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13 - 향리, 양인 그리고 양반

從心所欲 2019. 12. 26. 11:13

아전(衙前)이라고도 하고 향리(鄕吏)라고도 한다. 대표적 직책이 이방(吏房)이다. 조선시대 지방행정은

각 고을 수령의 책임이었지만, 수령은 지역과 실무에 어두웠기 때문에 실제로 모든 실무는 향리라고 하는

이들에 의해 집행되었다. 향리는 요즘으로 치면 군이나 읍과 같은 지방자치 단체의 민원담당 일선공무원이다.

그러나 이들은 지방의 하급 관리이기는 하지만 품계가 있는 벼슬아치가 아니라 벼슬아치를 돕는 구실아치다.

 

향리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전국의 20여 호족(豪族)들과

정략결혼을 해야 할 만큼 초기에는 그 세력이 확고하지 못했다. 호족은 몰락한 중앙귀족과 촌주(村主)와 같은

토착세력, 그리고 지방의 군사적인 무력을 가진 군진(軍鎭)세력들이 신라 말기에 농민반란을 배경으로

각지에서 봉기하여 각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지방 세력이다. 왕건은 정국의 안정을 위하여 호족들의 지속적인

지지가 필요하였고 중앙의 통치력이 전국적으로 미치기에는 미흡한 상황이라 지방의 군현(郡縣)을 그곳

지방출신의 호족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이것이 향리의 시작이다. 정권이 안정되어가면서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는 지역을 넓혀가고 이들 지방 호족에 대한 견제도 강화하면서 향리는 호족에서 수령의

보좌역으로 변하고 그 사회적 신분은 하락하였다. 하지만 조세, 부역, 소송 등 대민 업무는 이들 향리의

몫이었기 때문에 향리는 여전히 상당한 실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향리는 지역의 실질적 지배층이었기에

향리직은 세습되었고 향리들은 자신들이 가진 권한을 이용하여 점점 지방의 중소지주로 변모해갔다.

 

새로운 나라 조선은 전국을 중앙에서 직접 통제하려고 하였지만 근본적으로는 지방의 토착세력인 향리들의

도움 없이는 새로운 통치 질서를 구축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은 향리제도를 계속

유지하면서도 건국 초기부터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규제 정책을 펼쳤다. 원악향리처벌법(元惡鄕吏處罰法)을

만들어 수령을 조롱하거나, 백성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지 못하게 하는 등 향리의 행위에 대한 구체적 규제의

근거를 만들고,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으로 향리나 백성들이 수령을 고소할 수 없게 하여 수령의

권위를 대폭 강화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고려 때에는 하급귀족인 호족이었던 향리들의 지위가 조선에서는

양반과 상민 사이의 중인층인 이족(吏族)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향리의 집무처는 군수, 현령 등 지방수령이 근무하는 정청(正廳)인 관아(官衙) 앞에 있는 별도의 건물이었다.

이청(吏廳) 또는 작청(作廳)이라 불리는 이 건물이 관아 앞에 있었기에 아전(衙前)이라 불렀고 이는 곧 향리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향리의 조직과 호칭은 지역에 따라 여러 형태로 존속되다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중앙의 육조(六曹) 체제를 따른 이방(吏房), 호방(戶房), 예방(禮房), 병방(兵房), 형방(刑房), 공방

(工房)의 육방(六房) 체제로 정비되었다. 이때부터 이방의 실권이 강화되면서 이방이 향리의 우두머리인

수리(首吏)가 되는 체제로 운영되었다.

 

향리는 조선 초부터 과거응시 자격이 대폭 제한되었고 녹봉도 없었다. 거기다 세종 때부터는 이들에게

주어졌던 과전인 읍리전(邑吏田)마저 혁파되었다. 국가에서 받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의무만 남게 된 것이다.

향리의 면역 및 향역에 대한 규정은 이미 태조 때에 공포된 조선 최초의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에

명시되어 향리의 신분과 직역의 고정화를 추진하는 근거가 되었는데 향리직은 세습하도록 되어있어 자기

마음대로 그만 둘 수도 없었다. 토속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 지배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내려진 이런 조치는

물론 당시 향리들이 지주로서 지역에서 확고한 경제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점을 감안한 것이었지만 이는

두고두고 조선에서 부패와 수탈이 반복되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 또한 이는 결과적으로 국력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향리는 녹봉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근무처인 작청의 운영비를 포함하여 그들이 향역(鄕役)을 담당하는데

필요한 경비를 자비로 감당해야 했다. 거기다 지방관아 전체의 경비를 부담해야 했고, 심지어는 수령을

맞이하고 보내는데 드는 비용도 부담하여야 했다. 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에는 형벌을 받았다. 행정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는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구한말 관아 풍경. 심재우교수 사진]

 

