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의 죽음이 서인에게 꼭 반가운 일만은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숙종으로부터 시한폭탄을 건네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세자가 왕위에 오른 후 연산군 때 폐비 윤씨로 인해 일어났던 사화와 같은 대참사가 다시 재현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정치 경험이 많고 노회한 인물이 많은 노론에서는 세자가 왕이 되는 것을 바랄 리가 없었다. 장희빈이 죽은 해인 1701년 숙종은 41세, 장희빈이 낳은 세자는 14세, 숙원 최씨가 낳은 연잉군은 8세, 후궁 명빈 박씨가 낳은 연령군은 3세였다. 어쩌면 노론은 이때 이미 암묵적으로 숙원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을 세자의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장 세자의 즉위를 염려하여 움직일 상황은 아니었다. 1702년에 두 번째 계비의 자리에 오른 인원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