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4 - 왕권의 변화

從心所欲 2019. 9. 26. 20:00

무오사화 이후 조정의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변화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삼사의 위축이었다. 조선의

관료들이 영예로 여겼던 삼사의 자리가 연산군이 날로 심하게 대간을 핍박하자 모두가 임명되기를 꺼려하는

자리로 바뀐 것이다. 결국 이 자리에 유순하고 나약한 성품을 가진 인물들이 임명됨으로써 연산군은 정치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구애받지 않고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여기서 연산군은 강화된 왕권을 정치나 제도의 개혁이 아니라 자신의 사치와

향락에 발휘하였다. 연산군은 사냥, 연회, 음행 등에 더욱 몰두하면서 자신의 방종을 외부에서 알지 못하도록

궁궐 주변의 민가를 철거하고 왕에 관련된 발언을 철저히 통제했다. 이런 현상은 재위 8 ~ 9년부터 크게 증가하였다.

이에 보다 못한 삼사가 다시 간쟁을 시작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대신들의 태도변화였다. 대신들도 연산군의

일탈을 자주 강력히 간쟁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삼사와 비슷한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대신들이 본격적으로

간언에 참여한 것은 연산군 5년인 1499년부터였다. 근본적으로 긴장과 비판의 관계에 있던 대신과 삼사가

같은 의견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연산군의 폭정이 심각했음을 반증하는 일이었다.

 

대신들과 삼사가 같은 입장을 보이자 연산군은 점차 고립감을 느꼈고 이런 상황에 분노했다. 연산군은 “대간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정승이 말하고, 정승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육조가 말한다. …… 요즘 위에서 하는

일이라면 기어이 이기려고 해서 쟁론이 끝이 없다. …… 대간이 사체(事體)1를 헤아리지 않고 말하는데

대신도 따라서 말하니 결코 들어줄 수 없다”2고 하였다.

연산군은 무오사화에서 자신의 처벌이 미진했기 때문에 능상의 폐단이 삼사뿐 아니라 대신들에게까지 만연된

것이라 판단하고, 따라서 이제는 더 대대적인 처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사화를

통하여 그 생각을 실현했다.

 

갑자사화의 발단은 국왕의 하사주를 이세좌(李世佐)가 엎지른 실수3와 손녀를 입궐시키라는 왕명을

홍귀달(洪貴達)이 따르지 않은 사건4이었다. 연산군은 이런 대신의 행동을 능상의 표본으로 지목했다.

연산군은 이런 무엄한 능상을 비판하지 않은데 대하여 삼사를 질책했고, 이후 능상에서 촉발된 이 사건은

곧 폐모 사건의 보복으로 번져 갑자사화로 비화되었다.

 

갑자사화로 화를 입은 인물은 무려 239명에 달했다. 그 중 대신이 20명이었고 삼사 관료가 92명이나 되었다.

사형이나 부관참시를 당한 인원이 무려 122명으로 피화인(被禍人)의 반을 넘었다. 사망한 사람의 처벌 방식도

부관참시 외에 뼈를 부숴 바람에 날리는 형벌인 쇄골표풍(碎骨飄風), 집을 파괴하고 그 터에 물을 대 연못으로

만드는 파가저택(破家瀦宅) 등 극단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 그렇지만 과정과 결과에서 보듯 특별히 사림만

골라 화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연산군의 폭정과 실정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이어졌다. 사림과 훈구세력이 모두 연산군의 폐위를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은 훈구세력이었다. 연산군 12년인 1506년, 이조참판을 지낸 성희안

(成希顔)과 중추부지사 박원종(朴元宗) 등이 거사하여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중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함과 동시에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해 파괴된 유교적 정치 질서의 회복과 교학, 즉 대의명분과 오륜을 존중하는 성리학의 장려에

힘썼다. 이러한 새 기운 속에서 점차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 조광조 등 신진사류였다. 조광조

(趙光祖, 1482~1519)는 중종 10년인 1515년, 34세의 다소 늦은 나이로 중앙 조정에 등장했지만, 조선 역사에서

유례없이 빠른 승진을 거듭하면서 누적된 여러 현안을 근본적인 수준에서 개혁하려고 시도했다. 조광조는

성리학으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고대 중국 하, 은, 주시대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이른바

지치주의(至治主義) 정치 실현을 꿈꿨다.

