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17 - 패자의 변명

從心所欲 2020. 1. 7. 09:40

 

1623년 3월 13일 밤,

이귀, 심기원, 최명길, 김자점, 이괄 등의 서인들은 병력 600∼700명과 함께 홍제원에 모여 김류(金瑬)를

대장으로 삼고, 능양군도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고양 연서역(延曙驛)에 나아가 장단부사 이서(李曙)의

병력 700여명과 합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능양군은 그날로 창덕궁에서 보새(寶璽)를 거두어 경운궁에

유폐중인 인목대비에게 바친 후 다시 그 보새를 돌려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김포 장릉(章陵) : 인조의 아버지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의 묘]

 

다음 날인 3월 14일, 인목대비는 인조의 즉위와 광해군의 폐위에 대한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하늘이 만백성을 내고 그 중에다 임금을 세운 것은, 대개 인륜을 펴고 기강을 세워 위로는 종묘를 받들고

아래로는 온 백성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이다. 선조 대왕께서 불행히도 적사(嫡嗣)가 없어 임시방편으로

장유(長幼)의 차례를 어기고 광해로 세자를 삼았었는데, 동궁으로 있을 때 이미 실덕(失德)이 드러나

선묘(宣廟) 말년에 자못 후회하여 마지않았다. 즉위한 처음부터 못하는 짓이 없이 도리를 어겼는데,

우선 그 중 큰 것만을 거론하겠다.

 

내 비록 부덕하나 천자의 고명(誥命)을 받아 선왕의 배우자가 된 사람으로 일국의 국모가 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선묘의 아들이 된 자는 나를 어미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광해는 참소하는 간신의 말을

믿고 스스로 시기하여 나의 부모를 형살하고 나의 종족을 어육으로 만들고 품안의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유폐하여 곤욕을 주는 등 인륜의 도리라곤 다시없었다. 이는 대개 선왕에게 품은 감정을 펴는 것이라

미망인에게야 그 무엇인들 하지 못하랴. 심지어는 형을 해치고 아우를 죽이며 여러 조카를 도륙하고 서모를

쳐 죽였고,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다. 그리고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두 채의

궁궐을 건축하는 등 토목 공사를 10년 동안 그치지 않았으며, 선왕조의 구신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내쫓고

오직 악행을 조장하며 아첨하는 인아(姻婭)1와 부시(婦寺)2들만을 높이고 신임하였다. 인사는 뇌물만으로

이루어져서 혼암한 자들이 조정에 차있고, 돈을 실어 날라 벼슬을 사고파는 것이 마치 장사꾼 같았다.

부역이 번다하고 가렴주구는 한이 없어 백성들은 그 학정을 견디지 못하여 도탄에서 울부짖으므로 종묘사직의

위태로움은 마치 가느다란 실끈과 같았다.

이것뿐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백여 년이라,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그리고 임진년에 재조(再造)해 준 그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선왕께서 40년 동안

재위하시면서 지성으로 섬기어 평생에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았다.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기미년 오랑캐를 정벌할 때에는 은밀히

수신(帥臣)을 시켜 동태를 보아 행동하게 하여 끝내 전군이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사해에 펼

쳐지게 하였다. 중국 사신이 본국에 왔을 때 그를 구속하여 옥에 가두듯이 했을 뿐 아니라 황제가 자주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할 생각을 하지 않아 예의의 나라인 삼한(三韓)으로 하여금 오랑캐와 금수가 됨을 면치

못하게 하였으니, 그 통분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천리를 거역하고 인륜을 무너뜨려 위로는

종묘사직에 득죄하고 아래로는 만백성에게 원한을 맺었다. 죄악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 어떻게 나라를 통치하고

백성에게 군림하면서 조종조의 천위(天位)를 누리고 종묘사직의 신령을 받들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폐위하고

적당한 데 살게 한다.

