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10 - 임진왜란에 대한 오해

從心所欲 2019. 12. 16. 16:12

 

임진왜란이 나기 전인 1590년 통신사로 파견되었던 일행이 돌아와 각각 상반된 보고를 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서인(西人)인 정사(正使) 황윤길은 “앞으로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 보고했고, 동인(東人)인 부사(副使) 김성일은 “전혀 그런 조짐이 없다”고 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의하면 이때 유성룡이 김성일을 만나 “그대가 말한 것이 황윤길과 다르니 만일 병화가 있으면 어떻게 하려는가?”라고 물으니, 김성일이 “나도 어떻게 왜군이 끝끝내 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야 있겠습니까. 다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지나쳐 꼭 왜놈들이 우리 사신들의 뒤를 바로 쫓아오는 것 같아, 중앙이나 지방이 놀라고 당황할 것 같으므로 이와 같이 말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국가의 안위와 직결된 사안에 당파의 이익을 앞세워 거짓 보고를 한 것이다.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 견본채색, 145㎝ x 96㎝, 1592년 4월 13일과 14일 이틀간 부산진은 왜군의 침공을 받아, 부산진의 첨사(僉使) 정발(鄭撥)은 성안의 군민 1000여명과 더불어 끝까지 항전하다가 순절하였다. 1709년에 처음 그려진 것을 화가 변박(卞璞)이 영조 36년(1760)에 다시 그린 것이다. 처음 작품은 전해지지 않는다. 보물 제391호,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소장]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엄청난 기세로 북상하여 불과 이십 여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고, 5월 말에는 개성을 점령한 뒤, 6월 13일에는 평양성까지 함락했다. 선조는 왜구가 실제로 쳐들어오자 김성일의 거짓 보고를 떠올리며 분개했다. 통신사로 다녀온 뒤 김성일은 대사성, 홍문관부제학, 형조참의를 거쳐 임진왜란이 나기 전에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있었다. 왜구가 부산에 상륙한 다음 날의 ≪선조수정실록≫ 기사이다.

 

경상 우병사 김성일(金誠一)을 잡아다 국문하도록 명하였다가 미처 도착하기 전에 석방시켜 도로 본도의 초유사(招諭使)로 삼고, 함안 군수 유숭인(柳崇仁)을 대신 병사로 삼았다. 이에 앞서 상은 전에 성일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적이 틀림없이 침략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여 인심을 해이하게 하고 국사를 그르쳤다는 이유로 의금부 도사를 보내어 잡아오도록 명하였다. 일이 장차 측량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얼마 있다가 성일이 적을 만나 교전한 상황을 아뢰었는데, 유성룡이 성일의 충절은 믿을 수 있다고 말하였으므로 상의 노여움이 풀려 이와 같은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처음에 성일이 상주(尙州)에 이르러 적변(賊變)을 듣고는 본영(本營)으로 달려가 전 병사 조대곤(曺大坤)을 머물게 하여 함께 군사를 다스렸었다. 이때 적이 김해(金海)에서 벌써 우도(右道)에 들어왔는데 성일이 갑자기 적의 척후와 마주치게 되었다. 좌우에서 물러나 피하려 하였으나 성일이 말에서 내려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동요되지 않고 군관 이종인(李宗仁)으로 하여금 말을 타고 달려가 한 명의 적을 쏘아 죽이게 하니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는데, 여러 사람의 마음이 이로 인해 조금 안정되었다. 잡아오라는 명을 듣고 말을 달려 직산(稷山)에 이르렀다가 또 초유(招諭)하라는 명을 듣고는 도로 본도로 달려가 의병을 불러 모아 점점 형세를 이루어 한 도(道)가 그를 믿게 되었다.1

 

김성일이 그때 왜군을 마주하여 싸우는 경상 우병사(右兵使)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아마도 끌려와 국문을 받다 죽거나 사약(賜藥)을 받고 죽었을 것이다. 왜군과 대적했다는 보고와 유성룡의 변호로, 김성일은 한양으로 소환되던 중에 직산(稷山)에서 초유사(招諭使)로 임명받으면서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초유사란 난리가 일어났을 때 백성(百姓)을 위무하는 일을 맡아보던 임시(臨時) 벼슬이다.

