는 선조가 요동으로 망명할 경우 자신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라는

의미의 소조정(小朝廷)인 것이다.

 

●선조 25년 6월 14일 4번째 기사

상이 마침내 요동으로 건너갈 계획을 결정하고 선전관을 보내어 중전을 맞아 돌아오도록 하였다.

 

●선조 25년 6월 15일 8번째 기사

우의정 유홍(兪泓)이 아뢰기를, "소신은 노쇠하여 요동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신은 동궁에게로

가기를 청하옵고 성사(成事)될 가망이 있게 되기를 빕니다."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호종한 신하로서 대가를 수행하기에 어려운 사람들은 이날 밤에 모두 뒤떨어졌다.

 

●선조 25년 6월 22일 1번 기사

상이 용천을 떠나 의주에 도착하여 목사(牧使)의 아사(衙舍)에 좌정하였다. 이때에 고을 사람들이

평양이 포위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흉흉하여 두려워하더니 명나라 병사들이 강을 건너 성안으로

들어와 약탈하자 인민들이 모두 산골짜기로 피해 들어가 성안이 텅 비었다. 목사 황진(黃璡)과

판관(判官), 권탁(權晫) 등이 관인(官人) 및 관아의 여종 두어 명을 직접 거느리고서 임금의

수라(水剌)를 장만하였으며 호종한 관원들은 성안의 빈 집에 분산 거처하였다. 꼴과 땔나무가 계속

조달되지 아니하여 비록 행재소라고는 하지만 적막하기가 빈 성(城)과 같았다.

 

●선조 25년 6월 22일 2번째 기사

상이 대신에게 하문하기를, "명나라 장수가 막상 물러가고 적병이 점점 가까이 오면 일이 반드시

위급하여질 것이니, 요동(遼東)으로 건너가겠다는 의사를 명나라 장수에게 미리 말해 두는 것이

어떠하겠는가?"하자,

대신이 아뢰기를, "만약 미리 말하면 중간에서 저지하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니 그때에 미쳐서 대처하는

것이 좋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임시해서 대처하라고 하면 위험이 눈앞에 닥쳐 미처 강을 건너가지 못할 염려가

있을 듯하다." 하였다.

 

●선조 25년 6월 23일 1번 기사

전교하기를,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을 비록 갑작스럽게는 할 수 없으나 모든 일을 충분히 예비하도록 하라."하니,

예조 판서 윤근수가 요동으로 건너가면 낭패라고 강력히 말하고, 풍원 부원군 유성룡도 역시 그 불가함을

강력히 말하면서 아뢰기를, "북도15·하삼도16·강변 등이 있으니 두루 행행하시면 수복(收復)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듯합니다."하고는, 드디어 서로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도록 울었다.

이어 전교하기를, "명나라 장수에게 말하여 강 저쪽에 정박해 있는 배의 절반을 나누어 강 이쪽에

정박시키게 하고, 복태마(卜駄馬)17는 본 고을에서 조처하게 하고, 호위하는 병마는 이웃 고을에서 뽑아

시위하게 하라."하였다. 대개 이때 명나라 장수가 우리나라의 피난하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강을 건너는

것을 염려하여 강에 정박해 있는 배를 모두 건너편에 정박시켰기 때문에 이런 전교가 있었다.

 

●선조 25년 6월 24일 1번 기사

상이 이르기를, "요동으로 가든지 다른 곳으로 가든지 간에 부질없이 의논만 할 것이 아니라 속히 결정하여

그 때를 당해서 갈팡질팡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하니,

대신들이 아뢰기를, "당초에 요동으로 가자는 계책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의논을 들은

뒤로는 신민들이 경악하였으나 달려가 하소연할 곳도 없었으니 그 안타깝고 절박한 실정이 난리를 만난

초기보다 심하여 허둥지둥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비록 왜적들이 가까이 닥쳐왔지만

하삼도가 모두 완전하고 강원·함경 등도 역시 병화(兵禍)를 입지 않았는데, 전하께서는 수많은 신민들을

어디에 맡기시고 굳이 필부(匹夫)의 행동을 하려고 하십니까. 그리고 명나라에서 대접하여 허락할는지의

여부도 예측할 수 없으며, 일행 사이에 비빈(妃嬪)도 뒤떨어져 갈 수 없는데, 요동 사람들은 대부분

무식하여 복색(服色)도 다르고 말소리도 전혀 다르니, 비웃고 업신여기며 무례(無禮)히 굴면 어떻게

저지하겠습니까. 비록 요동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그곳의 풍토와 음식을 어떻게 견디시렵니까. 생각이