국가의 가장 큰 수입원인 전세(田稅) 수납액이 세종 때 60만석이던 것이 성종 대에는 44만석, 중종 대에는 27만석, 명종 즉위년에는 26만석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토지 개간도 이루어지고 점진적이기는 하지만 영농 기술의 발전도 이루어졌을 것이므로 전세는 조금씩이라도 늘어나야 마땅할 터인데 오히려 감소하였다. 장부상에 나타난 조선의 토지면적은 세종 때에 160만결에 가까웠었는데, 이 수치는 선조 때까지도 거의 변화가 없었다. 사실은 오히려 약간 줄어들었다. 그리고 조선은 대한제국 때까지도 장부상에서는 토지 면적이 세종 때의 수치를 넘어선 적이 없었다. 세금을 거두는 수세(收稅) 면적 또한 세종 때에는 전체 토지 면적과 약간의 차이가 있는 150만결 정도이었던 반면 선조 때에는 100만결이 채 안되었고 그 이후로는 고종 때까지 계속 80만결을 밑돌았다. 4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수 면적은 오히려 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종실 일가의 토지소유와 훈신에게 지급된 공신전(功臣田)과 권문세가의 사전(私田)이 늘어나면서 세금을 내지 않는 면세지(免稅地)가 늘어난 것이 일부 사유가 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다 설명이 되지 않는다.

 

조선의  전세제도는 세종 때 실시된 공법(貢法)을 따라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과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을

근간으로 하여 매 결(結)에 수확량의 20분의 1을 세금으로 거뒀다. 전분육등법은 과세의 기준이 되는 1결을

대략 400두(斗)를 수확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 토지를 질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눈 것이다. 따라서 1결의 넓이는

토지의 등급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공법에서의 1등전은 1결이 약 2,750평인 반면 제일 낮은 6등전은

약 11,030여 평으로 넓이에서 4배의 차이가 난다. 또한 같은 토지라도 해마다 풍년, 흉년의 정도에 따라

수확량이 차이가 있을 것이므로 그 작황에 따라 상중상부터 하중하까지 9등급으로 세분하여 과세의 기준을

달리하였다. 이를 연분구등법이라고 하는데 상중상인 해에는 1결당 전세가 20두가 되고 하중하인 해에는

전세가 4두가 되도록 하였다. 얼마나 합리적인 제도인가?

이 기준을 세종 때에 적용하면 수세 면적을 150만결로 칠 때 이론적으로는 가장 풍년이 든 해에는 전세가

2백만석에 이르고 최악의 흉년일지라도 40만석을 거둘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명종 대에 이르면 전세가 불과

30만석을 오르내리는 수준이 되고 만다. 임진왜란 때는 전란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전세가 7만석에 불과한 해도 있었다. 

 

공무원 월급이 너무 박하다는 기사가 언론에 오르내리던 시절 국민은 민원을 빨리 처리 받으려면 공무원들에게 담뱃값이라도 쥐어줘야 했다. 불과 수십 년 전 일이다. 조그만 권리라도 있다면 그것을 이용하여 이익을 챙기려는 것이 사람의 욕심인데 하물며 녹봉도 없이 일을 하면서 자기 재산 팔아가면서까지 관아 경비를 댈 향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면에서 향리의 부패와 수탈은 필연적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토지의 실제경작 상황을 파악하는 양전(量田)을 실시할 때 비옥한 전답의 일부를 원장부에서 누락시켜 그

조세를 사취하는 것을 은결(隱結)이라 하고, 전답의 면적을 실제보다 감소시켜 토지대장에 올려놓고 그 남는

부분에 대하여 개별적으로 곡물을 수취하는 것을 여결(餘結)이란 한다. 모두 탈세전(脫稅田)을 만드는 방법이다.

이런 부정을 행하는 주체는 전주(田主)일 수도 있고 향리일 수도 있지만 어느 경우나 향리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멀쩡한 땅을 황폐한 땅으로 만들어 장부에서 빼기도 하고 새로 개간한 땅은 아예

장부에 올리지도 않고 그 땅에서 걷는 세금을 착복하는 수법도 동원 되었다. 그러니 몇 백 년이 흘러도 장부상의

국가 토지 면적이 세종 때를 넘지 못한 것이다. 향리는 또 국가에서 정한 전세 외에 지방 관아의 명목으로 세금을

따로 걷기도 하였고 필요에 따라 부가적인 여러 세금을 갖다 붙여 농민을 수탈하였다. 심한 경우에는 있지도

않은 땅에 전세를 부과하여 착복하는 일도 있었다.