 

하지만 반정 공신들에 의한 전횡이 이어지면서 조광조가 꿈꾸던 개혁은 지지부진할 수 밖에 없었다. 중종

이전부터 대부분 10년 넘게 누적된 정치 체제의 모순에 관한 문제의 해결은 애초부터 쉽지 않았고, 거기다

개혁을 주도하는 사림의 핵심 인물들은 젊은데다, 관직의 경험도 많지 않아 국정을 운영하는 대신들의 협조를

얻어내는데 미숙했다.

 

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도 만 4년이 가까워지도록 개혁에 별다른 성과도 내지 못한 조광조는 내심 초조했을

수도 있다. 고심 끝에 조광조가 내린 결론은 사람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1519년 4월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였다. 사장(詞章)에만 치중하는 과거제도의 폐단을 극복한다는

취지에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薦擧)한 뒤 대책(對策)만 시험해 선발하는 현량과를 통하여

신진사류를 등용함으로써 유교정치 구현의 터전을 마련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이는 관료 중에 조광조의

인원수가 늘어날 수 있다는 위험성이 있었지만 좋은 인재를 골라 쓰겠다는데 반대할 대의명분이 없어

훈구세력은 이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소수의 하급 관리 교체만으로는 개혁의 길이 멀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광조가 다음으로 빼어든 칼이 소위 반정공신위훈삭제(反正功臣僞勳削除)였다. 반정공신 가운데 그 자격이

없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하여,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인의 공신호(功臣號)를 박탈하고 하사한 토지와

노비들도 환수한 것이다. 훈구세력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훈구세력은 그동안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세력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그래도 정국(政局)은 왕을 옹립한

자신들의 손안에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청렴결백과 원리원칙에 입각한 도학적인 태도로 자신들을 비판하고

거의 모든 반정중신들이 탄핵을 받는 상황에서도 이를 정치 풋내기들의 치기어린 행태로 치부하는 어른 행세를

하면서 넘겨왔다. 그런데 정국공신의 삭훈(削勳)은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였다. 왕을 세운 공로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자신들의 존재를 송두리째 부인하는 일이었다. 현량과가 사림이 자파 세력을 보강하려는

조처였다면, 정국공신 삭훈은 자신들을 직접 겨냥한 칼날이었기 때문이다.

 

중종이 이 사안을 안이하게 처리한 것이 아니었다. 그도 자신을 왕으로 옹립한 훈구세력의 공과 위세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대사헌 조광조와 대사간 이성동(李成童)을 중심으로 한 삼사는 10월 25일에 이 문제를 제기했다.

중종과 대신은 삭훈을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삼사는 3고(敲)5까지 반복해서 극력 주장하고, 조광조는

귀양을 가거나 죽더라도 달게 받아들이겠으니 조속히 윤허해 달라고 주청했다. 결국 조광조 등의 사림세력은

보름 뒤인 11월 11일 국왕의 윤허를 얻어냄으로써 정국공신 중 76명의 삭훈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사림의 승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위훈삭제사건은 기묘사림의 결정적 패착이 되었다.

위훈삭제가 관철된 나흘 뒤 전격적으로 기묘사화가 시작된 것이다.

 

기묘사화는 1519년(중종 14년) 11월 15일 밤에 전격적으로 일어났다. 중종은 밀지를 내려 홍경주, 남곤 등

주요 대신을 비밀스럽게 불렀고,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림의 주요 인물을 전격적으로 하옥시켰다. 그들의

죄목은 당파를 만들어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은 천거하고 그렇지 않은 부류는 배척했으며, 서로 연합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국정을 어지럽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즉각 유배되었고(16일) 정국공신의 지위는 원래대로

회복되었다(21일).

정광필을 중심으로 한 일부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피화인들의 형량은 한 달 만에 확정되었다.

