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7 - 중재자 이이

從心所欲 2019. 10. 11. 08:43

당시 율곡 이이(李珥, 1536 ~ 1584)는 사림(士林)의 영수로 여겨질 만큼 많은 사대부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들었었다. 여기에는 이이에 대한 선조의 절대적인 신임도 한 몫을 했다. 선조는 학문이 높은 이이를

깊이 존경했었다. 이제 사림이 정권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이상적인 도덕 정치를 펼칠 때라고 생각했던

이이는 사림이 두 편으로 갈라지는 것을 봉합하기 위하여 나섰다. 이이는 서로 감정이 격해 있는 심의겸과

김효원을 지방으로 보내면 분쟁이 수그러들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좌의정인 노수신(盧守愼, 1515 ~ 1590)을

만나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다. 노수신 또한 사림의 분당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터라 이이의

의견에 찬성하여 두 사람은 임금 앞에 나아가 심의겸과 김효원을 외직(外職)으로 보낼 것을 주청했다.

이에 선조가 물었다. “두 사람이 무슨 일을 가지고 서로 싸우는가?”

노수신이 대답했다. “서로 평생의 허물을 가지고 싸웁니다.”

노수신의 말은 자칫 두 사람이 평생 허물이 될 만한 잘못이 있다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라 이이는

두 사람을 변호했다.

“이 두 사람이 서로 미워하고 원망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옵고, 다만 세상인심이 부박(浮薄)하다1 보니

친척이나 친구들이 항간에 떠도는 말을 서로 전해가지고 이처럼 의견이 분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대신

노수신이 이를 진정시키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조는 두 사람의 뜻을 받아들여 김효원을 함경도 경흥부사(府使)로 보내고 심의겸은 경기도 개성

유수(留守)로 내보냈다. 그러자 동인들이 반발했다. 김효원의 부임지가 심의겸보다 한양에서 훨씬 먼

오지(奧地)라는 것이었다. 동인들은 임금에게 연일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논지는 ‘경흥은 오랑캐 땅과

가까워서 선비가 기거할 곳이 아니다’는 것이었다. 선조는 이를 받아들여 같은 함경도이지만 남쪽인

부령으로 김효원의 부임지를 옮겨주었다. 하지만 동인들은 부령 또한 오지라며 반발했다. 그래서

김효원은 다시 강원도 삼척부사로 옮겨간다. 여기에 이이는 또 다시 선조에게 주청하여 동인(東人)인

이발(李潑, 1544 ~ 1589)을 이조정랑에 앉혀 동인들의 반발을 무마하려 했다.

 

[함경도 경흥과 부령지역 : 은덕으로 표시된 지역이 경흥]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경흥이 오랑캐 땅과 가까워 선비가 기거할 곳이 아니라고 동인들이 주장하고

또한 그런 주장이 별 문제 의식 없이 받아들여진 사실이다. 조선 개국 후 180여 년이 지나면서 지배층인

양반 사대부들이 어느 정도로 안일함과 특권 의식에 젖어 있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함경도의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는 세종이 6진(鎭)을 개척한 뒤부터 국경지대의 요지였다.

국경지대를 국방의 요지가 아니라 선비가 기거할 곳이 아니라고 보는 동인의 시각과 그것을 받아들인

선조의 태도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치욕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김효원은 그 뒤 사간(司諫)2의 물망에 올랐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아 내직에 복귀하지 못했고,

당쟁이 더욱 심해지면서 황해도의 안악(安岳)군수를 자청해 나갔다. 그리고 이 후 10여 년간 한직(閑職)에

머물며 당쟁이 일어난 것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분쟁을 봉합해보려는 노력이 별 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이는 노력을 계속했다.

그는 동인의 강경파인 이발과 서인의 강경파인 정철(鄭澈, 1536 ~ 1593)에게 여러 번 편지를 보내

‘두 사람이 마음을 합쳐 나라 일에 힘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권면했으나 두 사람은 모두 듣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오히려 중재하려는 이이를 비판했다. 특히 동인들은 이이가 자신들의 편을

들지 않는 것 자체가 서인들의 편을 드는 것이라 의심하면서 서인보다 더 높은 강도로 이이를 비판했다.

동인과 서인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않았던 이이는 동인들의 비난을 계속 받게 되면서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서인으로 몰리게 되었다.