 

능양군(綾陽君)은 선조 대왕의 손자이며 정원군(定遠君)의 맏아들이다. 총명하고 어질며 비상한 위의가

있어 선조께서 몹시 사랑하여 궁중에서 길렀다. 그 소자(小字)를 천윤(天胤)3이라 하였으니 그 이름을 지어준

의미가 깊다. 궤에 기대어 계실 때 손을 잡고 한숨을 지으시면서 정을 붙임이 다른 손자들과 달리 깊었다.

지금 대의를 분발하여 혼암한 자를 토평하고 나의 수욕(囚辱)을 벗겨주며 나의 위호(位號)를 회복해 주어

윤리와 기강이 바로 서고 종묘사직이 다시 안정되었다. 그 공덕이 대단히 성대하여 신인 모두 귀부하는 바라,

대위(大位)에 나아가 선조의 뒤를 계승할 만하다. 부인 한씨(韓氏)를 책봉하여 왕비를 삼는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교시하니 잘 알기를 바란다."4

 

교서의 앞머리는 선조가 세자로 세우고도 후회할 만큼 광해군은 원래 왕이 되어서는 안 될 자였다는 얘기고

마지막 대목은 능양군은 일찍부터 선조가 점찍은 ‘하늘이 내린 맏아들’이라는 얘기다. 그 중간에 인목대비가

지적한 광해군의 죄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 어머니를 폐하고 형제들을 죽인 죄

둘째, 10년간의 궁궐 공사로 민생을 도탄에 빠트린 죄

셋째, 간신들에 둘러싸여 정치하고 관리들은 부패한 죄

넷째, 명나라에 배은하고 오랑캐 청나라를 가까이 한 죄

 

비록 서모이지만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살해했다는 폐모살제(廢母殺弟)는

꼭 유교국가가 아니라도 용서될 수 없는 패악이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악행이기에

광해군을 내치는데 가장 앞에 내세워진 이유가 됐을 것이다. 이유도 없이 어머니를 구박하고 동생을

살해했다면 이건 두말 할 것도 없는 사이코다.

 

광해군의 왕위 등극으로 정권의 중심에 선 대북은 차근차근 정권의 불안요소와 위협을 제거해 나갔다.

소북파의 유영경(柳永慶)은 대북이 집권하자마자 이이첨(李爾瞻), 정인홍의 탄핵을 받아 경흥에 유배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에 사사(賜死)되었다. 강화 교동에 유배되었던 임해군도 다음 해에 사사되었다. 3년 뒤인

1612년에는 김직재(金直哉)의 옥(獄)‘을 통하여 소북의 남은 세력을 제거하였다. 또한 그 다음 해에는

‘칠서(七庶)의 옥’으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위리안치시키는 한편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을 잘 보살펴 달라는 비망기를 받았던 소위 ‘유교칠신(遺敎七臣)’과 조정에 남아있던

서인과 남인을 몰아냈다. 이미 서인으로 강등되었던 영창대군은 이듬해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리고 5년 뒤인 1618년에는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경운궁에 유폐(幽閉)시켰다.

 

서인들은 이 모든 사건들을 주도한 원흉으로 이이첨을 지목했다. 이이첨은 선조 사망 나흘 전, 정인홍과 함께

유배당했다가 광해군이 즉위하자 간관들의 청으로 풀려나 병조정랑에 임명된 뒤, 이후 예조판서를 거쳐

대제학을 지낸 대북의 영수다. 실질적 대북의 영수는 정인홍이었지만 당시 나이가 70대 후반에 들어선 그는

광해군의 거듭된 출사 요청에도 거의 응하지 않고 고향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현직에 있던

이이첨이 대북의 영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대북의 뿌리는 동인이고 북인이다. 동인은 임진왜란 전 3년에 걸친 기축옥사를 통하여 무려 1,000여명이

처형되었다. 왕세자 건저 사건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다시 들어섰을 때 정철에 대한 처벌 수위 문제로

온건파인 남인과 갈라선 것이 강경파인 북인이다. 그런 북인들이 정권을 잡았으니 서인에 대한 탄압은 예견된

일이고 서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숨을 죽였을 것이다. 후사로 누구를 지지하느냐 하는 문제로 대북과 소북으로

갈리고 결국 대북세력이 득세했지만 대북세력에게는 15년 가까이 정권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던 서인들보다

더 시급히 해결해야될 사안이  있었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광해군이 어렵게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여전히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남아 있었다. 왕의 형인 임해군과 적장자인 영창대군의 존재였다.

