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45

조선의 당쟁 15 - 대북, 소북

선조실록에 의하면 1592년 6월 13일 분조(分朝)가 결정됨으로 해서 광해군은 그 다음날인 6월 14일부터 분조를 이끌고 선조가 머물고 있는 의주를 떠났다. 영의정 최흥원(崔興源)과 형조판서, 좌찬성 등 10여명의 대신이 분조를 따랐다. 광해군은 평안도의 맹산(孟山), 양덕(陽德), 황해도의 곡산(谷山)을 거쳐, 7월 9일 강원도 이천(伊川)에 도착해 이곳에서 20일간 머물렀다. 광해군은 각 처의 장수들과 의병장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독려하고 공을 칭찬하고 또 상과 관직을 내렸다. 그러다 왜구의 위협이 가까워지자 다시 황해도와 평안도 성천을 거쳐 영변에 머물며 분조를 이끌어갔다.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면서 자리가 빈 고을의 수령(守令)을 임명하고, 지방관들이 올린 상소와 보고를 처리하고, 무장들 사이의 갈..

조선의 당쟁 2019.12.31

조선의 당쟁 14 - 선조의 몽진기

설민석 강사는 TV강의에서 왜군이 조선에 쳐들어와서 당황한 것 중의 하나가 조선에 군사가 없는 것과 왕이 성을 버리고 도망간 일이라고 하였다. 선조가 의주로 파천(播遷)한 일은 이승만이 6·25전쟁 발발 다음 날 새벽 기차타고 피난 간 사건과 더불어 국가 지도자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사례로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선조가 피신하며 시간을 번 덕에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와 왜적과 대항할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 선조가 계속 한양에 남아있었다면 왜군이 한양을 점령한 순간 왜구의 한반도 지배가 300년 앞당겨 일어났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선조실록≫ 에는 선조의 몽진(蒙塵)1 행적을 엿볼 수 있는 기사들이 꽤 있다. 기사 중에는 선조가 일국의 왕인지 아니..

조선의 당쟁 2019.12.28

조선의 당쟁 13 - 향리, 양인 그리고 양반

아전(衙前)이라고도 하고 향리(鄕吏)라고도 한다. 대표적 직책이 이방(吏房)이다. 조선시대 지방행정은 각 고을 수령의 책임이었지만, 수령은 지역과 실무에 어두웠기 때문에 실제로 모든 실무는 향리라고 하는 이들에 의해 집행되었다. 향리는 요즘으로 치면 군이나 읍과 같은 지방자치 단체의 민원담당 일선공무원이다. 그러나 이들은 지방의 하급 관리이기는 하지만 품계가 있는 벼슬아치가 아니라 벼슬아치를 돕는 구실아치다. 향리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전국의 20여 호족(豪族)들과 정략결혼을 해야 할 만큼 초기에는 그 세력이 확고하지 못했다. 호족은 몰락한 중앙귀족과 촌주(村主)와 같은 토착세력, 그리고 지방의 군사적인 무력을 가진 군진(軍鎭)세력들이 신라 말기에 농민반란을..

조선의 당쟁 2019.12.26

조선의 당쟁 12 - 자비국방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된 조선의 군제(軍制)에 의하면 갑사 1만4800명을 비롯하여 지방군인인 정병(正兵) 7만2천명, 수군 4만8,800명 등으로 조선의 군제는 총 14만8천명으로 되어있다. 편제상 그렇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갑사(甲士)란 조선 초기의 유력자들이 보유하였던 사병(私兵)을 혁파하여 태종 때부터 왕권 호위를 담당하도록 특수 병종으로 제도화시킨 군대다. 이들은 입직(入直)과 한양의 시위(侍衛)를 담당하게 되면서 중앙군의 성격을 띠게 되었는데, 세조 때에 이르러 이들 중앙군은 오위(五衛)1제도로 정비되었다, 오위는 전국의 진관(鎭管)에 있는 지방군을 지휘, 감독, 훈련하는 일도 담당하였다. 즉, 오위는 중앙군 조직이면서, 지방군의 상급 조직인 동시에 변경의 방비까지 담당하는 정예병이기도..

조선의 당쟁 2019.12.23

조선의 당쟁 11 - 가난한 나라

이이가 ‘이탕개의 난’ 중에 올렸던 ‘시무육조’ 상소의 앞머리 부분은 십만이라는 숫자만 없을 뿐 후세에전하는 십만양병설과 기본 맥락은 같다. 병조 판서 이이(李珥)가 아뢰었다. “우리 나라가 오래도록 승평(昇平)을 누려 태만함이 날로 더해 안과 밖이 텅 비고 군대와 식량이 모두 부족하여 하찮은 오랑캐가 변경만 침범하여도 온 나라가 이렇게 놀라 술렁이니, 혹시 큰 적이 침범해 오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어떻게 계책을 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옛말에, 먼저 적이 나를 이기지 못하도록 대비한 다음에 적을 이길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라고 하였는데, 지금 우리 나라는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어 적이 오면 반드시 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한심하고 간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더구나 ..

