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45

조선의 당쟁 35 - 청정(聽政)

장희빈의 죽음이 서인에게 꼭 반가운 일만은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숙종으로부터 시한폭탄을 건네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세자가 왕위에 오른 후 연산군 때 폐비 윤씨로 인해 일어났던 사화와 같은 대참사가 다시 재현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정치 경험이 많고 노회한 인물이 많은 노론에서는 세자가 왕이 되는 것을 바랄 리가 없었다. 장희빈이 죽은 해인 1701년 숙종은 41세, 장희빈이 낳은 세자는 14세, 숙원 최씨가 낳은 연잉군은 8세, 후궁 명빈 박씨가 낳은 연령군은 3세였다. 어쩌면 노론은 이때 이미 암묵적으로 숙원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을 세자의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장 세자의 즉위를 염려하여 움직일 상황은 아니었다. 1702년에 두 번째 계비의 자리에 오른 인원왕..

조선의 당쟁 2020.03.17

조선의 당쟁 34 - 사씨남정기

집권을 한 서인들은 남인들에게 자신들이 당한 것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함이완으로 하여금 역모를 고변하도록 자리를 깔았던 우의정 민암과 그 아들 민종은 물론 함이완도 사형 당했다. 갑술환국 후 1년 동안 남인들은 14명이 사형되고 67명이 유배되었고 삭탈관작, 파직 등의 벌을 받은 인원도 50명이 넘었다. 이 와중에 남인의 역모를 고변했던 김인도 역시 사형당하고 같이 고변에 참여했던 다른 두 사람은 유배되었다. 이들이 남인의 역모를 고변하고도 처벌을 받은 이유는 서인들의 선제적 자기 방어적 조치 때문이었다. 새로 영의정에 임명된 남구만은 숙종에게 국문이 계속되면 무고한 사람이 희생될 수 있다는 이유로 고변 사건을 조속히 마무리 지을 것을 건의하고 허락을 받아냈다. 이들의 고변은 남인들이 주도한 국문 과정에..

조선의 당쟁 2020.03.13

조선의 당쟁 33 - 숙종의 대계

9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한 남인들은 경신환국 때 당한 수난을 잊지 않고 되갚음에 나섰다. 반복되는 환국(換局)에 이제 정치보복은 의례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가장 우선적인 대상은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이 삭탈관작된 이틀 후인 2월 3일, 대사간 이항(李沆)과 정언(正言) 목임일(睦林一)은 숙종에게 송시열의 죄를 이렇게 논박했다. ["송시열은 당여(黨與)를 세우고 사론(邪論)을 주창하였는데, 무릇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는, 살육하지 않으면 반드시 귀양을 보내고 금고(禁錮)하여 처치해 버리고야 말더니,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원자(元子)의 정호(定號)는 진실로 마음속에 음특한 계교를 품고 있는 자가 아니면 다른 말이 없어야 마땅한데도, 방자하게도 투소(投疏)하여 인심을 혹란(惑亂)시켰으니, 청컨대 극..

조선의 당쟁 2020.03.10

조선의 당쟁 32 - 국혼물실

1623년 인조정란을 통하여 다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내부적으로 미래 정국 운영에 대한 두 가지 중대한 방침을 세웠다. 국혼물실(國婚勿失)과 숭용산림(崇用山林)이다. 국혼은 임금, 왕세자, 왕자, 공주, 왕세손 등 왕실의 결혼을 뜻하는 것이지만 ‘국혼을 잃지 않는다‘는 국혼물실의 의미는 ’왕비는 반드시 서인에서 낸다‘는 것이다. 산림은 향촌에 은거해 있으면서 학덕을 겸비하여 유림(儒林)의 추앙을 받는 인물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한다는 것이 숭용산림이다. 두 가지 모두 자신들의 향후 정치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국왕으로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높은 권위를 지닌 인물을 전면에 내세워 국왕과 그 주변 세력에 대하여 사대부의 입장을 강력히 반영하도록 하는 한편 서인가문에서 왕비를 ..

조선의 당쟁 2020.03.07

조선의 당쟁 31 - 노론 소론

예송논쟁으로 귀양 갔다가 풀려난 이후 송시열은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은 상황에서도 관직에 나오기를 삼갔다. 숙종이 여러 차례 직접 사람을 보내어 관직에 나올 것을 요청했으나 그는 번번이 사양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정치에서 완전히 물러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서인들로부터 대로(大老)라는 존칭으로 불릴 정도로 송시열은 여전히 서인의 실질적 영수 자리에 있는 인물이었다. 임술고변이 있기 3달 전인 숙종 8년 7월에도, 서인 영의정 김수항의 건의로 숙종은 송시열을 부르는 유시를 내리면서 박세채, 이상, 윤증도 함께 서울로 불렀다. 박세채(朴世采, 1631 ~ 1695)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송시열의 손자 송순석이 그의 사위였다. 이상(李翔, 1620 ~ 1690) 역시 송시열을..

