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에 의하면 1592년 6월 13일 분조(分朝)가 결정됨으로 해서 광해군은 그 다음날인 6월 14일부터
분조를 이끌고 선조가 머물고 있는 의주를 떠났다. 영의정 최흥원(崔興源)과 형조판서, 좌찬성 등 10여명의
대신이 분조를 따랐다. 광해군은 평안도의 맹산(孟山), 양덕(陽德), 황해도의 곡산(谷山)을 거쳐, 7월 9일
강원도 이천(伊川)에 도착해 이곳에서 20일간 머물렀다. 광해군은 각 처의 장수들과 의병장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독려하고 공을 칭찬하고 또 상과 관직을 내렸다. 그러다 왜구의 위협이 가까워지자 다시 황해도와
평안도 성천을 거쳐 영변에 머물며 분조를 이끌어갔다.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면서 자리가 빈 고을의
수령(守令)을 임명하고, 지방관들이 올린 상소와 보고를 처리하고, 무장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명군에게
제공할 군량을 조달하는 등 실제적으로 전시(戰時) 조선 정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분조의 활동은
선조가 중국으로 파월하였다는 소식에 낙담하여 나라가 망한 것으로 생각했던 백성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갖게 하는 힘이 되었다. 광해군의 분조는 1593년 1월 선조의 명으로 그 기능이 중지되었지만 광해군은 4월에
왜병이 한양에서 철수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호남지역까지 다니며 군민을 격려하며 민심수습에 크게 힘을 썼다.
또한 그해 말에는 다시 무군사(撫軍司)1를 이끌고 전라도, 충청도 일대를 돌면서 병력을 모집하고 훈련시켰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이 자주국가라고 자부하지만 현실은 최근 북한과의 대화, 미국과의 방위비 협상에서 보듯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에 선출되면 어떻게든 가능한 빨리 미국순방 길에 올라
미국에 가서 눈도장을 찍고 와야 되는 입장이다. 의례적이기는 하지만 조선시대 조선의 왕도 중국의 승인을
받았다. 왕 뿐만 아니라 장차 왕위를 이을 세자도 같은 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런데 중국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거부했다. 명목상으로는 선조의 맏아들인 광해군의 형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였지만 속셈은 임진왜란 때의
파병을 빌미로 조선의 내정간섭을 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선조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1600년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죽은
해에 예관(禮官)이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허락받자고 주청하자 선조는 “왕비 책봉은
청하지 않고 세자 책봉만 청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고 힐책을 했다. 선조는 1602년 김제남의 둘째딸을
계비로 맞아들이는데 그녀가 바로 인목대비로 더 잘 알려진 인목(仁穆)왕후이다. 인목왕후는 4년 뒤에
영창대군을 낳았다. 영창대군은 선조의 14아들 중 13번째 왕자였다. 하지만 서자인 다른 왕자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정실 왕비에게서 난 적자(嫡子)였다. 선조는 이런 상황에서 광해군이 문안할 때마다 “명나라의
책봉도 받지 못했는데 어찌 세자 행세를 하는가? 다음부터는 문안하지 말라.”고 광해군을 꾸짖었다.
임진왜란 중에 득세한 북인들은 1599년 홍여순(洪汝諄)이 대사헌으로 천거된 것에 대하여 지지와 반대를
놓고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라졌다. 이런 사소한 앙금이 지속되다가 영창대군이 태어나면서 서로
입장의 차이가 명확해졌다. 원래 북인은 광해군을 지지하던 세력이었는데 소북의 유영경이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행보를 시작하면서 계속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복과 노선을 달리하게 되었다. 후세의 시각으로는
이미 14년을 세자 자리에 있던 광해군을 제쳐놓고 영창대군을 옹위한다는 것은 공연한 분란을 일으키는
일로 보인다. 영의정 유영경은 평소 선조의 마음을 얻으려 무진 애를 썼던 인물로 전해지고 있어 유영경의
이러한 입장은 나름 선조의 뜻을 헤아린 결과일 수도 있다.
