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8 - 선조의 변덕

從心所欲 2019. 10. 20. 09:06

이이는 대유학자이자 고결한 성품의 인격자로서 살아있을 때도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평생 벗어버리지 못한 커다란 허물이 있었다. 19세에 금강산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던 경력이다. 1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데다, 뒤이어

아버지가 맞은 서모(庶母) 때문에 가정의 불화가 잦자, 어머니의 상을 치르고 3년간 시묘(侍墓)한 뒤 출가를

했다. 승려로 지낸 기간은 비록 1년 정도에 불과했고, 절에서 나온 후에 <자경문(自警文)>을 지어 승려가

되었던 일을 반성했다. 배불(排佛)을 내걸었던 조선시대의 승려는 국가의 크고 작은 공사의 부역에 제일 먼저

차출되고 도성 안의 출입이 금지될 만큼 국가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계층이었다. 따라서 이이의

승려 전력은 사대부로서는 치명적 약점이었고 이이를 서인으로 보는 동인들에게는 이이를 비방할 수 있는

호재이기도 했다. 동인이었던 송응개(宋應漑, 1536 ~ 1588)가 이이를 비방했던 말을 보면 사소한 한 가지

사실에다 온갖 이야기를 덧붙여 아무 말이나 엮어내는 오늘날의 가짜뉴스와 정치인들의 상대편 비방이

얼마나 오랜 역사를 갖는 일인지 알 수 있다.

“이이는 본래 장삼 입고 머리 깎은 중으로서 환속하여 권문에 들어 호강하며 산림에 드나들면서 자기 스스로

당대에 제일이라고 생각하여 세상 시비의 밖에 있는 초연한 인물로 자처하면서 때로는 심의겸의 단점도 말하고

때로는 김효원의 장점도 말하여 지극히 공평하다는 이름을 구한다. 아래로는 세상 사람들을 속이고 위로는

천하를 속여 처음에는 둘이 모두 그르다고 하였다가 나중에는 그 의견이 세 번이나 변해서 속으로는 남을

음해하고 똑똑한 체하여 조정을 어지럽히니 이이야말로 나라를 갈아먹는 간신이 아니냐!”

 

[4군6진]

 

선조 16년인 1583년 2월에 함경도 북부의 6진 지역에서 여진 부족들이 변란을 일으켰다. 이 변란은 그해 9

월까지 계속되었는데 회령(會寧) 일대의 여진족 수장인 이탕개(尼湯介)의 세력이 가장 컸기 때문에 그 이름을

따서 흔히 ‘이탕개의 난’으로 불리는 것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조선이 겪은 가장 큰 규모의 군사적

변란이었다. 이때 이이는 병조판서였고 선조는 이이에게 전권을 주어 이 변란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동인들은 이이가 병권(兵權)까지 갖게 된 것에 대하여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이이가 임금의 부름을 받아 입궐하다가 갑자기 일어난 어지럼증에 내병조(內兵曹)1에서

몸을 추스르느라 임금께 나아가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선조는 이이가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어의(御醫)를

보내 이이를 진료하게 하였다. 그러나 동인들은 이이를 탄핵하였다. 동인들의 의견을 모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인물은 허봉(許篈, 1551 ~ 1588)2으로, 이이가 병조의 일을 마음대로 처리할 뿐만 아니라 임금이

부르는데도 가지 않은 것은 교만하고 방자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대사헌 송응개는 이이가 아랫사람은

억누르고 윗사람인 임금에게는 그럴듯한 말로 아부를 하여 자신의 허물을 가린다고 이이를 탄핵했다.

 

동인들이 잇따라 이이를 탄핵하고 나서자 영의정 박순(朴淳)과 호군(護軍)3 성혼(成渾) 등이 말의 뿌리를

밝혀 주동자를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다시 승지 박근원과 송응개가 이이는 이익을 탐해 지방관을

위협하고 사류를 미워하며 해쳤다고 공격하자 태학생과 전라도와 황해도 유생들이 각각 연명으로 소를 올려

이이를 변론하였다. 이에 선조는 사감을 가지고 정직을 가장하고 공론을 가탁, 대신을 몰아내고 편당을 지어

임금의 총명을 가렸다면서 “마땅히 저잣거리에서 목을 벨 죄로되, 가볍게 베풀어 죄를 덜어주는 은전을 내려

이들을 귀양 보내노라”는 친필교문을 내려, 허봉을 함경도 갑산(甲山)으로, 송응개는 함북 회령으로,

박근원은 평안 강계(江界)로 각각 귀양을 보냈다. 이렇게 1583년 계미년에 세 사람이 귀양 갔다는 의미에서

이 사건을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부르는데, 당쟁으로 유배를 가게 된 것은 이 계미삼찬이 시초다.