 

전세보다 농민을 더 힘들게 한 것이 신역이었다. 지방에서 서울로 상번하려면 많은 경비가 소요되었고 그 기간

동안 농사를 지을 수도 없으니  농민에게는 이중고였다. 또한 성을 쌓거나 도로를 건설하고, 뚝을 쌓고, 공물을

운반하는 것과 같은 요역에 국가가 정한 날수는 물론 지역의 사정에 따라 수시로 동원되었다. 나라에 전쟁이

없는 기간이 오래 지속되자 성종 이후에는 군역의 요역화 현상이 나타났고 아울러 군사를 운영하는 관리들의

자세도 해이해졌다. 그래서 상번하거나 부방하는 정병의 경우에는 자신을 대신하여 군역을 대신할 자를 세우는

대립(代立)과 진(鎭)을 지키는 유방군에서는 쌀이나 포를 받고 군사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방귀(放歸)가

성행하기 시작하면서 군역제도가 문란하여졌다. 전자를 대립제라 하고 후자를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라 한다.

대립(代立)은 고을의 사정을 잘 아는 향리의 눈을 속일 수가 없으니 사적으로 이루어지기는 불가능하고 향리를

통하여야만 했다. 향리가 이런 불법적인 일을 묵인하고 주선해주기 위해서는 향리의 개인적 이익을 위한 농간이

개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대립인에게 지불하는 대립가격은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런가 하면 군적에 오른 사람이 사망하는 경우에는 군적이 바로바로 개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향리는

어떻게든 할당된 인원을 군역에 동원해야 할 책임이 있다. 정병에 문제가 생기면 대립인을 세워야 하고 보인에

문제가 생기면 보인을 보충해야 한다. 그런데 대립인을 세우는 비용은 향리가 부르는 대로 보인들이 감당할

수밖에 없었고, 대체할 보인이 모자라면 갓난아이가 보인이 되는 황구첨정(黃口簽丁)이 생겨났고 죽은

보인에게도 계속 의무를 지우는 백골징포(白骨徵布)도 자행되었다. 결국 이런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운

농민들은 도망을 갈 수밖에 없고 그러면 남아있는 사람들이 또 다시 그 짐을 나눠져야 하기 때문에 백성의

삶은 날로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방군수포는 향리가 아닌 관리들의 부정이었다. 원래는 군사들의 편의를 위해 부득이한 사정으로 입번(立番)

하지 못하는 군사들에게 포나 쌀을 받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군 지휘관의 사리 축적을

위한 수단으로 변해갔다. 그래서 성종 23년인 1492년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 오순(吳純)이 1,234명의

군사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쌀과 베 등을 거두어들인 혐의로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는 일도 생겨났다.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도처에서 발생하는 가운데 군사들이 지켜야 할 진과 영(營)은 비워지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중종 때인 1541년에 불법으로 자행되던 방군수포를 국가의 공식적인 제도로 바꾸어 군적수포제

(軍籍收布制)를 실시하였다. 이는 지방 수령이 관할 지역의 군역 부담자로부터 포를 징수하고, 그것을 중앙에

보내면 병조에서 다시 군사력이 필요한 각 지방에 보내어 군인을 고용하게 하는 제도이다. 그 결과 양인

장정들의 대부분은 1년에 2필의 군포(軍布)를 내는 것으로 군역을 대신하였고 조선의 군대는 실질적으로는

용병제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도 또 병폐가 생겨났다. 군포 징수가 일원화되지 않아 5군영뿐 아니라 중앙

관청과 지방의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에서도 따로 군포를 징수함으로써 백성들은 이중, 삼중의 군역을

부담하게 되었다. 또한 군포 수납 과정에서도 실무를 담당한 수령과 아전들의 농간과 횡포까지 더해

백성의 피해가 극심해졌다.

 

 

[김윤보 형정도첩 中 <정소지관가(呈訴志官家)>, 관가에 소장을 올리다]

 

[<법정변송(法庭辨訟)>, 관아에서 시비를 가리다]

 

백성들은 나라를 지키는 군역 때문에 이처럼 숱한 고초를 겪고 있는 반면 정작 지배층인 양반은 이런 의무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다. 양반들은 정병의 의무를 지지 않았던 것은 물론 보인의 의무도 없었다. 지배층은 특권만

누리고 개고생은 백성만 하는 나라. 그런 나라에 십만의 군대가 있다한들 어떻게 강할 수 있는가?

임진왜란 후에는 양반의 수가 급증하여 군을 유지하기 위한 재정이 더욱 부족하여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걷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자 임금의 장인이라는 인물은 “차라리 백성의 마음을 잃을지언정 사대부의 마음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왕에게 말하는가 하면 “평생을 어렵게 공부한 선비가 일자무식인 상놈들과 함께 출포하게 되니

어찌 원망하는 것이 없겠느냐?”는 대사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양반에게 포를 거두면 양반들이 변란을

일으켜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있게 될 것”이라고 왕을 위협하는 우의정도 있었다. 이런 나라를 임진왜란 때

백성들이 나서서 지킨 것이다.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