이후 김성일은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의 의병활동을 고무하고, 의병 규합과 군량미확보에 전념하면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하여 왜군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게 하여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에서의 승리에 일조하였다. 하지만 1593년 4월에,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해 도내 각 고을에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던 중, 병을 얻어 진주의 공관(公館)에서 56세의 나이로 졸서(卒逝)하였다.

 

황윤길과 김성일의 일화가 너무 크게 부각되어 많은 이들은 왜적의 침입에 조선이 아무런 방비도 없이 손을 놓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조선 통신사가 조선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왜국의 사신이 조선을 찾아왔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4년(1591년) 윤3월 1일2의 6번째 기사이다.

 

왜사(倭使) 평조신(平調信), 현소(玄蘇) 등이 서울에 왔다. 상이 비변사의 의논에 따라 황윤길(黃允吉), 김성일(金誠一) 등으로 하여금 사적으로 술과 음식을 가지고 가 위로하면서 왜국의 사정을 조용히 묻고 상황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러자 현소가 성일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중국에서 오랫동안 일본을 거절하여 조공을 바치러 가지 못하였습니다. 평수길(平秀吉)이 이 때문에 분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쌓여 전쟁을 일으키고자 합니다. 만약 조선에서 먼저 주문(奏聞)하여 조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면 조선은 반드시 무사할 것이고 일본 백성들도 전쟁의 노고를 덜게 될 것입니다." 하니,

성일 등이 대의(大義)로 헤아려 볼 때 옳지 못한 일이라고 타이르자, 현소가 다시 말하기를,

"옛날 고려가 원(元)나라 병사를 인도하여 일본을 쳤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에 원한을 갚고자 하니, 
이는 사세(事勢)상 당연한 일입니다."하였다. 그의 말이 점점 패려하여 성일이 다시 캐묻지 못하였다.

 

기사에 나오는 현소(玄蘇)는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로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를 맡았던 대마도의 승려이다.

임진왜란 때 종군 승으로 참여했고, 강화 교섭을 위해 명나라에도 다녀왔던 인물이다. 이들은 이른바 정명향도(征明嚮導) 문제를 조율하기 위해 조선에 온 것이었다. 이들은 4월에 선조를 만나고 5월에 선조의 답신을 받아 일본으로 돌아갔다. 왜국 사신이 한양에 머무는 동안, 조정에서는 왜가 명나라를 침략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중국에 알리느냐 마냐를 놓고 왕과 대신들이 은밀한 논의를 거듭했다. 확실하지도 않은 일을 명나라에 말했다가 오히려 조선이 일본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며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설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침범하지 않더라도 왜국 사신이 가져온 서계(書契)에 그런 의도가 드러났으니 일단은 알려야 한다는 의견으로 모아졌다.

 

하지만 당시 명나라는 이미 일본이 명나라 공격을 거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들의 결과에 대하여 조선에서 오랫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자 조선과 일본의 내통을 벌써부터 의심하고 있었다.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에 갔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7개월이나 통신사 일행을 만나주지 않고 시간을 끈 사실을 중국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중국의 상황을 모르는 조선은 그 해 10월이나 돼서야 진주사(陳奏使)가 중국에 도착하여, 일본이 우리나라를 위협하여 명나라로 쳐들어가려 한다는 사정을 진주하였다3. 또한 이미 중국내에 널리 퍼져 있는 조선이 일본과 내통한다는 소문에 대해서도 유언비어임을 해명하여야만 했다.

 

일본의 사신들이 돌아간 후인 1591년 5월의 ≪선조수정실록≫ 14번째, 15번째 기사이다.