이 장해물을 제거하는 것이 자신들이 정권을 오래 유지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본능적 판단이다.

그래서 광해군이 즉위한지 보름도 안 되어 임해군을 역모를 도모한 죄로 몰아 유배를 보내는데 성공했다.

임해군이 집안으로 들였다는 무기들이 끝내 발견되지 않음으로 해서 이 사건은 무고(誣告)였을 가능성도

있고, 반대로 이때는 아직 대북세력이 자리를 잡기 전인데다, 막 즉위한 왕의 친형을 무고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무모한 일이기에 고변 내용이 사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임해군을 유배시켰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신이 중국에 가서 광해군이 왕에 오른 사실을 알리자 형인 임해군이 있는데 왕에 오르는

순서가 어긋났다며 광해군을 왕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즉위년 5월 20일 기사

이호민 등이 연경에 도착하자 명나라에서 왕의 차서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호민 등이 논변할 때에 "진은 중풍에 걸려 저위(儲位)를 감당할 수 없었다."고 잘못 말하였기 때문에

명나라에서 의심하였다. 예부 낭중(禮部郞中)이 "만일 임해군이 병에 걸렸다면 모름지기 임해군의 사양하는

주본을 갖추어 오라."고 하였다. 호민 등이 이 말을 따르지 않자, 낭중이 강력하게 요구하였으므로 이 사실을

보고한 것이다.

 

명나라는 실상을 파악하기 위한 사신들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들이 6월 15일 한양에 도착하여 6월 20일

임해군을 직접 만나고 돌아간 뒤에야 왕위를 허락받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지만 대북의 진짜 걱정은 선조의

적장자인 영창대군에 있었다.

조선은 명목상 적장자(嫡長子)가 종통을 계승하도록 되어있었다. 적장자란 정실(正室)의 아내가 낳은 맏아들을

의미한다. 이는 유교적, 종법적(宗法的) 가족제도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중국에서 유래된 종법에는

적출의 장자손을 종자(宗子)라 하여 가계와 제사를 우선적으로 상속하도록 되어 있었다. 적장자가 가계와 제사,

상속의 핵심이 된 것은 고려 때 주자(朱子)의 「가례(家禮)」가 들어오면서부터이다. 종법에 의한 조상의

제사와 종통(宗統)의 계승은 조선시대의 기본관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적장자의 중요성은 더욱 뿌리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경국대전』에도 적장자손의 승계를 원칙으로 정하고, 적장자에게 아들이 없을 때에는

중자(衆子)5, 중자에게 아들이 없을 때에는 첩자(妾子)6가 승계하되 그 다음 대에는 이들의 적장자손이

반드시 승계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러한 관념은 조선으로 그치지 않고 바로 대한민국 호주상속제도에까지도

적용되던 원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태조부터 고종까지 26명의 왕 가운데 적장자 출신 왕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순종 등 여섯 명에 불과했다. 적장자의 자질이 부족하거나 다른 문제가 있어 왕이

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정실 왕비가 적장자를 낳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광해군 때의 상황은 종통에 따라

당연히 왕이 되었어야 하는 적장자가 궁궐 안에 따로 있는데 엉뚱하게도 첩자가 왕위에 올라있는 상황인 것이다.