당시 이이는 삼사의 탄핵을 받아 물러나기를 청하고 파주로 돌아가 있었는데 선조는 9월에 이이를 이조판서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이는 다음 해인 1584년 1월 16일, 49세의 나이로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병으로

죽었다. 경기도 파주 탄현의 자운산 기슭에 장사 지냈고, 1615년에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을 중심으로 이이의

묘소 밑에 자운서원을 설립하여 오늘에 까지 이르고 있다.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소재의 자운서원, 경기신문 사진]

 

 

[이이선생묘(李珥先生墓)4]

 

선조는 이이 생전에 이이와 성혼에게 보내는 전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이는 정말 군자(君子)다. 이이만

같다면 당이 있는 것이 걱정이 아니라 당이 없는 것이 걱정이겠다. 나도 주희의 말처럼 그대들의 당에 들고 싶노라.”

그랬던 선조가 이이가 죽은 후에도 동인들이 계속해서 이이를 헐뜯자 그 마음이 흔들렸다. 이이가 죽은 후

영의정 노수신(盧守愼, 1515년 ~ 1590)이 이이를 탄핵하다 귀양 간 허봉, 박근원, 송응개를 사면해줄 것을

청하자 선조는 이를 허락하면서 노수신에게 물었다. “그 때 송응개가 이이를 간사한 인물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 말이 맞는가?” 이에 노수신은 “이이는 자기에게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는 인물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삼사(三司)에 포진해있던 동인들은 선조의 방관 아래 연일 성혼, 박순, 정철, 윤두수, 윤근수, 김계휘 등의

서인을 탄핵했고, 탄핵을 받은 서인들은 탄핵의 사실 유무와 관계없이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조정에는

점점 동인의 수가 늘어났다. 동인이 이이와 성혼을 조정에서 비판하자 당시 공주목(公州牧)의

제독관(提督官)5으로 있던 조헌(趙憲, 1544 ~ 1592)이 스승인 이이와 성혼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

조헌이 올린 상소문에 대하여 ≪선조실록(선조 19년 10월 20일)≫에는 “공주 교수(敎授) 조헌이 소를 올려

이이, 성혼의 학술의 바름과 나라에 충성한 정성을 극력 진술하고, 시인(時人)이 나라를 그르치고 어진 이를

방해하는 것을 배척하였는데, 내용이 몹시 길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 상소문에 대하여 선조는

아무런 비답(批答)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상소를 올린 후 즉각 공주목으로 돌아가지 않고 고향으로

갔다는 이유로 조헌을 파직하였다. 조선시대에 지방의 관리가 몸이 병들거나 여타의 이유로 고향에 가는 것은

흔한 일로 짧은 고향 방문이 파직으로 이어지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지금도 세의 유·불리에 따라 입장을 번복하고 당적을 옮기는 정치인들이 있어 그런 자들을 철새정치인이라

부르는데 서인과 동인으로 나뉜 12년 만에 우리나라 최초의 철새정치인이 등장한다. 서인의 젊은 인재로

이이와 성혼의 각별한 인정을 받았던 정여립(鄭汝立, 1546 ~ 1589)은 이이가 죽은 후 서인이 몰락하는

조짐이 보이자 동인으로 옮겨갔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술 더 떠서 서인을 비난하는데 앞장서기까지 했다.

그는 선조 3년인 1570년, 24세의 나이에 5등으로 문과에 급제한 이후 순탄한 벼슬길을 누렸는데 이이가

사망한 1584년 정5품인 홍문관 수찬(修撰)에 오른 뒤 갑자기 이이, 성혼, 박순 등 서인의 주요 인물을

비판하고 나섰다. 정여립의 이런 태도에 선조도 분노했고 정여립은 왕의 미움을 받게 되자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였고, 이후 진안군의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세우고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를 조직하고

무력을 길렀다.