1607년 10월 9일 선조가 새벽에 방밖으로 나가다가 갑자기 숨이 차서 넘어지는 일이 일어났다. 해 돋을 무렵
선조에게 문안하려고 동궁에서 나오던 광해군은 선조의 환후가 위급하다는 내인(內人)의 전언을 듣고 수레에서
내려 대전으로 급히 달려갔다. 선조가 의식이 들지 않아 일어나지 못해서 청심원(淸心元), 소합원(蘇合元),
강즙(薑汁), 죽력(竹瀝), 계자황(鷄子黃), 구미청심원(九味淸心元), 조협말(皂莢末), 진미음(陳米飮) 등의
약을 번갈아 올린 후에야 선조는 겨우 안정이 되었다. 오후와 저녁에도 또 다시 호흡이 가빠지고 의식을 잃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틀 뒤인 10월 11일 선조는 삼공(三公)2을 은밀히 불러들여 비망기(備忘記)3를 전했다.
"나는 본디 질병이 많아서 평일에도 만기(萬機)4의 정무는 절대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지금은 병에
걸린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조금도 차도가 없어 정신이 혼암하고 심병이 더욱 침중하다. 이러한데도 왕위에
그대로 있을 수 있겠는가? 세자 나이가 장성하였으니 고사에 의해 전위(傳位)해야 할 것이다. 만일 전위가
어렵다면 섭정(攝政)하는 것도 가하다. 군국(軍國)의 중대사는 이처럼 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속히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자 영의정 유영경, 좌의정 허욱, 우의정 한응인은 이에 이렇게 회계(回啓)5하였다.
"신들이 삼가 비망기를 보고 서로 돌아보며 놀라고 황공하여 품달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상께서 여러 달 동안
조섭하시어 즉시 쾌복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점차 수라를 드시어 원기가 회복되어 가니 온 나라 신민이
평복될 날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만 의외에 이번에 갑자기 이런 명을 내리시니 신들은 몹시
걱정스러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는 조섭(調攝)6중에 계시더라도 적체된 것이
없으니 바라건대 이런 점은 염려하지 마시고 심기를 화평하게 하여 조섭에 전념하시면 종묘와 사직이 은밀히
도와서 성후(聖候)가 저절로 강녕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신들의 소원일 뿐만 아니라 군신(群臣)의 뜻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황공하게 감히 아룁니다."
그러자 선조는 다시 이에 답했다.
"이와 같이 하고서 조섭하고자 한다면 이는 먹기를 거절하면서 살기를 구하는 것과 같으니 가련키 그지없다.
그러던 중에 심병이 갑자기 발작하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니 몹시 민망스럽다. 오직 이 일념뿐 그밖에 다른 생각은 없다."
중전인 인목왕후도 삼공을 빈청에 모이게 한 뒤 한글 내지(內旨)7를 내렸다.
"상께서 병중에 계신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니 심기 불편함이 전일보다 배나 더하다. 지금 이 전교를 따르지
않는다면 심기가 더욱 손상되어 환후가 더욱 위중하실까 우려된다. 대신은 상의 명을 순순히 따르라. 이것을
바랄 뿐이다."
그러자 삼공은 자신들의 뜻은 선조의 비망기에 회계한 것과 같다는 답을 올렸고 인목왕후는 다시 또 같은
뜻으로 글을 내렸지만 삼공은 자신들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다시 내교(內敎)를 받들진대 사의(辭意)가 더욱 간곡하십니다. 신들도 목석이 아닌데 어찌 마음속에
두려운 점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전교는 군정(群情)의 생각 밖에서 나온 것이니 신들은 감히 명을
받들 수 없어 땅에 엎드려 죽을죄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12일에 삼공이 다시 선조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엊저녁에 삼가 비답을 보고 신들은 절박한 심정에 말이 궁하여 아뢸 바를 모르고 그대로 물러나왔습니다.
