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45

조선의 당쟁 25 - 한당 산당

우리가 접하는 조선의 역사는 왕의 역사이고 집권계급인 사대부의 역사이다. 그래서 우리가 배우는 역사에서 일반 백성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기는 쉽지 않다. 질고에 시달려 저항하는 백성들의 삶은 도주, 유망, 도적, 폭도 등으로 표현되어 집권계층인 자신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집단으로 묘사되기 일쑤다. 집권층인 사대부와 관료들은 늘 백성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정작 저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는 일은 늘 자신들의 명분이나 이익에 관한 것이지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일은 없었다. 그런 조선 역사에서 딱 한 번 백성에 대한 정책 문제로 사대부가 갈라선 적이 있었다. 공납(貢納)은 각 지역에 토산물을 할당하여 국가의 수요품을 조달하는 제도로 정식 이름은 공물상납제도 (貢物上納制度)이다. 공납에..

조선의 당쟁 2020.02.04

조선의 당쟁 24 - 능양군 이종

인조정란 주도 세력들은 광해군에게 36가지에 달하는 죄목을 들이댔는데 그 중에서도 명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잊고 오랑캐인 후금과 가까이 한 것을 큰 죄로 꼽았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단순히 서인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광해군 때의 대북세력도 마찬가지였고 어쩌면 조선 전체 사대부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했다. 인조와 조정의 실권을 잡은 서인들은 광해군이 강홍립을 통하여 후금과 연결해 놓은 핫라인을 끊어버리고 친명배금 노선을 취하였다. 지피지기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차버린 것이다. 후금에서는 1626년 9월 누르하치가 죽고 누르하치가 낳은 16명의 아들 가운데 8번째 아들인 홍타이지(皇太極)가 그의 뒤를 이어 2대 칸[汗]이 되었다. 뒤의 청태종(淸太宗)이다. 홍타이지는 즉위 전부터 조선에 대한 ..

조선의 당쟁 2020.01.31

조선의 당쟁 23 - 고군분투

중종이 정란을 일으킨 신하들에 의하여 옹립된 왕인 반면, 인조는 자신이 직접 거사를 주도하여 왕이 되었다. 인조정변에 대해 기술된 주요 사료는 《인조실록》과 이긍익이 지은『연려실기술』1이다. 이들 기록들은 모두 광해군의 실정으로 인조정란이 일어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인조를 포함한 역모세력은 도끼로 돈화문을 부순 뒤 궁궐로 쳐들어갔고 정변이 성공했다는 확신이 들 무렵 궁궐에 불을 질렀다. 정변에 나서면서 가족들에게 ‘궁궐에 불길이 보이지 않으면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자결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집을 나섰기 때문에 궁궐에 불을 질러 자신들의 정변 성공을 알리려는 의도였다고 자신들이 쓴 실록에 기록하였다. 정변 세력은 광해군의 패륜과 실정을 정변의 이유로 앞세웠지만 사실은 각자 자신들이 처해있던 상황에 따라 ..

조선의 당쟁 2020.01.28

조선의 당쟁 22 - 능과 묘

이미 베어놓은 나무 때문에 생각지도 않게 인경궁 건축의 규모가 커지게 되자, 인경궁이 들어설 자리에 있는 가옥을 철거하고 그 곳의 주민들을 이주시켜야 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대하여 인목대비는 물론 사관들도 궁궐을 짓느라 광해군이 수천 채의 민가를 철거했다고 비난했다. 이 말을 들으면 마치 광해군이 왕권을 이용하여 민가를 마구잡이로 그것도 무자비하게 헐어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서인들이 기록한 실록에 따르더라도 광해군이 취한 조치는 근대의 청계천 주민 이주나 용산 재개발지역 주민 이주 때보다도 훨씬 더 세심했다. ●광해군일기, 광해 9년(1617) 3월 19일 6번째 기사 전교하였다. "이궁(離宮)의 담장 안에 사는 백성들의 가사(家舍)와 그 구입 원가에 대해 상세히 숫자를 헤아려서 서계하라. ●광해..

조선의 당쟁 2020.01.21

조선의 당쟁 21 - 인경궁의 진실

광해군은 1610년에 창덕궁, 그리고 1616년에는 창경궁의 중건을 마쳤다. 순서대로라면 다음은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을 중건할 차례다. 그런데 광해군은 경복궁을 재건하는 대신 인왕산 밑에 인경궁(仁慶宮) 건설을 시작하고 나중에 경희궁이 된 경덕궁(慶德宮) 공사도 거의 동시에 시작한다. 이 두 궁궐 건축을 꼬투리로 서인들은 광해군에게 ‘무리한 궁궐건축으로 정란을 자초한 폭군’이란 올가미를 씌우는데 성공했다. 서인들의 프레임은 대략 여섯 가지다. 1) 불필요한 인경궁을 대규모로 건축하려 했다. 2)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말을 듣고 시기하여 그 자리를 뺏어 경덕궁을 지었다. 3) 무리하게 두 궁궐 건축을 동시에 진행하여 백성의 고초가 심했다. 4) 수천 채의 만가를 철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5) 궁..

