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12 - 자비국방

從心所欲 2019. 12. 23. 16:58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된 조선의 군제(軍制)에 의하면 갑사 1만4800명을 비롯하여 지방군인인 정병(正兵) 7만2천명, 수군 4만8,800명 등으로 조선의 군제는 총 14만8천명으로 되어있다. 편제상 그렇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갑사(甲士)란 조선 초기의 유력자들이 보유하였던 사병(私兵)을 혁파하여 태종 때부터 왕권 호위를 담당하도록 특수 병종으로 제도화시킨 군대다. 이들은 입직(入直)과 한양의 시위(侍衛)를 담당하게 되면서 중앙군의 성격을 띠게 되었는데, 세조 때에 이르러 이들 중앙군은 오위(五衛)1제도로 정비되었다, 오위는 전국의 진관(鎭管)에 있는 지방군을 지휘, 감독, 훈련하는 일도 담당하였다. 즉, 오위는 중앙군 조직이면서, 지방군의 상급 조직인 동시에 변경의 방비까지 담당하는 정예병이기도 한 것이다. 조선의 군대는 위(衛)를 주축으로 중앙과 지방을 일원화시킨 체제였다.

 

조선 초기의 갑사는 왕자의 난 등을 거치면서 정국을 안정화하는데 생사를 같이 한 사병(私兵)들이었기에 국가에서 대우하여 품계와 녹봉, 전답을 지급하는 등 특권을 누리는 신분이었다. 태종과 세종 시대의 갑사는 무관으로서 특권적 신분을 원하는 양반 계층과 향촌 지주 세력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양반 자제라고 해서 쉽게 갑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갑사는 의장 군사의 성격도 겸했으므로 용모가 준수하고 신장, 힘, 기, 예를 갖추어야 하는 엄격한 자격요건이 있었다. 그러나 무과에서와 같은 병서(兵書)에 대한 지식은 요구하지 않았고 오직 무예만을 평가하였다.

갑사의 숫자는 태종 초기에는 2천명 수준이었지만 세종 말에는 7500명, 세조 때에는 그 숫자가 더 늘어나면서 국가 재정에 심각한 부담이 되자 갑사를 체아직으로 돌리고 그동안 주어졌던 여러 가지 특혜들을 폐지하였다.

 

갑사는 본인 스스로 군장(軍裝)을 준비하여야 했다. 기마병인 기갑사(騎甲士)는 말까지도 본인이 준비해야 했다. 거기다 유사시에는 변방 방어 임무에도 동원되는데 노비도 데려가야 하고 짐을 싣는 말도 있어야 해서 웬만한 경제력이 아니면 갑사의 임무를 제대로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경제적 부담에 비해 받는 특혜가 줄어들자 양반들의 갑사 지원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면서 세종 이후 증가된 병력 숫자를 채우려다 보니 일반 양인(良人)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양인들 입장에서는 고된 군역(軍役)보다는 그나마 갑사가 낫다는 생각에 갑사에 들어가려는 인원이 많았는데 이는 두 가지 문제를 초래했다.

우선은 개별 군사력의 저하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 문제로 인하여 군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것이었다. 무예를 연마하지 않은 지원자들이 늘어나면서 무예에 대한 선발 기준이 약화되었고, 선발된 자들은 상번 때마다 일족 전체의 재산을 팔아야 하는 일까지 생기자 철갑(鐵甲) 대신에 값싸고 효용성이 거의 없는 지갑(紙甲)이나 피갑(皮甲)으로 군장을 준비하는 일도 생겼고, 교대자의 군장을 서로 빌려 쓰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주관부서인 병조에서는 군장이 미비한 자를 법에 따라 처벌하고 해당 수령도 연좌하여 처벌하였지만, 재수 없는 사람들만 가끔씩 본보기로 처벌되다 보니 이 과정에서 뇌물이 성행하고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임진왜란 때까지 계속 흘러갔다.

 

조선의 국가 재정은 토지를 대상으로 거두어들이는 전세(田稅), 호(戶)를 대상으로 하는 공납(貢納), 그리고 인정(人丁)을 대상으로 동원하는 신역(身役)의 세 가지가 근간이었다. 뒤집어 말하면 이 세 가지가 백성의 의무이기도 하다. 여기서 인정(人丁)이라고 하는 것은 16세부터 60세까지의 국역(國役)을 담당하는 양인(良人) 남자를 가리킨다. 국역은 군대의 의무를 지는 군역(軍役)과 일정 기간 노동에 종사하는 요역(徭役)으로 나뉜다.

