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1 - 왜구의 굴레

從心所欲 2019. 9. 8. 18:35

 

[안중식 <백악춘효도(白岳春曉圖)>여름본, 1915년, 견본채색, 129.3 × 49.9cm, 국립중앙박물관]

 

 

[안중식 <백악춘효도(白岳春曉圖)>가을본, 1915년, 견본채색, 125.9 × 51.5cm, 국립중앙박물관]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 ~ 1919)은 장승업의 제자이면서 조선의 마지막 도화서원이기도 했다.

‘백악산의 봄날 새벽‘이라는 이 그림은 화제가 경복궁의 뒷산인 백악산일 뿐 진짜 주제는 경복궁이다.

또한 제목에는 봄이라 했지만 그림은 각각 여름과 가을에 그렸다. 조선총독부가 시정 5주년을 기념하는

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열기 위하여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을 헐던 시기인 1915년에, 스러져가는

조선왕조의 모습을 보며 여러 가지 복잡한 심정으로 경복궁을 화폭에 담았을 것이다.

백악춘효(白岳春曉). 나라가 다시 일어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에둘러 표현한 말일 것이다.

 

“당파싸움으로 망한 나라. 조선(朝鮮).”

어렸을 때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갖게 된 이 인식 때문에 그 후로 조선의 역사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특히나

겉핥기로 알게 된 구한말의 역사는 마치 내 자신의 치부처럼 다시 듣기조차 싫었다. 그렇게 수십 년을 조선을

‘엽전’과 동의어로 여기며 살았다. 그런데 이게 바로 일제가 우리에게 기대했던 반응이라는 사실을 세월이

한참 지나고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조선은 당파싸움 때문에 망하지 않았다. ‘조선은 당파싸움 때문에 망했다’는 말은 일제가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주려고 만들어낸 가짜뉴스다. 모든 나라는 흥(興). 성(盛), 쇠(衰)를 거쳐 망(亡)하기 마련이다. 세계 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나라는 그런 과정을 거쳤다. 조선 역시 그런 과정을 거친 것뿐이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던 그 유명한 진(秦)나라의 수명은 단지 15년에 불과했고 한(漢)나라는 215년 만에 망했다.

16년 뒤에 다시 한(漢)나라를 건립했지만 195년 만에 또 다시 망하고 말았다. 전한, 후한을 다 합치더라도

410년이다. 세 차례나 고구려(高句麗) 정벌에 나섰던 수(隋)나라는 38년, 당(唐)나라 289년, 송(宋)나라 319년,

중국 본토는 물론 거의 동(東)아시아 전역을 지배했던 원(元)나라는 불과 97년, 명(明)나라는 276년,

청(淸)나라도 296년간 존재했을 뿐이다.

그런데 조선은 무려 518년 동안 존속한 나라였다. 물론 조선에 당쟁이 있었다, 그것도 무려 250년이나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조선은 건재했었다. 오히려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조선이 망한 것은 당쟁이 없었던 100년 동안의

세도정치 끝이었다. 조선이 당파싸움 때문에 망했다는 말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고 개 풀 뜯어먹는 소리다.

조무래기 같은 왜놈들한테 나라가 망한 것만도 억울한데 그런 잡것들에게 조롱당하는 것도 모자라 우리가 그런

조롱의 말을 그대로 믿고 있다는 자체가 돌아보면 통탄할 일이다.

 

당파싸움이 문제라면 지금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중국이나 북한, 쿠바를 제외한 세계 모든 나라가

문제여야 한다. 다당제를 도입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들은 이제 곧 모두 망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그럴까봐

일본은 자민당(自民黨)이 60년 이상 일당 독주를 하는 족벌정치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다못해 독재국가나 공산주의국가에서도 내부적으로는 노선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다만 견해가 갈리는

세력이 제거되고 숙청됨으로써 한 목소리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당쟁이 문제가 아니라 당쟁의 내용이 문제였다고 말꼬리를 돌릴 지도 모른다. 가소로운 얘기다. 정파 간의

다툼이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한 주제에 대하여 품위 있고 합리적이며 효율적으로 진행되어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결과를 유출해내야 한다는 말은 일견 그럴 듯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천진난만을 넘어 안일하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역사에 정치 세력 간의 싸움이 단 한번이라도 그렇게 건전했던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모든 정파(政派) 간의 싸움은 당리당략을 위한 이전투구다. 싸움에서 지는 순간 그 세력은 폭망이다.