조선의 당쟁 2019.12.19

조선의 당쟁 10 - 임진왜란에 대한 오해

임진왜란이 나기 전인 1590년 통신사로 파견되었던 일행이 돌아와 각각 상반된 보고를 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서인(西人)인 정사(正使) 황윤길은 “앞으로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 보고했고, 동인(東人)인 부사(副使) 김성일은 “전혀 그런 조짐이 없다”고 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의하면 이때 유성룡이 김성일을 만나 “그대가 말한 것이 황윤길과 다르니 만일 병화가 있으면 어떻게 하려는가?”라고 물으니, 김성일이 “나도 어떻게 왜군이 끝끝내 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야 있겠습니까. 다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지나쳐 꼭 왜놈들이 우리 사신들의 뒤를 바로 쫓아오는 것 같아, 중앙이나 지방이 놀라고 당황할 것 같으므로 이와 같이 말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국가의 안위와 직결된 ..

조선의 당쟁 2019.12.16

조선의 당쟁 9 - 역전 또 역전

정여립의 반란 모의 사건으로 시작된 기축옥사(己丑獄事)는 사건 처리 방식에 대한 선조의 분노가 컸던 만큼 1591년까지 3년을 끌며 동인(東人)에게 커다란 피해를 주었다. 조선의 야사(野史) 총서(叢書)라 할 수 있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큰 변고가 일어나니, 서인들이 기뻐 날뛰고 동인들은 기운을 잃었다. 이것은 앞서 임금이 서인을 싫어하여 이산해(李山海)를 이조 판서 자리에서 10년 동안이나 두는 사이에 서인들은 모두 한산(閑散)한 자리에 있게 되어 기색이 쓸쓸하더니, 여립(汝立)의 역변이 일어난 후에는 갓을 털고 나서서 서로 축하하였으며 동인들은 스스로 물러나고, 서인은 그 자리에 올라서 거리낌 없이 사사로운 원한을 보복하였다. 기축옥사는 이처럼 동인들을..

조선의 당쟁 2019.12.06

조선의 당쟁 8 - 선조의 변덕

이이는 대유학자이자 고결한 성품의 인격자로서 살아있을 때도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평생 벗어버리지 못한 커다란 허물이 있었다. 19세에 금강산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던 경력이다. 1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데다, 뒤이어 아버지가 맞은 서모(庶母) 때문에 가정의 불화가 잦자, 어머니의 상을 치르고 3년간 시묘(侍墓)한 뒤 출가를 했다. 승려로 지낸 기간은 비록 1년 정도에 불과했고, 절에서 나온 후에 을 지어 승려가 되었던 일을 반성했다. 배불(排佛)을 내걸었던 조선시대의 승려는 국가의 크고 작은 공사의 부역에 제일 먼저 차출되고 도성 안의 출입이 금지될 만큼 국가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계층이었다. 따라서 이이의 ..

조선의 당쟁 2019.10.20

조선의 당쟁 7 - 중재자 이이

당시 율곡 이이(李珥, 1536 ~ 1584)는 사림(士林)의 영수로 여겨질 만큼 많은 사대부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들었었다. 여기에는 이이에 대한 선조의 절대적인 신임도 한 몫을 했다. 선조는 학문이 높은 이이를 깊이 존경했었다. 이제 사림이 정권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이상적인 도덕 정치를 펼칠 때라고 생각했던 이이는 사림이 두 편으로 갈라지는 것을 봉합하기 위하여 나섰다. 이이는 서로 감정이 격해 있는 심의겸과 김효원을 지방으로 보내면 분쟁이 수그러들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좌의정인 노수신(盧守愼, 1515 ~ 1590)을 만나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다. 노수신 또한 사림의 분당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터라 이이의 의견에 찬성하여 두 사람은 임금 앞에 나아가 심의겸과 김효원을 외직(外職)으로 보낼 것을..

조선의 당쟁 2019.10.11

조선의 당쟁 6 - 갈라진 사림

전랑(銓郎)1은 조선시대 문무관의 인사행정을 담당하던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정5품 정랑(正郎)과 정6품관인 좌랑(佐郎)직의 통칭이다. 조선시대에는 무관(武官)보다는 문관(文官)이 더 우대되고 중시되었으므로 병조보다는 이조전랑이 더 중시되었다. 전랑에 대한 직제는 태종 때 직제를 고쳐 정랑과 좌랑을 각각 3원(員)으로 정했고 이는 뒤에 『경국대전』에도 법제화되었다. 조선은 관리 임용의 권한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1품의 삼정승이 소속된 의정부에 있지 않고 이조에 속해 있었다. 따라서 인사권을 가진 이조의 수장인 이조판서가 어떤 면에서는 삼정승보다 더 큰 권한을 누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조판서의 전횡을 방지하기 위하여 삼사(三司) 관리의 추천권은 이조판서가 아닌 이조전랑에게 그 전권을 주었..

조선의 당쟁 2019.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