조선의 당쟁 2020.01.19

조선의 당쟁 20 - 가짜뉴스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두 채의 궁궐을 건축하면서 10년 동안 토목공사를 그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버려 1593년 10월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왕족의 사저(私邸)로 쓰이던 곳을 궁으로 개조하여 그곳에서 15년간을 지냈다. 선조가 죽을 때까지도 선조가 지내던 곳의 명칭은 정릉동 행궁이었다. 행궁(行宮)이란 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물던 별궁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조선의 왕이 자기 거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상황이었다. 태조3년에 창건된 경복궁, 태종 11년에 창건한 창덕궁, 성종15년에 창건한 창경궁까지 선왕들이 세워놓은 3개의 궁을 임진왜란 때 선조가 다 태워먹었다. 선조는 미안해서 궁을 다시 짓지 않고 정릉동..

조선의 당쟁 2020.01.15

조선의 당쟁 19 - 서궁과 대비

모든 역사 기술은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비시켰다는 점을 과장되게 부각하여 광해군을 폭군으로 몰아 세우고 있다. 500년 가까운 이 정치적인 억지 프레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광해군은 죽어서도 억울하기만 할 것 같다. 인목대비의 친정 아버지인 김제남과 관련된 인물들을 국문하는 중에 ‘선조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인목왕후와 김제남이 의인왕후의 능인 유릉(裕陵)에 무당들을 잇달아 보내어 저주(咀呪)하였다‘는 진술이 나왔다. 의인왕후(懿仁王后)는 선조의 첫 번째 왕비로 1600년에 사망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목대비의 궁 안에서도 ’차마 듣지도 말하지도 못할 일들’이라고 표현된 저주의 무술(巫術) 행위가 있었다는 진술도 나왔다. 물론 후세의 서인 사관들은 이 진술이 모두 꾸며낸 것이라고 《광해군일기》 기사에 사론(史..

조선의 당쟁 2020.01.11

조선의 당쟁 18 - 효와 패륜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는 아무리 신하들의 압박이 심했더라도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끝까지 보호해주었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광해군이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뜻을 고집했다면 후세는 또 그를 어떻게 평가했을 것인가? 이미 그런 단초는 광해군이 영창대군의 처벌과 김제남의 국문을 계속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자 성균관의 유생들이 올린 상소에도 나타난다. “역적 의(㼁)가 비록 어린 아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흉도의 귀중한 이용물이 된 나머지 그를 왕으로 옹립하기로 했다는 설이 적도의 공초(供招)1에 낭자하게 나왔으니 이런 대역(大逆)의 이름을 몸에 지니게 된 이상 천지 사이에 용납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지친(至親)이라는 연고와 우애하는 정 때문에 시일을 ..

조선의 당쟁 2020.01.09

조선의 당쟁 17 - 패자의 변명

1623년 3월 13일 밤, 이귀, 심기원, 최명길, 김자점, 이괄 등의 서인들은 병력 600∼700명과 함께 홍제원에 모여 김류(金瑬)를 대장으로 삼고, 능양군도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고양 연서역(延曙驛)에 나아가 장단부사 이서(李曙)의 병력 700여명과 합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능양군은 그날로 창덕궁에서 보새(寶璽)를 거두어 경운궁에 유폐중인 인목대비에게 바친 후 다시 그 보새를 돌려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다음 날인 3월 14일, 인목대비는 인조의 즉위와 광해군의 폐위에 대한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하늘이 만백성을 내고 그 중에다 임금을 세운 것은, 대개 인륜을 펴고 기강을 세워 위로는 종묘를 받들고 아래로는 온 백성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이다. 선조 대왕께서 불행히도 적사(嫡嗣)가 없..

조선의 당쟁 2020.01.07

조선의 당쟁 16 - 승자의 기록

흔히 역사를 승자(勝者)의 기록이라고 한다. 물론 기록은 패자도 남길 수 있다. 하지만 승자의 권세가 살아있는 한, 세상에서 인용되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그리고 승자의 영향력이 지속되는 한 그 기록은 계속 반복되어 인용되고 재생산되면서 패자의 기록을 반박하는 논리까지 보강되어 어느 순간 반박불가의 정사(正史)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면 패자의 역사는 그 세월 속에서 무시되고 부정되면서 야사(野史)로 전락한다. 만일 우리가 아직도 일제 치하에 있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지금 어떻게 전해지고 있을까? 만일 지금까지 군부독재가 계속되었다면 5·16 쿠데타는 어떻게 미화되고 5·18 민주항쟁은 어떻게 폄훼되었을까?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년) 1월 4일 3번째 기사 사헌부가 아뢰기를, "근..

조선의 당쟁 2020.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