그래서 지더라도 절대 패배를 인정할 수도, 인정하지도 않는 싸움이다. 겉포장에 국민이라는 딱지가

붙어있어도 속셈은 상대방을 누르고 이기는 것이 최종목적인 싸움이다. 정파 간의 싸움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들의 입지가 위협받는 결과를 받아들인 사례가 단 한번이라도 있었는가를 돌아보면 금세 답이

나온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지금 국민 세금으로 월급 받고 온갖 특권을 누리는 국회의원들 하는 짓거리들을

보라. 지금 저들이 나라의 미래는 안중에도 없이 눈앞의 자기 이익을 쫓아 국민 이간질이나 하고 싸움 붙이는

짓거리나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몇 백 년 전의 우리 조상이 서로 싸워서 나라가 망했다고 한다면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억울해하시겠는가?

 

국뽕이 되어 우리 조상과 역사를 쉴드치려는 것이 아니다. 당파 싸움이 나라에 백해무익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개인적이고도 감정적 원인에 의해 빚어졌고 소모적 정쟁이 지속되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그런 주장은 중국집에서는 언제나 ’짜장면으로

통일!‘해야 된다는 사고방식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광복 70년이 지났는데도 왜국 사학자가 만들어놓은 논리에 벗어나는 주장을 하면 소설가나 정신병자로

몰리고, 그런 주장에 관심을 가지면 국뽕 취급을 받는다. 우리나라 역사를 미화하거나 왜곡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왜 자기 나라 역사학자들이 자기 나라 역사를 비하하지 못해서 안달을 하는, 세계 어디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희한한 일들이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지 궁금해서 그런다. 왜 우리 사학계는 그 오랜

세월을 거치고도 일제 때의 학자 몇 명이 만들어놓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그 많은 사학자들은 노는가?

은사가 불러준 것 받아 적은 노트만 뒤적이는가? 실력이 없는 무능력자들인가? 아니면 다른 소리 냈다가 왕따

당할까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 것인가? 모두 자신은 아닌 척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우리 사학계는 여전히

일제 식민사관을 근간으로 하는 역사학자의 후예들이 깊게 뿌리를 박고 활개를 치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나라에서 역사를 바로 세우라고 국고를 지원해 만들고 운영하는 기관이 그 돈으로 식민지사관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일조하여 중국의 동북공정에 그 발판을 깔아주면서 옆에서 부채질까지 해주고 있는 판이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일제 사학자들이 주장한 학설에서 몇 가지 부분적인 잘못을 찾아내어 그것을 고친다고 해서 식민사관이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식민사관은 근본적으로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열등감을 주려 만들어낸 역사관이다.

우리 민족의 역량을 평가 절하하고 부정하는 출발점부터 바꾸지 않는 한 식민사관은 사라지지 않는다.

 

역사지리에서부터 국가의 기원과 사회제도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고대사 분야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역사학자는 이병도로, 지금도 고대사에 관해서는 그의 학설이 거의 정설처럼 되어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했는데 그 당시 와세다에는 요시다도고(吉田東伍)라는 교수가 있었다.

요시다도고는 일본의 고대사연구의 선도적인 역사학자로, 일제가 소위 한일합방 이전부터 식민사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병도는 해방 이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자신의

생애에 '가장 영향력을 많이 준 사람'으로 요시다도고를 꼽았다. 식민사학자 요시다도고가 자신의 역사관

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한 것이다. 이병도는 조선총독부의 역대 수뇌부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우리나라 고대역사를 저들의 입맛에 맞는 자료를 토대로 기술한 『조선사(朝鮮史』의 편찬,

발간 사업에 끝까지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식민사관 중에서 우리 역사를 가장 많이 왜곡한 부분이 바로

우리의 고대사이다. 