 

선왕의 적장자가 궁궐의 가장 큰 어른인 인목대비의 보호 아래 있다는 사실은 대북 세력에게는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왕실에서 왕위와 관련한 왕자의 존재는 언제나 위험 그 자체인 것이다. 영창대군이 커갈수록

그러한 위기의식이 더 커지던 차에 광해군 5년인 1613년 3월 문경 새재[鳥嶺]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을 추적하여 잡고 보니 과거 내로라하는 집안의 서자들 7명이었다.

그런데 이들을 추국하는 과정에서 인목대비와 그의 아버지 김제남이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역모를 꾀했다는 진술이 나왔다. 후에 서인들은 이 때 이이첨과 그의 심복인 김개,·김창후가

포도대장 한희길,·정항 등과 모의하여 영창대군 추대 음모를 꾸며 국문 과정에서 이들에게 거짓 자복하도록

교사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물론 그랬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지만 승자의 기록만 있고 패자의 변명은 들을 수

없으니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조작인지는 알 수 없다.

 

4월 25일 강도 일당으로 잡혀 옥에 있던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의 서자인 박응서(朴應犀)가

"우리들은 천한 도적들이 아니다. 은화(銀貨)를 모아 무사들과 결탁한 다음 반역하려 하였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광해군은 의금부 당상들을 불러 의견을 묻자 대신 이덕형 등이 죄인을 의금부로 보내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김제남과 영창대군의 이름이 거론되자 광해군은 직접 강도 일당들을 심문하기도 하였다. 국문이

시작된 지 열흘 정도가 흐른 5월 4일부터는 영창대군과 김제남의 처벌이 간관들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김제남은 5월 4일에 파직되었다.

 

이후 광해군은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광해군의 패륜을 논하려면 이 대목을 주목해야 마땅하다.

5월 5일부터는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에서 모두 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영창대군을 법대로 처벌하고

김제남을 국문하라는 요청이 올라왔다. 광해군은 계속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청이 계속 올라오자

광해군은 자신의 뜻을 이렇게 밝혔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5년 5월 9일 2번째 기사

양사가 합계하여 이의(李㼁)를 복주(伏誅)7시킬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적도가 설령 그를 옹립하려는 계책을 꾸몄다 하더라도 대군이 어떻게 알았겠는가. 선왕께서 잘 돌보아주도록

부탁하신 것은 바로 오늘날과 같은 걱정이 있을까 해서였다. 하늘에 계신 영혼이 여기에 오르내리고 계시는데

내가 어떻게 차마 법대로 하겠는가. 이런 말은 하지 말라."하였다.

또 김제남을 엄히 국문하도록 아뢰니, 답하기를,

"김제남에 관한 일은 이미 대신과 의논해 정한 것이다. 우선은 서서히 하라." 하였다.

 

이런 광해군의 답변에도 이후 양사, 합사, 예문관, 승정원, 정2품 이상의 대신들이 번갈아 나서서 영창대군의

처벌을 요구했다. 광해군은 계속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16일에는 백관(百官)이 나서고 그 다음날에는 종실이

나섰다. 광해군의 입장은 한결 같았지만 신하들 역시 한결 같았다. 5월 17일부터 21일까지 신하들은 끈질기게

영창대군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내용은 빼고 기사 제목만 추려 봐도 이렇다.

 

●광해 5년 5월 17일 2번째 기사  /  종실이 영창대군의 처벌을 간하다

●광해 5년 5월 17일 3번째 기사  /  양사가 연계하여 영창대군의 처벌과 김제남의 국문을 청하다

●광해 5년 5월 17일 4번째 기사  /  대신이 영창대군의 처벌을 청하다

●광해 5년 5월 18일 1번째 기사  /  생원 박이검 등이 영창대군의 처벌을 청하다

●광해 5년 5월 18일 2번째 기사  /  종친부가 영창대군의 일을 연계하다

●광해 5년 5월 18일 3번째 기사  /  양사가 영창대군과 안위의 일을 연계하다

●광해 5년 5월 18일 6번째 기사  /  예문관이 영창대군의 처벌을 청하다

●광해 5년 5월 18일 7번째 기사  /  대신이 영창대군의 처벌을 청하다

●광해 5년 5월 18일 8번째 기사  /  홍문관이 영창대군의 일로 차자를 올리다

●광해 5년 5월 18일 9번째 기사  /  대신들이 영창대군의 일을 재차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광해 5년 5월 18일 10번째 기사  /  양사에서 영창 대군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광해 5년 5월 19일 2번째 기사  /  양사가 합계하여 영창대군의 처벌과 김제남의 국문을 청하다