 

평의지(平義智)4가 또 부산포에 와서는 배에서 내리지 않고 변장(邊將)을 불러서 말하기를 ‘일본이 대명(大明)과 통호하려고 한다. 조선에서 이 사실을 중국에 주문해 주면 매우 다행이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일본과 조선의 관계가 좋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은 중대한 일이므로 와서 알려주는 것이다.’ 하였다. 
변장이 이 사실을 조정에 아뢰었으나 조정에서 아무런 답을 하지 않자 평의지가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이후로는 해마다 조공오던 왜선이 다시 오지 않았고, 관(館)에 머물던 왜인이 항상 수십 명이었는데 점차 일본으로 되돌아가 임진년 봄에 와서는 온 왜관이 텅 비게 되었다.5

 

풍신수길이 정병 1백만 명을 훈련시키고 이들을 다섯 부대로 나누어 먼저 조선을 점거하고 곧바로 요동으로 쳐들어가 천하를 차지하고자 하는 큰 계책을 세웠는데, 이런 계책을 세운 것은 일본이 나라는 작은데 군사는 많아 내란을 막을 수 없을까 염려해서였다. 그들의 서계(書契)와 사신들이 와서 하는 말이 모두가 쳐들어가는 것을 인도해달라는 말이었는데 간혹 우리나라에서 거절함으로 인하여 조공(朝貢)을 주청(奏請)해달라는 한두 마디를 변환시켜 유인하는 것뿐이었으니, 이것이 어찌 믿을 만한 말이었겠는가.

대마도 사람들은 신하로서 우리나라를 섬겨오면서 옷가지나 식량 따위를 조달해 왔는데 하루아침에 본토의 왜를 인도하여 쳐들어오기에는 낯 뜨거운 면이 있고, 또 뒷날에 우리 나라를 다시 섬길 수 없게 되면 온갖 이익을 놓치게 되겠기에 짐짓 분란을 풀어주고자 하는 것처럼 하여 뒷날에 해명할 여지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그 후에 주화론(主和論)이 미봉책에 그치어 분란이 일어나게 되자 온갖 허물이 한쪽 편의 논의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는 모두가 분당(分黨)이 일을 그르친 것이다.6

 

위의 마지막 『선조수정실록』기사는 좀 뜬금없는 데가 있다. 누가 말한 것도 아니고 조정에서 논의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다른 설명도 없이 이 기사가 삽입되었다. 물론 『선조실록』에는 없는 기사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시대에 북인(北人)들이

중심이 되어 편찬하였다. 그래서 인조정란으로 북인이 물러나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서인들은 인조 즉위 초부터 실록을 수정하려고 하였지만, 실제로 수정에 들어간 것은 인조 21년인 1643년이고, 완성된 것은 효종 8년인 1657년이었다.

 

사관이 『선조수정실록』에 기록한 내용들은 왜란 후에 정보를 종합하여 기술한 내용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임진왜란 전의 조선 조정이 왜에 대하여 얼마만큼의 정보를 갖고 있었고 어떤 판단을 하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부사(副使) 김성일의 말만 믿고 조선의 조정이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통신사의 보고 이후 일어난 여러 사건을 통하여 조선은 일본의 침략 의도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한 경각심은 많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설혹 일본이 침략하더라도 남부 해안지역에 국한될 것이라는 치명적인

오판을 하고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동인들이 왜적 침략에 대한 염려를 "서인(西人)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 시키는 것"이라고까지 내모는 상황이어서 국론도 분열된 상태였다. 

 

호남·영남의 성읍을 수축하였다. 비변사가, 왜적은 수전에 강하지만 육지에 오르면 불리하다는 것으로 오로지 육지의 방어에 힘쓰기를 청하니, 이에 호남·영남의 큰 읍성을 증축하고 수리하게 하였다. 그런데 경상 감사 김수(金睟)는 더욱 힘을 다해 봉행하여 축성(築城)를 제일 많이 하였다. 영천(永川)·청도(淸道)·삼가(三嘉)·대구(大丘)·성주(星州)·부산(釜山)·동래(東萊)·진주(晋州)·안동(安東)·상주(尙州)·좌우병영(左右兵營)에 모두 성곽을 증축하고 참호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크게 하여 많은 사람을 수용하는 것에만 신경을 써서 험한 곳에 의거하지 않고 평지를 취하여 쌓았는데 높이가 겨우 2∼3장에 불과했으며, 참호도 겨우 모양만 갖추었을 뿐, 백성들에게 노고만 끼쳐 원망이 일어나게 하였는데, 식자들은 결단코 방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7

 

