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지에 개혁의 대상이 된 훈구파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흔들려는 사림파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훈구파는
사림파를 야생(野生) 귀족이라 칭하며, 사림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게 한다고 비난하면서 연산군
이후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사림(士林)이 화(禍)를 입었다는 사화(士禍)이다.
흔히 조선의 4대 사화로 불리는 사건들로 그 첫 번째가 무오사화(戊午史禍)다.
연산군 4년인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중에, 실록청(實錄廳)의 당상관이었던 훈구파의 이극돈은
사초(史草)에 있는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발견하였다. 김일손이 자신의 스승을 높이려는
마음에서 《성종실록》의 사초에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포함시켰던 것이다.
이극돈은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성종 때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당시의 사초에
자신의 비행(非行)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고는 평소 김일손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던 터였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의 내용은 중국 초(楚)나라의 항우(項羽)가 희왕(懷王) 의제(義帝)를 죽여 폐위시킨 사건에
대하여 의제의 죽음을 조위(弔慰)하여 쓴 글이다. 그런데 이극돈은 이 글을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을
빗대어 지은 글이라 판단하였다. 그리고는 이 사실을 유자광(柳子光)에게 알렸다. 유자광 역시 김종직에게 사감이
있던 인물이었다. 유자광은 김종직의 글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端宗)을 의제에 비유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조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예종, 성종, 연산군 등 왕권의 정통성까지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라고 해석하였다. 또한 세조의 왕위 찬탈에 참가한 훈구 대신들 역시 비난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보았다.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노사신(盧思愼)은 유자광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는 왕에게 아뢰기로 작정했다.
아래는 연산군 4년 7월 1일자 《연산군일기》의 기록이다.
“파평부원군 윤필상(尹弼商), 선성부원군 노사신, 우의정 한치형(韓致亨), 무령군 유자광이 비밀스러운 일을
아뢰기를 청하고 도승지 신수근(愼守勤)에게 출입을 관장케 하니 사관은 참여할 수 없었다. …… 곧 의금부 경력 홍사호(洪士灝)와 도사 신극성(愼克成)이 경상도로 급파되었는데, 외부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다.”
무오사화가 시작된 것이다.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김일손(金馹孫)은 의금부 관원들이 파송된 지 열흘 만에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7월 12일부터 추국과 신문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같은 달 27일 주요 연루자들의 처벌을 확정한 임금의
전교(傳敎)가 내려지기까지 불과 보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미 죽은 김종직을 대역죄로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고, 김일손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의 행적을
더럽혔다는 죄명으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정여창(鄭汝昌)은 불고지죄(不告之罪)로, 김굉필(金宏弼)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이 사초에 들어가는 것을 방조한 죄로 귀양을 갔다. 또한 애초
이 사건을 만든 이극돈 역시 문제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면되었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무오사화의 전말이다. 하지만 무오사화에는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또 다른 정치적 변수들이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 김범 편사연구사의 연구에 따르면 무오사화로 화를 입은 인물은 이극돈까지 포함하여 모두
52명이었는데, 사형 6명, 유배 31명, 파직 또는 좌천 15명으로 분류되었다. 피화인(被禍人)들의 구성을 보면
김종직과 연관된 인물이 24명으로 절반이 안 된다. 그리고 나머지는 언관(言官)이 9명, 실록 편찬 관련자 8명,
그리고 대신과 종친들이 11명으로 되어있다. 언관이 9명이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언관은
임금에게 간언하는 일을 맡은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관원을 통틀어 부르는 호칭이다.
이들은 왜 사화에 휘말린 것일까?
성종은 사림을 등용하기 시작하면서 그 중에서도 특히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영남사림파의
종사(宗師)로 명성이 높았던 김종직을 중용하였다. 이에 그 제자들인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 영남 출신의
신진사류들이 대거 조정으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특히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 홍문관(弘文館) 등
삼사(三司)의 언론직(言論職)과 사관직(史官職)을 차지하면서 나름의 세력을 구축하고 주자학(朱子學)의
정통적 계승자임을 자부하였다. 동시에, 요순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도학적 실천을 표방해 군자임을 자처하면서
훈구파를 공격하였다. 즉 훈구파는 불의에 가담하여 권세를 잡고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현상 유지에 급급한
고식적인 소인배로 몰고 배척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권의 전제화(專制化)를 반대하면서 왕에 대한 직언도
서슴지 않았다.
