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2 - 붕당

從心所欲 2019. 9. 10. 18:24

 

붕당(朋黨). 벗의 무리.

예전에는 정치적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불렀다. 송나라의 구양수가 쓴 <붕당론(朋黨論)>에서

유래된 말로 알려져 있다. 구양수는 ‘군자(君子)는 군자와 더불어’, ’소인(小人)은 소인과 더불어‘ 붕(朋)을

이룬다면서, ‘군자의 당’은 공도(公道)의 실현을 추구하고 ‘소인의 당’은 개인적 이익의 도모를 일심는다고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구양수가 정치에서 붕당의 존재를 기정사실화 했다는 점이다. 뒤에 조선의

유학자들이 법(法)처럼 떠받들던 주희(朱熹) 역시 구양수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붕당이 있는 것을 염려할

것이 아니라 군자의 당이 있다면 정승도 군주와 함께 그 당에 들어가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김영택 <종묘>, 2009, 40 x 58cm, 펜화]

 

 

조선은 시작 때부터 이런 붕당이 있었다.

 

1298년 왕위에 오른 고려의 충선왕은 즉위년의 하교에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1으로

열다섯 가문을 열거하였는데 이들은 전통적인 문벌귀족과 무신정변 뒤에 새로 진출한 무반(武班)가문,

그리고 원(元)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떠오른 세력들이었다. 이들이 고려 말의 권문세족이다. 친일파가

그랬듯이 이들 친원(親元)세력 역시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는 한편 높은 관직을 독차지하던 지배층이었다.

고려 말이 되면서 이들 지배세력인 권문세족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신흥사대부들이 대두되었다.

신흥사대부는 권문세족의 정치권력의 독점과 농장의 확대에 따른 정치·경제·사회적 혼란을 시정하기 위하여

개혁정치를 주장했다. 그리하여 권문세족과 진보적인 신진사대부는 서로 대립하게 되었고 권문세족은

당연히 기존의 정치권력과 경제기반을 유지하고 존속시키기 위하여 원나라의 세력을 동원하면서까지

새로운 개혁에 반대하며 저항하였다.

신진사대부들은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과 개혁을 위하여서는 왕을 폐할 수도 있다는데 까지는 생각이

같았지만, 개혁의 범위와 방법에 대한 의견이 갈려 두 파로 나뉘었다. 그 결과는 모두가 알듯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여 개혁하자는 정도전, 이성계 중심의 역성혁명파가 고려라는 나라의 체제 안에서의 개혁을

주장했던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개혁파를 누르고 조선이라는 새 나라를 세웠다.

 

고려 말 상황에서 혹자는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권문세족이 보수이고 온건개혁파나 역성혁명파는 모두

진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보수는 변화를 원하지 않는 세력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다. 보수나

진보나 모두 변화를 도모한다. 다만 변화를 원하는 속도의 차이가 다를 뿐이다. 그래서 고려 말 상황에서는

온건개혁파가 보수이고 역성혁명파가 진보세력이다. 기존 체제의 유지를 원하고 변화를 원치 않는 권문세족은

보수가 아니라 수구(守舊)이다. “반동 간나이 새끼!”라는 표현에 너무 익숙해져서 흔히들 공산주의자들의

전용어처럼 인식하는 ‘반동(反動)’이란 말의 원래 정치적 의미는 ‘구체제를 부활하기 위하여 취하는 정치적

행동’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려 말의 권문세족은 보수가 아니라 수구이자 반동세력인 것이다. 이런

개념조차 없으니까 기레기들이 허구한 날 수구세력을 보수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 하나. 우리나라에서 좌파는 공산주의 체제의 신봉자, 우파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신봉자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좌파와 우파의 구분은 절대적인 정치적 이념이나 운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좌익 또는 좌파와 우익 또는 우파라는 말이 정치적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혁명기 때부터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직후 소집된 국민의회에서, 의장석에서 볼 때 오른쪽에 왕당파가 앉고, 왼쪽에 공화파가

앉은 것이 그 기원이다. 그래서 좌파는 정치적으로 급진적, 혁신적 정파, 우파는 점진적, 보수적 정파를 뜻하게

된 것이다. 몰론 그 후에 유럽의 좌파는 국가 운영에 정부의 역할을 중시하고 평등과 복지, 분배를 중시하는

노선을 취했고 우파는 국가 운영에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며 시장원리에 따른 경제정책 운영을 추구하면서

국유기업과 공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하는 등 서로의 노선에서 분명한 차이를 나타냈다. 좌파에서 중시하는 평등,

분배라는 단어가 자본주의 보다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서 더 자주 언급되는 단어들이라 좌파를 공산주의로

몰아 좌파 빨갱이라는 말을 쓰는데 한마디로 무식한 소리다.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는 몇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무엇인지나 알고 하는 얘긴가? 박정희는 무소불위의 힘을 갖는 강력한 정부 형태로 국가운영을

했고, 국가가 시장을 통제하고 개입하는 경제정책을 폈으며 주요 기간산업을 국유화하는 기업정책을 썼다.

평등, 분배, 복지를 강조하는 사회정책부분만 쏙 뺀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유럽의 좌파들이 추구해온

노선이다. 그렇다고 박정희가 빨갱이 정책을 폈다고 한다면 그것이 타당한 일인가?

공산주의는 기본적으로 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빨갱이는 왼쪽에 앉든 오른쪽에 앉든 그냥

빨갱이인 것이다.