 

1579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백인걸(白仁傑)이 이이를 찾아와 동인과 서인을 화합시키자는 상소를

올리려고 한다면서 상소문을 대신 써달라고 하여 이이가 그 초안을 써주었다. 이 일로 이이는 “경연에

참여하는 신하로 있으면서 남의 상소문의 초를 잡아주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사간원 정언(正言)의 비판을 받았다.

이이가 대사헌으로 있을 때, 사헌부의 정4품직인 장령(掌令)으로 있던 정인홍(鄭仁弘, 1535 ~ 1623)이 

‘심의겸이 부모상을 당했을 때 벼슬에 복귀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말을 들었다며 심의겸을 탄핵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이가 떠도는 말만 믿고 탄핵할 수는 없다고 하자, 정인홍은 항의의 표시로 사직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동인의 강경파 이발이 찾아와 ‘심의겸만 아깝고 정인홍은 아깝지 않냐’고

항의하면서 심의겸을 탄핵하면 동인과 서인이 합쳐질 것이라고 이이를 설득했다. 이에 이이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기로 결심하고 정인홍과 연명으로 심의겸의 파직을 요청하는 장계를 올리기로 하고 장계의

초를 작성한 뒤 정인홍에게 절대 다른 내용을 덧붙이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받았다. 하지만 다음날

정인홍은 장계에다 멋대로 ”심의겸이 선비들을 끌어들여 자기 세력을 만든다“는 내용을 첨가하여 장계를

올렸다. 장계를 본 선조가 물었다.

“전에는 심의겸이 선비들의 마음을 잃었다는 것을 파직의 구실로 삼더니 지금에 와서는 선비들을 끌어들여

당을 만든다고 하는구나. 그에게 붙어 다니는 선비가 도대체 누구인가?”

정인홍이 서인들을 끌어들여 대답했다.

“윤두수, 윤근수, 정철이옵니다.”

나중에 이이가 이 말을 듣고 정인홍을 찾아가 힐문했다.

“정철은 깨끗한 선비로서 심의겸에게 붙을 사람이 아니오. 또 정철은 일찍이 내가 천거한 사람이오. 내가

지금 언관으로 있으면서 그대의 말을 들어 정철을 탄핵한다면 자기가 천거한 사람을 탄핵하는 줏대 없는

소인이 되는 것이 아니겠소?”

이이의 항의에 난처해진 정인홍이 다시 상소를 올렸다.

“정철은 심의겸의 당이 아닌데 소신이 실상을 잘 모르고 장계를 잘못 올렸사오니 청컨대 소신의 벼슬을

갈아치우소서.”

이이도 ‘정철과 심의겸은 친하지만 그 뜻은 같지 않다‘는 내용의 장계를 올렸다. 그러자 동인들은 ’친하지만

뜻이 같지 않다‘는 말을 꼬투리 잡아 또 이이를 비난했다. 정언으로 있던 동인의 윤승훈(尹承勳, 1549 ~

1611)은 이이에게 직접 그 말의 뜻을 추궁했다. 이이는 중국의 고사를 들어 설명을 해주었지만 나이나 관직

경험으로나 윤승훈 정도의 인물이 자신을 찾아와 공격한 사실에 이이는 분노했다. 그리고 이이가 윤승훈에

대해 분노한 것에 대해 또 다시 동인들은 이이를 공격했다. 이처럼 이이의 중재 노력은 성과 없이 악순환만

반복되었다.

 

이런 와중에 선조가 전랑이 후임자를 추천하는 전랑자천제를 없애버렸다. 이 제도가 당을 만들고 세력을

부풀리는데 잘못 이용되고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실제로 김효원이 이조정랑이 된 후로는 전랑 자리는 대개

동인들이 후배들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는 동인들에게 커다란 타격이 되었다. 동인들은 선조의

조치가 자신들에게서 마음이 떠난 증거로 해석했다. 이에 동인들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전랑자천제는 얼마 후 다시 복원되었고 이후 완전히 폐지된 것은 숙종 11년인 1685년이었지만, 동인들은

선조의 조치 배후에는 이이가 있을 것이라는 강한 의심을 품었다. 그리고 이이에게 보복할 기회를 노렸다.

 

 

참조 및 인용 :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1997, 출판사 석필),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천박하고 경솔하다 [본문으로]
  2. 사간원(司諫院)의 종삼품(從三品) 관직으로 정원은 1원이다. 위로 대사간(大司諫: 正三品 堂上) 1원이 있고, 아래로 헌납(獻納: 正五品) 1원, 정언(正言: 正六品) 2원이 있다. (관직명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