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21 - 초의선사

從心所欲 2018. 6. 3. 14:29

 

추사가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 명을 받은 것은 1840년 9월 2일이었다. 명을 받고 가능한 급히  행장을 꾸려

떠났겠지만 유배지로 떠난 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 않는다. 추사의 유배지로 가는 길은 전주→ 남원→ 나주→

해남을 거쳐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 화북진항으로 들어가 거기서 다시 80리 떨어진 제주 최남단 대정현에

이르도록 행로가 잡혀 있었다. 쉬지 않고 가도 한달은 족히 걸리는 길이다.

완당의 유배길에는 의금부 관리인 금오랑(金吾郞)1이 행형관으로 동행하고 집 머슴이 완도까지 따라갔다.

스산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국문을 받은 몸을 이끌고 유배 길에 오른 추사는 당시의 심정을 벗 권돈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밝혔다.

 

'행실치고 조상에게 욕이 미치게 하는 것보다 더 추한 것이 없고, 그 다음은 몸에 형구(刑具)가 채워지고 매를

맞아서 곤욕받는 것인데, 나는 이 두 가지를 다 겸하였습니다. 40일 동안에 이와 같은 참독(慘毒)을 만났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혹시라도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완당선생전집 권3, 권돈인에게, 제4신)

 

완당이 유배길에 남긴 자취는 매우 드물다. 남원을 지나면서 자신의 억울하고 참담한 심사를 비유하듯 성난

다람쥐를 그려 권돈인에게 보냈는데 <모질도>라는 이 그림은 한국동란 때 소실되었다. 편치않은 심사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가는 귀양길에 보게된 창암이나 원교의 글씨를 보는 눈이 고울 리는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해남 대둔사 일지암의 초의선사를 만난 것이 귀양길의 유일한 위안이었을 것이다. 추사와 초의는 1786년생

동갑내기로 이미 25년 동안 교류가 있던 사이였다.

 

[허련 作 <초의선사 초상> 2 ]

 

 

추사가 초의를 만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엇갈리는 주장들이 있다. 한쪽에서는 추사가 30세 때인 1815년에

다산의 아들인 정학연의 소개로 초의를 만난 뒤 친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학연이 강진에 유배된 아버지를

뵈러 갔다가 그곳에 찾아온 초의를 만나 사귀게 되었고, 정학연이 초의에게 한양으로 올라오면 많은 사대부들을

소개해주겠다고 해서 초의가 정학연을 찾아가 추사와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의가 훗날 회상한 것을

보면 1815년, 한양의 북쪽 수락산의 학림암에서 해붕대사3를 모시고 있을 때 추사가 해붕을 찾아와 한 차례

묵어갈 때 만났다고 하였다.(초의,<해붕대사 화상찬 발문>)


추사의 스님들과의 인연은 특기할 만하다. 훗날 추사의 예술이 불가의 선(禪) 사상으로 이해되고 설명될 정도로

추사는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추사는 초년에 예산 화암사에서 지냈고, 중년에는 묘향산에 들어갔으며 노년에는

禪사상에 대하여 백파스님과 큰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말년에는 봉은사에서 생활하며 항상 108염주를 지니고

다닐 정도였다. 이는 결코 말년의 고적한 심사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었다. 완당이 생전에 교류한 스님들에는

초의와 백파외에도 여럿이 있다. 불교에 대한 추사의 심취는 초의선사와의 교분 속에서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아무튼 1815년부터 동갑내기 두 분은 금란지교를 뱆어온 벗이었다. 『완당선생전집』에도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 35통 보다 초의에게 보낸 편지가 38통으로 더 많이 실려있다. 시(詩)를 주고받고 서(書)를 보낸 것도 초의

쪽이 많을 정도로 두 분은 가까웠다. 초의선사가 해남 일지암에 있어 자주 만날 수 없던 사정때문일 수도 있다.

초의선사는 좋은 차를 추사에게 보내주었고 추사는 이에 답하는 글씨를 써 보내주곤 했다. <명선(茗禪)>4이라는

작품은 두 사람의 그런 교류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추사 <명선>,간송미술관 소장]  5

 

 

그러나 초의선사는 편지쓰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듯 추사에게 그렇게 열심히 답장을 보내지 않았고 또 차도

제때에 보내주지 않아 추사를 자주 애태웠던 모양이다. 초의선사와 차에 대한 추사의 애정은 여기 소개하는

한 통의 애교 있는 편지에도 잘 나타나 있다.