 

 

정몽주나 정도전은 모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제자였다. 이색은 온건개혁파와 역성혁명파의 중심인물들이

거의 대부분 그의 제자들일만큼 고려 말의 학문과 정치에 있어 중심적 인물이었다. 역성혁명파의 정도전과

하륜(河崙), 권근 등은 조선 왕조 창업에 큰 역할을 담당한 반면 온건개펵파에 속했던 인물들은 조선이라는

새 왕조와는 담을 쌓고 고향으로 돌아가 초야에 묻혀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그들은 대부분 중소지주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머무는 지역의 향촌에서 영향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역성혁명파가 주도하는 세상에서 이들은 근대

정치사의 재야인사들과 같은 존재였다.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80년이 넘게 온건개혁파가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참여할 기회도 없어 겉으로 드러난 당쟁은 없었지만 이렇게 조선은 시작부터 개국공신파와 고려에 대한

절의파로 나눠진 붕당이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당쟁은 역성혁명파 내부에서 있었다. 사대부가 주축이 되는 재상 중심의 권력체계를 꿈꾸던

정도전과 강력한 왕권 정부를 원하는 이방원이 서로 부딪힌 일도 있었고 수양대군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한명회, 신숙주 등의 수양대군 지지 세력과 이를 반대했던 소위 사육신, 생육신 세력 간의

격돌도 있었다. 다만 정도전이나 성삼문의 세력의 반발이 일시에 무너지고 끊어졌기 때문에 당쟁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뿐이지 이 또한 엄연한 당쟁이었다. 당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선조(宣祖)대에 이르기 전의

일들을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정치에서 당쟁은 일상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다.

 

세조대를 계기로 조선에는 새로운 권력층이 등장한다. 세조는 사육신의 단종복위사건과 금성대군 역모사건

등의 시련을 거치면서 자신의 왕위 등극에 공을 세운 인물들을 공신으로 봉하고 많은 시혜를 베풀며 왕권강화를

추진하였다. 이들은 세조 말년 발생한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공을 세워 공신으로 등장한 남이(南怡) 등 신진

세력에게 정치적 도전을 받기도 하였으나 이를 견제하고 세조 때부터 예종을 거쳐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권력을

독차지하였다. 자식을 중요한 관직에 등용시키는 것은 물론, 왕실이나 자기들 가문들끼리 혼인을 맺어 권력의

기반을 다지기도 하면서 정치권력을 확대하고 세습적 지위를 유지해 나갔다. 후세는 이들을 훈구파(勳舊派)로

불렀다.

그런데 성종 대에 이르자 사정이 조금 달라지기 시작했다. 세조대 이래 최고의 훈구대신인 한명회는 성종의

장인이다. 13세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른 성종의 즉위초기에는 신숙주, 한명회 등 9명의 원로대신들이

원상(院相)이라는 직함으로 정책 결정에 자문으로 참여하며 실질적으로 국정을 좌우하였다. 원상은 왕이 병이

났거나 나이가 어릴 때와 같이 왕으로서의 정상적인 국정 수행이 어려울 때 전직과 현직의 대신들이 승정원에

주재하면서 왕과 국정을 의논하게 한 임시관직이다.

하지만 즉위 7년째가 되어 친정(親政)을 하게 되자 성종은 왕권 강화를 추진하며 점차 지방에서 학문을 닦던

인재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사림파(士林派)로 불리는 인물들이다. 재야에 묻혀 지내던 온건개혁파의

후예인 사림의 학통은 정몽주에서 길재를 거쳐 김숙자 → 김종직 → 김일손, 김굉필, 정여창 등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다 성종 때에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등이 등용된 것이다.

 

부패한 고려를 개혁하겠다고 세운 새로운 나라가 다시 부패에 빠지고 이를 개혁하기 위하여 한 때 정적이었던

반대세력을 동원한 것이다. 한 때의 개혁 주도세력이 개혁의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역사는 이렇게 돌고 돈다.

정몽주는 조선 건국을 반대하여 목숨까지 잃은 인물이다. 그러니까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역적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정몽주를 충신으로 기억할 수 있게 되었을까? 당쟁이 본격화되면서 당쟁에

패한 일방은 늘 치욕적인 평가를 받기 마련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정몽주는 당연히 조선왕조 500여년을

거치면서 최고의 기피 인물로 낙인이 찍혔어야 마땅한 일일 것이다.

정몽주는 이방원에 의하여 시해되었다. 그런데 이방원은 태종으로 즉위하고 난 뒤 정몽주가 죽은 뒤 13년 후인

1405년,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본인이

직접 나서서 정몽주를 역사 속에서 되살려 낸 것이다. 새 나라를 건설할 때는 정몽주가 걸림돌이었지만 나라가

세워진 뒤 그 나라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서는 신하들의 충성됨이 필요하여 정몽주 같은 롤모델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세월이 지난 뒤 직접 나라를 다스리다 보니 정몽주의 충절에 진심으로

감복했을 수도 있다. 

 

[조선 후기 궁중화가 이한철 <정몽주 초상>2 61.5 x 35cm, 국립중앙박물관]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시사상식사전(지식엔진연구소), 인물한국사( 윤희진, 장선환),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이덕일, 1997, 출판사 석필)

 

 

  1.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공신과 재상의 가문 [본문으로]
  2. 개성의 송양서원(松陽書院)에 소장되어 있던 초상을 이한철이 옮겨 그린 것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