상께서 조섭 중에 계시다고 하더라도 서무를 재결하심에 있어 사리에 합당치 않은 것이 없고 적체된 일도없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밖으로는 변방이 매우 시끄럽고 안으로는 인심이 날로 이반되어 수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이 어떠한 시기인데 경솔히 이처럼 막중한 거조를 하십니까. 성상의 한 몸은 종묘사직이
의탁하는 바이어서 신명이 남몰래 보호하고 하늘이 반드시 도와 평복하실 날을 손꼽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온 나라 신민의 기대가 오직 여기에 있으니 신들이 애써 성교(聖敎)에 부응하고자 한들 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은 좀 더 심사숙고하시어 하정을 편안케 하여 주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이에 선조는 알았다고 답하였다.
선조의 비망기에 대한 이러한 3정승의 반응은 그 해석이 갈릴 수 있다. 왕이 자리를 물러나겠다는데 신하들이
넙죽 “네. 그러실 때가 됐습니다.” 하고 받을 수도 없는 일이다. 더욱이 선조는 임진왜란 중에 몇 번이나
광해군에게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말을 해서 신하들과 광해군을 곤란한 처지에 몰아넣은 전력이 있었다.
그래서 3정승의 행동을 신하들의 의례적인 행위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평소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유영경의
행보는 다른 해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반대편인 대북은 이를 유영경 일파가 대놓고 광해군의
승계를 방해한 행위로 보았다.
그 후 선조는 계속 병중에 있었다. 한 달 동안은 실록에 ‘왕세자가 대내(大內)에서 시질(侍疾)하였다.’는 기사
말고는 선조가 정사를 본 기사가 거의 없어 선조의 병세는 위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도 그 한 달 동안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선조 곁에서 병환을 살피며 시중을 들었다. 그러다 선조의 병세가 조금 나아진
상태에서 해를 넘긴 1608년 1월 18일 전 공조참판 정인홍이 영의정 유영경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 당시
정인홍은 74세의 고령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합천에 머물고 있었지만 이산해, 이이첨과 함께 여전히
대북을 영도하는 인물이었다. 정인홍은 상소에서 3개월 전의 일을 열거하면서 유영경을 극렬하게 비난하며
세자를 동요시키고 종사를 위태롭게 한 죄를 물어 형벌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조정은 벌집을 쑤셔놓은
격이 되었다. 유영경은 변명의 상소를 올리고 비망기를 삼사에 알리지 않고 숨겼다는 의혹을 받은 승지와
사관은 대죄를 청했다. 선조는 이 상황을 조용히 무마하고 싶었지만 각기 정인홍과 유영경을 지지하는 측에서
상소가 올라오는 등 정국이 혼란해지자 결국 사간원의 요청을 받아들여 정인홍과 이이첨을 귀양 보내게 하였다.
그리고 그 4일 뒤인 2월 1일 선조는 정릉동 행궁(行宮)에서 승하하였다. 정릉동 행궁은 원래 태조의 계비
강씨(康氏)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던 곳으로 태종 때 능이 옮겨진 후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살았던 곳으로, 지금의 덕수궁 자리이다. 임진왜란 뒤 서울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타버린 상황이라
이곳에서 머물고 있었다. 광해군은 그 다음날 선조가 남긴 유교(遺敎)를 받고 17년의 세자 생활을 마치고
정릉동 행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조선의 왕위 계승은 늘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선왕이 승하한
날 왕위를 물려받기 때문에 장례 절차와 즉위식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탓이다. 그런데 선조가 승하한 지 보름도
안 되는 2월 14일 홍문관에서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에 대한 차자(箚子)8를 올렸다.
"임해군 진(珒)이 은밀히 다른 마음을 품고 군병을 양성하고 무기를 저장한 의심스런 정적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은 지 오래입니다. 이제 와서도 여막에서 지극히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철퇴와 환도를 빈 가마니에
싸서 다수 반입하였으니, 가까운 집안에서 변이 발생할 조짐이 조석에 임박하여 있습니다. 대의에 의거
결단을 내려 절도에 유찬시킴으로써 종사의 안전을 도모하고 우애를 온전히 보존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이에 광해군은 이렇게 답했다.