이 기사를 보면 왜구가 침략한다고 해도 최대한의 피해지역은 경상북도 정도까지로 예상하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대비가 허술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은 임금 앞에서 일본을 말할 때에 ‘도이(島夷)’, 즉 ‘섬나라 오랑캐’라는 말을 쓸 정도로 적어도 임진왜란 전까지는 일본을 크게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리고 도이(島夷)의 우리 연안에 대한 크고 작은 침입은 늘 있었던 일이라, 왜의 공갈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 심각성에 대해서는 별로 진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80년 전인 1510년에 부산포(釜山浦), 내이포(乃而浦), 염포(鹽浦)의 왜관(倭館)에 거주하던 왜인들 4,000∼5,000명이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동래(東萊)와 웅천(熊川)을 공격하며 난(亂)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이를 삼포왜란(三浦倭亂)이라 하는데 조선 조정이 진압에 나서면서 난의 주모자였던 대마도주의 아들은 죽고 왜인들은 모두 대마도로 도주하였다. 이러한 전력(前歷)이 있었기에 어쩌면 조선 조정은 왜에 대한 경각심이 그리 높지 않았을 수도 있다.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 견본채색, 1592년 4월 15일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을 받아 싸우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宋象賢)과 군민(軍民)들의 항전 내용을 그린 그림이다. 부산진순절로와 마찬 가지로 1709년 그림을, 반박이 1760년에 개모(改模)한 것이다. 보물 제392호,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소장]

 

임진왜란에 대한 허술한 대비가 거론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이이의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이다. 하도 많이 회자되어 국민의 상식처럼 되어버린 ’십만양병설‘의 진실은 무엇일까?

사실 기록으로 전하는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없다. 다만 이이의 제자이자 이이와 성혼 이후 서인의 영수 역할을 했던 김장생이 <율곡행장>에 기록한 글이 이 설의 발단이다.

 

한 번은 경연에서, ‘미리 10만 명을 양성하여 급한 일이 있을 때에 대비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10년을 지나지 아니하여 토담이 무너지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하니 정승 유성룡이 말하기를, ‘일이 없이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회근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 때에 난리가 없은 지가 오래되어 편안한 것만 좋아하여서 경연에 있던 신하들이 모두, ‘선생이 잘못한 것이다.’ 하니, 선생이 나와서 유성룡에게 말하기를, ‘나라 형세의 위태하기가 달걀을 쌓아 놓은 것 같은데, 시속(時俗)의 선비는 이 때 어떻게 할 것을 모르니, 다른 사람이야 진실로 기대할 것이 없지만 그대가 또한 이러한 말을 하는가.’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에 유정승이 조정에서 누구에게 말하기를, ‘지금 와서 보면 문성공(이이)은 참으로 성인이다. 만약 그 말대로 하였으면 나라 일이 어지 이렇게 되었겠는가. 또 그가 전후로 계획한 것이 어떤 사람은 잘못이라고 하였지만 지금은 모두 꼭꼭 들어맞아서 참으로 따라갈 수가 없으니, 만약 율곡이 살아 있다면 반드시 능히 오늘날을 타개할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하였으니, 참으로 1백 년을 기다리지 않고 안다는 것이다.8

 