●광해 5년 5월 19일 3번째 기사  /  대신 등이 영창대군을 처벌할 것을 청하다

●광해 5년 5월 19일 5번째 기사  /  대신 등이 영창대군의 일을 재차 아뢰다

●광해 5년 5월 19일 6번째 기사  /  헌납 유활, 정언 박홍도가 역적 처벌을 엄히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혐(引嫌)8하다

●광해 5년 5월 20일 7번째 기사  /  양사가 합계하여 영창대군의 처벌과 김제남의 국문을 청하다

●광해 5년 5월 20일 10번째 기사  /  대신 등이 영창대군의 처벌을 청하다

●광해 5년 5월 20일 11번째 기사  /  합사하여 영창대군의 처벌과 김제남의 국문을 재차 청하다

●광해 5년 5월 21일 13번째 기사 / 대신 등이 영창대군의 처벌을 청하다

 

5월 5일 시작된 영창대군과 김제남에 대한 처벌을 청했다는 기사는 21일까지 보름 남짓에 무려 50여개에

이른다. 평균 하루에 세 번꼴로 청을 올린 것이다. 청이라고는 하지만 이는 왕에 대한 고문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광해군은 저들의 요구를 계속 거절했다. 이것은 모두 서인이 광해군을 폄훼할 의도로 편찬한

《광해군일기》에 수록된 기사들이다. 아마도 대북 정권이 끈질기게 영창대군을 죽이려 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사료를 그대로 실은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괄의 난 때 흩어져 버렸다는 사초가

어떻게 이 일에는 이렇게 자세히 남아있는 지 의아한 일이다. 하지만 계속되는 신하들의 요구에 광해군도 

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결국 21일에 타협안을 내놓는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5년 5월 21일 14번째 기사

재차 아뢰니, 답하기를,

"이의는 어린 아이인데 아는 것이 뭐가 있겠는가. 불측한 계책은 실로 김제남 등에게서 나온 것으로 의는

죄가 없기 때문에 내가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논집하고 있는 공론도 엄한 것이니

단지 그의 봉작(封爵)만 삭탈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실 이의(李㼁)를 영창대군(永昌大君)으로 봉한 장본인이 광해군이었다. 이의가 6살 때인 광해군 3년

(1611년) 12월 26일의 일이었다. 광해군은 국사에 지장을 줄 정도로 연일 계속되는 조정의 영창대군에 대한

논의를 이 정도 선에서 매듭지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광해군의 오산이었다. 영창대군의 봉작을

삭탈한 전교를 내렸더니 바로 또 양사의 언관들이 들어왔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5년 5월 21일 15번째 기사

양사가 합계하여 이의에 대한 일을 청하니, 답하기를,

"내 뜻은 이미 모두 말하였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하였다.

재차 아뢰니, 답하기를, "이미 나의 뜻을 유시하였다. 억지로 쟁집하지 말라." 하였다.

세 번째 아뢰니, 답하기를, "이미 유시하였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왕이 학문과 덕을 쌓는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대부분의 왕들이 오래 못 산

이유도 알 것 같다. 이후 광해군과 신하들 간의 공방이 열흘간 계속되고 난 5월 30일의 기사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5년 5월 30일 3번째 기사

종친이 통쾌하게 공론을 따르라고 계청하니, 답하기를,

"이미 봉작을 깎고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었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하였다.

재차 아뢰니, 이미 유시하였다고 답하였다.

