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5 - 붕당의 불씨

從心所欲 2019. 10. 6. 19:43

중종은 정비(正妃)가 세 명이었다. 첫 왕비는 연산군 때의 권신이었던 신수근(愼守勤)의 딸, 단경(端敬)왕후 신씨(愼氏)였는데 아버지 때문에 반정 직후 폐위되었다. 중종과 단경왕후는 서로 사랑하였지만 신하들에 의해 택군(擇君)된 중종은 신씨가 폐서인(廢庶人)이 되는 상황을 지켜보며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중종반정 다음 해인 1507년 종4품 숙원으로 있던 윤여필의 딸이 중전의 자리에 오르는데 그녀가 장경(章敬)왕후 윤씨(尹氏)다. 하지만 그녀는 왕비가 된지 8년만인 1515년, 인종을 낳고 엿새 만에 산후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에 단경왕후를 다시 맞아들이자는 논란이 잠시 있기도 했으나 여전히 반정주도세력이 남아 있는 상태라 이 논란은 이내 잦아들었다. 그리고 2년 뒤 중종은 두 번째 계비(繼妃)를 맞는데, 그녀가 유명한 문정(文定)왕후이다. 문정왕후는 장경왕후의 오빠였던 윤임(尹任, 1487~1545)이 어머니를 잃은 세자가 중종의 총애를 받던 경빈 박씨 같은 후궁의 자식들에게 치이지 않도록 하기위하여 세자를 보살펴줄 왕비로 자신의 가문에서 골라 추천한 인물이었다.

 

윤임 덕에 국모라고 하는 왕비의 자리에 올랐지만 자신보다 나이 많은 후궁들의 등쌀과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넷을 줄줄이 낳은 탓에 초기 문정왕후의 삶은 그다지 녹녹하지 않았다. 신하들의 입김 하나에 좌지우지되는 힘없는 왕인 중종의 왕비로, 문정왕후는 자신의 앞날이 언제 단경왕후와 같은 처지가 될지 모를 위험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했다. 세자의 보호자라는 신분이 그나마 그녀의 안위를 유지시켜 주는 방편이었다.

왕비지만 왕비 같지 않은 세월을 보내던 문정왕후에게 기회가 왔다. 왕비가 된지 20년이 다 되어가던 1534년 경원대군(慶源大君)을 출산하게 된 것이다. 내리 딸을 낳고 당시로서는 노산인 30대 후반 나이에 아들을 낳은 문정왕후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정쟁에 뛰어든다. 지난 긴 세월동안 방패막이 삼아 끼고 돌며 키워 온 세자였지만 아들을 낳게 되자 문정왕후에게 세자는 자신의 아들을 위하여 제거해야 할 정적이 되었다.

세자를 끌어내리고 경원대군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서 문정왕후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동생 윤원형(尹元衡, ?~1565)과 그의 첩 정난정 등의 도움을 받으며 세자를 보호하려는 윤임세력과 맞섰다. 중종이 붕어하기 1년 전 쯤이 되면 두 세력의 대립은 더욱 구체화되어 1543년(중종 38년) 2월 대사간이 “지금 윤임과 윤원형이 각각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이라는 당파를 세웠다는 풍문이 있다”고 아뢰는 상황이 되었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문정왕후는 세자 시절의 인종을 죽이기 위해 세자궁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심약한 세자를 독한 말로 구박해 병들게 하고, 때로는 무속의 힘을 빌려 저주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 실록에 남은 기록을 보면 문정왕후는 세자에게 장차 경원대군과 자신의 친정가문을 죽이지 말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여, 자신을 키워준 문정왕후에게 효심을 품고 있던 인종을 근심스럽게 하기도 하였다.

문정왕후의 세자 측에 대한 이러한 날카로운 대응은 단지 경원대군에 대한 그녀의 욕심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윤임이 김안로등을 내세워 문정왕후를 폐위시키려 획책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김안로의 음모는 결국 이를 빨리 알아챈 문정왕후가 중종을 움직임으로써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사건으로 문정왕후는 실제 권력이 없는 허울 좋은 자리가 얼마나 소용이 없는지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두 집단의 팽팽한 대립과 균형은 인종이 즉위하면서 일단 대윤 쪽으로 무게가 기울었다. 공조참판으로 있던 윤원형은 대윤의 대사헌 송인수(宋麟壽)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계자(階資)1를 박탈당하고, 문정왕후의 오빠인 윤원로 역시 파직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소윤 측은 대윤 측에 의해 커다란 정치적 박해는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고, 문정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면서 정국의 형세는 역전되었다.

