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20 - 추사의 제주 유배

從心所欲 2018. 6. 1. 14:39

 

[복원된 추사 유배지.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1661-1]

 

추사는 41세 때 충청우도 암행어사를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비인현감1으로 있던 김우명이란 자의 비리가

발견되어 봉고파직2 시키는 조치를 내린 일이 있었다. 그런데 안동 김씨였던 김우명은 이때의 수모를 원한으로

품어 이후 추사가 당하는 두 차례의 가화(家禍)때마다 앞장을 서곤 했다.

 

1830년에는 김우명이 추사의 부친인 김노경을 거의 모함에 가까운 내용으로 탄핵을 했다가 삭직되는 벌을

받았는데 결국 김노경도 고금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10년 후인 1840년 김우명이 대사간이

되고 경주 김씨와는 악연인 김홍근이 대사헌이 되어 양사(兩司)3를 장악한 안동 김씨가 옛 일을 다시 들춰내어

이미 고인이 된 추사의 부친 김노경을 공격하고 나섰다. 이는 당시 우의정인 조인영, 형조판서 권돈인, 병조참판 김정희 등으로 엮인 반(反)안동 김씨 연합세력에 대한 안동 김씨의 공격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시 예산에 내려가 있던

추사는 나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고 국문을 받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당시 현종을 대리청정하고 있던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의 결단 덕분에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4 되는 것으로 정쟁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 때가

추사의 나이 55세로, 병조참판을 지내고 있던 추사가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다시 30년 만에 연경을 찾게 될 계획에

가슴 설레고 있던 때에 일어난 일이었다.

 

추사 개인으로서는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었지만, 추사의 예술세계는 "제주도 유배지에서 피어난 꽃"이라는

견해가 추사 생시에도 정설로 여겨졌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시절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작품을 부탁받아 정말로 많은 글씨를 썼다. 위로는 임금에서부터 아래로는 유배지의 관리까지,

멀리는 중국 연경으로부터 가까이는 집안의 형제와 벗의 요구까지 추사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써야 하는 글 빚,

글씨 빚을 지고 귀양살이를 했다. 헌종은 추사가 유배중인데도 곧잘 그의 글씨를 요구했을 뿐 아니라, 추사의 제자

소치 허련5이 왕명을 받고 입궐할 때도 추사의 글씨를 갖고 들어오라고 했을 정도였다.

 

'정미년(1847) 8월 27일, 우수영 수사 신관호가 특사를 시켜 내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뜯어보니 임금께서

부르신다는 내용이었지요. 추사 글씨를 몇 점 갖고 들어오라는 말도 적혀 있었습니다...' 「소치실록

 

'기유년(1849) 정월 15일, 나는 비로소 입시(入侍)하였습니다......화초장을 지나 낙선재에 들어서니 임금께서

평상시 거처하시는 곳으로, 좌우 현판 글씨는 추사선생의 것이 많더군요.'   「소치실록」

 

[허련의 <山水圖>. 종이에 수묵담채]

 

그렇다면 단순히 많이 쓴 것이 추사체를 이루게 된 비결이었을까? 청명 임창순 선생은 예의 「한국 서예사에

있어서 추사의 위치」논문에서 청조 학예가 어찌해서 추사에 의해 결실을 맺게 되고, 왜 추사체가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는가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청조의 학문이 구입된 이후 박제가, 신위 같은 사람이 일으키지 못한 서법의 혁신을 완당은 어떻게 대담한

시도로 성공하기에 이르렀는가?  나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첫째, 앞 사람들에 비하여 완당은 보다 더 풍부한 자료와 그 원류에 대한 깊은 연구를 쌓은 동시에 끊임없는

임모6에서 배태된 것이니 곧 서학(書學)의 길을 터득해 가지고 거기에 그의 천부적인 창의력이 합해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이다.

다음으로 또 중요한 것은 그의 사회적 불우이다. 그의 새로운 스타일의 서체는 유배생활을 하는 중 완성되었다.

울분과 불평을 토로하며 험준하면서도 일변 해학적인 면을 갖춘 서체는 험난했던 그의 생애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만일 조정에 들어가서 높은 지위를 지키며 부귀와 안일 속에서 태평한 세월을 보냈다면 글씨의 변화가

생겼다 할지라도 꼭 이런 형태로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추사체가 왜 제주도 유배시절에 완성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때 상식적으로 예상되는 대답은 이런 것이다.

