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9 - 역전 또 역전

從心所欲 2019. 12. 6. 17:56

정여립의 반란 모의 사건으로 시작된 기축옥사(己丑獄事)는 사건 처리 방식에 대한 선조의 분노가 컸던 만큼

1591년까지 3년을 끌며 동인(東人)에게 커다란 피해를 주었다. 조선의 야사(野史) 총서(叢書)라 할 수 있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큰 변고가 일어나니, 서인들이 기뻐 날뛰고 동인들은 기운을 잃었다. 이것은 앞서 임금이 서인을 싫어하여

이산해(李山海)를 이조 판서 자리에서 10년 동안이나 두는 사이에 서인들은 모두 한산(閑散)한 자리에 있게

되어 기색이 쓸쓸하더니, 여립(汝立)의 역변이 일어난 후에는 갓을 털고 나서서 서로 축하하였으며 동인들은

스스로 물러나고, 서인은 그 자리에 올라서 거리낌 없이 사사로운 원한을 보복하였다.

 

기축옥사는 이처럼 동인들을 실각시키고 서인에게 일시적 승리를 가져다주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지만, 동시에

이 사건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대립과 갈등의 골이 깊어져 서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남은 동인들의 상당수는 속으로 정여립 모반 사건은 무고에 의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그렇게 큰 화를 불러낸 원흉을 상대편에서 찾았고, 정철이 위관(委官)1으로 이 사건을

주도하고 그 배후에는 성혼(成渾, 1535 ~ 1598)이 있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서인쪽에서는 당시 위관이 정철이

아니라 동인인 유성룡이었다고 반박했다. 이런 논란은 정철과 유성룡이 죽은 뒤에도 두고두고 서인과 반대세력

간에 계속되었다. 기록을 확인하면 간단한 문제이지만, 임진왜란 중에 수사 기록인 ‘기축옥안(己丑獄案)이

불타버렸기 때문에 정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은 채 서로의 주장만 되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기축사옥에서

특히 논란이 되었던 것은 이발(李潑) 뿐만 아니라 그의 82세 노모와 8세의 아들이 엄형(嚴刑)을 받아 죽은

일이었다. 동인들은 이발과 그 가족을 무고하게 죽게 한 당사자가 정철이라고 믿었다.

물론 서인의 강경파였던 정철이 이발을 미워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발이 국문을 당하는 중에 정철은 선조에게

이렇게 고하기도 하였다. “이발이 정여립과 사귄 것은 정에 이끌려서 그가 악한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천하에 어찌 두 여립이 있겠습니까?” 정철은 이발을 변호했지만, 선조는 이발이 정여립과 연관되었을 것이라

믿었기에 이발을 계속 문초하게 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정철에 대하여 악감정을 갖고 있던 동인은 뒤에서 칼을 갈던 중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기축옥사가 마무리되던 1591년, 선조의 나이 39세 때이다. 왕위에 오른 지도 25년이 되었다. 조정 중신들은

선조의 후사를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조의 정비(正妃)인 의인왕후(懿仁王后)는 자식이

없었다. 따라서 후궁의 소생 중에서 세자를 논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당시 조정의 신하들은 대체로

공빈(恭嬪) 김씨(金氏)의 둘째아들인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하는 쪽으로 뜻을 모으고 있었다.

광해군의 형으로 세 살 위인 임해군(臨海君)이 있었지만 성질이 난폭하다는 이유로 조정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낳고 2년 만에 죽었는데 이미 15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였고 선조는 인빈(仁嬪)

김씨(金氏)를 총애하고 있던 때였다. 인빈 김씨는 그때 이미 4남 4녀를 낳았었는데 선조는 그 중에서 둘째

소생인 신성군(信城君)을 아꼈다2.

이런 상황에서 동인으로서 영의정이었던 이산해와 우의정 유성룡, 서인의 좌의정 정철은 의논 끝에 만장일치로

광해군을 세자로 건저(建儲)할 것을 선조에게 주청(奏請)하기로 합의하였다.

정철은 동인의 거두 이산해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원한을 제대로 꿰뚫어보지 못했다. 함께 선조에게 건저를

주청하기로 한 전날 저녁, 이산해는 인빈 김씨의 오라버니인 김공량(金公諒)을 불러. “지금 좌상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운 후 신성군 모자와 당신을 죽이려 합니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김공량은 깜짝 놀라

그 길로 인빈 김씨에게 달려가 이 말을 전했다. 인빈 김씨는 곧 선조에게 달려가 울면서 정철이 광해군을 세우고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일러바쳤다. 하지만 선조는, “뜬소문이지 정철이 그럴 리가 있나?”라고 하며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선조에게 함께 주청하기로 약속한 날, 이산해는 병을 핑계로 등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철은 세자 건저 문제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유성룡과 상의하여 임금에게 나아가 주청하기로 하였다. 성질 급한 정철이

선조에게 먼저 세자 건저 문제를 꺼내자, 선조는 “그래 대신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하고 물었다.