 

●5월 30일 5번째 기사

대신 등이 잇따라 이의(李㼁)에게 율을 적용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이미 봉작을 깎고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었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하였다.

재차 아뢰었으나 또 윤허하지 않았다.

 

●5월 30일 6번째 기사

홍문관이 잇따라 상차하여 이의 및 김제남의 복주(伏誅)를 청하니, 답하기를,

"나의 뜻은 이미 유시하였다." 하였다. 재차 상차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30일 7번째 기사

대신 등이 세 번째 아뢰니, 이미 유시하였다고 답하였다.

 

●5월 30일 8번째 기사

시강원 보덕 신경락(申景洛) 등이 상소하여 조정의 논의를 따라 이의를 처단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이미 참작해서 처치하였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5월 30일 9번째 기사

익위사(翊衛司)의 관원 등이 상소하여 이의에게 법을 적용하도록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광해군은 견뎌내지 못했다. 5월 30일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폐서인(廢庶人)하는 전교를 내린다.

 

●5월 30일 10번째 기사

금부에 전교하였다.

"이의가 물론 어린 아이라서 아는 것이 없지만 그를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설이 누차 여러 적들의 공초에

나왔고 보면 그 누가 화의 근본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역적들을 제거했다 할지라도 화의 근본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국가의 걱정이 오히려 전일보다 더 심해질 것이다. 예로부터 동기(同氣)의 변에 대처할 때에

천륜이 중한 것을 모르지 않았지마는 그 일이 종묘사직과 관련될 경우에는 대부분 의리에 입각하여

은정(恩情)을 덮어두고 정을 굽혀 법대로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관계된 바가 지극히 중해서 임금이

개인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적들이 최고로 가치 있는 이용물로 삼고 종묘사직에

화를 초래하는 근본이 실로 여기에 있는데, 지극히 가까운 자리에 거하면서 용납하기 어려운 이름을

지니고 있으므로 삼사가 서로 소장을 올리고 백관이 대궐 문에 엎드려 상소하는가 하면 유생들이

항소(抗疏)를 하고 군민(軍民)이 피를 뿌리며 읍소하고 있다. 그리하여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는

유생들에 이르기까지 군민 모두가 ‘한 시각이라도 궁중에 편안히 머물러 있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공론이 지극히 엄하고 여정(輿情)이 날로 격렬해지고 있으니, 읍호(邑號)를 깎는 것만으로는 

죄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없고 공론을 신장시켰다고 말할 수가 없다. 의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어라."

 

삼사, 조정의 관리, 유생들이 모두 요청하는데도 왕이 그것을 끝까지 외면하면 결국 공론을 막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라고 했다. 그래도 신하들은 만족하지 않았다. 바로 또 들어와 영창대군을

죽이고 김제남을 국문하라고 청한다.

 

●5월 30일 정해 12번째 기사

합사하여 이의를 복주시키고 김제남을 엄히 국문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이미 봉작을 삭탈하고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었으니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김제남은 내가 차마

형신(刑訊)9을 가하며 국문하지 못하겠으니 사사(賜死)하라." 하였다.

 

광해군은 자신이 김제남을 친국하는 것이 인목대비와 그 아버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고문을 당하는 모욕을 주느니 차라리 사사시키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역모에 이름이

올라 국문이 시작된 이상 거기서 살아남은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김제남도 이미 5월 6일 광해군 앞에서 진술하면서 “대군이 아무리 어미젖에 매달리는 소아라 할지라도

일단 불측한 이름을 지니게 된 이상 보전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전께서 만약 그를 내보내어

신에게 붙여주신다면 신이 그와 죽음을 함께 하고 싶은데 자전께서 죽음을 같이 하려 하시면서 내어놓지

않으려 하시니 신이 어떻게 주선해 볼 수도 없습니다.”라고 했을 정도로 그의 죽음은 본인조차도 이미

예견하는 일이었다.