하나는 유배기간인 55세에서 64세 사이는 인생이 무르익어가는 시절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흔히는 영광의

세월에서 아픔의 나날로 바뀐 인생의 반전이 추사의 그런 예술적 성숙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의문은 있을 수 있다. 유배지에서 마음을 다스린 결과가 하필이면 왜 '괴(怪)'라는 개성으로 나타났을까?

1990년 연세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이동주선생이 연속강좌로 한국 미술사 특강을 할 때, 유홍준박사는 이에

대한 질문을 꺼냈다고 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이동주선생의 육성 대답을 이렇게 옮겼다.

 

"많이 썼을 거예요. 아마도 심심해서 쓰고, 화가 나서 쓰고, 쓰고 싶어 쓰고, 마음 달래려고 쓰고...그 실력과

그 학식에 그렇게 써댔으니 뭔가를 이루지 않고 어떻게 되겠어요? 그런데 완당이 제주 유배지에서만 그렇게

썼냐 하면 그렇지가 않았죠. 아시다시피 평소에도 좀 많이 썼습니까. 또 글씨 주문은 좀 많았습니까.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제주도에서도 왕이건 친구건 제자건 관리건 주문이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별로 문제되지 않았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쓸 수 있었다는 계기가 추사체의 비밀이겠죠.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썼다는 것, 울적한 심사를 달래려고 썼건 그걸 쏟아내려고 썼건, 원래 예술로서 글씨란

남을 위하여 혹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쓰는 것인데, 이제는 그런 제3자의 걔가룰 처던햐버린 셈이죠. 즉

자기 멋대로, 맘대로 해도 누가 뭐랄 사람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괴이한 개성이

나온 거 아니겠어요?"

 

추사는 수없이 많은 서한(西漢)시대 예서를 임모하면서 졸박하면서도 힘있는 글씨체를 익혔다. 현재 추사가

서한시대를 임모한 서첩이 상당수 전하고 있다. 그 중 잘 알려진 것이 호암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각각 다른 <임한경명(臨漢鏡銘)>이다.

 

[중앙박물관 소장 <臨漢鏡銘>. 추사가 전한(前漢)시대 동경(銅鏡)에 새겨져 있는 글씨를 임모한 작품이다.  추사는 예서 중에서도 아직 전서(篆書)기가 살아 있는 전한시대 예서를 좋아했다.]

 

 

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비인(庇人)의 객사위치는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성내리, 고을 범위는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서면, 종천면,·판교면 일대. 현(縣)은 조선시대 주(州),부(府),군(郡),현(縣)의 지방행정구역 중에서 가장 낮은 단위로 큰 현에는 종5품의 현령이 파견되고 작은 현에는 종육품(從六品)의 현감(縣監)이 파견되었다. [본문으로]
  2. 봉고파직(封庫罷職) : 어사(御史)나 감사(監司)가 부정한 관리를 파면하고, 그 창고를 봉하여 잠그는 것을 가리킨다. 관가의 창고를 봉하여 잠근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관리의 업무 수행을 정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3. 조선시대의 양사(兩司)는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합한 말이다. 대간(臺諫)이라고도 한다. 사헌부는 정치의 시비에 대한 언론활동 및 백관(百官)을 규찰하며 기강·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맡았으며, 그 책임자는 종2품의 대사헌이다. 사간원은 임금의 잘못을 간(諫)하고 대신의 비행을 논박(論駁)하는 등의 임무를 맡았고 책임자는 종3품의 문관으로 대사간이라 하였다.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본문으로]
  4. 안치(安置)는 유배지에서 거주의 제한을 가한 유배형벌(流配刑罰)로 하급관리나 서민은 해당되지 않고 왕족이나 고위관리 등에게만 적용한 유배형으로, 유배지에서도 거주지를 강제로 제한하였기에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고도 불렀다. 그 중에서도 위리안치(圍籬安置)는 본인의 거주지를 제한하기 위해 집 둘레에 울타리를 둘러치거나 탱자나무 가시덤불로 싸서 외인의 출입을 금한 중죄인의 안치로 가극안치(加棘安置)라고도 한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5. '소치 허련(小痴 許鍊 : 1808-1893)은 31세 때 해남 대흥사 초의선사의 소개로 김정희의 문하생이 되어 그의 집에 머물면서 서화수업을 하였다. 추사가 [본문으로]
  6. 임모(臨摹) : 서화 모사(模寫)의 한 방법. 서(書)의 경우, 임서(臨書)라고 한다. ‘임’은 원작을 대조하는 것을 가리키고, ‘모’는 투명한 종이를 사용하여 윤곽을 본뜨는 것을 말한다. 넓게는 원작을 보면서 그 필법에 따라 충실히 베끼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미술용어사전, 1999. 월간미술) [본문으로]