이병도는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라고 주장하였고 지금도 이 주장이 정설로 되어있다.

재야사학자들이 한사군의 위치가 요동반도라는 주장을 계속 제기하고 있지만 주류 사학자들은 이를 국뽕의

소설 정도로 여기며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는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6월 28일 기록에는 이런 글이 있다. 그 날은 그가 옛 고구려 산성이 있었던

중국 요녕성 봉성진의 봉황성(鳳凰城)에 도착한 날이었다.

 

≪당서(唐書)≫1를 보면 안시성은 평양에서 500리요, 봉황성은 ‘왕검성(王儉城)이라고도 한다고 썼고,

<지지(地志)〉2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고도 한다 하였으니, 이러고 보면 무엇을 표준삼아 이름을 붙였는지

모를 일이다. 또 ≪지지≫에는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蓋平縣)3의 동북 70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고,

개평현으로부터 동으로 수암하(秀巖河)까지 300리요, 수암하로부터 동으로 200리를 가면 봉황성이라고

했으니 이것으로써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서 말한 평양과 안시성의 거리가 약 500리쯤 된다는 것이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우리 나라 인사들은 기껏 안다는 것이 지금의 평양뿐으로, 기자(箕子)가 평양에 도음을

했더라 하면 이 말은 꼭 믿고,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었더라 하면 이 말은 넙적 믿고, 평양에 기자묘가 있다면

이 역시 믿으나, 만약 봉황성이 평양이었더라 하면 깜짝 놀랄 것이요, 더구나 요동에도 평양이 있었느니라

한다면 아주 궤변으로 알고 야단들일 것이다.

그들은 요동이 본래 조선의 옛 땅인 것을 모르고 숙신(肅愼), 예맥(濊貊)과 동이(東夷)의 잡족들이 모두들

위만조선에 복속하였던 것을 모를 뿐만 아니라 오랄(烏剌), 영고탑(寧古塔), 후춘(後春) 등이 본디 고구려의

옛 강토임을 모르고 있다.

애달프구나! 후세에 와서 경계를 자세히 모르게 되고 본즉, 함부로 한사군의 땅을 압록강 안으로 죄다 끌어들여

억지로 사실을 구구하게 붙여 놓고는 그 속에서 패수(浿水)까지 찾아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청천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대동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여, 이로써 조선의 옛 강토는

싸움도 없이 쭈그러들고 만 것이다.

 

글을 읽다보면 소름이 돋는다. 박지원이 당시 선비들의 생각을 꼬집은 내용이지만 동시에 자신보다 160년 뒤에

태어난 이병도가 할 짓과 그 뒤로 이 땅에 일어날 일들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박지원의 글은 계속 이어진다.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군데 붙박이로 정해 두고 패수는 앞으로 물려내어 언제나 사적을 따라다니게
된 까닭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 땅은 비단 요동뿐만 아니라 여진도 마땅히 들어간다고 주장하였다. 왜 그러냐 하면

≪한서(漢書)≫ 지리지(地理誌)에는 현도(玄菟), 낙랑(樂浪)은 있으나 진번(眞番), 임둔(臨屯)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한나라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4에 4군(郡)을 합쳐 2부(府)로 만들고 원봉(元鳳) 원년5에는

또다시 2부를 2군으로 고쳤는데, 현도 3개 현에 고구려가 있고 낙랑 25개 현에 조선이 있고, 요동 18현에

안시성이 있다.

그런데 진번은 장안으로부터 7천리 떨어져있고, 임둔은 장안에서 6천 1백리 떨어져 있어 조선의 김륜(金崙)이

말한 바와 같이 이 땅들은 우리 나라 안에서는 찾아 낼 수 없을 것이고 마땅히 지금의 영고탑6 등지가 됨이

옳을 것이다. 이로써 미루어 보아 진번과 임둔은 한나라 말년에 부여, 읍루, 옥저에 들어갔고 부여는 다섯 부여가

되고 옥저는 네 개 옥저가 되어 혹은 변하여 물길(勿吉)이 되고 말갈로, 발해로, 여진으로 차차 변하게 되었다.

