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33 - 숙종의 대계

從心所欲 2020. 3. 10. 08:33

9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한 남인들은 경신환국 때 당한 수난을 잊지 않고 되갚음에 나섰다. 반복되는 환국(換局)에 이제 정치보복은 의례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가장 우선적인 대상은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이 삭탈관작된 이틀 후인 2월 3일, 대사간 이항(李沆)과 정언(正言) 목임일(睦林一)은 숙종에게 송시열의 죄를 이렇게 논박했다.

 

["송시열은 당여(黨與)를 세우고 사론(邪論)을 주창하였는데, 무릇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는, 살육하지 않으면 반드시 귀양을 보내고 금고(禁錮)하여 처치해 버리고야 말더니,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원자(元子)의 정호(定號)는 진실로 마음속에 음특한 계교를 품고 있는 자가 아니면 다른 말이 없어야 마땅한데도, 방자하게도 투소(投疏)하여 인심을 혹란(惑亂)시켰으니, 청컨대 극변(極邊)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소서."] (숙종 15년 2월 3일 4번째 기사)

 

이를 시작으로 송시열에 대한 논박이 이어지면서 숙종은 2월 4일 송시열을 제주에 위리안치 하라는 명을 내린다. 임술고변이라는 정치공작을 주도하였던 김석주는 1684년에 이미 죽은 상태였다. 남인들은 나머지 서인들에 대한 보복에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기사환국을 통하여 남인들은 100명이 넘는 서인을 죽이거나 유배, 삭탈관직 시켰다. 송시열도 결국 국문을 받으러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 정읍현(井邑縣)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고, 노론과 소론이 갈리는 계기를 제공했던 김익훈도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죽었다. 물론 이 모든 일을 주도한 것은 남인이지만 숙종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동안의 사례를 통해서 이미 정권을 교체하는 시점에 숙종도 반대당에 의한 보복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은 어느 정도 예측했을 것이고 새로 가까이 두려는 세력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까지는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숙종은 왜 정국에 큰 혼란을 일으키는 이런 상황을 자초했을까?

 

 

[인현왕후가례도감의궤 중 반차도]

 

[숙종인경왕후가례도감의궤(肅宗仁敬王后嘉禮都監儀軌): 숙종이 세자시절 김만기의 딸 광산 김씨와 가례를 올린 8개월의 과정을 기록한 책, 1책 239장, 어람용, 국립중앙박물관, 도서출판 학선재 영인본]

 

[숙종인경왕후가례도감의궤 中 반차도, 학선재 영인본]

 

송시열의 상소에 대해 숙종의 분노가 컸던 이유는 그만큼 원자의 안위에 대한 위험을 크게 느낀 때문이었다. 숙종이라고 서인들의 국혼물실 내약을 몰랐을 리 없다. 만일 서인들이 국혼물실을 끝까지 이뤄내려 한다면 서인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장옥정이 낳은 원자의 미래도 없는 것이다. 일단은 위협이 되는 서인들을 내쳤는데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숙종은 원자 보호를 위하여 더 큰 그림을 그렸다. 인현왕후가 궁에 남아있는 한 원자가 안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장옥정을 왕비의 자리에 올려 원자의 위치를 확고히 하겠다는 계획이다. 즉, 원자에게 붙은 ‘후궁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당당한 ‘적장자’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흔히 사극에서 인현왕후 민비의 폐출을 숙종과 장희빈 간 치정의 결과물로 묘사하지만 그것은 그냥 드라마일 뿐이다.

 

왕비를 폐출시킨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숙종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숙종 15년 4월 21일 대사헌 목창명(睦昌明)을 비롯하여 홍문관 사간원 등의 간관(諫官) 10여명이 왕을 청대(請對)하여, 송시열의 죄를 논하면서 잡아다가 엄히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남인들은 송시열을 귀양 보낸 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어 기어코 송시열의 목숨을 뺏고야 말겠다는 입장이었다. 간관들이 한창 송시열과 홍치상(洪致祥)의 죄를 논박하고 있는데 듣고 있던 숙종이 느닷없는 말을 꺼냈다.

“궁위(宮闈)에 관저(關雎)의 덕풍(德風)은 없고 투기의 습관이 있어서 병인년 희빈(禧嬪)이 처음 숙원(淑媛)이 될 때부터 귀인(貴人)에게 당부(黨付)하였으며, 분을 터뜨리고 투기를 일삼은 정상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며 인현왕후를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자 우부승지 이시만(李蓍晩)이 "전하께서 신들을 자식처럼 여기시고 신들은 전하를 아버지처럼 섬기고 있습니다. 여염(閭閻)의 가정으로 말하면, 부모가 불화(不和)한데 자식의 마음이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궁위(宮闈) 사이에 미안(未安)한 일이 있더라도 서서히 진정하시면 될 것인데, 이와 같이 드러내어 말하실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고 답했다. 이에 숙종은 "원자(元子)가 탄생하자 더욱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실로 이는 뜻밖이다.’ 하였다“고 덧붙였다.