정철은 논의한대로 “광해군이 총명하시니 사직을 맡길 만하다고 생각하옵니다.”라고 답했다. 아마도 선조는

이때 인빈 김씨가 전날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을 것이다.

선조는 대뜸 노기 띤 음성으로 말했다. “내 나이 아직 마흔도 안 되었는데 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예기치 못한

선조의 반응에 정철은 식은땀을 흘렸고, 같이 자리한 유성룡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으로 자리를 지켰다.

 

이 일로 정철과 서인들은 위기를 맞았다. 그렇지만 선조가 노했다고 해서 물러나 신성군을 추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대사헌 이해수와 부제학 이성중이 다시 광해군을 세자로 세울 것을 건의하자 선조는 분노하여

이들을 외직으로 쫓아냈다. 동인들은 선조와 서인 사이가 갈라지는 조짐을 보이자 연일 정철을 공격했다.

사간원에서는 정철이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좋아한다”는 인신공격적인 상소까지 올렸다. 뿐만 아니라

기축옥사를 배후에서 조종해온 장본인이라고 믿고 있는 서인의 영수 성혼까지도 끌어들여 점점 더 공격의

수위를 높여갔다. 결국 정철은 이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경상도 진주(晉州)로 유배되었다가 곧 평안도

강계(江界)에 위리안치 되었다.

정철에 대한 원한에 사무친 동인들은 이것으로도 성이 안차 끝내 정철의 목숨까지 빼앗으려고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동인들은 정철의 처벌 수위를 놓고 논의를 했는데, 강경파인 이산해는 사간헌과 사헌부의 동인들에게

양사(兩司)가 합계하여 탄핵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같은 동인이지만 우성전(禹性傳)과 부제학 김수(金睟)는

사건 확대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그러자 대사간 홍여순(洪汝諄)이 우성전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정철의 처벌을 둘러싸고 동인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정철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주장하는 인물들이

북악산 아래 살던 이산해를 중심으로 북인(北人)으로 불렸고, 온건파였던 우성전은 남산 밑에 살아,

남인(南人)으로 불렸다. 이때부터 정파에 따른 학풍의 특색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북인들은 대개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 ~ 1572)의 문인들로서 이산해를 필두로 유영경, 기자헌, 박승종,

홍여순, 허균, 이이첨 같은 인물들이 있었고, 남인으로는 대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 ~ 1570)의 문인들로

유성룡, 우성전, 이원익, 이이명, 이덕형, 윤승훈 등의 인물들이 모였다. 정철의 처벌 문제로 의견이 갈릴 때만

해도 이들이 완전히 다른 당으로 갈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한번 생각이 갈리자 그 골은 점차 깊어져만 갔다.

이때가 임진왜란을 코앞에 둔 1591년, 1592년의 상황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도순변사 신립(申砬)이 당시 조선의 전 군사력을 끌어 모으다시피 한 군사를 이끌고 벌린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하자,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을 쳐야하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몽진(蒙塵)하는

선조 일행에는 왕을 호위하는 시위금군조차 없는 상태로, 도승지 이항복을 포함한 몇몇 신하만 뒤따랐다.

한양을 출발한 다음 날에는 어가를 호위하러 따라왔던 경기의 이졸(吏卒)들이 도망하는 바람에 곤란한 상황에

처했는데, 마침 서흥부사(瑞興府使) 남억(南嶷)이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도착하여 어가를 호위하여 개성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선조가 개성에 도착하자 의외의 상황이 발생했다.

 

상이 개성 남문루(南門樓)에 나아가 백성들을 모아 위유하고 유지를 내려 각각 마음에 품은 바를 진술하도록

하였다. 부로(父老)들이 앞으로 나와 정 정승(鄭政丞)을 부르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는데, 정철(鄭澈)을 가리킨

것이었다. 상이 알았다 하고 즉시 정철을 석방하도록 명하면서 전지를 내리기를, "경(卿)의 충효 대절을 알고

있으니 속히 행재소(行在所)3로 오라." 하였다. 이로부터 기축년, ·신묘년4에 처벌받은 사람들이 모두

석방되어 돌아와 서용(叙用)되었다.5

 

백성들로부터 직접 정철을 부르라는 말을 들은 선조는 아마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대궐 안에서 신하들로부터

듣던 이야기들의 분위기와는 달라 ‘이것이 백성의 민심이구나!’ 했을 것이고. 궁을 버리고 도망가는 처지라

더욱 민심을 무겁게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즉시로 정철을 귀양지에서 불러 오도록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또한 대간이 번갈아 글을 올려 영의정 이산해가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침입하도록 했다는 죄를 들어 탄핵하였다.