 

이후로도 패수, 평양에 대한 박지원의 글은 계속되는데 여기서 다 소개하기에는 너무 길다.

다만 박지원의 주장은 평양은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의 평양뿐만 아니라 여러 곳이라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평양(平壤)은 특정 지명이 아니라 일종의 보통명사로 고조선과 고구려 계통의 북방 선조들은 평지에 세운

나라의 수도를 모두 '평양'으로 불렀다. 따라서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고구려 등의 수도가 모두

'평양'이지만 그 위치는 각각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박지원의 논리가 이병도의 논리를 일축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나라의 역사학자라면 이러한

논리의 타당성과 가능성에 대하여 서로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고 토의를 하고 미진하면 서로 함께 노력하여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앞에 언급했듯이 이런 주장은 주류

사학계에서는 씨알도 안 먹히는 궤변으로 취급되고 있다.

 

중국은 2012년 미국 상원의 요청에 ‘중국과 북한 사이의 국경 변천에 관하여’라는 자료를 제출한 일이 있다.

한사군(漢四郡)을 근거로, 한 때는 북한이 중국의 영역이었다는 자료다. 이 자료를 받은 미국은 중국 측의 자료를

한국 정부에 전달하면서 답변을 요청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중국의 주장을 반박해 달라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당시 이명박 정부는 외교부를 통해 역사 관련 국책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에 대한민국의 공식 답변을

맡겼다. 그리고 2012년 12월 동북아역사재단 정재정 이사장과 외교부 고위관리 및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국고

47억원을 들여 만들던 ‘동북아역사지도’ 제작 책임자 격인 서울교대 임기환 교수가 워싱턴에 가서 한국의

공식의사를 전달했다. 그들이 미 상원에 제출한 자료 가운데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부분은 이렇다.

 

“한사군의 관할 지역은 현의 소재지로 보건대, 그 남쪽 한계는 황해도 재령강 연안 지역(멸악산맥 이북)과

강원도 북부에 그치고 있어, 그 이남 지역은 한사군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다”7

 

황해도 재령강 연안 이북과 강원도 북부까지는 모두 중국의 역사 강역(彊域)이라는 것이다.

그냥 말문이 막힌다. 중국보고 대놓고 동북공정을 하라고 판을 깔아준 것이다. 훗날 통일이 되면 우리나라와

중국 간의 국경 분쟁이 언젠가는 예정된 수순인데 어쩌면 이 일이 두고두고 우리의 발목을 잡을지 모르겠다.

마치 1965년의 한일협정처럼.

더 충격적인 것은 이 동북아역사지도에 그 예민한 우리의 영토 ‘독도’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지도제작 책임자인

임기환이라는 작자는 독도가 빠진 이유에 대하여 국회에서 ‘실수’라고 답했다. 8년간 60여명의 학자들이

참여하여 그린 지도에 독도가 빠진 것이 실수였다는 것이다.

 

친일청산? 식민사관 탈피? 아직도 멀었다.

 

각설하고.

유쾌하지도 않고 흥미진진하지도 않은 일이지만 우리 선조들이 왜 싸우고 왜 편을 가르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남의 말만 듣고 우리 조상을 비하하는 것보다는 훨씬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까보자. 우리 조상들이 왜,

무엇을 어떻게 싸웠는지.

 

 

 

  1. 건국에서 멸망까지의 당나라 역사를 기록한 정사(正史) [본문으로]
  2. 삼국사기중 지(志) 9권의 3권부터 6권까지 수록된 지리 4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3. 만주 봉천지역 [본문으로]
  4. 기원전 82년 [본문으로]
  5. 기원전 80년 [본문으로]
  6. 발해 시대에 상경 용천부가 설치되어 있었던 지역으로, 영고탑은 만주 동부의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성(寧安縣城)의 청(淸)나라 때 지명 [본문으로]
  7. 동북아역사재단, ‘CRS보고서에 대한 동북아역사재단의 검토의견-한·중 경계의 역사적 변화에 대한 한국의 시각’ (2012. 8. 31)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