명종의 치세가 시작된 지 한 달 반 만에 병조와 공조, 호조 판서를 맡고 있던 소윤의 주요 인물들이 대윤을 탄핵하고 나섰다. 인종의 환후가 위중하자 윤임이 앞날을 걱정하여 명종 대신 다른 인물을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며, 거기에 좌의정 유관(柳灌)과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등도 협력했다는 것이었다. 이언적(李彦迪), 권벌(權橃) 등이 이 탄핵이 밀지에 따라 이뤄졌다고 문제를 제기했지만, 왕후와 소윤의 강경한 태도에 부딪혀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일단 윤임은 절도에 안치되고 유관과 유인숙은 파직되었지만(8월 22일) 나흘 뒤 모두 사사되고 말았다(8월 26일). 인종이 붕어한 지 두 달 만의 일이었다.

 

사화는 계속 확대되었다. 경기도 관찰사 김명윤(金明胤)이 계림군(桂林君)2 이유(李瑠)와 봉성군 (鳳城君)3 이완(李岏)도 윤임의 역모를 알고 있었다고 고변함으로써 윤임과 계림군의 친인척, 지인, 종들이 국문을 받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실을 자백하면 살려주겠다는 소윤의 회유를 받은 윤임의 사위 이덕응(李德應)이 윤임이 봉성군에게 인종을 모시게 했다가 국왕이 승하하면 바로 대위를 물려받게 하려는 계획을 꾸몄다는 진술을 하였다.

이에 계림군, 윤임, 유관, 유인숙의 아들들은 교형에 처해졌고, 피화자의 아내와 딸들은 노비로 전락했으며, 형제, 숙부, 조카 등은 유배되었다. 도망갔던 계림군도 붙들려 처형되었고, 자백했던 이덕응도 약속과 달리 죽음을 당했다. 을사년의 사화는 28명의 위사(衛社)공신을 책봉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9월 15일).

 

하지만 소윤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윤원형이 주도하는 소윤 세력은 명종 2년째인 1547년에 더 큰 옥사를 일으켰다. 경기도 양재역(良才驛)의 벽에 난데없는 익명서(匿名書)가 하나 발견된 것이 그 발단이었다.

거기에는 붉은 글씨로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단하니 나라의 멸망을 서서 기다릴 만하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女主執政于上, 奸臣李芑等弄權於下, 國之將亡, 可立而待. 豈不寒心哉)”라고 씌어 있었다. 이것이 일명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으로, 이를 빌미로 이루어진 대대적인 대윤의 잔존세력 숙청 작업을 정미사화(丁未士禍)이다.

 

≪명종실록≫을 작성한 사관(史官)들은 이 벽서는 ‘그 진위와 파급력을 짐작할 수 없기 때문에 부자(父子)끼리도 열어보지 않고 없애버려야 하는 문서’였다고 평(評)했다. 그런데도 부제학4 정언각(鄭彦慤) 등이 이 벽서를 조정에 알렸다는 사실은 그 배후에 어떤 음모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심을 갖게 만들었다. 실제로 이 사건은 그 문서의 진위나 작성자의 색출 같은 정상적인 방향으로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그 대신 문정왕후와 주요 대신들은 이전의 역적을 엄벌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판단을 했다. 그리고 그런 판단은 즉각적으로 옥사(獄事)의 확대로 귀결되었다.

이기, 윤원형 등의 주도에 따라 윤임의 인척인 송인수(宋麟壽), 이약빙(李若氷)은 사사되고, 그 외에 을사사화에서 반대 의견을 표명했던 주요 인물들이 모두 유배되었다. 이렇게 명종의 외척(外戚)이 인종의 외척을 도태시키는 작업은 끝이 났다.

문정왕후는 명종 8년인 1553년까지 수렴청정을 했고 소윤의 영수인 윤원형은 영의정까지 오르면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을사사화와 정미사화를 통하여 화를 입은 신하는 1백 여 명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문정왕후와 그 동생인 윤원형은 두고두고 사림(士林)의 철천지원수로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명종이 즉위한 때부터 1565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20년 동안 윤원형은 그야말로 권력과 재력을 독점했다.

우선 권력에서 그는 이조판서(1548년), 우의정(1551년)을 거쳐 영의정(1563년)에 올랐다. 그가 행사한 권력은 ≪명종실록≫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윤원형의 권력은 국왕을 능가할 정도였다.