▶궁위(宮闈) : 중궁(中宮), 즉 인현왕후를 가리킴

▶관저(關雎)의 덕풍(德風) : 주나라 문왕(周文王)의 아내인 태사(太姒)에게 유한(幽閑)하고 정정(貞靜)한 덕이 있음을 찬미하여 지은 시가(詩歌)의 이름이 관저로, 태사(太姒)가 갖고 있던 덕풍을 일컬음.

 

숙종으로서는 어떻게든 인현왕후의 비난에 신하들을 끌어들이고 싶은 욕심에서였겠지만 신하들은 하나 같이 숙종에게 용납하고 참으라는 말로 왕을 위로할 뿐이었다. 이때 신하들이 인현왕후를 폐위시키려는 숙종의 의도를 알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혹 알았더라도 왕비의 폐위문제에는 함부로 끼어들 일이 아니었다. 과거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 사건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지는 그들도 잘 알고 있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숙종이 신하들의 의중을 떠 본 이틀 뒤인 4월 23일은 인현왕후의 생일이었다. 조정 대신들이 왕과 왕비에게 문안을 올리려 하자 숙종은 이를 막았다. 이에 영의정을 비롯한 모든 대신들이 빈청(賓廳)에 모여 "탄일(誕日)에 문안을 올리는 것은 신자(臣子)들의 상례(常禮)인데 성명(聖明)의 처분은 뜻밖에서 나온 것으로, 성심(聖心)이 무엇에 격분되어 갑자기 이런 전교가 있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숙종은 인현왕후의 행실을 탓하며 더 이상 인현왕후를 국모(國母)로 대우하지 말라는 뜻의 답을 내렸다. 이에 대신들이 숙종을 청대하여 왕비의 잘못이 있더라도 감화시켜 나가면 되지 않겠냐고 진언했지만 숙종은 막무가내였다. 이제 대신들은 왕비를 폐위시키려는 숙종의 의도를 확실히 알게 되었고 그 말이 세간에도 전해졌다. 이에 이틀 뒤인 4월 25일, 전(前) 사직(司直) 오두인(吳斗寅)을 비롯한 86명이 ‘부모가 화평하지 않으면 자식들이 편하지 못하니 혹 왕비의 처사가 왕의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폐절(廢絶)은 하지 마시라’는 취지의 상소를 올렸다. 상소를 들은 숙종은 승정원에 숙직하고 있는 승지를 급히 부른 뒤 내관에게 상소를 가져오게 하여 승지에게 읽어보라고 시켰다. 승지에게 전해진 상소는 숙종이 분노하여 내려친 까닭에 찢어져 있었다. 숙종은 승지에게 상소를 읽은 소감을 물은 뒤 "인정전(仁政殿) 문에다가 친히 국문할 형구(刑具)를 설치하라. 3경(更)까지 제대로 못하면 승지는 무거운 견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지시했다. 아울러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후(閔鎭厚)형제를 잡아다 엄히 국문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그리하여 자다 말고 달려온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한밤중에 횃불을 밝히고 직접 국문을 진행하였다. 숙종이 문제를 삼은 부분은 상소문에서 논지를 강조하기 위해 동원된 몇 가지 문구에 불과했음에도 숙종은 상소의 주동 인물인 오두인, 이세화(李世華), 박태보(朴泰輔) 등을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기세로 각종 고문을 동원하여 혹독한 형문(刑問)을 벌였다. 우의정 김덕원(金德遠)이 사전 심문 없이 바로 형장(刑杖)을 가하는 것은 법의(法意)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현장에서 바로 파직될 만큼 숙종은 노기등등했다. 국문 후 상소문의 소두(疏頭)였던 오두인의 의주에, 상소문 집필자였던 박태보는 진도에 각기 위리 안치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하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오두인은 의주로 가는 길에 파주에서 죽고, 박태보는 서울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숙종은 5월 2일 전격적으로 인현왕후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인현왕후는 그 날로 궁을 나와 친정으로 돌아갔다. 숙종은 5월 6일 장옥정을 왕비로 삼겠다는 전지(傳旨)를 내렸다. 하지만 장옥정이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된 것은 다음 해인 숙종16년 10월이나 되어서였다. 그 사이 복식문제에 휘말려 예송의 중심에 섰던 인조의 계비(繼妃) 장렬왕후(莊烈王后)가 죽어 상중(喪中)에 책례(冊禮)를 치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원자는 이 해 6월에 이미 세자로 책봉된 상태였다.