"나의 형이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내가 계사(啓辭)를 보고 안타까워 눈물이 흐르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
불행하게도 이런 공의(公議)가 유발되었으니, 대신에게 문의하여 조처하라."
임해군은 광해군의 세 살 위 동복(同腹) 형으로 서자 중에서는 서열이 첫째였으나 일찍부터 성질이 난폭하여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를 뺏긴 인물이다. 임진왜란 때는 근왕병을 모집하러 함경도로 갔다가 이복동생인
순화군(順和君)과 함께 왜군의 포로가 되어 1년 가까이 잡혀 있다가 여러 차례의 석방협상 끝에 풀려났다.
본래 성질이 포악한데다가 포로가 되었던 후유증으로 인하여 그 포악함이 더욱 심해져 분을 발산시키기 위하여
길거리를 헤매면서 민가에 들어가 재물을 약탈하고 상민을 구타하는 등의 행패를 부렸다. 임해군은 이복동생인
순화군, 그리고 선조가 아꼈던 신성군의 동복동생인 정언군과 함께 조선의 3대 망나니 왕자로 일컬어질 만큼
선조실록에는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그들의 파직을 요청한 기사들이 넘쳐난다. 대신들의 파직을 요청했다가도
잘못되면 귀양을 가기도 한다. 하물며 왕자들의 파직을 요청하는 것은 그와 비교할 수도 없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으로 명확한 근거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선조는 그 때마다 번번이 자기 아들들을 비호하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만행은 계속되었고, 그들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은 자자했었다.
그런 임해군이 역모를 계획한 정황이 발견된 것이다. “대신에게 문의하여 조처하라."고 답을 했던 광해군은
대신들이 혹시라도 형인 임해군에게 큰 벌을 내릴까 염려하여 그날 다시 또 전교를 내렸다.
"국가가 불행하여 이런 공의가 유발되었으니, 동기(同氣) 사이에 조처할 바를 몰라 그저 스스로 통곡만
할 뿐이다. 선왕의 유교(遺敎)가 정녕하게 귀에 남아 있으니 내가 차마 저버릴 수 없다. 원컨대 대신들은
상의하여 선처함으로써 힘써 우의를 보존할 수 있는 계책을 강구하여 주었으면 더없는 다행이겠다. "
그러나 대신들은 "절도에 유찬시키는 것이 바로 우의를 보존시키는 지극한 뜻인 것이니, 조속히 처치하는
것이 의당하겠습니다." 라고 광해군에게 아뢰었고 광해군은 "절도로 유찬시키는 것은 차마 못하겠다.
단, 동기를 대우하는 것은 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만 이미 나갔으니, 무장(武將) 1원(員)을
택차(擇差)하여 무사와 포수(砲手)·군사를 데리고 그의 집으로 가서 사면을 엄히 지키면서 출입하는 사람을
금하게 함으로써 뜻밖의 일을 예방하게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어서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무장(武將) 고언백(高彦伯), 박명현(朴名賢) 등이 은밀히 이심(異心)을
품고 있으니 급속히 잡아다가 가두소서." 라고 아뢴데 이어 병조(兵曹)에서 또 다른 보고가 올라왔다.
"임해군 이진이 지금 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부인(婦人)의 차림새로 꾸며 사람에게 업혀 나아가는 것을
본조의 낭청이 순검(巡檢)할 때 마침 보고서 발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무사를 시켜 급급히 추심(追尋)하여
지금 문밖의 비변사에 들여다 놓고 장수를 정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
임해군은 선조가 승하한 날에도 입궐했다가 선조의 죽음을 확인한 뒤 밥을 굶었다는 당치도 않은 이유로
궐 밖으로 나갔다가 한참 뒤에야 돌아온 행동으로 의심을 받고 있었다. 간원과 대신들의 이어지는 상소로
결국 임해군은 유배를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진도에 안치하는 것으로 정해져 유배 가는 도중, 광해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지를 변경하였다.