글의 내용은 이이가 왕과의 경연자리에서 ‘10만양병설’을 건의했고 그 의견에 반대했던 유성룡이 나중에 임진왜란이 나자 이이의 그런 주장이 옳았다고 인정했다는 이야기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주목할 것은 여기서 이이가 10년 운운한 것이 과연 왜란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가 하는 것이다. 10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그렇지, 문맥으로 보아서는 딱히 임진왜란을 가리킨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그리고 다시 수십 년 뒤,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을 스승으로 모셨던 송시열은 1665년에 「율곡우계이선생연보(栗谷牛溪二先生年譜)」를 쓰면서 김장생의 <율곡행장> 기록을 거의 따르면서도, 10만양병설을 더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다. 뿐만 아니라 송시열은 이이가 1583년 4월에 10만양병성을 주장했다고 그 시기까지 적시하였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꼭 10년 전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이이의 선견지명을 돋보이게 하려 했다는 의도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송시열이 말하는 1583년 4월 이이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당시 이이는 병조판서였다. 그리고 그 해 1월 28일 함경도의 북방 6진에서 일어난 여진족의 변란을 진압하느라 한창 정신이 없을 때였다. 소위 이탕개(尼蕩介)의 난으로, 앞서의 삼포왜란과 함께 임진왜란 이전 조선에서 일어났던 가장 큰 전란 중 하나다. 이 난은 8월까지 계속되었고 이때 조선을 침입한 여진족의 병력은 많을 때는 3만이나 되었다. 그런데 당시 북방에 있던 조선 군사는 각 성에 5 ~ 6백 명 수준이었다. 만일 송시열의 말대로 이때에 이이가 임진왜란을 염두에 두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면 이이는 북쪽에서 난리가 난 상황에서 한가하게 아직 예측도 안 되고 일어나지도 않은 임진왜란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이를 욕보이는 말이다. 오히려 국난을 당한 때에 병조판서로써 평소 우리의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당위론적 발언으로 보는 것이 더 상식적이지 않을까?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사실 그 실체가 없다. 송시열이「율곡연보」에 쓴 간략한 내용이 전부인데 그 진위도 가름하기 어려운 것이다. 김장생의 최초 기록대로 이이가 경연 중 국가에 10만 군대를 키울 필요가 있다는 말 한마디를 했다고 해서 이것을 임진왜란에 대한 이이의 선견지명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견강부회로 보인다.

국가가 군대를 양성하여 혹시 장차 있을지도 모르는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은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김장생과 송시열의 글로 인하여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임진왜란에 대한 '이이의 선견지명'이라는 옷을 입고 그 후 서인이 주도했던 조선 후기 사대부들의 상식이 되어 정조, 영조는 물론 수많은 실록에 기정사실화되어 등장한다. 서인들은 1657년에 편찬을 완료한 『선조수정실록』에 이 일을 1582년 9월 기사로 기록했다.

‘이이가 네 가지 시폐(時弊)의 개정을 논한 상소문’이라는 제하의 기사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이이가 일찍이 경연에서 ‘미리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앞으로 뜻하지 않은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자, 유성룡은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단을 키우는 것이다.’라고 하며 매우 강력히 변론하였다.

이이는 늘 탄식하기를 ‘유성룡은 재주와 기개가 참으로 특출하지만 우리와 더불어 일을 함께 하려고 하지 않으니 우리들이 죽은 뒤에야 반드시 그의 재주를 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임진년 변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이 국사를 담당하여 군무(軍務)를 요리하게 되었는데, 그는 늘 ‘이이는 선견지명이 있고 충근(忠勤)스런 절의가 있었으니 그가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오늘날에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한다.

 

송시열은 1583년 4월의 일이라고 했는데 이 기사에 의하면 1582년 9월 이전에 이미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이를 높이려는 서인들의 노력이 오히려 이이의 십만양병설 주장의 진위를 의심케 만들어 공연히 이이에게 의문의 1패를 안겨주고 있는 셈이다.

율곡 이이는 의심의 여지없는 조선의 대유학자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말대로 “조정에 나아가서는 일세의 도를 행하여 백성을 태평케 하고 물러나서는 바른 가르침으로 후학들에게 큰 꿈을 깨치게” 하려고 했다. 그런 이이가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이탕개의 난이 일어나고 보름쯤 후에 선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소위 시무육조(時務六條)로 알려진 글이다.

 

(전략)

신은 원래 부유(腐儒)로서 외람되이 병관(兵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애태우며 생각한 나머지 감히 한 가지 계책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대강만을 아뢰고 자세한 내용에 대하여는 면대(面對)하여 자세히 아뢰겠습니다. 그 조목을 말씀드리면, 첫째 현능(賢能)을 임용할 것, 둘째 군민(軍民)을 양성할 것, 세째 재용(財用)을 풍족하게 만들 것, 넷째 번병(藩屛)을 튼튼하게 할 것, 다섯째 전마(戰馬)를 갖출 것, 여섯째 교화(敎化)를 밝힐 것 등입니다. 