명종은 친정(親政)을 하면서도 문정왕후의 제재를 받아 자유롭지 못했다. 윤원형은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문정왕후와 내통해 명종을 위협하고 제재하였다. 윤원형은 궁인(宮人)을 후하게 대접해 그들의 환심을 산 덕분에 명종의 모든 행동을 알 수 있었다. 명종은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걱정하고 분노했다.

 

하루는 주상이 내관에게 “외척이 큰 죄가 있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라고 말했는데, 윤원형을

가리킨 것이었다. 그 말은 곧 누설되어 문정왕후에게 들어갔다. 왕후가 “나와 윤원형이 아니었으면

주상께서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라고 크게 꾸짖으니, 주상은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모든

군국의 정사가 대부분 윤원형에게서 나오니 주상은 마음속으로 그를 매우 미워했다.5

 

재력 또한 엄청났다. 역시 실록은 “뇌물이 문에 가득해 재산이 국고보다 더 많았다”고 적었다. 거기에는 그의 애첩으로 나중에 정경부인에 오르는 정난정(鄭蘭貞, ?~1565)의 탐욕도 크게 작용했다고 지적되고 있다. 정난정의 어머니는 관비(官婢) 출신으로 정난정은 미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기생이 되어 윤원형에게 접근하여 첩이 되었다. 정난정은 남편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商圈)을 장악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윤원형의 막강한 권력은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명종 20년에 문정왕후가 죽자 신하들은 즉시 윤원형을 강력히 탄핵했고, 평소 외삼촌인 윤원형에게 커다란 불만을 갖고 있던 명종은 즉각 수락했다. 윤원형과 정난정은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종말도 이내 다가왔다.

정난정이 윤원형의 적처(嫡妻) 김씨를 독살했다는 고발을 받아 사사될 위기에 처하자 부부는 함께 음독자살을 했다. 국왕의 외숙이자 대비의 동생이며 영의정이라는 전례 없는 지위를 바탕으로 거대한 권력과 재력을 누렸던 윤원형의 끝은 이처럼 작은 명예조차 남지 않았다.

 

우리에게도 너무 익숙한 이름인 태릉(泰陵)은 문정왕후의 능이다. 왕비의 단릉(單陵)이라고는 믿기 힘들만큼 웅장한 능이다. 문정왕후는 원래 중종 옆에 묻히고 싶어 하였다. 그래서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의 능역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서삼릉(西三陵) 오른쪽에 있던 중종의 정릉(靖陵)을 풍수지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내세워 봉은사(奉恩寺) 옆으로 옮기고 자신도 후일 이곳에 묻히려 하였다.

그러나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 물이 들어오자, 지대를 높이는 데 큰 비용만 들이다 사망하여 결국 그 곳에 묻히지 못하고 따로 태릉에 묻히게 되었다. 그 바람에 중종의 정릉은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 태조의 건원릉과 함께 조선 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묻힌 몇 안 되는 외로운 능이 되었다.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

 

[중종의 능인 정릉]

 

이렇게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세대는 갔지만 이 때 있었던 작은 일 하나가 후에 조선이 붕당시대를 맞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영의정으로 윤원형의 권세가 한창이던 시절 심의겸(沈義謙, 1535년 ~ 1587)은 명종의 명을 받아 윤원형에게 입궐하라는 소식을 전하려고 윤원형의 집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때 그곳에서 김효원(金孝元, 1542 ~ 1590)을 보게 되었다.

김효원은 윤원형의 첩의 사위인 이조민(李肇敏)과 매우 친한 사이였다. 이조민은 당시 처가인 윤원형의 집에 살고 있었는데 김효원도 그때 윤원형의 서실(書室)에서 기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연히 마주쳐 알게 된 이 작은 일이 두고두고 조선을 흔들 붕당의 불씨가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참고 및 인용 : 인물한국사(김정미, 장선환), 테마리스트(을사사화, 김범), 인물한국사(김범),

인명사전(2002. 인명사전편찬위원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벼슬아치의 품계(品階)와 자급(資級). [본문으로]
  2. 계림군은 성종의 셋째아들 계성군(桂城君)의 양자로 장경왕후의 아버지 윤여필의 외손이자 윤임의 조카 [본문으로]
  3. 중종의 8남으로 중종의 후궁 희빈 홍씨의 아들 [본문으로]
  4. 홍문관과 그 전신이었던 집현전의 정3품 당상관직 [본문으로]
  5. 명종 20년 11월 18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