조선의 당쟁 2020.03.05

조선의 당쟁 30 - 공작정치

공작정치(工作政治). 현대 정치에나 어울릴 듯한 이 말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김석주였다. 1680년의 경신환국으로 남인 정권을 몰아낸 김석주는 숙종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 우의정으로서 호위대장을 겸직하며 권력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허견의 옥사 때 1백여 명 이상의 남인들을 처형하고 유배 보낸 것만으로는 미흡하다고 느꼈는지 김석주는 경신환국 때 살아남은 복평군과 남인의 잔여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숙종 8년인 1682년 10월, 갑자기 연달아 세 건이나 역적모의가 있다는 고변이 들어왔다. 후세에 ‘임술삼고변(壬戌三告變)’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임술년 10월 21일 김환(金煥)이 남인 유생(儒生) 허새(許璽) 등이 복평군(福平君)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몄다고 고변했고 그..

조선의 당쟁 2020.02.26

조선의 당쟁 29 - 패가망신

“잘 나갈 때 조심하라.”는 옛말이 있고, “여차하다 한방에 훅 간다.“는 요즘말도 있다. 숙종 즉위 이래 7년 가까이 남인은 서인을 물리치고 별 어려움 없이 정권을 주도하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남인 허적이 그 기간 내내 영의정 자리에 있을 만큼 남인의 입지는 탄탄한 것처럼 보였다. 남인 내에서 소위 청남으로 불리는 허목, 윤휴, 권대운 등은 여전히 송시열의 처벌 수위를 높이고 서인의 나머지 세력에 대한 처벌을 도모했지만 국정을 운영하는 허적을 비롯한 탁남 입장에서는 문제를 시끄럽게 만들기를 원하지 않았다. 숙종 6년(1680년) 3월, 숙종은 71세가 된 영의정 허적에게 안석(案席)과 지팡이를 내려 주었다, 안석과 지팡이는 궤장(几杖)이라는 물품인데 70세 이상의 연로한 대신들에게 왕이 내리던 하사..

조선의 당쟁 2020.02.19

조선의 당쟁 28 - 남인의 득세

현종이 죽자 13세의 어린 세자 숙종이 조선의 19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숙종은 즉위하자 송시열을 원상(院相)으로 삼고자 하여 한양으로 부르면서 효종의 능지(陵誌)를 지었던 송시열에게 현종의 능지를 지어 올리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자 송시열은 자신이 "(복제 때에) 범죄를 한 것이 지극히 중하여 서울 가까운 곳에서 대죄(待罪)한 지가 이미 한 달이 되었습니다. 선침(仙寢)이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어찌 차마 갑자기 무죄로 자처하면서 임금 계신 곳에 드나들 수가 있겠습니까?"하며 이를 사양하였다. 그런 와중에 진주의 곽세건(郭世楗)이라는 유학(幼學)이 상소를 올렸다. 송시열이 두 번에 걸쳐 복제를 잘못 정한 주범이고 이를 바로 잡은 것이 현종인데, 그런 죄인 송시열로 하여금 현종의 능지를 쓰게 하는..

조선의 당쟁 2020.02.13

조선의 당쟁 27 - 대비의 상복

조선은 건국 때부터 유학(儒學)을 국가의 학문으로 삼았다. 유학은 춘추전국시대의 유학에서 한당(漢唐)의 훈고학(訓詁學), 송명(宋明)의 성리학을 거쳐, 청(淸) 때에는 고증학 으로 변모하였다. 조선은 그 중에서도 특히 주자의 이기철학(理氣哲學)을 형이상학적 원리로 삼는 성리학(性理學)에 심취했다. 성리학은 그 학문 자체가 목적이 아닌 학문이다. 성리학은 유학 본래의 목적 실현을 위해 먼저 철학적으로 그 근거를 규명하는 학문이다. 즉, 유학의 목적은 윤리 도덕적 완성이고 이는 유학의 근본정신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을 통하여 실현되는데, 성리학은 수기치인을 위한 방법론에 관한 학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성리학은 중국 송(宋)대에 공자와 맹자의 유교사상을 ‘성리(性理), 의리(義理), 이기(理氣)’ 등의 형..

조선의 당쟁 2020.02.11

조선의 당쟁 26 - 일장춘몽

효종이 왕에 오르기 전의 호칭은 봉립대군(鳳林大君)이다. 봉림대군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첫째 아들인 소현세자와는 일곱 살 차이로, 두 사람은 모두 병자호란 때 중국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 심양과 북경에서 같이 8년을 지냈지만, 두 왕자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소현세자는 당시 청에 유입된 서양 문물과 사상에 큰 관심을 가졌고 직접 아담 샬과 같은 서양 신부를 만나 교류도 했다. 또 실질적 조선의 외교적 창구가 되어 청과 담판하고 조정하는 중에 청나라 조정의 신임을 얻으면서 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반면 봉림대군은 서양 문물에 경탄하거나 특별한 관심도 없었고 반청(反淸)의 감정을 갖고 있었다. 이런 두 왕자의 소식은 역관과 사은사를 통하여 조선의 조정에 전해졌고 청나라에 치욕을 당한 인조는 소현세..

조선의 당쟁 2020.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