조광조는 사사(賜死)되고 그를 따르던 세력들은 외딴 섬이나 변방에 안치(安置)되었다(12월 16일). 조광조에

동정적이던 정광필과 김전은 좌천되고, 남곤과 이유청이 좌의정과 우의정에 발탁됨으로써 조정도 새롭게

구성되었다(17일). 이렇게 기묘 사화는 일단락되었다

 

후세 역사가들은 조광조의 개혁이 실패하고 기묘사화가 일어난 원인에 대하여 개혁세력의 급진성과 과격성,

그리고 개혁에 대한 중종의 피로감을 거론한다.

그러나 개혁 실패의 원인을 급진과 과격에서 찾는 것은 일을 해보지 않은 학자들이 책상에 앉아 떠올리는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개선과 개혁은 다르다. 개선은 기존체제를 유지하면서 점차적으로 더 좋은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고 개혁은 기존체제를 일시에 새롭게 뜯어고치는 것이다. 당연히 개혁 대상의 반발이 따른다.

시간을 갖고 그런 반발세력을 설득해서 상호 합의점을 찾아 개혁을 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새로운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개혁을 약속한다. 그럼에도 결국 원하는 만큼의 개혁을 이루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언제나 구세력의 반발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개혁의 시기가 지연되고 그러다 보면 타이밍을 놓쳐

개혁 동력을 상실하고 만다. 흔히 정권이 바뀔 때 새로운 정부가 개혁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정권 초반

6개월뿐이라고들 한다. 이 골든 아우어를 놓치면 그 이후의 개혁은 거의 무망하다는 것이 그동안의 정권교체를

겪어본 사람들의 견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급진적이고 과격해서

개혁이 실패했다는 비판은 언제나 개혁을 지연시키고 불발시키려는 반발세력의 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불과 4달 전인 1519년 7월 21일자 ≪중종실록≫ 기사에는 “조광조가 말하자 왕은

얼굴빛을 가다듬으며 들었고, 서로 진정으로 간절히 논설해 날이 저무는 줄도 모르다가 환관이 촛불을 들고

가자 그제야 그만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랬던 중종이 불과 몇 달 만에 개혁에 대한 피로감 때문에

조광조를 내쳤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약하다. 또 혹이라도 그런 피로감 때문이라면 조광조를

사직시키면 될 일이지 죽이면서까지 조광조를 완전히 내칠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조광조는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몇 달 전, 병을 이유로 왕에게 사직을 청하였다. 이에 중종은 어의를 보내어 조광조의 병을 돌보게

하고 사직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일도 있었다.

 

중종의 조광조에 대한 급작스러운 변심에 대하여 이런 추론을 해본다.

흔히 항간에서 거론되는 ‘주초위왕(走肖爲王)’사건은 ≪중종실록≫에는 등장하지 않고 ≪인종실록≫에

등장하는데 이는 중종의 급작스런 변심을 설명하기 위하여 후세에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삭훈이 거론되면서 공신세력은 중종에게 조광조 세력의 주장이 부당함을 주청(奏請)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중종에게 오늘의 왕이 있게 한 자신들의 공로를 상기시켰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중종반정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음을 연상시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대신들이 주도한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으로서는 등골이 오싹한 일이다. 이 상황에서 중종은 결단을 내려야했다. 조광조와 반정공신

중 어느 편에 서느냐 하는 선택의 결정이다. 중종은 아마도 처음에는 이런 결정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반정공신의 삭훈만은 막아서 공신들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삼사를 앞세운 조광조 세력의

포기하지 않는 공세에 결국 허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하지만 이때 이미 중종은 마음속에 조광조

세력을 버리기로 결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조광조 세력이 소기의 목적을 이룬 성취감에 빠져 있을 때

불시에 이들을 제거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중종은 공신들에게 자신의 결기를 확인시켜 주기 위하여 굳이

조광조에게 사약까지 내리게 되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왕조(王朝)인 조선의 주권은 왕에게 있다. 정치의 원리는 언제나 똑같다.

주권을 가진 세력의 신임을 얻지 못하면 도태되게 마련이다.