이에 이르자 눈물이 절로 흐릅니다. 요동으로 가는 문제는 신들은 결코 다시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명나라 병사들이 비록 많이 왔지만 우리나라에서 향도하는 군사가 없어서는 안 되니 이 향도군을

모집하는 것도 시급합니다. 본주(本州)에 토병(土兵)들이 거의 1천 명쯤 되니, 지금 비록 무너져

흩어졌지만 만약 과거(科擧)로써 소집한다면 그들을 모으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병조(兵曹)에서 내일 활 쏘는 것을 시험 보이려고 하니, 상께서 당분간 여기에 머무르셨다가 다시

왜적의 소식을 들은 다음 수상(水上)을 경유하여 벽동(碧潼)에 이르러 며칠 머무르시다가 또

강계(江界)로 가 형세를 보고 또 설한령(薛罕嶺)을 경유하여 함흥(咸興)에 이르시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전하께서는 수많은 신민들을 어디에 맡기시고 굳이 필부(匹夫)의 행동을 하려고 하십니까?”.....

군사력으로 보자면 어느 때 망해도 하나 이상할 것 없는 조선이, 5백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왕에게 이처럼 대놓고 담대한 말을

할 수 있는 신하들이 줄지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선조 25년 6월 26일 1번 기사

상이 대신들에게 하문하기를,

"이곳으로 온 것은 오로지 요동으로 가기 위해서였는데 이미 요동으로 갈 수 없다면 수상(水上)도

지극히 위험하니 항해(航海)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은밀히 의논하여 아뢰라."하자,

윤두수 등이 아뢰기를, "왜적이 평양에 있으니 바닷길로 가게 되면 왜적에게 저지당할까 두렵습니다.

황해 감사에게 바닷길을 정탐하고 와서 보고하도록 한 뒤에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약 왜적이

가까이 오면 창성(昌城)으로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답하기를, "그렇게 하면 더딜 것 같다.

끝내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이 좋으니 지금 배를 준비하도록 하라." 하였다.

 

●선조 25년 6월 26일 7번째 기사

명나라에서 우리나라가 내부(內附)18를 청한 자문(咨文)을 보고 장차 우리 나라를 관전보(寬奠堡)의

빈 관아에 거처시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상이 드디어 의주에 오래 머물 계획을 하였다.

 

그리고 7월 9일 드디어 명나라의 첫 군대가 다음날 강을 건너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들은 명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군사는 아니고 국경 수비병이었다. 요양부총병(遼陽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이 이끄는 3,500명의 군사였다.

 

[<평양성탈환도병> 부분 150 x 500cm, 1593년 1월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수복한 2차 평양성전투를 그린 민화 병풍, 국립박물관]

 

 

[<평양성탈환도병> 부분]

 

 

 

 

참고 :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으로, 임금이 급박한 상황에서 평상시와 같이 길을 깨끗이 소제한 다음 거둥하지 못하고 먼지를 쓰며 피난함을 비유하는 말 [본문으로]
  2. 한반도의 북서부인 평안남도, 평안북도 지역 [본문으로]
  3. 황해도의 별칭 [본문으로]
  4.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진다는 뜻으로, 일이 근본부터 뒤엉켜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가리키는 말. 출전 사기(史記) [본문으로]
  5. 조선시대 승정원의 정7품 관직 [본문으로]
  6. 이현궁 : 지금의 종로구 인의동에 있었던 광해군의 거처 [본문으로]
  7. 명종의 장자인 순회세자의 세자빈인 공회빈윤씨(恭懷嬪尹氏), 순회세자 사후에 덕빈(德嬪)으로 불리며 30년을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인 1592년 창경궁 통명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본문으로]
  8. 밤중에 특별한 일이 있어 궁궐 문이나 성문 닫는 것을 중지시키는 것 [본문으로]
  9. 임금이 3품 이상의 당상관이나 대간(臺諫)을 부를 때 보내던 ‘명(命)’자를 쓴 붉은 칠을 한 나무 패 [본문으로]
  10. 조선 개국 직후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설치된 국가의 의례(儀禮)를 관장하는 관서. 얼마 지나지 않아 통례문(通禮門)으로 개칭되었지만 관습적으로 합문이라는 명칭이 계속 사용되었다. [본문으로]
  11. 평양 [본문으로]
  12. 신시(申時).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본문으로]
  13. 호조판서 한준 [본문으로]
  14. 봉화대 [본문으로]
  15. 우리나라 동북면(東北面) 곧 함경도 지방 [본문으로]
  16.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본문으로]
  17. 짐을 싣는 말 [본문으로]
  18. 다른 나라가 들어와서 붙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