『경국대전』은 성종 16년인 1485에 완성되었다. 『경국대전』의 첫머리인 이전(吏典)에는 주요 관서들의
기능과 그 밖의 사항을 규정한 조문(條文)이 들어 있다. 그 내용은 간략하고 때로는 모호하기도 하지만,
각 관서의 고유 임무와 권한을 포괄적으로 정의함으로써 주요 관서의 본원적 기능은 국법에 보장된 불가침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여기에 국왕과 대신을 비판하고 제어하는 삼사의 기능도 제도적으로 확립된 것이다.
이상적으로 운영된다면 이런 삼사의 기능은 국왕과 대신에 대한 적절한 견제와 균형을 통하여 수준 높은
유교정치로 발전할 수 있는 제도였다.
이런 제도적 규정은 치세 중반 이후 삼사를 육성해 기존의 대신을 제어하려는 성종의 정치적 포석과 맞물리면서
점차 현실에도 적용되었다. 원칙적으로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세 관서는 각각 관원에 대한 감찰과 국왕에
대한 간언, 그리고 여러 사안에 대한 자문을 주요 임무로 하는 독립적 기관이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서로의
임무를 넘나들면서 활동했고, 그 결과 ‘삼사(三司)’라는 하나의 명칭으로 동질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삼사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은 유교 정치의 이상에 다가가는 의미 있는 발전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대신들은
물론 국왕의 입장에서도 불편하고 불만스러운 현상이기도 했다. 성종 후반이 되면 삼사의 역할이 지나치게
비대해졌다. 삼사의 활동을 제도로 보장하고 현실에서도 후원했던 성종은 붕어하기 직전, 당시 대신들과 삼사의
대립을 “두 마리 호랑이가 싸우는 것 같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1라고 개탄했을 정도였다
삼사의 위세는 연산군이 즉위한 이후에도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삼사는 연산군이 즉위한 이래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상소를 올렸고,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무려 57일 동안 연속으로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삼사는
자신들의 의견이 조금이라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즉시 사직했다. 여기에서의 사직은 바로 벼슬을 그만두었다는
뜻이 아니다. 사직하겠다는 의사를 왕에게 밝힌 것을 뜻한다. 이런 경우 왕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개 이를
반려하는 것이 관례였다. 즉 사직을 청하는 것은 간언을 받아들이라는 강력한 요청이기도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자신의 간언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간에 이러한 사직이 많게는 60 ~ 70번에서
1백 번까지 지속되기도 했다.
즉위 직후부터 왕권 강화에 남다른 관심과 의지를 보인 연산군은, 이런 삼사의 행태에 큰 분노를 거듭
표명했음에도 삼사의 행태는 바뀌지 않았다. 대신과 삼사의 갈등도 증폭되었다. 그러면서 대신을 겨냥한 삼사의
탄핵 중에는 황당한 주장도 등장했다.
연산군 3년인 1497년에는 정월에 천둥과 번개가 치자 삼정승과 찬성(贊成)2이 사람답지 않기 때문에 재변이
일어난 것이라는 탄핵이 있었다. 또 한 달 뒤에는 삼정승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녹(祿)만 축내고 있다고
탄핵했다. 당시만 해도 이런 삼사의 비판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대신들은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 자체를
불명예로 여겨 즉각 사직하던 때였다.
대신들도 이런 삼사의 행태에 분노하여 대응하는 방식도 격화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영의정 노사신이었다.
그는 대간을 하옥하라는 연산군의 왕명을 “위엄 있는 결단”이라고 칭송하면서 이런 대간(臺諫)3의 습속은 현명한
군주가 뜻을 둔 뒤에라야 제거할 수 있다고 아뢰었다. 이런 노사신의 발언은 삼사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
특히 사간원의 정언(正言) 자리에 있던 조순(趙舜)은 “노사신의 고기를 먹고 싶다”4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했다.