 

조헌과 정여립은 모두 이이의 문하로 동문관계였는데 정여립의 처세에 조헌은 그의 흉패함을 논박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지어 올렸다. 조헌은 모두 다섯 차례나 상소를 올려 정여립을 비판했으나 선조는 이 상소에

대하여 역시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거듭된 상소가 무위로 끝나자 1589년 조헌은 도끼를 들고 상경하여

동인들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도끼를 들고 상소하는 것을 지부상소(持斧上疏)라 하는데 이는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도끼로 자신을 죽여 달라는 뜻이다. 선조와 동인들은 더 이상 조헌을 내버려둘 수 없다고

판단하여 조헌을 함북 길주로 귀양을 보냈다.

 

그런데 같은 해 10월,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을 비롯한 여러 수령이 연명으로 정여립과 그가 조직한

대동계의 무리들이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한양을 공격해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려는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告變)이 있음을 급보했다. 그러자 당시 정승으로 있던 동인 이산해와

정여립과 동본(同本)인 정언신은 고변이 당치 않다면서 고변자를 죽이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당장 자세한 진상을 밝히라고 명령했다. 선조는 반란에 관한 고변을 진상 조사도 하지

않고 덮어버리려는 동인들을 의심했고 집권 동인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의금부에서 정여립을 잡으려고

관원들을 급파하자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진안(鎭安)의 죽도(竹島)로 도망쳤다가 관군이 포위망을 좁혀오자

자살해버리고 말았다.

그의 아들 정옥남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게 되었는데 위관(委官)으로 정언신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정언신은 한 달이 지나도록 진상을 밝혀내지 못했다. 그러자 서인들은 ‘동인들이 정여립과 결탁했기

때문에 정여립의 죄상을 덮어주고 있다’고 논박했고 이에 동인인 영의정 노수신이 나서서 선조에게

지지부진한 국문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이번 일은 선비들 사이에서 일어났으므로 조용히 처리할 일이지 공연히 중간에서 생기는 거짓말에 끌려서는

아니 되옵니다.”

 

반란 사건을 선비들 사이의 일로 치부하는 노수신의 발언에 선조는 분노했다. 선조는 노수신과 정언신을

파직하고 위관을 서인인 정철(鄭澈, 1536 ~ 1593)로 교체했다. 정철의 문초 끝에 정옥남은 주모자와 공모자를

자백했다. 옥사는 계속 확대되어, 동인의 영수 이발(李潑, 1544 ~ 1589)은 정여립의 집에서 자신이 보낸

편지가 발견되어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고, 그의 형제와 노모, 자식까지 모두 죽음을 당했다. 그 뒤 3년 동안

옥사로 사망한 사람이 무려 1천여 명에 이르면서 동인의 정예인사들은 거의 대부분 제거되고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는 상황으로 뒤바뀌었다. 이를 기축옥사(己丑獄事)라 하며, 이 옥사를 통하여 동인과 서인은 결코

다시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데 이 모반사건에 대해서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그 진위를 둘러싼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모반이

조작되었다는 설과 실제 정여립이 역모를 꾀했다는 설 사이에서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어쨌거나

정여립은 기축옥사의 장본인이 되어 동인의 정치세력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전라도 전체가 반역향이라는 낙인을

찍히게 하여 이후 호남출신 인물들의 벼슬 진출을 어렵게 만들었다.

 

 

참조 및 인용 : [李珥, Yi I]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1997, 출판사 석필),

인물한국사-정여립 (김범), 인물한국사-조헌(신병주, 장선환),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조선 시대 각 궁궐 내에 설치하였던 병조에 딸린 관청으로 궁궐내의 시위, 의장 등 군사업무를 보기 위한 병조 관리들의 파견소와 같은 장소 [본문으로]
  2. 허엽의 아들로 난설헌(蘭雪軒)의 오빠이자 허균의 형 [본문으로]
  3. 조선시대 오위 소속의 정4품 관직 [본문으로]
  4. 부인 노씨와의 합장묘인데, 특이하게 부인 묘가 이이선생 묘 후면에 위치해 있다. 어머니 신사임당 묘를 비롯하여 일가의 묘 13기가 조성되어 있다 [본문으로]
  5. 정식 명칭은 계수제독관(界首提督官)으로 향교(鄕校)의 육성과 보호를 위하여 선조 19년(1586)에 목(牧), 도호부(都護府) 같은 각 도의 행정 및 군사의 중심지에 신설된 관직이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없어졌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