 

양인은 조선 초기 신분의 법제적 규범인 양천제(良賤制)에서 생겨난 용어로 노비가 아닌 모든 사람, 즉 천민이 아닌 모든 계층을 일컫는 말이었다. 사족(士族), 상인, 농민이 모두 다 양인이었다. 그러니까 조선의 법제에 의하면 노비를 제외한 16세 이상 59세에 이르는 사족을 포함한 모든 양인 남자는 병역의무를 포함한 국역(國役)의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이들 양인은 모두 관직에 나가는데 대한 특별한 법적 제한이 없었다. 하지만 교육의 기회가 없는 계층은 현실적으로 관료로의 진출이 거의 불가능해지면서 천직이 곧 신분이 되었다. 그러면서 세월이 지남에 따라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계급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고, 16세기에 이르면 양인은 평민(平民) 혹은 상민(常民)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변모되었다. 그 과정에서 양반은 찬물에 뭐 줄어들듯 양인이라는 호칭에서 빠져버리고 양인은 농민, 상인, 수공인 같은 계층을 의미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의 신역제도는 처음부터 학생이나 관료, 상인, 공장들은 면책대상이었다. 그 결과 조선의 신역은 대부분 농민이 부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지금 후세에서 조선의 병역제도를 말할 때는 양인개병(良人皆兵)과 병농일치(兵農一致)라고 하는 것이다. 병농일치라는 말이 굉장히 현명하고 좋은 제도인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농민이 평소에는 농사를 짓다가 때에 따라서는 군사도 된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군적(軍籍)은 조선 시대에 군인을 징발하기 위하여 신상을 기록한 장부로 군호(軍戶)별로 세대와 함께 동거하는 아들, 형제, 조카, 사위 등의 씨족 관계까지 작성되었다. 이를 군안(軍案)이라고도 한다.

조선은 건국직후부터 군적을 작성하였고, 세종 때 호적법과 군적의 작성 절차를 확정하여 호적은 3년에 한번 정비하고 호적에서 군역 대상자들을 추려내어 군적에 올리게 하였다. 군적은 6년에 한 번 씩 개수하도록 되어 있었다. 군적에는

해당인의 병종(兵種)이 명기되고 정군(正軍)인 경우 소속군대까지 표기되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하여 군적은 유사시에는 군사로 동원하고 평상시에는 국민들에게 요역을 부과하는 기초 자료가 되었다. 요역은 중앙 관부와 지방 관부에 동원되어 무상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전세미(田稅米), 공물, 진상물의 수송이나 토목 공사에 동원되었다. 동원되는 기간은 초기에는 평년 20일, 풍년 30일, 흉년은 10일간으로 10월 이후 가을철에만 동원하도록 규정되었었다. 그러다 성종 때인 1471년부터는 계절에 관계없이 연간 6일간으로 조정되었고 이는 『경국대전』에도 그대로 규정되었다.

 

조선 건국초기인 태조2년에 군적에 오른 인원은 200,800명이었다. 1509년에는 301,280명 이라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이 숫자가 모두 현역병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군적에 오른 정(丁) 3명을 한 조로 묶어 그 중에 1명만 직접 병역 의무를 지는 정병(正兵)이 되고 나머지 2인은 보인(保人)이 된다. 보인은 군역을 수행하는 1인의 생계를 지원하는 의무를 갖는 자들이다. 보인들은 처음에는 당번이 된 정병이 복무하는 동안 토지를 경작하고 그 집안일을 돌보도록 하는 보역(保役)을 제공하도록 하였는데 그 부담이 커서 부작용이 생기자 이를 보포(保布)로 변경하여 정병이 상번(上番)일 때는 보인들이 1달에 포(布) 1필씩을 내어 보조하도록 하고, 하번일 때는 정병 스스로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정병들은 평시에 번상(番上)과 부방(赴防)의 임무를 맡는다. 번상은 한양에 상경하여 훈련에 참여하고 도성의 경비를 서는 것을 말하며, 부방은 서북 변경인 함경도와 평안도에 파견되어 국경지대의 방위임무를 맡는 일이다. 또 일부는 각 지방의 전략상 중요 지역에 설치된 진(鎭)에서 방어임무를 담당하는 유방군(留防軍)으로도 근무하였다.