 

'편지를 보냈지만 한번도 답은 보지 못하니 아마도 산중에는 반드시 바쁜 일이 없을 줄 상상되는데 혹시나 세체

(世諦)와는 어울리고 싶지 않아서 나처럼 간절한 처지인데도 먼저 금강(金剛)을 내려주는 건가.다만 생각하면

늙어 머리가 하얀 나이에 갑자기 이와 같이 하니 우스운 일이요, 달갑게 둘로 갈라진 사람이 되겠다는 건가.

이것이 과연 선(禪)에 맞는 일이란 말인가.

나는 스님을 보고 싶지도 않고 또한 스님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나 다만 차의 인연만은 차마 끊어버리지도

못하고 쉽사리 부수어버리지도 못하여 또 차를 재촉하니, 편지도 보낼 필요 없고 다만 두 해의 쌓인 빚을

한꺼번에 챙겨 보내되 다시 지체하거나 빗나감이 없도록 하는 게 좋을 거요.'  (전집 권5, 초의에게, 34신)

 

이런 우정으로 추사의 유배시절에는 초의선사가 제주도로 건너가 6개월간이나 벗을 해주기도 했다. 그리하여

추사가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초의선사는 추사에게 바친 제문에서 이렇게 그를 회상했다.

 

'42년의 오랜 우정을 잊지 말고 저 세상에서도 오랜 인연을 맺읍시다. 생전에는 별로 만나지 못했지만 그대의

글을 받을 때마다 그대의 얼굴을 대한 듯했고 그대와 만나 얘기할 때는 정녕 허물이 없었지요. 더구나 제주에서

반 년을 함께 지냈고 용호(蓉湖)에서 두 해를 같이 살았는데 때로 도에 대해 담론할 때면 그대는 마치 폭우나

우레처럼 당당했고, 정담을 나눌 때면 실로 봄바람이나 따사한 햇볕 같았다오.'  (『초의선집』)

 

초의선사가 속세의 사대부와 학연(學緣), 묵연(墨緣), 시연(詩緣)을 맺은 것은 추사만이 아니라 추사의 동생

김명희, 다산 정약용과 그의 아들 유산 정학연, 연천 홍석주와 해거 홍현주 형제, 자하 신위 등 추사와 다산의

주변 인사들도 있다. 초의선사는 당대의 명사들과 친교를 맺으며 높은 학식과 시,서,화로 교류했지만 당시의

사회적 지위는 천민의 하나인 중에 불과했다. 조선시대에 중은 도성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소치 허련의

증언에 의하면 초의 역시 한양성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동대분 밖 청량사에 머물면서 편지로 추사와 연락하곤

했다고 한다. (『소치실록』)

 

[초의 <봉하(鳳下>]

 

 

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원래는 의금부도사라고 불리는 의금부의 종육품(從六品) 참상도사(參上都事)를 가리키는 별칭인데 정원이 5명밖에 안 되는 까닭에 의금부 나장이나 포졸이었을 가능성이 높음 [본문으로]
  2. 소치가 훗날 초의선사를 생각하며 그린 초상화로 소치의 대표작 중 하나. 초의선사의 조용한 풍모가 격조높게 표현되어 19세기 초상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본문으로]
  3. 해붕((海鵬 : ? ~ 1826) : 선(禪)과 교(敎)에 모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문장도 탁월하여 ‘호남칠고붕(湖南七高朋)’이라 일컬어졌다. 또한 처능(處能)·수연(秀演)과 더불어 조선 후기 스님 가운데 3대 문장으로 꼽힌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깊이 교유하였으며 전남 순천 선암사에 부도와 진영(眞影)이 남아 있는데, 진영의 찬문은 김정희가 썼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4. 초의는 우리나라 다도의 달인(達人)으로 불릴 만큼 차에 조예가 깊던 인물이다. 추사가 초의에게 차를 선물 받고 써준 글씨에는 ‘명선’, ‘죽로지실’, ‘다로경권실’ 등이 있다. 이들 중 명선은 초의선사의 또 다른 호가 되었다. (대흥사 홈페이지) [본문으로]
  5. 큰 글씨 좌우에 명선이란 글씨를 쓰게 된 사연을“초의가 스스로 만든 차를 보내왔는데 몽정과 노아에 덜 하지 않다. 이를 써서 보답하는데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의 필의로 쓴다. 병거사(病居士)가 예서로 쓰다.“라고 밝히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