선조는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양사(兩司)가 연계하여 마침내 이산해를 파직시켰다. 선조는

유성룡을 영의정으로, 최흥원을 좌의정으로, 윤두수를 우의정으로 삼았는데, 이산해의 문인이었던 신잡

(申磼)6이 ‘영의정이 나라를 그르쳤다는 것으로 죄를 입었다면 좌의정이었던 유성룡에게도 죄가 있다’고

주장하여 양사가 유성룡을 탄핵하였다. 그리하여 유성룡은 영의정이 된지 반나절 만에 파직되었다. 그나마

이항복과 홍이상(洪履祥) 등이 극력 구원에 나선 덕에 귀양은 면하였다. 이에 최흥원이 영의정으로 , 윤두수가

좌의정, 유홍(兪泓)이 우의정이 되어 잠시 다시 서인이 득세한 것처럼 보이는 형국이 되었다. 이산해와

유성룡은 파직되고도 백의(白衣)로 평양까지 호종(護從)하였는데, 이산해는 평양에서 다시 탄핵을 받아

경상도 평해(平海)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정철은 귀양지인 강계에서 평양으로 와 선조를 만난 뒤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전란 중에는 언제나 강경파가 주도권을 쥐기 마련이다. 북인은 전란 중에 세를 탔는데, 곽재우(郭再祐), 김덕령

(金德齡)과 같은 북인 출신 의병장들의 활약 덕분이었다. 또한 북인들은 전란 내내 타협 없는

주전론(主戰論)으로 일관하여 선조와 세자 광해군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북인은 일본에 대한 강경론뿐만

아니라 다른 당파에 대해서도 강경론을 유지했다. 북인은 서인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남인인 유성룡에 대해서도

기회만 있으면 공박했다.

이는 전란 중에 북인과 남인이 확실히 갈라서게 된 때문이었다.

1594년 이경전(李慶全)이라는 인물이 후임 이조전랑으로 이름이 거론되었다. 이경전은 이산해의 아들이다.

당시 이조전랑은 남인인 정경세(鄭經世)였는데, 그는 이경전을 후임으로 지목할 수 없다고 고집하였다.

정경세는 유성룡의 문인이었기에 이산해는 이를 유성룡이 사주한 것으로 보았다. 이 일로 북인과 남인은

완전히 서로 등을 지게 되었다.

 

유성룡은 왜란 중에 3도 또는 4도의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를 편성하는 등 군사를 총지휘하면서 왜란을 극복했다.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순신을 정읍

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파격적인 발탁을 하고, 권율을 형조정랑에서 국경 요충지인 의주 목사로 보낸 것

등은 그의 선견지명이었든 아니든 간에 결과적으로 조선이 왜란을 극복하는데 커다란 공을 세운 일들이다.

그러나 1598년 왜란이 끝났을 때, 북인들은 유성룡이 일본과의 화친을 주도했다는 누명을 씌워 탄핵하여

영의정에 있던 유성룡을 파직시켰다. 이에 유성룡은 고향인 하회마을로 낙향했고, 1600년에 누명이 벗겨지고

관직도 회복되었지만, 그는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7년간 선조의 부름을 거절하며 고향을 지키다가

66세가 되던 1607년 병으로 눈을 감았다.

 

[<수군조련도> 55.3 × 183.0cm, 국립해양박물관]

 

 

 

[<통제영 수조도(水操圖)7>, 통영 충렬사 소장]

 

 

참조 및 인용 :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1997, 출판사 석필),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죄인을 추국(推鞫)할 때, 의정대신(議政大臣) 가운데서 임시로 뽑아서 임명하는 재판장 [본문으로]
  2. 인빈 김씨의 첫째 소생인 의안군(義安君)은 1588년에 죽었다. [본문으로]
  3. 왕이 궁궐을 떠나 멀리 거둥할 때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이나 이궁 [본문으로]
  4. 기축년 : 1589 선조 22년. 신묘년 : 1591 선조 24년 [본문으로]
  5. 선조수정실록의 선조 25년(1592년) 5월 기사 [본문으로]
  6. 신잡(申磼)은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申砬) 장군의 형이다 [본문으로]
  7. 정효현(1848∼1928)이 고종의 명을 받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