흔히 왕조(王朝)라고 하면 강력한 절대 왕권을 떠올린다. 하지만 조선왕조의 왕권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강력하지 못했다. 초기 사대부가 중심이 되는 정치체제를 구상했던 정도전과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이방원과의 싸움에서 정도전이 패했고, 후에 연산군 같은 폭군도 등장했지만 대부분의 조선 왕들은 일방적

왕권을 행사하는 대신 늘 대신들과 의견을 조율했다. 특히 중종반정의 경우처럼 신하들에 의하여 왕이

옹립되는 경우가 생기고 부터는 대신들을 무시한 무소불능의 왕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조선의

당쟁이 시작되고 또 지속되었던 데에는 이런 정치체제가 한 몫을 한 것이다.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靜菴趙先生謫廬遺墟追慕碑)]

 

적려(謫廬)란 ‘귀양살이하던 집’이란 뜻이고 유허(遺墟)란 ‘전해오는 터’란 뜻이니, 적려유허비(謫廬遺墟碑)는

조광조가 귀양살이 하던 전라도 화순 능주의 집터에 세운 비석이다. 1667년(현종 8년)에 능주 목사(牧使)

민여로(閔汝老)가 세운 비다. 비석에는 이 자리가 조광조의 유배생활을 하다 사약을 받고 죽은 곳임을 밝히고

또 조광조의 억울한 죽음을 비통해 하는 글이 새겨 있다.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을 썼다. 당대 노론의

두 거두가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것이다. 조광조는 선조(宣祖) 때 신원(伸寃)되었고 이후 문묘에 종사되었고,

전국의 사당과 서원에서 제향(祭享)하였다.

 

[소쇄원, 소쇄원홈페이지사진]

 

우리나라의 전통 정원으로 널리 알려진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의 소쇄원(瀟灑園)은 양산보(梁山甫,

1503 ~ 1557)라는 인물이 세운 것이다. 그는 담양 창평에서 태어나 15세 때 상경하여 조광조의 문하생이 되고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1519년 중종이 친히 주관한 현량과에 17세의 나이로 합격하였으나, 대간(臺諫)들이

나이가 어리다고 반대하여 벼슬에 나가지는 못했다. 이를 애석히 여긴 중종이 물품을 내려 위로하였다.

그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스승 조광조가 화를 입어 귀향을 가게 되자 유배지까지 스승을 모셨다. 그리고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사망하자 충격을 받아 벼슬길을 등지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소쇄원을 지었다. 그는

이곳에서 세속적인 것과 거리를 멀리하고 성리학에 몰두하였다고 전한다. 소쇄원의 형태는 1528년까지

정자 한 채만 있었고 그의 말년에 이르러 '원(園)'을 갖추었으나 별서원림(別墅園林)을 직접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현재 남아 있는 소쇄원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그의 손자인 양천운(梁千運)이 1614년에 재건한 것이다.

 

[겨울의 소쇄원]

 

 

 

 

참고 및 인용 : 테마리스트(기묘사화 , 김범),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일의 이치와 정황. [본문으로]
  2. 연산군일기 1503년 3월 16일 [본문으로]
  3. 1503년 인정전에서 열린 양로연(養老宴)에 참석하여, 어사주를 돌려 마시다가 어의(御衣)에 술을 엎지르는 실수로 연산군의 분노를 사서 무안에 부처되었다가 다시 온성·평해에 이배되었다. [본문으로]
  4. 1504년 손녀의 미모가 뛰어나 이를 탐한 연산군이 입궁(入宮)시키라고 강요하였으나 이를 거역하여 장형(杖刑)을 받고 경원으로 유배 가는 도중에 교살(絞殺)되었다. 1498년에도 무오사화 직전에 열 가지 폐단을 지적한 글을 올려 왕에게 간하다가 사화가 일어나자 좌천되기도 하였다. 성격이 강직하여 부정한 권력에 굴하지 않아, 모두들 몸을 조심하라 했으나, 태연히 “내가 국은을 두터이 입고 이제 늙었으니 죽어도 원통할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고 전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본문으로]
  5. 23 ~01시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