숙종은 장옥정의 선조 3대에게 정승을 추증(追贈)한데 이어 장옥정의 아버지 장형에게는 시호(諡號)까지 내렸다. 장옥정의 집안은 중인에서 양반으로 완전한 신분 상승을 하게 된 것이다. 남인들은 장옥정의 오빠인 장희재와 손을 잡았다. 장옥정의 앞날은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숙종의 서인에 대한 분노도 여전한 가운데 그렇게 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던 숙종20년인 1694년 3월, 숙종이 대신들을 불러 만난 자리에서 우의정 민암(閔黯)이 한 무리가 재물을 모아 간악한 짓을 시행하려는 계획을 만들고 있다는 말을 함이완(咸以完)이란 자를 통하여 들었는데 의금부를 통하여 조사해보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말하자 숙종은 허락하면서 특별히 엄한 형벌을 써서 조사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함이완은 이전의 척신 김석주의 가인(家人)이었다. 의금부 조사결과 숙종의 전 장인인 김만기의 손자 김춘택 등이 장옥정을 축출하고 민비를 복위시키려 한다는 모의가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후 이른 아침에 갑자기 김인(金寅) 등 3인이 궁으로 들어와 고변서(告變書)를 올렸는데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가 사람을 사주하여 최숙원(崔淑媛)을 독살하려했다는 것과 신천 군수(信川郡守) 윤희(尹憘) 등이 반역을 도모하는데 여기에 남인 재상인 민암, 목창명 등이 연루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최숙원은 영조의 생모다. 숙종 19년 4월에 숙원(淑媛)에 봉해진 사실로 미루어 숙종은 이때 최숙원을 한창 총애하던 때로 보인다. 특히 고변이 있기 반년 전에는 최숙원이 아들을 낳았다가 두 달 만에 죽은 일이 있었다.

 

두 고변 중 하나는 서인을 공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인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후세는 두 고변이 각기 남인과 서인의 조작으로 보는데, 이를 따른다면 남인이 서인을 모함하여 공격하자 궁지에 몰린 서인이 남인에게 역공을 펼친 셈이 되는 것이다. 남인이 집권하고 있는 상황이라 서인의 반격은 무위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날 저녁 국청(鞫廳)에 참여했던 신하들이 왕에게 김인 일당의 신문결과를 보고하면서 고변내용의 모순을 말하자 숙종도 그에 수긍했다. 함이완의 고변은 사실로, 김인의 고변은 무고로 정리돼 가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인 숙종 20년 4월 1일 숙종은 늦은 밤에 “국문에 참여한 대신(大臣) 이하는 모두 관작을 삭탈하여 문외(門外)로 출송하고, 민암과 의금부 당상은 모두 절도(絶島)에 안치하라."는 전격적인 내용의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다. 남인 영의정, 좌의정, 대사헌을 비롯한 14명을 삭탈관직시키고 우의정 민암을 포함한 8명을 귀양 보낸 것이다. 숙종이 승지 전원과 삼사(三司) 전원을 파직시키거나 유배 보낸 것은 자신이 내린 조치에 대한 간쟁 자체를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어 서인 남구만(南九萬)을 영의정으로 삼고 병권 장악을 위하여 병조판서와 훈련대장도 각기 서인 인사로 갈아치웠다. 문관 인사권을 갖는 이조판서도 서인을 임명하고 이어 후속 인사와 조치를 그날 밤에 모두 일사분란하게 처리하였다. 이것이 서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는 숙종 20년의 갑술환국(甲戌換局)이다.

일설에 의하면 숙종이 최숙원에게 독살설의 진위 여부를 물었는데 최숙원이 이를 사실이라고 인정함으로써 숙종이 남인을 몰아낼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것도 인경왕후의 아버지인 김만기의 손자 김춘택이 평소 최숙원에 연을 넣어 공작한 결과라는 것이다.

 

갑술환국으로 100명이 넘는 남인들이 또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숙종 연간의 잦은 환국은 사대부들에게는 생사가 오가는 고난의 사건들이었다. 이를 숙종의 변덕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숙종으로서는 자위를 위한 결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환국은 또한 숙종에게는 왕권을 강화하는 방편이 되기도 했다. 초기에는 숙종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일부러 환국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지만 재임 20년 때의 갑술환국에 이르러서는 숙종도 환국이 가져오는 왕권 강화의 긍정적 효과도 어느 정도는 의식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사실 숙종이 혼자만의 결정으로 한밤중에 정권을 갈아치울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왕권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의 왕들은 끊임없이 신하들의 견제를 받았다. 조선의 왕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지만 실상은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이기도 했다. 그런 조선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패도적(霸道的)인 왕의 모습을 숙종이 드러낸 것이다.

 

 

 

참고 :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