30세의 정6품 관직인 정언이 70세의 전직 영의정을 상대로 쏟아낸 이 표현은 대신과 삼사의 관계가 치유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써 연산군 초반, 국왕과 대신, 삼사의 상호관계는 명확해졌다. 왕은 삼사의 언론을 계속 불만스럽게 생각했고
강력히 경고했지만, 삼사는 좀처럼 제어되지 않았다. 삼사는 대신을 극단적인 표현으로 탄핵했고, 일부 대신들은
거기에 강력히 반발했다. 왕은 삼사의 강력한 언론활동을 가장 심각한 폐단인 능상(凌上)으로 규정했다. 능상은
왕을 능멸한다는 의미다. 일부 대신들도 이에 공감했다.
이런 상황에서 《성종실록》의 사초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김종직의 조의제문뿐만 아니라 김일손의 사초에서
세조와 관련된 서술도 문제가 되었다. 연산군은 김일손에게 “이것은 반심(反心)을 품은 것이 분명한데, 어째서
너는 세조의 후손이 다스리고 있는 조정에서 벼슬했는가?”라며 불충한 사초를 쓴 까닭을 추궁했다. 김일손은
반역의 혐의를 부인하면서 자신의 사초에 대한 변명을 했다. 이에 연산군은 실록을 직접 열람하려고 했다.
그러자 삼사가 등장했다. 먼저 홍문관과 예문관이 왕은 실록을 열람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표명했고 대간은
홍문관과 예문관의 만류는 그 직무상 당연한 일이라고 변호하고 나섰다. 이런 삼사의 태도는 보기에 따라서
피의자들을 감싸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연산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김일손을 즉시
국문하라고 지시하였다.
김일손의 사초에 담긴 내용의 출처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사초에 연루된 인물들의 집을 수색하던 중에
대표적 훈구파 인물이라고 할 임사홍의 넷째 아들인 임희재(任熙載)가 주고받은 편지에 정치와 왕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에 연산군은 “이제 군소배(群小輩)가 붕당을 만들어 재상과 국사(國事)를 비판하니 통렬히 징계해 그 풍습을
개혁하라”고 명령했다. 연산군은 이 사건이 김일손이라는 개인의 사초에서 발원한 개별적 문제가 아니라
그와 교유한 일군의 집단이 붕당을 결성해 국사와 재상을 비판한 조직적 범죄라고 판단한 것이다. 나아가
연산군은 그런 연관의 혐의를 삼사까지 확장했다. “실록을 열람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붕당이 드러날까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닌가.” 라고 삼사에 대한 의심을 나타냈다.
이후 사건은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김종직에게 적용할 형벌에 대하여 거의 모든 신하들은 김종직이 지극히
부도하므로 부관참시의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데 합의했다. 그러자 대간이 다시 제동을 걸고 나섰다. 김종직은
참시해도 부족하다고 전제하면서도 이미 죽었으므로 작호를 추탈하고 자손을 폐고(廢錮)5시키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아뢴 것이다. 대간의 기본적인 입장은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법률에 충실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취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런 대간의 태도를 자신의 삼사에 대한 의심과 결부시켰다. 그는 대간의 상소에 표시를 달아
대신들에게 보이면서 “김종직의 대역이 이미 나타났는데도 이렇게 논의하니 비호하려는 것이 분명하다”고
대노했고, 즉시 체포해 국문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삼사가 모두 자리에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의금부 나장(羅將) 10여 명이 철쇄(鐵鎖)를 가지고 한꺼번에
달려드니 모두 놀라 일어났다”6
연산군은 대간들에게 형장을 때리고 신문하라고 지시했다7.
이 사건을 계기로 사화의 주요한 처벌 대상은 김종직 일파와 삼사라는 두 부류로 좁혀졌다. 이들의 공통된
죄목은 서로 붕당을 맺어 그릇된 발언과 기록을 남겼다는 것이었다. 연산군은 그동안 불만스러웠던 대간의
행태를 일소하려는 의지도 보였다. “이제 대간을 뽑을 때는 대체를 아는 자를 선발해야 하며, 이전의 대간처럼
불초하거나 연소한 자들은 절대 임명하지 말라.” 8
무오사화는 연산군이 아직 폭정(暴政)을 저지르기 이전 때의 일이었다, 무오사화를 통하여 훈구파는 사림을
견제하였고 왕은 껄끄러운 삼사의 언론활동을 제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참고 및 인용 : 테마리스트(무오사화 , 김범), 시사상식사전( 지식엔진연구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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