 

여기서 두 번째 항목인 ‘양군민(養軍民)’의 제목만 보고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는 말을 전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이이의 상소문을 직접 확인해봤다면 얼굴이 뜨듯해질 소리다.

 

군민(軍民)을 기른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양병(養兵)은 양민(養民)이 밑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양민을 하지 않고서 양병을 하였다는 것은 예부터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나라 부차(夫差)의 군대가 천하에 무적이었지만 결국 나라가 망한 것은 양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민력(民力)이 이미 고갈되어 사방이 곤궁한데 당장 대적(大敵)이라도 나타난다면, 비록 제갈량(諸葛亮)이 앉아 계략을 짜고 한신(韓信), 백기(白起)가 군대를 통솔한다 하여도 어찌 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발하려 해도 조발할 군대가 없고 먹이려 해도 먹일 곡식이 없으니, 아무리 슬기로운 자라 할지라도 어찌 재료가 없음을 핑계 삼지 않겠습니까. 이는 모든 색군사(色軍士)의 임무가 괴롭고 수월함이 고르지 않아 수월한 자는 그런대로 견디지만 괴로운 자는 도망갈 수밖에 없는데 일단 도망을 가면 그 일족(一族)이 책임을 지게 되어 연쇄적으로 화(禍)가 번져 가서 심한 경우엔 마을 전체가 몽땅 비는 사례까지 있게 되는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현능(賢能)한 자를 각별히 선택하여 국(局)을 설치하여 군적(軍籍)을 관장하게 하고 괴롭고 수월한 자를 서로 교대시켜 그 역(役)을 균등하게 하며, 군사가 도망간 지 3년이 지나면 한정(閑丁)을 다시 모집하여 그 자리를 메우는 등, 반드시 모든 색군사가 다 지탱할 수 있게 하고 또 그 일족이 책임을 지는 폐단을 없앤다면 군민(軍民)의 힘이 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밖의 휴양(休養)·생식(生息) 등에 관한 규정은 국(局)을 설치한 뒤 그 일을 맡은 자가 강구하면 되는 것이며, 훈련 방법에 있어서는 우선 양민부터 하고 나서 논의할 일입니다.

 

난독증이 아니라면 군사를 징발(徵發)하려해도 백성이 없어 뽑을 수가 없으니 양병을 하려면 양민(養民)부터 해야 된다는 내용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를 두고 ‘결국은 양민을 해서 십만 군대를 양병하자는 주장’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렇다면 왜 이십만, 오십만 양병설은 아닌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들어온 왜국의 군사가 16만이었으니 적어도 이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고 하는 편이 이이의 선견지명을 더 돋보이게 하지 않았을까?

 

이이 십만양병설의 진위는 사실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십만양병설을 빌미로 당파싸움에 때문에 

이이의 주장이 무산되어 임진왜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문제다. 임진왜란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던 데는 보다 근본적인 다른 문제가 있었다.

이이의 십만양병설이 사실이라 치더라도 동인의 반대만 없었다면 과연 조선은 십만 군대를 양병할 수 있었고 또 왜란에 잘 대처할 수 있었을까?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선조 25년(1592년) 4월 14일 계묘 12번째 기사 [본문으로]
  2. 선조수정실록은 일자를 따로 기록하지 않고 한 달 치 기사를 매월 1일자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윤3월 1일의 6번째 기사’의 의미는 윤3월에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 기사 가운데 6번째라는 의미이지 윤 3월1일이라는 날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3. 진주(陳奏)는 ‘아랫사람이 그 사정을 윗사람에게 진술하여 아뢴다’는 뜻이고, 진주사(陳奏使)는 제후국인 조선에서 황제국인 중국에 임시로 파견되는 비정규 사절이나 그 사신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4. 소 요시토모(宗義智)는 당시 대마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호족인 소(宗) 가문의 후계자로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를 담당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무장으로 직접 전쟁에 참여하였다. [본문으로]
  5. 선조수정실록, 선조 24년 5월 14번째 기사 [본문으로]
  6. 선조수정실록, 선조 24년 5월 15번째 기사 [본문으로]
  7. 선조수정실록, 선조 24년 7월 1일 갑자 6번째 기사 [본문으로]
  8. 김장생 율곡행장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