 

광해군이 고심의 결단을 내린 다음 날, 이번에는 승지들이 몰려와 폐서인된 영창대군을 궁궐 밖으로 내보낼

것을 재촉한다. 아마도 광해군은 인목대비에 대한 배려때문에 차마 자신의 입으로는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광해군은 빗발치는 신하들의 요구에도 답을 하지 않았다. 6월 12일의 기사를 보면

광해군의 처지가 안쓰럽기까지 하다.

 

●광해 5년 6월 12일 8번째 기사

백관과 종실들이 이의의 일로 연이어 세 차례 아뢰고 홍문관도 잇따라 차자를 올리니, 답하기를,

"내가 공론에 부대끼어 이미 법을 시행하였으니, 지금쯤은 그만 해도 될 것이다.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누가 조선의 왕권이 절대적이었다고 거품을 무는가?

이후 영창대군이 유배가기까지의 과정도 위와 같은 과정을 겪는다. 대표적으로 뽑은 아래의 기사 날짜를 보

면 그 사이에 광해군이 어떤 고통과 고뇌의 시간을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혹시라도 궁금하여 찾아보게

된다면 ‘진절머리’라는 말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5년 6월 16일 6번째 기사

양사가 세 번 아뢰고, 홍문관이 두 번 차자를 올려 이의를 죽이자고 청하니, 왕이 답하기를, "차마 법을

적용하지 못하겠으니, 번거롭게 고집하여 나를 더 걱정하게 만들지 말라." 하였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5년 6월 21일 3번째 기사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세 번째 아뢰면서 이의를 처리할 것을 극력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백관들이 직무를 폐지하고 여러 달 동안이나 굳이 논쟁하고 있으니, 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밤낮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지금 여염으로 내보내 공론에 보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5년 7월 26일 1번 기사

의금부가 아뢰기를,

"이의를 마땅히 역적 이진(李珒)을 처벌했던 예에 의거하여 교동(喬桐)에 안치시키는 것이 합당할

듯한데, 어떤 사람은 강화(江華)가 마땅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강도(江都)로 옮기는 것이 편할 듯하다. 그러나 대신들에게 물어보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이덕형, 행 판중추부사 기자헌, 심희수가 의논드리기를,

"이미 법을 양보하고 은혜를 베풀었다면 교동과 강화가 모두 바다에 있는 섬인데 사정이 다를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삼가 성상께서 처리하소서."

하니, 강도에 안치시키라고 전교하였다.

 

광해군은 궁 밖으로 나가는 영창대군이 안쓰러워 각별한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하고 그것으로 마음이 안 놓였는지

다시 일러, "이의가 나가 있을 곳에 훈련도감 제조가 먼저 가서 살펴보게 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인목대비는 아들인 영창대군과 아버지인 김제남에 내려진 처벌에 대하여 어느 쪽을 더 가슴 아파했을까?

 

[영창대군 묘 : 원래는 남한산성 아래에 안장되어 있었는데 성남시 개발계획에 의해 1971년 현재의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으로 이장하였다.]

 

[영창대군 묘비]

 

 

 

참고 :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인(姻)’은 사위의 아버지를 가리키고 ‘아(婭)’는 사위 간을 가리킨다. 즉 사위 쪽의 사돈과 사위 상호 간, 곧 동서쪽의 사돈을 아울러 이르는 말 [본문으로]
  2. 궁중의 궁녀와 환관(宦官) [본문으로]
  3.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 [본문으로]
  4. 인조실록, 인조 1년 3월 14일 7번째 기사 [본문으로]
  5. 맏아들 이외의 모든 아들 [본문으로]
  6. 본부인이 아닌 여자가 낳은 아들. 서자(庶子) [본문으로]
  7. 형벌을 순순히 받아 죽게 함 [본문으로]
  8. 자신의 과실(過失)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함 [본문으로]
  9. 죄인을 형구(刑具)로 고문하면서 신문(訊問)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조사 방법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