조선은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한 군약신강((君弱臣強)의 나라냐 아니냐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어쨌거나 조선의 임금 자리가 만만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실록에는 삼사 간관(諫官)들의 탄핵을
요청하는 기사가 거의 매일 같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사간원에서 탄핵하였는데 왕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헌부가 나서고, 그 다음에는 양사가 합동으로 나서고 이어서 홍문관까지 나서서 연일 왕을 괴롭힌다.
그래도 안 받아들여지면 자신들을 파직시켜 달라거나 사직 의사를 밝힌 뒤 물러나 왕명을 기다린다. 때로는
간관 스스로가 제 때에 탄핵하지 못한 죄가 있으니 자신을 파직시켜달라고도 한다.
선조가 승하한지 열흘 만에 유영경을 파직시켜야 한다는 사간원의 탄핵이 올라왔다. 광해군은 이를 물리쳤다.
다음날에는 대사헌에서 파직시키라는 합계가 올라왔고 이어 홍문관에서는 아예 유영경의 임관 기록을 없애는
삭직(削職)을 청하는 차자가 올라왔다.
광해군이 모두 다 받아들이지 않자 삼사가 나서 매일 같이 상중(喪中)의 광해군을 괴롭힌 끝에 결국 열흘만에
광해군은 유영경의 관직을 삭탈했다. 그러자 그 다음날에는 양사가 또 유영경의 문외출송(門外黜送)을 청하고
나섰다. 문외출송은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한양 밖으로 추방하는 형벌이다. 유영경에 대한 탄핵이 며칠
잠잠하더니 이번에는 대사헌에서 유영경을 탄핵하는데 자신들이 직무를 다하지 못한 죄를 물어 자신들의
직무를 갈아달라고 청한다.
행 대사헌 김신원, 목장흠, 장령 윤양, 지평 민덕남·정광성이 아뢰기를,
"악역(惡逆)을 토죄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거조입니까. 당초 이미 원흉의 죄악을 알았으면 의당 상세히
살펴 해당되는 율(律)을 의논했어야 하는데도 단지 삭출시킬 것만 청하였으니, 이것이 첫 번째 잘못된
것입니다. 여정(輿情)이 격분하여 모두들 너무 가볍게 했다고 하기에 이르러서는 즉시 다시 가죄(加罪)
하기를 청했어야 하는데도 오히려 삭출시키자는 의논만 고집하면서 오랫동안 고치지 않고 있었으니, 이것이
두 번째 잘못된 것입니다. 삭출시키라는 명이 내린 뒤에는 조용하게 여러 날이 지나도록 전혀 한마디 말이
없다가 공의(公議)를 막기 어렵게 되어서야 비로소 전례에 따라 인피하였으니, 이것이 세 번째 잘못된
것입니다. 언관의 풍채가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니 결코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신들의 직을
체직시키라 명하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기다렸다.9
이 정도면 왕이 질려서 간관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듯싶다. 대북은 이런 식으로 소북 인사들을
몰아내었다. 또한 정인홍도 석방시켜달라는 청을 매일 올려 선조가 귀양을 보낸 지 20여일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게 하고 대북(大北) 정권의 기반을 닦았다.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1593년 윤11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 광해군이 이끌었던 행영(行營). 처음에는 비변사(分備邊司)의 기능을 나누어 담당할 목적으로 설치되었지만 군사는 물론 일선에서 행해지는 제반 행정을 모두 먼저 조처하고 뒤에 왕에게 보고하는 분조(分朝)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본문으로]
-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3의정(三議政) [본문으로]
- 임금이 명령이나 의견을 적어서 승지(承旨)에게 전하던 문서 [본문으로]
- 임금이 보는 여러 가지 정무 [본문으로]
- 임금의 물음에 대하여 신하들이 심의하여 대답하는 것 [본문으로]
- 건강이 회복되도록 몸을 보살피고 병을 다스림 [본문으로]
- 왕비의 명령 [본문으로]
- 왕에게 올리는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 [본문으로]
-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즉위년(1608년) 2월 27일 1번 기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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