정병은 8교대로 2개월씩 한양에 상경해 근무하고, 유방군은 지방의 진(鎭)에서 4교대로 1개월씩 근무했다. 정병들이 군역을 감당하는데 드는 비용은 모두 군역자 각 개인의 부담이었다. 소집지까지의 여비는 물론 식량과 무기까지 모두 군사 개인이 부담해야했다. 허다 못해 부방을 위해 함경도, 평안도까지 가는 군사도 여행길에서의 식량은 물론 현지에서 먹는 식량도 모두 자비였다. 오직 전시에만 국가가 군사들의 군량을 부담하였다.

군대 가는데 자기 돈으로 군복 사 입고 개인화기 사고, 먹을 식량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영화에서 보는 조선 군사의 전투복은 모두 천으로 만든 포졸복장인데 조선의 군사는 갑옷도 있었다. 그러니까 방탄조끼도 사가야 하는 것이다.

 

[발굴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착용했던 찰갑,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

 

[<조선전역해전도(朝鮮戰役海戰圖)> 부분, 일제가 1940년대에 오오타 텐요오(太田天洋)라는 화가를 시켜 그린 그림이라 한다. 그림 속의 무기, 복장, 전투장면 등 정황이 상당히 사실적이어서 일본에서 전해오던 임진왜란 때의 기록화를 보고 다시 그린 그림으로 추정하고 있다. 구글검색사진]

 

[<조선전역해전도(朝鮮戰役海戰圖)> 부분, 장군의 갑옷으로 알려진 두정갑(頭釘甲)을 입고 있는 조선 군사들. 앞에 방패와 칼을 들고 있는 군사는 조선의 최전방 보병인 팽배수(彭排手). 옆의 궁수도 두정갑을 입고 있다.]

 

[<조선전역해전도(朝鮮戰役海戰圖)> 부분, 석궁 형태의 수노궁(手弩弓)을 쏘고 있는 조선 병사]

 

근무형태는 교대 근무라 근무가 끝나면 퇴근하는 요즘의 방위와 같은 방식이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 근무지에 가더라도 군대막사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근무기간 동안 군사들은 민가에 방을 얻어 지내면서 방세도 개인이 지불해야 했다. 정부에서 문제점을 인식하고 막사를 마련하기도 하였지만 불편하다는 이유로 군인들은 여전히 밖에 방을 얻어놓고 생활했다.

이렇게 상번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또 중앙 정부나 지방 관아에서 요역으로 부른다. 법에는 연간 6일로 규정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일 뿐이었다. 이런 군대에 사기(士氣)는 물론이고 군기(軍氣)를 기대할 수 있을까?

최근까지도 예비군 몇 년 하면 능구렁이가 다 되어 훈련 가서 별 수들을 다 써가며 교관과 조교들의 애를 먹였는데, 조선시대 정병은 16살부터 60살까지 평생을 군대생활 하는 사람들이다. 군대생활 요령에 대해서는 예비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계속 근무가 아니라 교대 근무니, 근무 기간만 잘 때우고 돌아올 생각뿐인 것은 인지상정이다. 아울러 오랫동안 전쟁이 없음으로 인하여 이들의 지휘 감독 또한 엄격히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국가에서 정한 제도만 봐도 문제가 있어 보이는데 그렇다면 운영상의 문제는 없었을까?

1523년에 군적에 오른 자가 311,765명이었다고 하니, 70년 후인 임진왜란 즈음에는 그 숫자는 더 늘어났을 것이다. 그냥 311,765명이라고 치더라도 정병의 숫자는 10만이 넘는다. 이이의 십만양병설이 아니더라도 군적에 올라 있는 정병만 잘 훈련시키면 되는 일 아닌가?

 

 

 

참고 : 조선후기 중앙군제연구(김종수, 2003년 ,혜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 5위(衛) : 의흥위(義興衛), 용양위(龍驤衛), 호분위(虎賁衛), 충좌위(忠佐衛), 충무위(忠武衛)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